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에 관한 약간 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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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백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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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00:00
저와 백 태영 목사님간의 한 토막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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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위에 소개한 것 중 제가 잠실동 교회를 거쳤다고 하는데 저는 잠실동 교회를 등록하거나 소속하여 다닌 적이 없습니다. 제가 신혼 시절에 처가 잠실동 교회 출신이라서 결혼식은 잠실동 교회에서 하였고 당시 주례는 백 태영 목사님이었습니다.
결혼후에 인사를 드릴 려고 약간의 선물을 가지고 태영 목사님의 사택을 방문하였다. 사택은 당시 공회 교역자들의 소박한 거처에 비하면 2층 양옥으로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방문 후에 얼마간만에 저에게 태영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이제는 결혼도 하고 했으니까 청량리 교회를 계속나가면 안 되고 잠실동 교회에 나와야 된다고 나의 결정을 보려는 전화였다. 나는 일언직하에 거절하면서 안 됩니다. 저는 멀더라도 청량리 교회에 계속 나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나의 의외의 거절에 태영 목사님은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주례도 서 주었고 집도 교회에서 가까우니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잠실동 교회로 나올 줄 알고 전화를 하였는데 당돌하게도- 저의 태도가 평소에 조금 건방진데가 있었다.- 명명백백히 거절하니 실망감을 가지시는 것 처럼 보였고 그 후에는 다시 전화가 안 왔다.
니
당시 저의 집은 잠실동 교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어서 새벽기도는 얼마간 가까운 잠실동교회에 나갔지만 집에서 버스타고 지하철타고 1시간 여가 걸리는 청량리교회에 계속 나갔다. 바로 코 앞에 잠실동 교회를 두고서 멀리까지 (서울 석촌호수 롯데월드 옆 잠실에서----> 동대문구 청량리 교회 까지) 청량리 교회를 다니니 고생스러웠지만 고생을 마다 하지 아니하였고 필경은 청량리 교회로 이사를 왔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현대화된 잠실 신도시에서 오래된 꾀죄죄한 청량리로 이사를 온다니까 왜 그러느냐고 했다. 나는 이미 태영 목사님의 스타일을 간파했다. 당시 백 목사님에 이어 공회 내 2인자에 속하였지만 태영 목사님의 설교나 태도에 대해 우리 공회의 노선상에 비추어 보아 이질감을 느끼는 면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력 중 잠실동 교회를 거쳤다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정정을 요청하고 있는가? 지금의 잠실동 교회의 현황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교회에 과거 한 때에 내가 속하여 있었다는 이력은 나로 하여금 자긍심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치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당시 제일의 교회는 외형적으로 잠실동 이었지만 노선도의 선명도를 따지지만 청량리 교회였다고 저는 보았다. 청량리 교회의 모든 역사와 믿음의 형태는 최금주 권사였다. 이 분은 믿음의 여걸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분의 이력으로 청량리 교회가 존립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량리 교회가 사직동, 잠실동, 동문, 상남 등의 큰 교회들이 서울에 있었지만 공회 노선에 제일 굳건히 선 곳은 청량리 였다고 보았다. 청량리 교회는 1950년대 백 목사님이 세운 교회였다. 당시 상남 교회(서울 상도동 소재)는 그 때 부터 제가 방문 한 경험으로 보면 우리 공회와는 영 딴 판으로 가는 교회로 보여서 정이 가지 아니하였다.
또 저의 소개 중 또 한가지 정정 할 곳은 저는 1952년 11월에 태어나 1974년에 사모하는 김 영채 목사님으로 우리 공회 복음을 받고서 외도없이 오로지 우리 공회안에만 있으면서 흐른 세월이 오늘부로 약 38년 입니다. 세월은 여류하여 이제는 염색을 하지 아니하면 온 통 백발이 성성합니다. 출생연도도 정정이 필요합니다. 1953년을 1952년으로요.
불충한 저를 좋게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요셉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