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공회] 공회 내 두 '이재순'목사님들과 현재 8월 도평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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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공회] 공회 내 두 '이재순'목사님들과 현재 8월 도평집회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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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총공회에 '이재순'목사님은 2명이 있습니다.

①이재순(李在淳)

백목사님 사모님 집안 식구, 개명 출신, 개명 동네에서는 아주 잘 살았기 때문에 별로 아쉬울 것이 없어 신앙생활도 아주 늦게 한 분. 1949년 백목사님이 위천으로 부임하게 되자 후임이 없어 개명교회를 맡아 조사님으로 출발. 백목사님의 친 동생으로 백영익 백태영목사님, 집안 동생되는 백영침목사님과 함께 총공회 초기 교역자입니다.

설교나 목회보다는 공회 행정에 있어 제일 수고한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7년 교학실장으로 와서 목사님을 마지막까지 모셨고, 그 이전에도 지방 교회에 문제가 발생되면 파송 제1순위로 수고한 분입니다. 물론 백태영목사님이나 백영익목사님의 경우, 그런 분규 교회를 수습하는데는 더 유능했을지 몰라도 그분들은 고정으로 맡고 있는 큰 교회가 있어 주로 이목사님이 수고하게 됩니다.

큰 딸 부부가 안산교회(현. 동부장로교회) 김무웅장로님 가정으로 대림대학 교수시고,
둘째 딸 부부가 배종일목사님 가정으로 서부교회 첫 직원(행정실, 주일학교 겸임)이며, 서부교회에서 자라난 핵심 청년들을 대부분 지도하던 분입니다.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를 출발시켜 오늘에 이르게 한 최고 최대 공로자입니다. 아마 행정과 목회 실력 면에서 총공회 전체를 통해서 첫 손에 꼽을 분입니다.

큰 아들은 글씨에 능하여 공회 내 교역자들이나 교회에 한글로 된 백목사님 시를 액자에 걸어놓은 것은 거의 그분 솜씨이며, 조용한 품성에 신앙이 깊어 목회자로 주변에서 권하나 겸손하게 사양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금융전문가로 서부교회 이춘영장로님 사위가 됩니다. 이장로님은 백목사님 생전 서부교회에서 경제면으로 제일 실력가였습니다.


②이재순(李載淳)

이재순목사님은 1974년 50대 늦은 나이로 목회에 나온 분이며, 집안 식구들끼리 경영한다고 알려진 대림그룹 회장 집안 출신으로 그룹의 이재용회장과 전대통령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씨 등과 함께 대림 일원입니다. 운동에 능하고 영어가 자유로우며 대림건설의 중역을 지내다가 미국지사장으로 가게 되는 시점에 갑자기 세상을 다 포기하고 조사로 출발한 분입니다.

첫 목회지가 남해 제일 외진 바닷가 서상에서 개척을 하였으며, 총공회 가장 어렵던 시절 마지막 고생하고 개척해야 하는 순서를 그대로 다 밟은 분입니다. 백목사님을 마주치면 그 자리에 일단 서서 90도로 정중하게 절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고 그 심지가 특히 견고한 분입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백목사님 사후 재독으로 이어가야 할 서부교회 후임자로 인정받아 서부교회 운영 주도측에 의하여 담임목회자로 청빙을 받게 됩니다. 서부교회가 부산공회에 속하는 과정에서 담임목회자로 강단 위로 날아드는 계란세례에 고초도 많이 겪었으나 1989년 9월에 부임해서 1990년 11월 시무투표에서 불신임을 받게 됩니다.

큰아들이 이의용목사님으로 서울대 의대출신으로 현재 내과의원 의사를 겸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고 부인은 서부교회 장로 및 부목으로 있던 이동근목사님 따님으로 현재 가족이 함께 서광교회(개공회)를 맡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서울대 건축학과 출신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던 규모 큰 건축사였습니다. 사위는 남천교회 최기주집사님 아들로 경제기획원을 거쳐 사업을 했던 분입니다.

1979년 공회의 대거 개척계획에 따라 인천 인산교회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백목사님 사후 두 분의 걸음

백목사님 생전 마지막 순간, 거의 모든 중진 목회자들이 대구공회라고 이름할 수정노선으로 쏠릴 때 두 이재순목사님은 백목사님을 그대로 따르는 보수노선에 있었습니다. 안양이목사님은 교학실장으로, 인산이목사님은 행정위원장으로 백목사님 측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측이 백목사님 사후 공회 행정체제를 '삼두체제'라는 이름의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자고 제의를 하게 되는데, 이 안에 의하면 총공회장은 백태영목사님, 양성원은 안양이목사님, 공회 행정은 백영침목사님으로 교권을 분권하고, 서부교회를 맡은 분은 공회직을 맡지 않아야 균형이 맞겠다는 것입니다.

