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본질을 중심으로 - 오웬과 백영희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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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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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00:00
1. 답변에 앞서
- 답변자의 선입견
질문 직후 질문자는 개인 연락으로 답변자와 대화를 했고 이 과정에서 질문 내용에 담지 않았던 '죄에 대한 깊이' 등도 거론 되어 함께 안내를 드렸습니다. 답변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고 이 곳에 글로 적어야 하는 것은 잊었습니다. 매일 이 곳을 보면서도 이렇게 선입견의 생각 때문에 눈에 보이는 '답변 준비 중'이라는 글이 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증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람의 약점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또한 답변자의 부족이라는 점에서 늘 조심과 겸손을 갖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설명을 들었으나 방문인 전체께는 아주 죄송합니다.
- 답변자 일정 문제
평소 때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일정들이 겹치면 실수를 합니다. 이 번 질문은 양성원 일정과 겹쳤습니다. 최근 양성원 강의는 성경 본문을 직접 찾는 공부여서 강의 중간에 눈을 뗄 수가 없어 오후 1시에 시작한 강의가 저녁 먹는 6시까지 휴식 없이 이어 지며 이렇게 300 분 강의가 흔한 상태에서 때로는 다른 강의로 전환 되면서 2 시간을 더하게 되면 420 분 강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강의 후에 건강 문제가 있어 하루나 이틀을 쉴 때도 있고 이럴 때 다른 일정이 들어 가게 되면 이 번 답변처럼 아주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려 하나 부족한 점이 곳곳에 많아서 차질이 있는 면을 죄송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업무의 균형을 좀 기하려 합니다.
2. 죄와 죄의 본질
- 본질이란
나무의 색깔과 재질과 무게와 종류는 본질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무의 본질이라 할 때는 어떤 나무라도 공통적인 사항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무는 불에 탑니다. 태워서 타지 않으면 그 것은 나무가 아닙니다. 동물이란 원숭이 말 새 나비 벌레 등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동물의 본질이란 움직입니다.
- 죄의 본질
십계명에 10 가지의 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종류의 죄, 그 죄들은 천차만별입니다. 사람을 죽여야 살인죄가 되고, 훔칠 때 8계명의 도적질이 됩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은 5계명의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기본적으로 왕의 명령을 순종해야 의가 되나 신약에는 기본적으로 왕의 명령을 듣다 보면 죄를 지어야 하므로 항명이 의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설명은 전부 죄의 모습이며 종류 때문에 생기는 차이입니다. 죄의 본질이란, 모든 종류의 죄 전부로부터 공통적으로 발견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죄치고 이런 면이 없는 죄가 없을 때 그 것을 죄의 본질이라 합니다.
- 오웬 목사님의 죄론
오웬이라는 이름은 근대 미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잠깐 듣고 지나 간 듯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청교도 인물들을 간략하게 들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답변자는 신학을 구경만 한 사람이어서 교회사의 수 많은 이름 중에 한 분으로 지났습니다. 이 홈을 운영한 후부터 여러 사람으로부터 오웬이란 이름을 많이 듣게 되어 궁금했습니다. 일단 답변자는 알지 못하는 인물이나 질문자를 통해 '오웬은 청교도 유명한 대표 인물이고 죄의 본질을 하나님에 관련 된 것에 반감 - 적대감으로 본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설명에 기초하여 느낌을 소개한다면,
죄와 실제 싸워 본 분이며 그 싸움은 상대히 깊게 들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북 대결을 두고 예를 들면 국방부 장관이 휴전선에 철조망을 높게 강하게 만들고 참호를 많이 파고 견고하게 손을 보는데 국력을 집중한다면 요즘 남북 분위기에서 그런 정도에서 볼 때 애국자며 군인 정신에 투철함은 알 수 있으나 제일 하급 군인이니 전방에 전투 지휘관이나 할 사람입니다. 휴전선의 철책과 참호 설비는 최소화에 그치는 대신 국방비를 전자 장비 확충과 공군력에 쏟는다면 눈이 밝은 군인이며 훌륭한 장관입니다. 만일 국방부 장관이 국방비의 대부분을 뒤로 돌려 핵무기를 몰래 만들었다면 이야말로 진정한 군인입니다. 군인의 본질은 승리에 있습니다. 인권이니 법이니 외교니 UN이니 그 어떤 소리에도 상관 없이 무조건 이겨 놓고 봐야 군인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 상황에서 국방부 장관이 정말 싸울 대상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남한 내부에서 내부를 어지럽게 만들어 북을 유리하게 만드는 남한 내에 숨어 들거나 남한 안에 잘못 판단하고 있는 국민들의 사상과 정신을 상대로 싸워야 정말 이기는 군인입니다. 오늘 국제 환경에서 만일 북한이 먼저 친다면 우리가 한 번은 당해야 하나 공격을 당한 즉시 우리의 국력을 다 쏟아 버리면 북한은 지상에서 사라 질 정도입니다. 문제는 북한은 구식 무기로 우리를 먼저 칠 수 있고 우리는 오로지 당하기만 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반격을 해서 안 된다는 국내의 사고방식이 유일의 적입니다. 이미 남북의 격차는 다시 해결할 방법이 없도록 고착이 되었습니다. 현재 남한의 적은 남한 내의 인식입니다.
