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까지 아는 이 진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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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00:00
1. 성함
'진헌'이라는 이름은 목회를 출발하면서 '먼지 하나, 티끌 하나'까지 다 바치겠다는 결심을 담은 '먼지 진,塵'입니다. 이 목사님의 평생은 최소한 오늘까지를 두고 말한다면 자신의 먼지 하나까지 다 바친 것은 사실입니다. 공회 목회자 중에서 현재 생존한 분 중에서는 그 분만큼 이 노선에 자신을 다 바친 분은? 답변자가 아는 바에는 없습니다. 과거 홍 순철 목사님이나 서 영준 목사님의 경우는 이 진헌 목사님처럼 자기를 다 바쳤다고 기억 됩니다.
전 성수 목사님은 원래 '판수'였으나 음이 은혜롭지 못하여 '성수'로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 분은 평생 소원이 이 노선에서 '성자'의 걸음을 사모했는데 과연 그 분은 성자였습니다. 정 봉옥 목사님은 원래 그 이름으로 서부 교회 찬송 인도를 했던 성악가였는데 목회 출발하면서 의로 나아 가겠다고 '의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노선은 신앙에 필요하다 해도 최대한 일반 생활 속에 자연스런 표현이나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도 일반 지역 명칭을 사용하고 예배당도 일반 건축물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믿은 이후라 해서 또 목회 출발이라 해서 천주교 교인들이나 신부들처럼 특별한 이름을 따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헌 전 성수 정 의진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백 목사님이 그 이름의 연유를 알고 있고 지시하면 그 이름 사용을 막을 수 있는데도 두고 보셨습니다. 공회의 일반적 흐름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개인에 따라 필요한 면도 보셨기 때문입니다. 백 목사님 바로 주변, 아주 가까운 경우에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2. 나사렛 교파
나사렛 교파는 성결교 계통의 교파 중 하나이며 현재 천안의 나사렛 대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이 목사님은 30대 초반에 나사렛 최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김 현봉 목사님을 알게 되면서 백 목사님의 서울 교역자 성경 공부를 알게 되고 참석하면서 공회 주변에 있었습니다.
3. 공회 소속 과정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던 중 백 목사님이 사람을 보내어 공회 소속을 권유한 경우입니다. 목사님의 대인 관계 처리는 아주 특별한데 자신을 따르라고 사람을 잡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주 어린 자녀같은 교인이 아니면 오려고 해도 막아 서고 돌려 세우는 분인데도 특이하게 고신 최고 부흥사이자 백 목사님의 추종자였던 박 인순과 이 진헌에게는 따르도록 부탁했고 박 인순 전도사님은 왠 일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 목사님은 많은 기도 끝에 따랐습니다.
수정동의 나사렛 성결 교회는 주변에 부산의 명문 부산 고등 학교와 경남 여고가 있었으며 이들 학교 출신들로 이 목사님 밑에서 신앙을 기르고 이 노선에 따라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서부 교회 4층을 중심으로 서 영호 목사님과 맞서 19년째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간반 측과 부산 공회 1의 대부분 세월 속에 경제와 인원을 가장 많이 지원한 조 순자 집사님은
그 남편 구 장로님도 신앙이 있는 분이나 조 집사님이 확실하게 경제와 인원의 실력자이며 청량리를 거쳐 하계동 교회의 장로님으로 계시는 김 종상 장로님 그리고 그 부인 집사님도
당시 그 교회 학생이며 이 외에도 전국 교회에 유력하게 포진한 분이 많아서 만일 타 교단
처럼 세력화를 시도했다면 공회 전체의 위협이 되었거나 아니면 특수 이권 단체를 형성할
정도라고 파악 될 정도입니다.
4. 이 원일 목사님
이 진헌 목사님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게 보신 분은 이 원일 목사님이며 교사 출신으로 우리 공회에 가입한 것이 맞고 상남 교회를 개척했으며 이후 대전 동북 교회를 개척한 분입니다. 거제동 교회를 거쳐 다시 상남 교회로 부임했다가 백 목사님 사후 대구 공회로 처신하였고 달산을 거쳐 현재 수상 교회로 옮겼는데 지금 공회 소속 여부를 알 수 없는 정도입니다.
