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참고1) 교회
교역자 | 김창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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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 | 목사님 | ||||
소속공회 | 개별공회 | ||||
전화번호 | 055-944-3172 | ||||
교회주소 | 50133 경남 거창군 거창읍 아림로2길 44 | ||||
지방 | 08거창지방 | ||||
세부 | 창동교회사 교역자 및 장로 권사님 |
* 2차 첨부 - 11.6.10.
* 각주는 첨부 자료 참고하실 것
* 1976년 이전까지 초기사만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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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교회사 요약
1. 개요
① 개척 배경
(1937년 )
백영희 조사님의 목회지였던 고제 봉산교회 시절부터 그 신앙 지도를 받아 오던 교인들이 6.25 전쟁 후 거창읍으로 이주하면서 거창읍교회 출석하며, 철공업으로 경제 기반을 갖추자 백 조사님의 지도로 양혜원과 양혜원교회를 설립하며 백 조사님의 신앙 지도를 받아 오던 중
(1959년)
4월부터 소속 교단인 고려파가 백 조사님을 교권에 방해가 된다고 불법으로 치리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거창읍교회는 상기 이주 교인인 이운길 집사를 장로로 예정한 상태에서 백 조사님의 신앙노선을 따를 것으로 보고 신앙의 변경과 함께 양혜원의 소유권을 고려파 교단으로 옮기게 하자 이를 거부했고, 거창읍교회 당회는 3차례 소환을 통해 59.9.20.에 이 집사를 제명 출교 조처하므로 백영희 신앙노선을 원하는 교인들은 더 이상 거창읍교회를 내부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창동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교회 출발.
② 마루 예배 1개 월
비록 1 명에 대한 제명과 출교 조처였으나 실은 거창읍교회를 출석하는 창동교회 교인 전부에 대한 조처였으므로, 창동교회 교인들은 백 조사님의 신앙 노선을 따르기 위해 중앙리 278번지 이운길 가옥의 마루에서 이순길 가정, 변종희 청년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한 달이 지나면서 국농소 강재희 집사님을 임시 주 설교자로 모시고 김상권 집사님 가정도 합류했으며 이후 초기 교인들 대부분은 봉산교회거나 삼봉산집회에서 은혜 받은 신앙이라는 점에서 동일
③ 천막 예배당 1 년
(교인 자체 예배)
이 집사의 마당에 천막으로 임시 예배당을 마련하고 ‘중앙교회’로 첫 이름을 가졌고 설교는 강재희 집사님이 주로 하면서 이운길 이순길 집사도 맡았고 이후에는 서부교회에서 신학을 했던 여 집사님들이 순회.
(백영희 조사님의 집회)
천막 교회가 출발한 직후 백 조사님을 모신 집회가 개최 되자 백 조사님께 은혜 받은 지방의 교인들이 많아 발 딛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는데, 위기감을 느낀 거창읍교회는 경찰 군청 소방서에 불법 건물로 고발하여 천막 예배당을 철거 당할 직전에 갔고, 또 양혜원 탈취를 위해 군청 경찰 검찰 세무서까지 고발장을 제출하여 조사와 감사가 연이어지자 이 집사는 무식하여 포기 상태에 이르렀으나 당시 교인이 아닌 이상길 씨가 모두 방어하여 지킴. 거창읍교회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지만 거창읍교회가 퍼뜨리는 백 조사님에 대한 악성 소문과 여러 소동으로 인해 출석 교인은 핵심 몇 가정으로만 유지 됨.
