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집회와 그 의미 - 0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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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집회와 그 의미 - 09.8.8.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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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회 집회

- 본질과 부차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본질이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상관이 없는 것은 부차라고 합니다.
집회를 두고 사소하게 보여도 본질에 대한 것이 있고 엄청나게 크게 보여도 부차가 있으니
건축물로 예를 들면 일반인은 그 모습과 사용 편리만 보나 전문가들은 무조건 안전입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토지의 위치와 견고성, 건물의 기초와 기둥을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 집회의 부차

그 불편한 과거 교통편으로 한반도의 남부 제일 시골 도로변에 전국 소속 교인들이 모였고
차에서 내려 짐을 지고 이고 냇물을 건너 들판을 따라 작은 골짜기로 줄 이어 들어 갔으니
그 골짝이 운동장 3-4개 넓이인데도 15,000 명이 천막을 세워 숙식을 자체 해결하였습니다.
남녀노소와 첫 신앙과 목회자가 한 자리에 모여 가마니 위에 자기 방석을 깔고 예배 드렸고
매일 3회 예배마다 30 분 준비 찬송과 주해 설교 시간만 3-4시간, 후에는 2-3시간 정도였고
예배당은 무릎이 잇 닿아 옆줄이 되고 앞 사람 등에 뒤 사람 노트가 닿아 줄이 되었습니다.

15,000 명이 5일 간 고대 사회의 자족 도심을 이루었다가 사라 진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당시 여의도에 1백만 대회로 모였다 해도 서울 도심에서 오가다 1시간 들러 가는 정도였고
순복음 기도원 어디가 몇만 명이 모였다 해도 좋은 시설에 돌아 가면서 오가는 모임이었고
CCC 바닷가 수련회 등은 청년이라는 또래의 행사식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만
공회 집회는 가족 단위를 기본으로 하고 주일 학생까지 포함한 교인들 전체가 참석을 하되
세상 편의 시설은 최대한 없애고 전체가 고대 사회 생활을 하며 전적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5일이 지나면 골짝을 원 상태로 돌려 놓고 전국으로 흩어 져 갔으니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거창군의 불신자와 시청 경찰 등 관공서에서도 지금도 그 엄청난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어떤 다른 종교 정치 사회적 대규모 행사와 비교할 수 없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습니다.
오늘 총공회 통합을 말할 때마다 교단의 존재 의미와 함께 집회가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과 집회의 본질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집회의 현장 증인이고 자신의 역사였습니다.
스스로 봐도 타 교단이 봐도 또 불신자가 봐도 집회 모습 그 자체가 거대한 기적이었으니
집회에 대한 향수는 실로 지대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회를 대표할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집회의 부차 문제들이지 이 것이 집회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공회의 집회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그렇게 대단한 모습 외에 또 무엇이 있었는가?
전국 모든 교회가 전부 참석했고 굉장한 모습으로 한 주간을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한가?



2. 공회 집회의 본질

(1) 광역 목회 - 목회자로서

좁은 의미에서 백 목사님의 목회지는 서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전국 교회였습니다.
전국의 공회 교회들이 한 교회 내의 한 구역과 같았고 백 목사님은 광역 목회자였습니다.
조직도에서 서열이 앞이므로 조직상 그렇게 말하거나 인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공회 교회의 교훈이 그 분의 교훈을 따랐고 행정 관리 지도의 모든 면이 그랬습니다.
행정이나 지도 관리 등의 문제는 다른 시기에 논하고 지금 집회를 두고는 교훈 면입니다.
전국 교역자는 물론 주일 학생으로부터 전체 교인이 백 목사님께 1년에 40시간을 배우는데
지금 지명도 높은 교계 지도자 급의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 설교를 1년에 40시간씩 하는가?
부목에게 맡기는 예배가 많고 주일 대 예배조차 연중 계속 되는 국내외 출장으로 빠지고
실제 예배를 인도해도 한 주간 주일 대 예배 설교가 30분 안팎일 것인데 백 목사님의 경우
1 년에 40 시간이란 40 회가 아니라 60 분 기준으로 40 시간이니 설교 80 회 분량입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집회 한 번 참석하면 1 년 필요한 양식이 된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은혜 정도와 지속과 실제 시간으로 볼 때 백 목사님은 집회를 통해 광역 목회를 했습니다.
집회란, 백 목사님의 전국 모든 교인들을 상대로 목회한 목회의 핵심이며 절정이었습니다.
이 집회 말씀 은혜와 지도를 통해 공회 교인들은 전국 어디에 있어도 속이 같았었습니다.
따라서 공회 집회는 타 교단이나 타 교회의 잡다한 모임 집회 수련회와 그 성격이 다르고
공회 집회는 백 목사님이 전체 공회 교인을 향한 '백 영희 광역 목회 현장'이 의미입니다.