오웬 목사님은 죄와 많이 싸워 본 분이라는 설명을 최근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번 질문은 오웬 목사님이 죄와 싸우며 내린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관련 된 것에 대한 '반감 - 적대감'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방부를 예로 들 때 어느 단계에 해당이 될까? 휴전선에 철조망과 참호 구축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아이들의 PC방 출입을 막기 위해 출입문에 전자카드를 설치하자고 나서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세상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운동일 것입니다. 죄와 싸워 보면서 PC 방이 밉고 휴대폰이 밉고 유흥업체가 미워 이런 것을 없애려고 법령을 만들며 학교를 결석하는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들며 동분서주하는 사람, 그가 죄를 미워하고 평생 싸우는 사람이나 죄의 본질을 깊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나 미국의 교계 전부가 이 단계입니다.
전자전과 같은 첨단전을 넘어 서서 현재 남한 내에 국민이 정부에 대한 반감, 남한의 국가수립 과정에 대한 불만, 남한의 국방력 강화 그 자체에 대한 적대감이 오웬 목사님은 죄와 싸울 때 가장 깊은 속에 들어 있는 핵심이며 본질로 봤다는 것입니다. 아주 깊고 제대로 봤습니다. 사실 이 정도라면 한 시대를 맡아 전체 교계를 바르게 지도하며 제대로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많지는 않으나 국내에도 영어가 제대로 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오웬 목사님의 죄와 투쟁한 과정 그 심리적 갈등과 주력한 신앙에 감동 되어 열심히 증거하고 노력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고 보입니다.
3. 공회의 죄론 - 죄의 본질과 관련하여
- 백영희의 죄론
우선 나타 난 죄를 알고, 그 죄들에 공통적인 사항을 파악하며, 이 과정에서 얼마나 죄를 아느냐에 따라 죄와 싸움은 그 차원과 전개 과정이 달라 집니다. 휴전선에 철책과 참호를 파는 장관은 어느 날 정권이 바뀌면 총 한 번 쏘아 보지도 못하고 집니다. 국민이 투표를 통해 적에게 항복을 해 버리면 전방 군인은 전부 역적이 됩니다. 이런 것을 전사(戰史)에 상식이라 합니다.
우선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그리고 사람이 영과 심신의 3 분으로 되어 있는데 마음은 물질이어서 늘 죄를 짓고 우리의 영은 중생 후 범죄하지 않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아는 것이 죄에 대한 기초 인식에 필요한 사항입니다. 성경의 죄를 살핀 사람치고 제대로 깊게 들어 가다 보면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 잭 하일스 목사님의 경우
얼마 전에 전달 받은 책 중에 '잭 하일스' 목사님의 '날마다 새로운 구원'을 10여 페이지 읽었습니다.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확실히 나누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 오기 전의 사람과 이 단계에 온 사람이 죄와 싸우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휴전선 이북의 적과 남한 안의 내부 적으로 적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외부 적만 아는 사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더 이상은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제목만 봐도 이 부분만 나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 안에 몸과 마음은 건설구원에 문제고 우리의 영이 기본구원의 문제에 해당함을 인체 해부학적 차원에서 또 접목을 시켜야 하는데 이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남한 내부의 적 중에 평양의 파송 증명서를 가진 사람은 간첩이니 잡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이 아닌 줄 아는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 경우입니다. 다 읽지 않은 상태이므로 최종 판단은 유보하고 있습니다.