(한종희 조사님)
1959년 12월에는 한종희 조사님이 서부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첫 목회자로 부임했고, 천막 교회는 1 년 정도 계속 되었으며 이 천막 예배당에서 김현봉 목사님까지 강사로 집회를 인도했고, 교인들은 소망 가운데 신앙 자유를 가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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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모, 1950년생 8세 때인 1957년 초교1년 8세 입학, 1962년 6월의 화폐개혁 직전 수학여행 취소로 기억. 중앙교회가 천막 치고 있을 때 김형만 선생님이 반사한 것은 확실하고 주교 부장은 김영철 부장선생님으로 기억. 4학년 때 교회를 다녔고 동생이 교회 갈 때 팔을 빠진 기억은 함께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반대하는데 가다가 그렇게 되었고 아버지 때문에 다니지 못했고,
다시 다닌 것은 1965년 12월 중3 졸업 성탄절에 창동교회 출석하고 지금까지 계속. 당시 백영익 목사님이 계셨고 아버지 때문에 학교와 교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백영익 목사님께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느냐고 질문하자 둘 다 택해라 하심. 그 이듬해 가시고 66년 서울 성은교회로 가시고 후임으로 신용인 목사님 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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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첫 예배당
(흙벽돌 건축)
첫 목회자인 한 조사님의 사택은 이 집사의 뒤채를 사용했고 1960년에 들어서면서 천막 예배당을 대신하여 흙벽돌로 15여 평의 예배당을 건축. 이 집사 댁의 대문 쪽 마당에 양혜원의 원생들이 흙벽돌을 찍어 세웠는데 이는 1955년에 양혜원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집사가 본가를 지을 자재로 양혜원 예배당을 건립한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한 것. 읍내 한복판에서 원생들이 예배당을 건축했으므로 어려움과 조롱도 많았으나 아담한 예배당이 마련 됨. 개척 1 년을 지내며 이 시기 교인은 장년과 아동을 합하여 30여 명.
(송용조 조사님)
2대 목회자인 송용조 조사님은 벽돌 예배당이 완공 된 다음에 부임했고 부임 중인 1961년 11월 13일 월요일 저녁부터 백 조사님을 모시고 다시 사경회를 가졌고, 장차 공회의 중심인 거창 지방에서 중심 역할을 맡게 될 교회에 대한 백 조사님의 관심도 특별.
(이재순 조사님)
1962년 3월 부임한 이재순 조사님은 양혜원 운영에 행정적 어려움을 겪는 이 집사를 백 목사님 지도를 받아 가며 총무직을 맡아 도우며, 한 편으로는 서울의 박윤선 목사님의 개혁신학교와 남산의 대한신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다 1965년 3월에 청량리교회로 부임하고 청량리를 담임하던 신도범 조사님이 부임.
⑤ 현 위치로 이전
(신도범 조사님)
1965년 3월에 부임한 신 조사님은 불과 5개 월을 재임했으나 이 기간에 교회는 30 명 교인이 70 명을 상회하며 예배 시간에 목회자 강단 위에까지 사람이 앉아야 하도록 크게 부흥되어 예배당을 새로 마련해야 할 상황이 됨. 신 조사님 부임 전에 집 주인이었던 이 집사가 개척 당시 양혜원 분쟁에서 받은 상처로 신앙을 중단하고 예배당을 비워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되어 예배당 이전은 이미 교회의 과제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예배당 이전이 추진.
(단독 예배당 마련)
교회 부흥과 은혜 분위기에 확신을 가진 신 조사님은 토지를 구입하고 전면 건축을 기도하는 중 5만 원을 예상했고 주력 교인들은 2만 원에서 3만 원 사이로 연보 결과를 예측하는 정도였는데, 연보는 15만 7천 원이 나왔고 이 돈으로 이운길 집사 소유와 그 일대 중앙리 58번지 현 예배당 부지를 구입하고, 80 평 규모의 당시로서는 큰 예배당을 목표로 기초를 놓고 우선 40 평을 건축함. 연보한 가정에 복을 받는 모습이 연이어졌고 예배당을 비우라고 했던 이 집사도 입장을 바꾸어 예배당 이전을 막고 교회도 다시 출석한 상태였으나 이미 장소가 좁아서 불가피하여 양혜원 토지를 매입하는 일까지 적극 협조함.