5. 공회의 외부 출신과 내부 출신
ROTC와 3사 출신 장교들은 모든 군인을 장교와 사병으로만 분류합니다. 그런데 자기들과 같은 장교들 중에서 육사 출신들은 모든 군인을 육사와 비육사로 나눈다는 사실을 잘 잊어 버립니다. 연고대 출신은 모든 학벌을 서연고와 나머지로 따지는데 서울대 출신들은 서울대와 나머지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서울대 내에서도 서울대 법학과나 의대는 서울대 안에서 또 인종을 따로 구별합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들은? 사시 합격 여부와 법조계 어느 계통에서 움직일 사람이냐에 따라 또 나뉩니다.
답변자가 서부 교회를 간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서부 교인들의 사고 방식은 서부 교인 외의 공회 교인들은 교역자든 아니든 지교회 일반 교인이었습니다. 지교회 교인들이 교역자를 하늘처럼 섬길 때에 그 교역자들이 서부 교회에 교역자 회의 참석 때문에 오면 서부 교인들은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서부 교인 중에서도 원래 서부 교회 출신들은 자기들끼리 뭉치고 자기들이 가진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답변자는 백 목사님이 서부 교회에 부임한 1952년보다 더 일찍 답변자 조상들이 이 노선 시작 교인들이었습니다. 1957년부터 시작한 공회 초기 집회 때 참석한 40여 명 중에 거의 4분의 1이 답변자 집안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서부 교인들 눈에는 외부인이었고 심지어 외부에서 서부 교회를 먼저 와서 출석한 친구는 1년 먼저 왔다고 군대 1년 선배처럼 행동을 하던 정도였습니다.
폐일언하고, 구약의 구원은 유대인이었으나 룻과 라합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동방 박사는 이방인이지만 당대 유대인 전부가 배척한 예수님의 첫 교인이 되었습니다. 외부 계통은 '가능성'이지 '최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고 절대 불변의 확정을 추구하는 노선입니다. 일반인들과 일반 대화를 위해 답변자도 공회 내외 출신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현재, 이 노선 기준에, 자기의 신앙이 어딘지에 따라 자기 구원이 결판납니다. 그리고 현재, 이 노선 기준에 그 사람의 신앙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룻을 상대한 보아스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모압은 수치와 멸망의 종자이므로 그냥 자연 상태로 두면 수치와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룻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은 종자적 예측을 초월했고 룻에게 종자적 짐작으로 비판한 이들은 전부 오해 오산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보아스의 신앙은 그 구약 시기가 육체로 인도를 하던 시대인데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보아스는 하나님의 육적 인도를 따르면서도 늘 내심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인도를 함께 지켜 보고 있었고 그런 하나님의 동행이 있었기 때문에 룻을 취했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97년 이후로는 이 진헌 목사님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목사님은 백 목사님 생전이나 사후나 한결 같았습니다. 이 노선을 지킬 현재 이 홈의 직원을 제외 한다면 당시까지 남아 있던 단 1 명이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교인도 교역자도 전국의 어떤 교회도 이 노선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아껴서 목숨 바쳐 지킬 순간이 오자 단 1 명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때 대구에 유명한 동성로 교회, 거창의 개명 창동 교회, 부산의 서부 학장 거제동 교회, 서울의 청량리 사직동 그 어느 교회도 총공회가 기둥뿌리채로 뽑힐 때 단 한 마디 말하고 행동한 사람도 교인도 교역자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이 진헌 목사님은 모든 것을 다 던진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홈은 1997년 이후로는 이 진헌 목사님과 전혀 연락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 시점 이전까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총공회 교인과 목회자 중에서 서부 교회 4층을 제외하고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걸고 이 노선을 지키려 했던 분은 딱 한 분이었고 그 분이 이 진헌 목사님이셨다는 것은 증언할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 신앙은 밤중 신앙이며, 절정 신앙이며, 최종 최후의 결전에서 '보다 어느 것인가?'를 두고 최종 판단을 합니다. 그 순간은 비록 짧지만 그 한 순간 그 것이 지난 날 전부를 말합니다. 물론 그 순간을 이겼다 해도 그 다음은 또 다시 그 다음에 올 그 순간이 말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이 말하는 것은 이 순간 앞에까지를 두고는 최후 심판입니다. 백 목사님 사후라는 총공회 노선의 유일 무이한 밤중 어느 한 순간이 닥쳤을 때,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그리고 달리 좋을 길을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겠다며 함께 했던 분은 이 진헌 목사님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백 목사님 생전 기준으로 총공회 전체 목회자와 교인의 신앙을 판단할 때는 이 목사님 외에는 승리자가 하나도 없다고 내심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6. 태생적 한계