(2) 교계 증거 - 교계적으로

백 목사님은 해방 후 손 양원 이 성봉과 함께 초교파적으로 유명한 대표적 부흥사였습니다.
단순히 은혜 면으로 본다면 손 양원 이 성봉 목사님 외에도 박 영기 김 창인 등도 있었으나
백 영희는 한국 교회의 현황과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했고 성경 해석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원래 그의 집회는 일반 교인뿐 아니라 목회자들이 별도로 배우는 고정 모임이 많았습니다.
1964년까지 초교파적으로 다니며 한국 교회를 가르쳤으나 이후 일체 외부 활동을 그칩니다.
이유는, 너무 유명해 지고 한국 교회의 병폐가 낱낱이 드러 나자 견제가 시작 된 것입니다.

더 깊이 깨달아야 할 시간에 교계의 시비를 상대하다 보면 시간 허비가 많게 되어 손해이고
많이 가르쳤으나 집회 후 반대 측이 지속적으로 교훈을 배척하고 훼방하면 그 손해도 크고
이미 20 년 교계를 향해 증거했으니 대외 충성은 되었고 이제 각자 받은 대로 살면 되는데
무엇보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배운 교역자들이 말씀만 배우고 갈 길은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최대 교회인 아현 교회를 염두에 둔 분이 백 목사님을 직접 모함한 일이 생기자
백 목사님은 대외 활동을 중단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일체 대외 집회를 끊어 버리고
부산 금정산 서울 삼각산 대구 주암산 거창 삼봉산 집회를 1 년 2 회 내부 집회로 고정하되
찾아 와서라도 배워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금하지 않음으로서 교계 의무를 대신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거창의 삼봉산 집회와 부산 금정산으로 고정이 되다가 거리와 시설 불편 때문에
5월 대구 8월 거창으로 자리 잡고 생존 마지막까지 교계를 향해 외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계에 의미 있는 각 교단 지도자들이 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귀를 기울였으며
집회 때마다 백 목사님은 한국 교회를 향해 외친다는 언급이 많았던 이유도 이 배경입니다.


(3) 신앙 정화 - 교인들에게

공회 집회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1 년에 1 - 2 회씩 세상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끊어 버리고
말씀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모든 공회원들이 각자의 신앙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기회이니
평소 현실 속에서 주일과 평일의 예배 시간을 중심으로 이어 가는 생활은 기본 생활이 되고
집회에는 세월 속에 자기도 모르게 찌들었던 것을 털고 1 년을 살아 갈 양식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는 말씀을 받아도 바로 현실에서 또 세상과 부딪혀야 했으니 깊이 들어 가기 어렵고
집회에는 세상을 눈과 귀와 입으로 접할 일이 없어 마음까지도 아주 멀어 질 수 있습니다.
한 편 말씀은 시간시간 이어 지면서 얼마든지 깊게 자세하게 넓게 짜여 질 수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계속 이어 지는 누적의 시간은 환경에 의하여 끊어 지며 누적 된 시간과 다르니
집회 참석 교인들은 몸과 행위와 생활의 변화까지 만드는 참 신앙의 새 경지를 겪었습니다.


