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답변하라시지만, 내용이 답변자를 붙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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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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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2 00:00
1.백목사님의 성경은
수백독 정도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성경을 다 외운 정도입니다.
백목사님에게 이 의미는
전도를 해도, 길을 가도, 식사를 해도,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해도
그의 속에서는 늘 성경이 암송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만날 때
미리 그와 만남에 해당되는 성구를 찾아 새겼고
그와 대화하면서 겉으로는 그 사람과 대화하나 속으로는 그 대화의 주제를
끊임없이 성경으로 찾아 인용하며 살피며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수백 독을 한 분들은 교회사에 더러 있지만
백목사님의 성경 읽기는, 드러난 교회사에서는 그 비할 예가 없습니다.
설교록을 통해서 평소 그분을 개인으로 뵐 때
그분은 비록 성구를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으나
성경을 아는 분들은 그분은 성경으로 발언을 시작해서 성경으로 맺었으며
그분의 모든 발언을 굳이 성구로 표시하자면, 답변자 수준에서도 거의 다 표시를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2.변판원선생님
막 결혼해서 딴살림을 준비하던 1950년 12월 동지날 변선생님은 순교하셨고
부인은 순교지 교회에서 30세 안팎까지 혼자 사시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아는 분의 소개로 대구로 재혼을 했습니다.
6.25가 끝나고 거창 지방의 이 노선 신앙 초기인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6.25 전시의 승리까지로 6.25 이전까지 준비된 신앙은 백점 만점으로 성공했으나
종전후 새롭게 펼쳐지는 또 다른 차원의 시기가 이 노선에는 열리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은 부산으로 1952년 이동하게 되면서
장차 공회의 중심을 거창지방이 아닌 부산에 두고 한국교계의 보수 중심에 서게 되고
또한 거창의 덕유산 골 곳곳에서 백목사님의 지도를 받던 시골무리들이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외부적으로는
이 노선 초기 중심인 거창지방에는 이 노선의 급격한 약화현상이 일어나고
그대신 부산, 대구, 서울 등지에는 이 노선에서 신사참배와 6.25를 겪고 승리한
이 노선의 초기 신앙인들이 흩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곳에 모여 타오르듯 큰불더미가 6.25 이후 급격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 신앙들을 외부적으로 별로 관찰할 수 없는 듯 했는데
1960년 안팎으로 전국 곳곳에 백영희신앙노선의 교회를 개척하며
전국의 공회 교회가 시작되는 초기교인들로 다시 그 모습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공회 노선으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기회를 가지고
이 노선의 중심에서 오늘까지 이어지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일반 노선에 편입되어 일반 교회에서 열심히 믿는 사람으로 남게 되고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 자체를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변판원선생님의 부인은 제일 안타까운 세번째 경우에 해당됩니다.
6.25 이후 백목사님도 부산으로 갔고
순교지 교회의 중심 신앙인들도 읍내로 또 타지역으로 흩어져 전국의 공회 교회를 만들었으나
따로 떠날 수 없어 그 곳에 계속 남아 있던 부인은
젊은 나이를 혼자 신앙으로만 살아가야 할 자신 내면의 신앙은 약했고
그분을 계속 신앙으로 지속하게 할 수 있는 지도자와 신앙선배들이 없어지자
세상으로 결혼을 하고 나가게 됩니다.
1994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그분과 순교지에서부터 친형제 이상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다 공회 내 다른 지역 교회를 충성하고 있는 분을 모시고 환갑을 막 넘긴 부인을 만나뵈러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답변자는 그분을 처음 뵙지만 어른들 때에 불신 친부모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낸 신앙의 사람들로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변판원선생님과의 결혼 이전 어릴 때부터 결혼 때의 일과 그후 노년에 이르는 모든 이야기를 밤깊은 줄 모르고 듣고 기록하고 동촌비행장 주변 어느 대구 외곽 시골스런 가정을 나오던 기억이 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불신자에게 결혼을 해서 가면서도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약속은 받고 재혼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됩니다. 그 이상이 없을 만큼 어렵게 살았던 30여년 대신 재혼 후에는 고향 시골 기준으로 본다면 행복하게 먹고 살며 살아 가는 정도였고, 방문 당시 답변자 기준에서는 이 정도로 살려고 재혼을 하셔야 할 정도로 그렇게 가난했었느냐고 그분의 그 옛날 가난을 연상하게 했지 재혼 후 살고 있는 형편이 그리 좋아보인 정도는 아닙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앞서 간 순교자 변판원선생님과 신앙으로 결혼했던 그 분은 그 분도 결혼 이전 친정에서 어린 나이에 죽을 각오를 믿었던 유명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전성수목사님이 집안이었고 변선생님의 순교를 그렇게 사모하는 분이었으므로 1970년대 대구집회를 가면 집회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 집으로 찾아가서 꼭 신앙으로 살도록 권하였으며 그 결실로 나이들어 주변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 옛날 그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두 분 사이에서
답변자는 백목사님 전기 자료 수집 차원으로 갔기 때문에 업무적 기록에 바빴지만
그분들의 6.25와 변판원선생님 그리고 백목사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던 그 옛날의 생생한 추억담은 지금도 그때 그 자리의 대화만 생각해도 답변자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양쪽 눈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로 숨죽여 신앙생활을 해야 할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질문자께서 답변자의 답변 내용이 한번 발동이 걸리면 지겹게 계속되므로 간단하게 보고하라 하셨지만 변판원선생님의 순교와 그 부인의 이후 삶과 그들의 신앙 절곡 성패 등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목사님의 신앙초기 엄청난 감동의 이야기들을 답변하면서 어떻게 이 정도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설교로 한 교인의 신앙을 겨우 겨우 길러가는 모습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한 성자의 감동스런 생활 생애 모습 한번을 잠깐 본 충격으로
평생 불가마 속에서 사는 듯한 에너지를 충전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홈을 운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신앙노선과 관련하여 소개하고 전하고 싶은 이런 내용들이 한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인과 새삶을 살며 평생을 함께 하고 또 두 분 사이에 태어난 자녀분들을 생각해서, 자세한 주소나 인적사항 관련 내용들을 이곳에 적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백목사님 생애를 적게 된다면 그곳에 나타날 이름들은 아마 거의 가명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