위 글을 적은 분께서 지적하셨듯이 백 목사님께 대한 순종은 절대적이었고 또 본인 스스로 죽도록 노력을 해도 본인이 본인 스스로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 고치는 면을 두고는 늘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공회에 들어 온 세월이 참으로 오래 되었는데도 공회 어느 교회를 가도 교인들이 밖에서 들어 온 분이라고 쉽게 알아 차렸습니다. 그런데 이 진헌 목사님이 공회에 들어 온 뒤에 예수님을 믿고 공회 교인이 되고 목회를 나온 사람과 비교해도 이 목사님은 외부인 표시가 있었기 때문에, 마치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잘못 배우면 죽는 날까지 표시가 난다는 것처럼 그런 모습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분의 그런 외부 표시가 공회를 위해서는 늘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것이 바울을 더욱 바울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공회 모든 교인과 교역자보다 탁월했던 분이 또 항상 제일 충성하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 밑에서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교인과 비교해도 공회성의 표시가 못했으니 이 면 때문에 그 분은 이 노선의 중요성과 이 노선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그렇게 절감했고 그래서 그 분은 늘 노선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했으며, 그래서 그 분은 목사님 사후에도 유일하게 이 홈과 이 노선을 사수할 수 있는 단 1 명의 목회자였습니다.
이렇게까지 그 분을 비판했다면 이제 태생적 공회인들을 살펴 보는 것이 공평일 것입니다. 태생적 공회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백 목사님의 친인척인 백 태영 백 영익 백 영침 이 재순 신 도범 신 연범 등의 목회자들로부터 개명 위산 서부 교회 등 백 목사님이 직접 담임을 전임한 교회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 출신 중에 보수 교인이 단 1 명이라도 있는가? 그 교회 출신 목회자들치고 단 1 명이라도 이 노선 이 공회의 색채를 지키는 이들이 있는가? 종자가 없어졌습니다. 마치 구약 북조 10 지파는 역사에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바로 이 것이 그들의 신앙 내면의 태생적 한계이니, 이 진헌 목사님이 공회적 외모를 갖추려고 필사의 노력을 해도 외부에서 들어 온 표시를 평생 가지고 살았고 그래서 공회 일반 지 교회 교인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노선의 신앙적 태생을 가진 분들이 그 속에 가진 신앙의 근본 자세가 이 노선에 잠겨 있어도 이 노선을 모르기 때문에 현재 이 노선의 신앙 내면적 기준에서 볼 때 진실과 충성을 가진 분들은 다른 교파나 다른 교회에 있다가 공회로 들어 온 교인들 중에서 일부 발견할 수 있고 원래 목사님 생전의 공회 교인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공회 외부에서 공회 내부로 들어 오는 분들은 공회의 껍데기 외형까지 그대로 옷을 입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공회 내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자기 속에 신앙의 근본 자세와 방향이 평생 믿어 봐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유대인 꼴일 것이라는 단정 앞에 벌벌 떨어야 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그런데 역사 통계에서는 비제자 출신 바울이 제자 중의 제자였고, 비유대인이 교회사 초기의 중심이었고, 기독교 문명의 외방지였던 한국이 오늘 세계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총공회 내에서는 공회 외부에서 이 소식을 듣고 들어 온 이들 속에는 희망이라도 좀 보이고 원래 공회 내에 있던 분들 중에서는 희망을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7. 이 진헌 목사님의 목회 경력
이 목사님은 공회에 들어 오자 덕수 교회, 동성로 교회, 거제동 개척, 창동 교회, 청도읍 교회, 개명 교회, 신풍 교회, 포양 교회, 청량리 교회, 상남 교회 등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교회 부흥은 부임 전과 후가 눈에 확 띄게 다 달랐습니다. 홍 순철 서 영준 목사님을 제외하고는 공회의 목회 지침을 그렇게 철저히 지키면서 부흥한 경우는 기억에 없습니다.
