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과 평가 -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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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과 평가 - 완료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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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순과 노선

이재순 목사님은 비록 시골이었지만 주변에 비해 잘 사는 가정의 종손이라는 점과 그 성격 때문에 체질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분입니다. 백 목사님 1세대 제자들 중에서 백태영 목사님이 가장 대표적인 수정주의였고 이재순 목사님은 그 반대편의 가장 대표적 보수주의였으며 백영침 목사님은 두 분의 중간에서 약간 보수 쪽이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는 공회 전체 분위기가 목회자 개인의 수정 노선 성향을 외부로 드러 낼 수 없었는데 80년대 말에는 공회 내의 수정 노선이 자유롭게 그리고 봇물처럼 터쳐 나왔는데 1세대 원로 측근들 중에서는 이재순 목사님만 유일하게 보수주의를 견지했다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백 목사님 사후가 되자 이 목사님은 즉각 수정노선에 서게 됩니다. 이 목사님 평생의 가장 큰 실책이었고 그 결정 때문에 이 목사님은 불과 1 년 정도 수정노선에 이용만 당하고 백태영 목사님께 배척 되자 대구공회를 탈퇴하게 됩니다. 이 때 함께 한 분들 대부분이 비록 보수 신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정노선 기준에서 본다면 보수노선 사이에 중도 정도였고 당시 '거창공회'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분들이 오늘의 대구공회에서는 중심에 서 있고 당시 끝까지 수정노선에 앞장 선 이들은 현재 서울공회에 있고 일부는 대구공회 내에서 수정노선 성향이 뚜렷한 교역자들입니다.

이재순 목사님은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의 수정 노선에 합류했다 부산공회와 투쟁이 끝난 1년 후에 교권 중심부에서 배제 되었고 이후 서부교회 바로 옆에 개척 나와 있던 성광교회에 잠깐 계셨다가 자녀들이 있는 안산교회(현. 안양동부교회)에서 임종하게 됩니다.

백 목사님 생존 마지막 시기에 백태영 목사님 중심의 수정노선 목회자들이 너무 강하게 활동하게 되자 목사님은 이재순 목사님을 양성원 교학실장으로 또 공회 행정실장으로 불러 공회 본부에서 전국 교회의 수정화를 제어하는데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태영 목사님 등 수정노선 목회자들이 백 목사님 면전에서 고성을 내며 이 목사님께 화풀이를 하고 양측의 감정 싸움 때문에 89년 1월 교역자회의는 파행적으로 마치는 사태도 있었고 곧 이어 목사님은 5층에서 준비 해 온 행정 8개안을 발표하는 직접적 계기도 됩니다.






2. 질문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1) 수정노선에 서게 된 이유

- 가족 관계
서부교회 내의 이춘영 장로님은 수정노선 남정교회의 중심 인물이며 이재순 목사님 둘째 아들과 장로님의 딸이 부부입니다. 백 목사님 사후 이 장로님의 서부교회 내 위상에서 볼 때 크게 기대할 수 있었고 백 목사님 사후라는 입장에서 이 목사님으로서는 별도로 맡은 교회도 없었고 따라서 이 장로님께 크게 기대는 입장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장로님 가정과 결혼 관계를 중매한 분이 이 목사님의 둘째 사위 배종일 목사님이었는데 배 목사님은 백 목사님 사후 수정노선의 대구공회의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백태영 목사님은 최고의 목회 실력과 원로라는 간판이 있었으나 대구공회를 실질적으로 형성하고 이루어 낸 실무 총책임자는 배 목사님입니다. 배 목사님과 이 목사님은 백 목사님 생전에는 끝까지 서로 신앙 노선이 보수와 수정이어서 맞지 않아 고통스러웠는데 목사님 사후 이 목사님은 백 목사님이 유일한 후원자였는데 목사님이 계시지 않게 되자 평소 위상에 맞는 위치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배 목사님과 이 장로님과 함께 대구공회에 서게 됩니다.