(4) 공회 동력 - 공회적으로

공회 교인이 공회인임을 느끼는 첫 일체감이 바로 집회 참석이라는 공동 경험일 것입니다.
집회 경험이 없으면 이름만 공회 교인이라 할 정도이고 집회 경험이 있으면 실감을 합니다.
집회 경험이 공회인을 확인하는 외증이라면 백 목사님에 대한 존재감이란 내증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과 제사를 원칙대로 철저히 지켜 보았다면 이 노선을 실제 걸어 본 사람이 되고
반사 생활을 해 보았다면 이 노선의 핵심이 알고 가질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타 교단은 헌법과 전국 조직과 시각적 활동과 잦은 연대 모임이 한 교단을 유지하게 한다면
공회는 집회가 전국 공회 교인들을 공회라는 한 이름에 묶어 교단이 되는 동력이었습니다.
따라서 본질을 모르는 어린 교인이면 공회의 전국적 의미는 집회뿐인 줄 아는 정도입니다.
이 말은 본질과 부차를 따질 것 없이 공회가 공회였던 것은 외관적으로 바로 집회였습니다.



3. 현재 공회 집회를 돌아 보면

(1) 분리 문제

공회는 개교회 자유 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교훈과 신앙 노선을 최우선하고 있으므로
이런 원칙을 해치며 단일 집회를 원한다면 집회의 부차는 알고 본질은 모른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 노선이 같은 대구 공회와 부공2 집회가 합하고 부공1과 3이 합해야 정상입니다.
대구가 재독 때문에 부공2와 합하지 못한다면 이는 백 태영의 악의 시도를 계승하는 일이고
부공2가 대구와 합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존심과 공회 주도권 문제라는 교권 문제 때문이며
부공1이 부공3과 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송 반대를 이유로 제명한 것이니 이는 잘못이며
부공3이 부공1에 합하지 않는 것은 현재 노선 이탈이며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권과 다른 이해나 인간 감정 같은 것들이 개입 되었으면 분리는 죄일 것이고
신앙 노선이 다른데도 하나로 합한다면 이는 합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탈선이 될 것입니다.
현재 공회의 집회 분리는 나타 난 결과가 그렇습니다. 해석에 따라 달라 질 문제가 아닙니다.


(2) 개최 모습

장소와 일자는 부차이지 본질 문제가 아니므로 지나치게 고집하면 오히려 이탈이 됩니다.

일자 문제를 두고 집회 초기인 50년 대 60년 대에는 3월 4월 8월 9월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연중 2 회 집회로 고착 되면서 5월과 8월이 먼저 자리를 잡았으나 월말이었습니다.
5월 말은 70년대 들어서 농촌의 농번기 불편이 지적 되어 현재와 같이 5월 초로 당겨 졌고
8월은 방학 중의 보충 수업 학생들의 편리를 위해 83년부터 현 8월 초로 자리를 잡습니다.
공회의 역사를 알거나 좀 넓은 의미를 기억하는 분들은 봄 집회 여름 집회로 기억합니다.
즉 5월과 8월이란 부차이지 본질이 아니며 1 년 2 회 정도를 본질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소 문제는 삼각산 주암산 삼봉산 금정산이던 것을 금정산과 삼봉산 두 곳으로 줄였었고
금정산은 현 대구 노곡동으로, 삼봉산은 현 도평으로 옮긴 것은 장소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금정산은 집회 시설을 할 수가 없었고 삼봉산은 좁고 교통편이 불편하여 다 변경했습니다.
원래 공회 집회는 산 집회입니다. 세상과 떨어 져 자연 상태의 산중 생활을 지향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대구는 시내 중심이고 거창은 시외곽 교통 분기점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집회의 장소적 취지를 안다면 세상과 떨어 진 자연 속 장소를 찾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비록 과도기지만 부공2와 대구 공회가 편의 시설이 잘 된 수련원에서 집회를 하는 문제는
앞으로 집회를 확고하게 계속할 의지가 있다면 장소적 지향점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3) 참석 문제