당시 목회자들 사이에는 백 목사님이 이 진헌 목사님을 어느 한 교회에 오래 두면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백 목사님의 영향력조차 무력화 될 정도니까 자주 옮기고 책망도 자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실제 이 목사님은 백 영익 목사님이나 김 석준 목사님처럼 별도 교파를 창설하고 주도할 만큼 모든 면으로 실력을 가지고 있던 분입니다. 예를 들면, 백 목사님 생전에 공회 교역자들보다 이 진헌 목사님의 소개로 외부 교단 목회자가 설교록을 구입하는 수가 많았던 정도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 목사님과 마찰을 빚었던 교인들은 주로 부산의 백 목사님의 행정 지도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개명 교회나 청량리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어 공회에 보고가 되었는데, 마치 홍 순철 목사님이 남천 교회에 있을 때 최 기주 집사님이 홍 목사님과 마찰이 있었는데 홍 목사님은 백 목사님의 70년 대 이후부터 주일 학교 등 교회 부흥을 위해 목회자들을 재촉한 것을 잘 따랐고 최 집사님은 60년 대와 그 이전에 백 목사님께서 개인 신앙 경건을 위주로 강조하던 것만 알고 있어서, 최근 백 목사님이 강조하는 면을 모르고 부딪힌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말하자면 지교회 교인 중에서 오래 된 분들은 백 목사님이 부산에서 스스로 자꾸 자라면서 교역자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가르치는데 홍 순철 목사님이 이 진헌 목사님처럼 백 목사님의 새로운 지도가 있으면 즉각 바꾸고 그대로 순종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 교인들이 과거에 알던 백 목사님과 다른 목회를 한다고 비판을 하던 식이었습니다.
1972년 창동 교회에서 있었던 예를 하나 들면, 그 교회는 당시 젊은 반사들조차 백 목사님의 6.25 시기 주일 학생이어서 백 목사님을 잘 알고 전쟁을 이긴 순교적 신앙가들이었는데, 백 목사님이 서부 교회 주일 학교를 전도에 가장 효율적인 체제로 바꾸자 이 진헌 목사님도 단번에 주일 학교 체제를 바꿨는데 바꾸자 말자 몇 주 안에 학생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 들어 왔고 예배는 과거 조용한 분위기에서 시장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일 학교에서 가장 목소리가 컸던 청년 집사 교인이 예배당 마당에서 학생을 데리고 오는 반사들에게 교회가 무슨 시장통이냐 이게 무슨 짓이냐 하면서 야단을 치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백 목사님의 지도 세계는 너무 깊고 다양해서, 지교회 교인들은 전혀 그 세계를 모릅니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들이 백 목사님의 지시를 팔아서 재주를 부리는 것은 수도 없이 많은데 이 번 글에서는 그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므로 넘어 갈 뿐입니다. 서부 교회 내에서도 목사님을 가까이 하는 교인과 그렇지 않은 교인은 같은 목사님의 같은 설교를 듣고도 정반대로 알고 상대합니다. 직원들끼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회에는 답변자를 포함해서 조금이라도 믿는다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 교인이든 교역자든 전부가 이 노선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발언을 하고 논쟁이라도 하면 거의 모든 사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데, 속으로만 품어 두고 나만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으로 아찔아찔한 교인들의 아찔아찔한 발언이 수도 없습니다.