- 공회의 일반 죄론
공회는 성경의 모든 죄를 일반 우리 모두가 아는 죄의 종류와 형태 면에서도 대단히 깊게 들어 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하라 하신 말씀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데 이 경우는 죄를 논하기 전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인식과 노력이라는 것은 또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길에 있는 거지에게 옷을 벗어 주고 밥을 먹여 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압니다. 오늘 교계가 구호 기관으로 복지 단체로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이 그 것이라면 교계는 예배당 재산을 다 팔고 개인 재산을 다 팔아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담보 잡혀 더 줘야 합니다. 그리 하게 된다면 이 땅 위에 거지는 그렇게 하기 전보다 더 많이 늘게 됩니다. 교회가 어두워 지다 보니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구원입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일에 목적과 그 결과를 위해 필요할 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죄 하나를 두고 그 내부를 보고 출발하는 동기와 걸어 가는 향방이 이렇게 큰 차이가 있으니 죄에 대해 몸서리 치며 뒹구는 모습만 가지고 죄를 아는 사람인가? 죄를 고민한 사람인가? 죄에 대해 얼마나 깊게 들어 간 사람인가? 이렇게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성경 깨달음 이상의 죄를 알 수는 없습니다. 오웬은 양심을 가진 분임은 틀림이 없으나 그 분에게서 성경과 교리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별로 들을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 분은 깊이 문제와 넓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신앙 양심에 정직하며 충성한 모범적 교인이라는 점에서 특별할 듯합니다.
보통 그런 분들이 신앙의 각 분야에 각기 전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청교도 교회사에서는 누구, 청교도 교리에서는 누구, 청교도의 목회 지도자로서는 누구, 청교도의 경건주의자로서는 누구 그런 식인데 실은 이런 구분은 상식에서는 구별할 수 있으나 깊이 들어 가면 하나라도 떼 놓을 수가 없습니다.
- 공회의 죄론의 전개
백영희 '죄론'은 죄의 본질을 말씀에 삐뚤어 진 것으로 우선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하신 명령에 삐뚤어 진 것으로 죄의 전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질 뭉텅이의 제일 겉 모습으로 봅니다. 말씀에 삐뚤어 진 것 안에 죄의 본질이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에 삐뚤어 진 것도 죄의 본질 중 일부로 봅니다. 다만 그 본질 덩어리 중에 외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백영희 '죄론'의 죄의 본질 뭉텅이 안으로 더 들어 가면 '자기 마음대로 산' 자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누구 뜻대로 사느냐, 누구 원대로 사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것을 '불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씀에 삐뚤어 지지 않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근본 자세는 자기 뜻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별은 필요한 것입니다.
백영희 '죄론'의 죄의 본질 뭉텅이 안으로 더 들어 가면 '하나님과의 거리'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말씀을 순종하고 또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된 배경조차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해도 문제는 하나님과 거리가 어떠한가?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좀 멀어 져 있는가, 가까와 져 있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정권자와 거리를 둔 상태에서도 정권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정권자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지시를 잘 수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권자와 자기의 체감 온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것은 부부 간에도 그렇고 우리의 교회 신앙 생활에서도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렇게 깊은 문제까지도 당연히 살펴야 합니다.
백영희 '죄론'의 마지막 속에는 '소망인가 절망인가'라는 미래를 향한 향방 문제가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형으로 삼을 때 우리는 모형이며 우리의 모형 됨은 닮았다는 정도에서 그칠 수가 없고 이 모형은 생명체니 원형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닮을 때까지 영원토록 자라 가게 됩니다. '소망은 항상 있을' 것이라 하신 고전13:13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는 '소망'이라는 이 부분이 참으로 중요한데 보통 '소망'이라는 것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쉽지만 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죄론'의 가장 깊고 가장 중요하며 가장 깊은 속에는 '소망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 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우리의 발전적 최고의 가치로 둔다면 여기에 삐뚤어 지거나 미달 되는 것은 전부가 죄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 가져 가지 못하고 지옥에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이 '소망' 때문에 늘 조심하며 두려워 하며 전부를 다하고도 주님 앞에는 부족합니다.