참석 문제를 두고 외부 교단에 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늘 이질감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예배에 따라 각 직책에 따라 참석하는 교역자와 교인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마치 총공회 예배는 초등 학교 담임제 같아서 교사와 학생 전체가 종일 함께 하게 되는데
다른 교회들은 대학교 강의 같아서 학생도 강사도 다 제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회는 목회자가 사택 식구를 다 데리고 가면서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자리에 목사는 가고 교인이 가지 않는다면 그 것은 공회 집회를 모른 연고요
은혜 받는 자리에 목사는 제 가족을 데려 가지 않고 교인들만 가자 한다면 공회가 아니고
목사와 장로와 교회 직원들만 주로 참석하고 일반 교인은 일부 가고 대부분 가지 않는다면
그 것은 교역자회나 총공회 회의처럼 대표를 통해 결정하고 결과는 전해 들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집회는 예배이니 이 것은 대표를 보내어 대신 들을 수가 없는 식사 시간과 같습니다.

80 개가 넘는 대구 공회 교회는 목회자 백 명, 장로님 백 명, 권사나 핵심 구역장 5백 명,
그러면 공회의 핵심 중직자 부부만 참석해도 1천 명이고, 그 직계 가족만 참석해도 4천 명,
만일 여기에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처럼 교회 주요 모임에 참석할 사람까지 합하게 된다면
대구 공회 집회가 공회 집회이기 위해서는 5-6천 명 이상은 수월하게 모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다면 굳이 집회 통합을 말할 것도 없이 자체적으로 과거 집회를 떠 올릴 것이나
분리 후 대구 공회는 집회의 원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옛날만 회상하고 그리워 할 뿐이니
대구 공회 집회는 목사님 사후 공회 분리 직후 불과 수 년을 지나지 않고 사멸했습니다.

중요한 이유는, 재독을 죄라고 하여 그 집회가 유지 될 교훈과 힘의 중심을 스스로 막았고
그 대신 백 목사님이 권위 있게 외치던 강사직만 한껏 부러워서 설교를 해야 한다 했는데
실력은 되지 않고 자리만 오르려 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된 분들이 비록 실력 있고
굉장히 준비하여 설교하므로 일반 목회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은혜를 끼치고 있지만
문제는 그들이 외치는 그 자리에 참석할 이들이 백 목사님께 설교를 들었던 귀 교인들이니
그들에게 가끔 한 번 들어 보러 오거나 인사차 눈 도장을 찍으러 올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생활을 다 접고 온 가족과 교인을 데리고 오게 할 정도에는 너무 못 미치기 때문에
대구 공회 집회는 초기부터 강사가 되었거나 강사 될 분들의 교회는 제법 참석율이 높으나
그렇지 않으면 데려 올 마음도 없고 또 데려 오면 자기 위상 문제도 있어 소극적인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차량으로 매일 아침 출발하고 저녁에 돌아 오는 식의 집회로 진행 되고 있으니
이 상태라면 대구 공회 집회는 공회 집회의 흔적만 남았으며 일반 교회 집회식일 것입니다.
대구 공회가 재독을 정죄한 것이 그 자체도 죄지만 그 보다는 완전히 놀아 난 것이 컸고
집회로 말한다면 공회 집회가 향후 불가능하도록 대구 공회 초창기 기초가 잘못되었습니다.
재독 집회를 통해 교역자도 새로 배우고 교인들은 교역자들에게 배울 이상의 은혜를 받고
그 세월이 지나 감에 따라 새 말씀이 필요하든지 새 인물이 직접 설교하는 것이 낫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부상하면 될 것을 초상 친 다음 해에 바로 강사 자리에 앉아서 고함만
지르면 백 목사님 밑에 은혜 받던 집회로 이어 질 줄 알았던 백 태영 목사님이 한심스럽고
그 고령을 기대하며 몇 년 후에는 자기들 차례로 내려 온다고 기대한 분들이 안스럽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수천 년 찌들어 내려 오는 악습 중에 번개처럼 뚝딱해 치우는 성격이 있는데
비록 그 분이 돌아 가셨다 해도 공회에서 비중이 너무 컸으므로 세월을 좀 기다려야 했는데
교리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교리를 앞 세워 재독을 정죄하되 하루 밤에 결정했습니다.
심지어 평양의 저런 정권도 아버지 자리를 수 년째 비워 두고 연극을 해서 그래도 버텼는데
공회 목회자들, 소위 원로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인 그들은 하루 밤을 채 참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별로고 우리가 다 천출들이니 함께 좀 기다리며 생각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내부 자멸로 끝난다는 자탄이 나오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무리 말해도 안 되고
하루 저녁만 더 기도해 보자고 해도 오늘 밤에 천지가 뒤집어 져도 결단을 낸다고 설쳤으니
그렇게 했는데도 이 공회와 집회가 깨어 지지 않는다면 그 것이 더 이상할 일이었습니다.