내용으로 보면, 서부교회 담임으로 온 인산이목사님이 보수측이므로 보수측에게 공회 발언권을 차단하겠다는 계산이었고, 안양이목사님이 인산이목사님과 연대하면 저항세력이 생길 것이므로 삼두체제라는 행정조직으로 안산이목사님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므로 안산이목사님을 대구공회로 흡인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수정노선의 이런 제안은 총공회 전체를 장악하는 전략이었는데, 이 제안은 그후 현실화에 성공합니다.

수정노선의 대구공회로 본다면, 백목사님 사후 총공회를 단어 하나와 아이디어 하나로 전반적 구도를 수정측이 주도하도록 승부수를 띄웠으니 세상말로 말하면 누워서 떡먹기로 공회를 접수하게 되었고, 보수측의 부산공회는 눈감고 아옹하는 전략에 눈뜨고도 그대로 먹히게 되는 방향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1989년 10월 17일 제20회 공회가 수정노선의 대구공회로서는 이 모든 목표를 다 달성했던 날입니다.

설마 했다가, 대구공회측의 칼이 총공회를 완전 장악하고 그다음 서부교회 담임직을 향한다고 느끼게 되자, 서부교회 담임으로 와있던 인산이목사님은 서부교회 백목사님 생전 직원들에게 비로소 향후 노선 투쟁의 모든 것을 일임하게 됩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총공회 내부나 서부교회의 내면을 실감하지 못하여 모든 결정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양이목사님은 대구공회 노선 최일선에 서게 되고 1990년 3월 양측 공회가 분리될 때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공회 교학실장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구공회는 부산공회를 접수하는데 실패하고 수정노선이 독자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서자 막바로 안양이목사님을 제거하게 됩니다. 그분은 원래 보수노선이었기 때문에 수정노선에서는 항상 때를 기다리고 있던 제거 목표 중에 한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두고 대구공회 내에서는 이재순목사님을 지원하는 분들과 이목사님을 제거하려는 백태영목사님으로 분열이 되고, 백태영목사님이 대세를 쥐고 있으므로 안양이목사님측은 소수만 대구공회를 탈퇴하게 됩니다. 탈퇴한 분들은 부산공회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구공회로부터 이탈해서 나왔기 때문에 중간측이라고도 했고 거창지방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거창공회라고도 했습니다.

이재순목사님은 그후 부산성광교회에 조금 계시다가 자녀들이 있는 안산교회로 옮겨 노년을 그곳에서 임종하게 됩니다. 잠깐 대구공회로 나갔다가 탈퇴했지만 여전히 그분의 기조는 보수노선이어서 임종 때까지 이 복음 원칙에서 목회를 했고, 그 마지막 수년간은 평생을 통해 가장 은혜롭게 설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한편 서부교회에서 불신임을 받은 인산이목사님은 인천으로 돌아가고 그곳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부산공회 모든 공회 재산권을 행사하는 대표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부교회에 이목사님 후임으로 온 서목사님이 이목사님에 이어 1992년 11월에 불신임을 당하자 공회적으로 서부교회 담임목회자를 불법으로 규정 치리하는 일로 향후 1990년대 끝까지 투쟁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양성원 쟁탈, 거창 및 대구기도원 쟁탈, 집회 강사 독점, 교역자회와 총공회 개최 문제 등을 통해 오늘까지 총공회 전체의 법적, 외부적 대표자가 되어 있습니다.


3.현 대구와 거창기도원에서 개최되는 집회는, 부산공회(1)의 단독집회입니다.

대구공회와 서울공회 그리고 부산공회(3)은 두 곳의 집회를 전혀 별개로 개최하며 10여년을 지냈습니다. 부산공회(2)는 현재 소속 교회의 내부사정에 따라 독자적으로 집회를 하거나 아니면 이전 장소로 집회를 가지 않으면 요동하는 교인들 때문에 아직도 참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중에 몇 분은, 대구와 거창 집회장소에 참석을 하지 않으면 공회간 재산 배분에서 절대적으로 분리하여 법적 항변권을 갖추려고 참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사정에도 불구하고, 주최측은 현재까지는 백목사님 생전의 모든 것은 외부적으로 형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까지 그대로 하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부산공회(1)만이 정통공회이므로 독자적으로 재산권을 영구 확보하기 위해 몇 가지 조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 8월집회의 성격은

백목사님 생전 그대로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입장과
공회재산 전체에 대한 법적 지배 사용권 확보를 위해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외부 교회들의 참여는 오게 되면, 주최는 부산공회(1)에서 할 것이므로 참석 숫자가 많으면 많은대로 분위기에 도움되고 또 연보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 있습니다.

현재 집회 사회는 인산이목사님이 단독으로 맡고 있습니다. 집회 분위기는 초기 서목사님측을 치기 위해 집회 재독을 1988년과 1989년 두 집회만 7-8번 계속 반복을 했고, 지금은 공회간 마찰이 소강상태이므로 한 해씩 내려와서 현재 1984년 8월집회를 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집회 분위기는 10년 넘게 한번도 가보지 않은 답변자보다, 혹 이곳을 방문하는 부산공회(1)이나 (2)에 속한 분들이 자유롭게 적는다면 더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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