- 서부교회 주도 세력과 반목
백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는 중간반 주일학교 연구소의 책임 직원들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30대였고 이재순 목사님은 70세를 넘어 서던 원로였는데 서부교회 핵심 30대 직원들은 백 목사님 밑에 오래동안 직접 배운 체질 때문에 원로라는 이름 자체는 예우 정도에서 그치고 실무 처리에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데 이 목사님은 안 믿을 때부터 내려 온 옛날식 예우를 심각하게 요구하는 분이었으므로 서로 보수 노선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서부교회와 공회를 중심으로 백 목사님 생전 마지막에 일어 났던 보수신앙과 수정노선의 투쟁에서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실무와 멀었고 현장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 직원들은 이 목사님보다 매사 백 목사님께 직접 지도를 받아 왔기 때문에 이 목사님에 대한 예우 때문에 그들이 파악하고 대처하고 처리해야 하는 공회 노선의 중대사를 두고 양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목사님은 꾸준하게 예우 문제를 거론하자 백 목사님 생존 마지막 해에는 서로 갈라 서게 됩니다.
이 목사님은 연구소의 7명 운영위원회의 대표를 맡았던 직책을 이름뿐인 자리라며 사표를 냈고 직원들은 백 목사님께 그대로 보고 드려서 사표를 수리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서부교회 내의 경쟁과 견제가 심각했던 장로님들의 관계에 이 목사님이 수정 노선의 장로님을 지원하는 시도를 직원들이 막고 나서는 등 서로 감정과 신뢰 문제에서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 목사님 사후의 공회 판도
목사님 사후 비록 서부교회는 교회 직원들이 주도하고 있으나 전체 공회는 전체의 3분의 2가 수정노선이며 특히 백태영 목사님이 총공회의 차기 지도자로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단 되자 수정노선에 서게 됩니다. 이 때가 장례식 기간 중이었습니다. 백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는 장로님 16명의 결정으로 무엇이든 결정 된다고 보았는데 그 중에 13명이 대구공회의 수정노선에 있었고 공회는 이재순 목사님을 빼놓으면 다 수정노선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인천의 이재순 목사님은 공회적으로 간단한 심부름만 잠깐 하는 정도였지 공회 전체적으로는 어린 목회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님 사후 이 목사님의 거취를 두고 이미 총공회 전체가 백태영 목사님 손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수정노선에 서게 됩니다.



2) 목회한 교회들

- 성광교회
이재순 목사님이 백 목사님 사후에 목회한 교회는 부산의 성광교회와 안양의 안산교회입니다. 이 목사님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백 목사님 생전에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나 목사님 사후에 백 목사님의 후원도 없고 미리 닦아 놓은 교회가 없어 진 상태에서 목회자가 교인들의 의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성광교회는 비록 대구공회 내에 있어도 정순환 장로님처럼 좀 보수적인 분들이 개척한 교회였으므로 그래도 어느 정도 보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교인들이 통일찬송가를 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성광교인들은 서부교회에서도 강한 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교인들은 이재순 목사님이 비록 공회적으로는 원로라 해도 서부교인들의 특이한 기질, 즉 백 목사님 외의 공회적 인물은 그냥 보통 인물 중에 좀 낫다는 정도로 보지 지교회 교인들처럼 순종할 대상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모신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교인들의 입장을 살펴야 할 교회였습니다.

- 안산교회
안산교회는 이 목사님의 통제가 가능한 교회이므로 공회찬송가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면 가능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백 목사님 사후에 이 목사님이 대구공회에 섰고 그 과정에서 대구공회의 논리를 주장하는 지도부에 계셨고 또 성광교회에서 약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안산교회는 모든 면으로 대구공회 핵심 교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안산교회에 부임한 목사님으로서는 목사님 사후의 모든 입장을 일거에 다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밀어 붙이면 되겠으나 이제 노후를 생각해야 하고 또 공회적으로 교회들이 함께 모일 때 사용해야 할 찬송가 문제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속으로는 백태영 목사님의 수정노선의 잘못을 가장 잘 알고 비판할 수 있지만 외부적으로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소속 전환
백 목사님 사후의 급변 상황에서 백태영 목사님의 대구공회가 서부교회와 총공회 전체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 이 목사님으로서는 평생에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만사가 다 밝혀 진 다음에 돌아 서려 하나 그 분은 원래 예우라는 것에 민감한 분이므로 부산공회에서 어느 정도 대우를 제시해야 하는데 부산공회는 생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였으므로 이재순 목사님이 스스로 회개를 한다고 발표를 하고 오면 몰라도 그냥 다독거리고 영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돌아 오고자 해도 길이 없었습니다. 이 목사님으로서는 인간적 입장 때문이었고, 부산공회를 주도하던 젊은 직원들로서는 모실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3) 대구공회 홈 운영
이 목사님의 손주 중에는 한양대에서 인터넷을 전공하던 석사 과정 학생이 있었고 신앙과 실력과 효성이 지극한 분이어서 대구공회 홈뿐 아니라 이 홈도 자문을 자주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안산교회로 가셨을 때는 이미 안산교회에서 이 목사님의 일상 목회가 어렵다고 보고 노후를 책임 진다는 차원에서 모셨습니다. 그래서 안산교회는 대구공회의 일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이 목사님은 일절 공회 사안에 나서지 않고 물러 나 앉았습니다. 그래서 안산교회의 입장은 이재순 목사님의 입장과 공회 활동에서는 이원화가 있었습니다.