비록 부공 집회는 재독으로 양식을 삼았으므로 최선은 아니나 훌륭한 차선은 잡았는데도
부공1은 오로지 교권욕만 가진 지도부와 그 지도부에게는 백 목사님께 보다 더 충성한 하부
부공2는 서 목사님의 노련한 물 타기와 그를 향해 백 목사님 이상의 충성을 보인 김 목사님들
이런 요인들이 얼키고 설켜 과거 집회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쳤습니다.
그래도 재독의 힘이 크기 때문에 대구 공회보다 집회 유지가 어려울 요소가 훨신 많았으나
대구 공회보다는 조금 나은 형편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과거 모습이 어느 정도 유지 되고 있다고 말씀하시나 부공2 사진에서 보듯이
좌석의 집중도 자체가 비교 될 수 없습니다. 서부 교회 중직자들의 집회 불참이 뚜렷하나
다만 서부 교회의 덩치가 워낙 크고 부공1이 그들 소수의 힘으로 다수를 통제한다는 기분
그리고 그 분들의 원래 체질상 그 시기에 그 장소에 앉아야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으로
현재 어느 정도 집회는 유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이미 집회일 수가 없습니다.
동상이몽, 이 것이 부공1의 두 편과 부공2의 참석하는 핵심 지도부들의 집회 이유입니다.



4. 몇 가지를 추가하면

(1)부공3의 경우

아다시피 이 홈은 백 목사님 생전부터 지금까지 공회 이론을 연구하고 세워 온 곳입니다.
따라서 집회를 포함하여 공회 노선에 속한 것은 무엇이든 이 홈이 관계 된 사안을 두고는
원칙과 본질은 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만 부공3은 작은 교회 하나 모인 정도의 규모이니
공회 전체를 두고 논할 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사례로 들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전체 향방을 가늠하기 위해 통계 조사를 할 때에 최소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하는데
조사 대상이 너무 적으면 전체를 가늠할 기초 자료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2) 현재 부공1 집회

어쨌든 외부 모습은 그래도 공회 집회의 전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재독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난투극만 생기지 않는다면 기본 은혜가 클 것이고
외부적으로는 일반인 시야에 대형 집회 모습을 가졌기 때문에 그만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다만 그 내부를 너무 환하게 파악하고 있는 각 공회나 교회의 목회자들과 핵심 교인들은
현재 평양 정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눈을 뜬 사람은 도망을 나오거나
현재 그 자리에 앉는 것이 누구의 장난에 누구의 욕심을 채우는 행동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상처는 아물게 되나
문제는 언제 무슨 사건이 돌발하면 과거 우리가 다 본 것처럼 남의 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평양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할 때 전국 교회가 침묵을 지켜 그들을 지지해 놓고도 훗날
그 지도부만 욕을 하면서 한국 교회사는 오늘까지 그 지도부 몇만 비판하고 끝을 냈습니다.
오늘 부공1 집회가 옳다면 참석자가 옳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참석자는 동참죄가 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은 허물치 않으시나 과거 역사를 통해 아는데도 짐짓 모른 것처럼 했다면
몰랐다고 말한다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 성경 역사이며 교회 역사이며 한국 교회사이며
우리 공회의 지난 20 년 역사이기도 합니다.

현재 유지 되는 대충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이며 발전을 위한 좋은 토대였으면 합니다.
만일 현재 유지 되는 대충의 평화가 남북의 휴전선 상황이라면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남한 내에서 북한을 좋은 시각으로 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하는 이들의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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