공회의 죄론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분류에서, '영, 마음, 몸'의 분류에서, 성경의 모든 종류의 죄와 관련 된 표현에서 성경 전체로 연구하고 깨달은 교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론과는 비교가 될 수 없도록 깊어 지고 넓어 지며 차원이 높아 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일 하나를 두고도 바쁘지 않으면 교회에 나오는 정도를 주일 성수로 생각하는 타 교단과 평생에 단 한 번의 주일 문제를 두고 흠을 두지 않으려고 목숨을 내 놓는 공회와는 죄에 대해 같은 차원일 수가 없습니다. 공회 기준에서 보면 타 교단의 주일은 주일이 아닙니다. 평일 밤 예배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공회의 주일은 순교의 대부분을 가져 오는 주일입니다. 공회의 죄론이 죄의 안을 들여다 보기 시작할 때는 4 가지로 설명하는데 '말씀을 어긴 죄' '내 뜻대로 산 불의의 죄'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 진 죄' '소망을 포기한 절망의 죄'라고 4 가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4. 오웬 목사님의 '반감 - 적대감'은
공회 죄론의 마지막 설명한 4 가지 단계의 3 단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중생 되는 순간 우리의 영은 영원 불변적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도 있고, 심신이 제 멋대로 살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순간에는 주일도 지키고 또 주일 예배 시간에 자기 자율을 꺾고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산 제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왜 이렇게 어렵게 믿어야 하는가? 라는 거부감이나 반감이 만일 자기 바탕에 깔려 있다면 이 것은 하나님과 거리 문제, 하나님과 연결 문제, 하나님의 친밀 문제, 하나님과 화친 평화 하나 되는 상황에 약화를 말하는 것이니 비록 겉으로 욕을 하지 않았다 해도 겉으로는 불만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해도 그 깊은 바탕에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좀 불편하고 억울하며 반감이 깔려 있다면 이 것이 바로 오웬 목사님이 보신 죄의 본질 중 하나이니 공회로서는 3번째로 이 문제를 보고 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의 죄론은 죄의 깊이를 두고 들어 갈 때는 4 가지 단계가 있는데 그 중에 3번째를 어떤 때는 연결로 어떤 때는 화친으로 표시합니다. 화친이라는 표시가 될 때는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그 연결력의 차이는 많으니 그 면을 표시한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 반대로 말하면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 이 것은 회개의 대상입니다. 요나가 회개했으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는 해결했습니다. 다시 니느웨까지 와서 회개를 목숨 걸고 외쳤으니 제 멋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가 그렇게 외치는 것은 자기 의무기 때문에 외치지만 그 외친 후에도 니느웨는 회개를 거부하다가 소돔 꼴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부분이 하나님과 감정적으로 연결 되어 하나 되지 않고 끊어 져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돌이 켜 회개를 하자 요나의 감정은 그 성이 망해서 끝장 나는 불바다를 보고 싶어 언덕에 올라 가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이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니느웨에 대한 역사를 두고 반감 적대감을 드러 내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여기까지인가? 죄는 그 이상으로 뿌리가 뻗어 있습니다.
- 백영희와 오웬의 죄론의 비교
아마 오웬 목사님의 책을 제대로 잘 읽어 보시면 공회의 4 가지 면이 여기저기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 목사님처럼 이런 식으로 체계화가 되어 있지는 않을 듯합니다. 있으면 너무 반가운 일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시대를 넘어 서면서 동지를 만난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체계로 잡힌 경우는 아직까지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 김현봉 목사님은 알면 되었지 그렇게 체계화가 필요한가, 백영희는 지식주의라, 그런 말씀으로 이 노선을 비판한 적이 있었으나 저희의 반론은 '지식 없는 행위가 있는가? 그 것이 과연 가능한가?' 성경이 깨닫게 해 주시는 데까지 간 것도 잘못인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행함이 없는 지식, 남을 정죄하기 위한 연구, 학자나 연구물을 이 땅 위에 남기고 싶어 공연히 이리저리 글을 적는 것은 공회는 아주 극단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한 말씀을 깨닫고 그대로 실행하고 그 후에 다시 깨닫게 되는 단계로 나아 가는 것은 하나님이 끌어 주시는 것이니 이를 거부하면 당연히 죄가 된다는 입장입니다.
비교를 한다면 오웬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개인적인 경건은 절정에 있다 해도 그 전체적인 수준은 칼빈이라는 이전 시대 안에 계신 분입니다. 이 노선은 이후 시대입니다. 이 말은, 구약의 최고 선지가 세례요한이나 신약 교회와 비교하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세례요한의 신앙이 어리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주신 시대적 사명이 오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자체 경건과 신앙 완성도는 우리가 쳐다 보기도 어렵지만 오늘 말세 마지막 이 노선에게 주신 객관적 상황은 기독교 역사 최종 순간의 최고봉입니다. 우리가 과거 성도와 같이 노력한다면 우리의 신앙 차원은 하늘을 찌를 것이나 아쉽게도 우리는 게으르며 강퍅합니다.
>> 진리를 알고자 하는이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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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웬목사님은 죄의본질을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것에 대한 반감 -적대감'으로
: 이야기하셨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죄의본질을 '자기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있는데
: '자기중심과 하나님에 대한 반감-적대감'을 동일하게 봐도 될까요? 아니면 둘중에
: 한가지가 더 포괄적개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