게으르고 무능하고 그 뜻조차 모르는 목회자가 읽어 주면 은혜를 받는 것은 그 교역자의 게으르고 무능한 것이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노선의 교훈이 은혜스러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충성하는 목회자들은 그 교훈에 감격하여 감격한 그 것을 전하려 하니까 무능해서 그냥 읽어 주는 교역자보다 오래 된 공회인들에게는 은혜가 덜 되는 것이고 새로 믿고 출발하는 교인들에게는 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래 된 교인들은 집에서 재독 11 회로 은혜를 받고 예배당의 11 회 예배는 어린 교인 전도용 심방용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묵은 교인은 묵은 교인의 수준에서 넉넉할 것이고 어린 교인은 멋 모르고 자랄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 그 교인이 다 알게 되면 또 그 교인은 집에서 재독하면 됩니다. 만일 이 것이 이해 되지 않으면 공회에는 사실 목회자 생활비를 주고 데리고 있어 봐야 재독만큼 은혜를 끼치지 못할 것이므로 지방 교회처럼 교인들끼리 둘러 앉아 재독하면 됩니다.
이 해결법을 두고 한 가지 더 고민을 할 것은, 왜 성경만 읽어 주면 또는 성경 본문 그대로만 읽으면 설교록보다 더 은혜를 받는데 백 목사님은 인간이 그 성경 본문에 빼고 더해 가며 설교를 했겠는가? 왜 2천 년 기독교사에 목자 제도를 두었는가?
길러 가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면 될 것을 모든 면에서 부모 노릇을 할 수도 없는 인간들을 통해서만 다음 인간이 태어나게 한 것,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이 면을 알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한 절 읽고 백 목사님이 한 시간 동안 자기 생각을 설교라는 이름을 했고, 오늘 그 설교록을 11 번 예배 때마다 녹음기로 그대로 틀지 않고 목회자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조절해서 배합하느냐는 것은 별건 문제입니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백 목사님 사후 그렇게 재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하는 이 재순 목사님이 재독을 하지 않으려고 서부 교회 내에서 얼마나 고단수로 전쟁을 했는지, 곧 당시 일지를 일일이 짚어 가며 한 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이 재순 목사님이 대구의 부공1 지도부와 긴밀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서로가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설교록 그대로가 은혜스러우면 이제 목회자가 읽어 주는 형식을 넘어 서서 집회 재독처럼 그렇게 하면 되고, 목회자에게 그래도 기대야 한다면 공회 역사와 교회사 역사를 통해 기댈 만한 목회자는 없다고 단정을 하는 것이 교인들로서는 옳습니다. 설교록을 그대로 제일 잘 읽던 교역자들이 어느 날 각목들고 난투극을 벌이는 바람에 전투 경찰이 출동했던 역사를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부 교회 4층을 빼고, 부공1에 재독을 노래하는 그 목회자와 교회와 이 재순 목사님과 그 어느 공회 교인이든 설교록 출간에 단 한 시간이라도 자원 봉사를 해 보았는지 실제 출간을 위해 비용을 댄 일이 있는지 조사를 해 보셨으면. 오히려 이 홈이 5년간 출간 금지 된 설교록을 출간하자 이 홈과 함께 했던 전체 직원들을 10여 건으로 형사 고발하고 공회에서 완전히 제거한 것이 바로 부공1과 그 지도부입니다. 그런데도 검정 양복에 재독 사회를 보는 모습에 머리 숙이고 있는 정도니까 재독의 내용은 예배당 소송하지 말라는데 예배당 소송에서 이겼다며 집회 현장에서 축하 박수까지 치게 되는 것입니다.
8.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
이 진헌 목사님은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신학과 세상 어학의 유력한 경력과 실력이 있습니다. 서 영호 목사님은 1952년 백 목사님의 서부 교회 부임 그 날부터 공회 학생이었고 교인이었습니다. 서 목사님은 종자가 오리여서 못에서 놀 분이고 이 목사님은 오리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 종자는 공회 방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