4) 동부장로교회
목사님의 개인 문제를 두고 그 동안 대구공회와 교역자는 서로 입장을 달리 하고 있었습니다. 교역자가 자신의 개인 문제를 대구공회가 잘못 처리했다고 주장하는 이상 제3자는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구공회로서는 공회의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를 했다고 하는데 평소 대구공회가 백 목사님 사후 진실되이 걸어왔다면 그 과거를 봐서 공회의 입장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데 대구공회는 그 걸어 온 역사 자체가 스스로 원칙과 노선을 바꾼 적이 많았습니다.
과거 부산공회와 소송 문제처럼 또는 찬송가 문제처럼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그 증거를 근거로 얼마든지 개인적인 설명과 평가를 할 수 있으나, 목회자의 개인 문제를 두고 목회자가 강력하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외부인으로서는 세월을 통해 가부가 드러나도록 기다릴 뿐입니다.
지난 11월 중에 동부장로교회는 그 동안 목회자의 입장을 유보적으로 지켜 보다가 최종적으로 둘로 나뉘어 공회 입장을 따르는 교인들이 동부장로교회에 그대로 남고 목회자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개척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남은 교회도 대구공회 자체를 신뢰하지는 않으나 대안이 없어 현재 고민 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5) 창동교회의 소속 문제
창동교회는 백 목사님의 생존 마지막 시기였던 1989년 당시 최근까지 동부장로교회를 맡고 있던 배종일 목사님이 목회자였습니다. 창동교회 당시 목회자는 목사님 사후 공회 분리 과정에서 대구공회를 창설한 주력이었고 평소 교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으므로 창동교회의 소속은 당연히 목회자가 결정한 대구공회로 생각하고 대구공회에 교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창동교회는 비록 거창 시골에 있지만 교장이 5명이나 있는 정도로 지성인들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수정노선의 대구공회를 선호할 입장은 맞지만 창동교회에 오래 된 교인들은 공회의 전통적인 내부인들로 일제 때부터 이 노선에서 믿어 온 교인들입니다. 자연스럽게 교회 내에서 목회자 한 사람이 판단하고 명단에 올리면 교회의 소속은 무조건 확정 되는 것이 대구공회이며 총공회이며 신앙의 일반 원리에 맞느냐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이어 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단 대구공회 핵심인 목회자 1명의 주장만 듣는 것으로 공회 상황을 결론 낼 수가 없다 하여 이 홈의 답변자에게 부산공회 입장을 듣는 자리를 제의했습니다. 저녁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경까지 계속 된 대화에서 백 목사님 사후 6개월 이상 계속 된 배 목사님의 대구공회 입장에 대하여 답변자는 세세하게 부산공회의 입장을 설명했고, 그 설명 끝에 그 날 참석한 분들이 교회 내에서 목회자 1인의 결정으로 교회 자체를 대구공회로 소속 시킨 것을 보류해 달라고 했고, 창동교회의 소속은 교인 전체가 의견을 모을 때까지는 보류하고 교역자와 교인들은 각자 자유하기로 되어서 지금까지 그렇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대구공회에서 1회 부산공회에서 1회 등으로 목회자 교체나 재임 기간 등을 고려하는 것이 옳겠지만 교회 자체의 소속 입장이 보류 되는 정도에서 목회자의 소속은 대구공회에서 주로 오고 있는 것을 부산공회 교인들이 양해하여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며 무슨 법이나 약속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분쟁에 빠진다면 이렇게 타협을 하고 나가는 것이 양심과 교회 내의 복음 운동에서 가장 바람직한 한 사례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6) 남천교회의 경우
이제는 관련인들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이어서 처음으로 공개합니다만,
