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자료를 참고하고 각자 판단하셨으면
| 설명 |
|---|
yilee
0
9
2005.08.07 00:00
1990년 11월 시무투표에서 이재순목사님 불신임이 결정되고
1990년 12월 이후 그분 초빙을 위해 헌신했던 김권사님 구역 출신 김목사님들이 중심되어 설교록의 이 논리를 이론으로 제공하며 치열하게 서부교회 교권투쟁에 사용했던 세월들이 기억나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갖지 않아서 여호와의증인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그들의 이단 이론입니다.
설교록에 누구 이름으로 칭찬한 대목이 없어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설교록에서 자주 등장하며 백목사님이 챙긴 사람들은 거의 다 나간 사람들입니다.
일단 백목사님이 서부교회 후임으로 결정한 분은 서영준목사님 뿐입니다.
가능성을 두고 칭찬하거나 격려한 사람은 조준영목사님 김진태목사님 등
그 수가 많습니다.
일단 가능성을 두고 나온 설교 내용이므로
가능성을 두고 언급 된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객관적으로 판단할 만한 기준이 있습니다.
윗글 내용 중에서
'신학대원원'보다 '신학대학', '신학대학'보다 '신학교', '신학교'보다 '양성원'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칭찬받고 격려받은 그 시점에
그분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이것은 설교록 내용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살펴보면 단번에 나오는 객관 자료가 있습니다.
그분은
1976년 일시 귀국했고
1982년 박사학위를 받고 완전 귀국했습니다.
1989년에 윗글 소개한 설교 내용에서
귀국 때 신앙은 깡통이라 했으니 그때가 1982년이고
그 이후 신앙이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1989년 당시를 두고 평가하기를
계속 저렇게 나가면 백목사님 사후 서부교회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1982년 미국 유학 직후, 허무했던 신앙이
1989년 백목사님 장례 직전까지 잘 자라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9년 당시 신앙으로만 평가한다면
비록 자라가는 신앙이지만 그 상태로는 아직 부족하고
그대신 자라가는 신앙이 계속 자라가면 서부교회 후임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1989년 이후 그분의 신앙이 자라갔는지 반대로 내려갔는지 아니면 답보였는지
살펴보면 아주 간단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백목사님 사후
그분이 서부교회 후임이 되었고
그 후임 상태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분은
'신학대학원' 대신에 '신학대학'급으로 출강이나 활동을 낮추고
'신학대학' 급에서 정식 학교도 아닌 '신학교'로 더 낮추고
'신학교'라는 교계의 흔해빠진 구멍가게조차 출강하지 않고
최근에는 양성원에만 전념하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설교록에서 제시했던 백목사님의 지도 방향을
백목사님 사후에 그분은 충실히 기억하고 그대로 이행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외부 교단의 수많은 유혹을 다 뿌리치고
신학대학원의 해외 박사 출신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명예와 성취감을
초개같이 버리고
서부교회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이 노선의 외길을 걷기 위해
외부 교단과 교류했던 과거를 회개했을 것이고
공회 목회자의 기본인 단순한 친분 연락도 끊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하는데도
이 홈과 이 노선의 거의 모든 보수노선 사람들은
그분의 과거 행적에 선입견을 가지고 거짓으로 그를 거스려 비판했을 것인데
김권사님 구역 출신 목사님들, 그들과 멍에를 함께 하는 부공2 목회자들은
그분의 과거가 그렇게 빈깡통이었음도 알았지만
그분이 회개하고 돌이킨 것도 너무 잘 파악하는 영안 밝은 종들이어서
그분을 오늘 우리 시대 선지자로 모시고 그분 지도 일하에 생명바치고
지금 부공2가 목사님 생전의 총공회를 대체할 단체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분이 1982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나올 때는
무허가 무인가 우리 양성원보다, 교육청 허가를 받은 외부 신학교를 선호하고
외부 교계 신학교보다는, 학위 수여가 가능한 '신학대학교'를
그보다는 국내 신학자들이 전부 목타게 줄을 서고 있는 '신학대학원'으로 점점 타락을 하고 나갔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대충 교계 소식을 들어 이곳에서 파악은 하고 있지만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니 그 분을 아끼는 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