⑥ 거창과 공회의 중심 교회
(백영익 목사님)
4대 목회자 신 조사님에 이어, 서울 사직동교회의 백영익 목사님이 5대 목회자로 부임한 지 6개 월만에 이임하여 창동교회는 좋은 목회자들을 모시고도 단기간에 그치는 아쉬움을 크게 느끼던 중
(신용인 조사님)
제 6대 신용인 조사님이 1966년에 부임. 이미 창동교회는 거창지역 공회 교회의 중심이 되면서 전국 공회의 도평집회를 맡아 전국의 공회 중심 교회가 되고 있었음. 거창은 공회의 발생지며 전국 교회의 중심 교인을 배출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삼봉산집회가 전국 공회의 도평 8월집회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에서 창동교회가 대내외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 컸음. 자연스럽게 목회자와 교인들은 보이는 수고와 함께 숨은 노력도 많아지므로 힘에 겨운 희생과 함께 신앙에 큰 발전을 갖게 됨.
(이진헌 목사님)
1971년 이진헌 목사님의 부임으로 창동교회는 장년 130 명과 주교 200여 명으로 성장
(전성수 조사님)
1972년 부임한 전성수 목사님의 시기에는 장년 200 명을 넘기며 주교도 320 명으로 성장이 계속 되고 있었고 향후 예배당 확장을 위해 대지를 294 평까지 확보함.
2. 통계
① 목회자
개척 59년, 3 가정
한종희 조사님 59.12. 60년, 유아 30 명
송용조 목사님 (60.)
이재순 목사님 62.10. 64년, 30 명
신도범 목사님 65.3. 65년, 70 명, 건축 40 평, 대지 200 평
백영익 목사님 65.11.21.
신용인 목사님 66. 70년, 장년 80 명, 증축 40 평, 대지 230 평
이진헌 목사님 71.(10) 72년, 장년 130 명, 아동 200 명
전성수 목사님 72.(4) 75년, 장년 200 명, 아동 320 명, 대지 294 평
송종섭 조사님 79. 11. 02
전재수 목사님 80. 07. 17 부임
전재수 목사님 83. 06. 12 이동
이재순 목사님 83. 07. 14
이재순 목사님 85. 03. 12 이동
배종일 목사님 85. 03. 12 부임
배종일 목사님 94. 01. 18 이동
문석표 목사님 94. 01. 18 부임
임상렬 목사님
안재남 조사님 84. 07. 10
안재남 조사님 85. 03. 26 이동
신용수 장로님 96. 01. 16 장립
박경순 전도사님 인허 //
김형순, 이옥순 서경숙 권사님 //
오숙자 권사님 97. 11. 02
이정애 권사님 99. 01. 03
신영철 장로님 99. 01. 08
박병은 장로님 01. 03. 05
배분순 권사님 01. 03. 11
장윤석 조사님 01. 12. 13 부임
② 공회 기록으로 본 창동교회
59년, 3 가정 마루
60년, 30 명(장년, 아동) 천막
64년, 30 명(장년) 흙벽 15 평, 무상 임대
65년, 70 명(장년) 건축 40 평, 대지 200 평
70년, 80 명(장년) 증축 40 평, 대지 230 평
72년, 130 명(장년) 아동 200,
75년, 200 명(장년) 아동 320, 대지 294 평
85년, 411명(장년) 중간 131,
주교 492, 대지 520평, 건평 160평
연보 수입 1,724만원(십일조 1186, 일반 536)
86년, 397명(장년, 4월)
88년, 주전 309, 주후 189, 삼일 198, 새벽 44 (장년)
11월 주전 102, (중간)
주전 635, 주후 41, 삼일 25, 새벽 12 (주교)
③ 창동교회 출신 목회자
김영웅 목사님 (서울 난곡동교회) 이도영 목사님 (서울 하계동교회)
김형렬 목사님 (부산 서진교회) 하영식 목사님 (거창 무월교회)
김수복 목사님 (부산 생명수교회) 이치영 목사님 (부산 동천교회)
이신영 목사님 (부산 모덕교회) 이영인 목사 (여수 신풍교회)
장원정 사모님 (부산 학장, 류정현 목사님)
김길제 조사님 (부산 남정교회, 교육) 장재영 조사님 (미국 세인트루이스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