남천교회도 창동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상황이 있었습니다. 백 목사님 생존 마지막 시기에 목회를 하던 분께서 대구공회에 서게 되고 교회도 그렇게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천교회 내에 최광수 선생님 등 양성원에서 답변자의 강의를 듣던 분들이 남천교회 핵심 교인 15명 정도를 모시고 답변자에게 부산공회의 입장을 듣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저녁 9시경에서 다음날 새벽 4시경까지 밤을 새우며 노선 문제를 설명했습니다.
남천 교인들은 당시에 서부교회 부산공회 측이 5층에 묘지를 마련한다고 했다, 비디오를 우상으로 섬긴다더라, 백 목사님께 배운 목회자는 노트를 불 태워야 하지 않느냐는 당시 대구공회 논리가 다 나왔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을 드렸으며 모두가 평소 집회를 통해 백 목사님께 직접 배운 이들이기 때문에 단숨에 부산공회로 교인 입장을 모았습니다. 당일 그 자리에서 대구공회에 앞장 선 당시 목사님을 보낼 수 있다는 발언이 있었으나 답변자가 그 목사님은 원래 부산공회가 체질인데 백태영 목사님의 대구공회가 남천교회에 분란을 일으켜 교회에 피해가 클까 해서 현재 자신의 최종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분이므로 여기 있는 남쳔교회 주력 교인들이 다 함께 가서 생명을 걸고 부산공회를 지지할 터이니 목사님께서 앞장을 서 주시도록 부탁을 하는 것이 하나님도 기뻐하고 목사님과 교인 전체가 사는 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답변자가 남천교회를 방문하고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이 공개가 된다면 당시 목사님의 입장이 곤란해 져서 답변자가 마치 남천교회의 또 하나의 배후처럼 되면 늘 남천교회 내부에 보이지 않는 장애가 생길 것이므로 답변자 방문 사실을 말하지 않도록 부탁했습니다. 창동교회도 꼭 같이 부탁을 했는데 창동교회는 바로 다음 날 말이 나갔고, 남천교회는 교회가 완전히 수습이 되도록 말이 지켜 져서 그 목사님 중심으로 부산공회가 튼튼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먼 훗날 남천 목사님께서 부산에서 답변자를 만나서 언제 왔다 갔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 표정이 진심으로 고마왔던 느낌이어서 남천교인들의 신앙과 인격성을 지금까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말이 지켜 진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으나 가끔 어떤 교회들과는 건설적인 면으로 잘 협조가 되어 지기도 했습니다.
창동교회와 남천교회가 대구공회 핵심 교회로 서는 순간에 부산공회로 넘어 가고 중립으로 빠지게 되자 대구공회에서는 답변자가 예전에 사직동교회 식으로 전국을 난동 부린다 하여 답변자 어느 관련 교회에서는 강단 안에 낫을 넣고 있다가 오기만 하면 쪼아 죽인다고 악을 갈던 분이, 훗날 공회 분립이 끝나고 모든 입장을 알 만한 때가 되자 당시 이야기를 직접 하여 주셔서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20명이 채 안 되는 교회로서, 답변자는 나누어서 각자 개척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낫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그리고 그 교회 교인들이 먼저 문의를 하면 담대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렇게 했고, 밀양 시산교회나 거창의 신천교회처럼 나누어서는 각각 교회가 교회로 서기 어렵다고 생각 되는 교회는 이 노선을 주장하는 쪽에서 조용히 나와서 개척을 하든지 아니면 교회 내에서 분리하여 싸우는 일을 그만 두도록 안내를 했는데, 당시 전국의 교회에 분리 문제만 생기면 부산공회에서는 답변자를 다 내세우려 했고, 답변자는 상기 원칙에 의하여 선별 활동은 한 적이 있었습니다.









: 참고로 거창 창동교회와 대구공회와의 연관성은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외형상은 개공회라고 하나 실제는 대구공회 노선을 따르고 있지 않은지 궁금하며, 창동교회 내부에서는 부산공회1과 부산공회3 그리고 대구공회측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로는 대구공회가 주관하고 있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
: 질문이 우왕좌왕한점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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