교회 분포로 본 비교 - 계신과 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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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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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7 00:00
비교하거나 설명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우리의 과거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설명합니다.
1. 백 목사님 생전 교세로 비교하면 파악이 더욱 쉬워집니다.
교단의 중심부가, 계신은 서울에 있고 공회는 부산에 있었으며
전국적 분포로는, 계신은 호남에 많고 공회는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에 고른 편입니다.
국내외 분포로는, 계신은 선교를 주력하고 공회는 아주 소극적인 편입니다.
백 목사님 생전 모습이 공회와 계신이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분포된 상태였고
백 목사님 사후 공회는 혼동기에 있어 정상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보입니다.
2. 지역 분포의 차이
이 병규 목사님은 한 때 김 현봉 목사님과 함께 백 목사님께 배운 분이었으나
현재는 독자적 노선을 구축하고 분명히 일반 장로교 노선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 교계에 비하여 이 노선과 같은 점과 우호적인 면이 분명히 많습니다.
근본적 차이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 병규 목사님이 김 현봉 목사님 사후 백 목사님의 주도를 우려하여
두 사람의 사이를 벌였고 김 목사님이 백 목사님을 공개 비판할 때 백 목사님은 향후
진리 노선 내의 교권 교세 다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울과 외부 활동을 전면 중단했고
그 동안 배운 이 목사님이 독자적으로 일반 교계를 향해 진리를 전할 수 있을 것이므로
서울은 이 목사님께 맡기고 부산 서부 교회와 공회의 범위를 다시는 벗어 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회는 60년 초반까지 공회를 따르거나 따를 수 있는 서울 지역 교회를 많이 잃었고
그 대신 원래 공회 교회들이 자연스럽게 개척하여 자라 나가는 모습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계신 측과는 지역 접촉이나 불편할 일이 거의 없이 지역 대칭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3. 백 목사님과 목회에 대한 근본 차이
이런 분리 초기의 조처와 별개로 또 한 가지 중요하게 다른 점은
공회는 선교를 비롯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주력하는 식의 기획 추진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 목회자여서 북한 교회 재건에 관심이 많고
그 목표를 위해 중국 등 해외 선교에 주력한 면이 특별하기 때문에 해외 교회가 많습니다.
4. 아쉬운 역사, 안타까운 오늘의 현실
1960년 초까지 백 목사님은 김 현봉 목사님과 같은 차원에서 서로 교류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병규 목사님은 서울의 김 목사님과 부산의 백 목사님에게 배우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 김 현봉 목사님의 서울 아현 교회 교세는 전국 최고 수준이었고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는데 교세나 교회 조직에 관심이 많았던 이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김 현봉 목사님보다 나이가 적기 때문에 김 목사님의 사후에 김 목사님의 아현 교회나 그 영향력 아래 있는 교세가 백 목사님에게 기울어질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 목사님에게서 배울 것을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어서 이 목사님은 김 목사님과 백 목사님의 사이를 벌여 놓게 됩니다. 이후 김 목사님은 공석에서 직접 백 목사님을 비판하게 되고 백 목사님은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김 목사님과 관계를 끊게 됩니다.
이 병규 목사님의 활동이 점차 백 목사님의 서울 지역 집회 인도 등에 보이지 않는 불편 관계로 나타나게 되자, 백 목사님은 그 동안 한국 교계에 충분히 외칠 만큼 활동한 점과 이 병규 목사님이나 김 현봉 목사님이 서울에서 한국 교계에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서울을 포함하여 공회 외부 활동을 일체 중단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교회를 초교파적으로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한 편으로 교리 면에서 중생 교리나 건설 구원 등의 새로운 깨달음이 쏟아지던 시기여서 일반 교계와 자칫 교리 논쟁에 세월만 허송할 점도 고려했습니다. 교리 논쟁이 본질 문제로 토론이 지속된다면 한국 교회를 살릴 기회가 되겠지만 교계는 말을 왜곡하여 교리가 아니라 정치와 교권으로 투쟁하고 나설 것이어서 조용히 공회 내부만 길러 미래를 준비하려 했습니다.
이런 분리가 1960년대 초반에 있었고, 이후 백목사님 돌아가시던 1989년까지 이어졌는데
1989년 백 목사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자 이 병규 목사님은 공회 내부에 적극 개입하며 총공회 전체를 도모하는 활동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물론 본인은 아니라 할 것이나 백 태영 목사님을 비롯 공회 내에 초기 분리의 첫 불을 당긴 이 목사님 그리고 그 분들과 맞서 가장 몸을 던진 또 다른 이 목사님 등 공회 당시 지도부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백 목사님 사후의 공회 내부를 비집고 들어 오는 활동이 계속 공회 내에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공회 내부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 진헌 목사님 한 분만 당시 이 병규 목사님의 상황을 공회 내부에 말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했으나, 이 병규 목사님을 접촉했다는 다른 분들은 공회 내부의 자신들이 가진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편으로 외부 교계 총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이런 발언을 통해 마치 교계적 인사나 되는 것처럼 자신을 과장하였는데, 훗날 그런 면은 사실이었고 바로 이 병규 목사님이 그 배후였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노련한 이 병규 목사님으로서 공회를 도모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발언하거나 표시를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며, 공회 내부 인물들이 과도하게 사용한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회 초기부터 현재까지 지나 온 역사는 이 병규 목사님의 당시 활동은 공회를 도모했다고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 목사님 사후 총공회는 서부 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면으로 이 병규 목사님이 이룰 수 없는 그 이상의 단체였고 공회의 초기를 생각한다면 백 목사님이 없는 상황에서 이 목사님은 공회 전체를 욕심 낼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여러 공회 인물들을 통해 공회 내부에 재독을 정죄하는 결의를 하도록 만들어 백 목사님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탈색해 가면 가능성은 생기는 것이고, 하다 안 되면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한 다음 대화가 가능한 상대를 향해 다시 일부 도모도 가능할 법입니다. 공회는 일단 두 조각으로 나게 됩니다. 그 동안 우리는 공회 내부인이므로 공회의 내분은 우리 책임으로만 연구하고 자책했으나,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 병규 목사님은 총공회 분열에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 현봉 목사님 사후 아현 교회의 분리와 그 아현 교회 분리 과정에서 최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불편해 했던 김 현봉 목사님의 신앙 노선은 제거하고 김 목사님의 교권과 교세만 잡았던 경력이 있는 분입니다. 김 현봉 목사님과 백 영희 목사님과 같은 독특한 인물들이 지나 간 교회들은 일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내면이 있어 교계의 일반인들은 내면을 읽지 못하나 이 목사님은 가능한 인물입니다. 전체를 도모하다 불가능하니까 둘로 나눈 다음 나머지 가능한 쪽이라도 도모하려 했다고 공회 내부에서 이 병규 목사님을 향해 지적해도 이 목사님으로서는 아마 할 말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설명을 증명하려면 잠실동 교회를 좀 아는 분들에게 물어 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할 것 같습니다. 백 태영 목사님이 백 목사님 사후 갑자기 창광 교회 이 병규 목사님에 대한 언급이 잦아졌고 강단 교류가 이루어 졌으며 잠실동 교회 주력 장로님 중에 신학을 아는 분이 창광 교회로 옮겨 갔다가 나중에 소속을 다시 되돌리는 등 수 많은 복잡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