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창 교회
설립 | 1977.02.15 | 개척자 | 이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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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자 | 김철수 | ||||
직분 | 목사님 | ||||
소속공회 | 고신 | ||||
전화번호 | 055-256-8212 | ||||
교회주소 | 51357 경남 마산시 합성2동 263-22 | ||||
지방 | 14참고교회 | ||||
세부 | 산창교회 |
▷ 1980년 마산 산창교회
(연혁)
- 1977년
2.14. 양덕1동 17번지 가정집 2층에서 전세 150만 원에 이만기 목사님 외 7 명 첫 예배
8. 양덕1동 8-17번지 상가건물 3층 33평으로 이전, 전세 250만 원
- 1980년
10.26. 이만기 목사님 신임투표(이병준 조사님 실시)가 찬성4, 반대17, 지지율 19%
11.10. 이만기 목사님은 대구 원동교회로 이동
11.11. 김철수 목사님이 부임
11.16. 부임 첫 주일 장년 25 명, 유년 58 명
- 1981년
4.7. 양덕1동 52-19번지 43평 부지 1천 만 원에 매입
6.28. 신축 예배당 첫 주일 장년 33명, 중간반 8 명, 유년 132 명
7.4. 신축 예배당 1층으로 사택 이사
8.9. 장년 54 명, 유년 188 명
- 1982년
2.14. 장년 주전 94 명, 오후 62 명
3.2. 이형 장로님 장립
3.7. 장년 주전 103 명, 오후 52 명, 유전 주전 203 명, 오후 25 명
11.28. 교역자 시무투표 찬성 91 명, 반대 1 명, 98% 지지
- 1983년
6.29. 합성동 263-22번지 138평, 48,883,000원
12.6. 주민 반대 때문에 공사금지 가처분 신청을 통해 마산지법에 승소
-1984년
4.22. 부활주일 신축예배당 첫 예배, 장년 247 명, 유년 360 명
6.18. 헌당예배, 건축비 71,897,877원
6.24. 장년반 주전 185 명, 오후 105 명, 유년 주전 474 명, 오후 162 명
12.13. 옥상 조립식 사택 이사. 사택 건축 5,018,750원
부채 1억 초과 - 81년 이자 346만원, 82년 390만, 83년 579만, 84년 1450만
12월 시온 찬양대 설립
-1985년
2.17. 설립 8주년 기념 전도주일 장년 320 명, 중간반 62 명, 유년 450 명
3.5. 어린이 선교원 설립
-1986년
6.22. 유년 주교 1862 명 출석
-1987년
1. 진해 주일학교 분교를 충무동교회로, 유년 80, 중간반 15, 집사 권찰 3 명 전출
3. 성서대학 설립 개강
5. 임마누엘 찬양대, 호산나 찬양대 설립
11. 추정희 전도사 사역(88.6. 이임)
■ 경제
가는 교회마다 건축했고 건축의 문제는 빚인데 백 목사님이 학생 때부터 인정하고 신뢰하여 직접 빌려 주심. 이자를 갚을 때는 기간을 날짜 시간까지 맞춰 이자를 계산하고 봉투에 적어 드림.
■ 공회 탈퇴
▷ 1988년
2.14. 교단 소속 투표, 총공회 찬성 26 명, 탈퇴 김철수 목사님 지지 218 명, 지지 90%
3.19. 크리스챤신문 제1316호에 240 명 교우의 총공회 탈퇴 성명서 발표
▷ 고신 소속
-1989년
6.1. 김철수 목사님 위임식, 박우수 우종재 장로님 장립
-1990년
2. 합성동 263-22번지 2층 본당 증축공사
8.10. 263-46번지 46평 주택 1억원 매입
11.18. 추수감사절에 입당예배
건축비 96,766,496원(사채7900만, 은행5275만, 이자 182만원/월)
12.19. 산창 성서대학 제1회 크로스웨이 23명 졸업
-1991년
6.30. 유년부 총동원 주일 1,085 명
-1993.11.14. 전도왕 안강자 집사님 (주안장로교회) 전도 간증
-1994.9.26. 산창교회에서 고려개혁 44회 총회 개최, 총회장 최기호 부총회장 김철수
-1995.4.5. 양덕1동 94-11 서광빌라 401호, 42평 8900만원, 9월 교단 총회장 피선
-1996.7.8. 합성2동 263-28, 47평 주차장 부지 매입, 1억 8400만원
-1997.2.23. 제1회 열린음악회, 마산 종합운동장 올림픽 생활관에서 개최
-1998.2.12. 김영욱 목사님 안수
남부노회, 송용조 황주태 김철수 이영덕, 김석환, 이종길, 변재천, 김경렬 제2회 열린음악회, 40평 주차장 1억3560만원 매입
고려개혁과 고신개혁의 통합총회 산창교회에서 회집
-1999.4.11. 제3회 열린음악회, 한샘교회 재건교회 내서교회 구세군교회 연합
-1999.9.14. 고려개혁 48회 총회에서 김철수 목사님 총회장 피선
-2000.6.26.-7.5 중국선교여행 17 명
현대콘도 회원권 산창교회 명의로 구입
-2001.1.29. 제26회 마산시 기독교연합회총회 회장으로 피선
3.18. 매주 FM 106.9Mhz 기독교 경남방송 오후 8시부터 30분 방송설교
경남방송 설립 공동회장 및 연보 1천만원
-2002.1.1. 김성도 강도사 윤선제 전도사 사역
필리핀 선교 여행 10 명
본 강단을 계단식으로 개조
-2010. 70 세 은퇴 (몇 년 전부터 파킨슨 병환)
▷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헌법전문
1990년 10월 고신측 제21회 서울노회가 불법으로 이혼한 목사를 옹호하고 이에 항의하는 목사들을 부당하게 처리하자 이 문제를 고신 제41, 42회 총회에 상소하고 시정을 촉구하였으나 총회가 권징조례를 전면 무시하고 총회재판부로 보내야 할 소송사건을 총회 행정부로 보내는 등 정치성을 앞세워 묵살해 버림에 따라 우리는 고신총회와 결별하고 1992년 12월 10일 고신 제42회 총회를 계승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총회를 조직하였다.
우리 총회의 기본정신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고려파 교단을 설립한 신앙 선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진리를 파수하고 신앙의 전통과 생활의 순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총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제42회 총회가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헌법개정위원을 선정하여 그 작업을 일임하였다...
1996년 10월
헌법개정위원회
위원장: 최기호
서기: 유관태
위원: 송용조 김철수 김석환 이상하 안병삼 김상철 이창배
■ 역대 제직 권찰
-1978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음영희 하덕자
-1979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이성복, 채종석, 음영희, 하덕자, 임용자, 박은혜, 차경림
-1980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이성복, 채종석, 음영희, 하덕자, 임용자, 차경림, 신영애, 김영숙, 박은례
-1981년
목사: 김철수
집사: 정재우 이성복, 김영숙, 하덕자, 임용자, 차경림, 박은례
-1982년
목사: 김철수
장로: 이형
집사:
■ 사경회
1981.1.12.-16. 백태영(잠실동교회) 밤 57, 새벽 27
1982.1.25.-29. 김철수, 새벽 45, 오전 75, 밤 76 명
1983.1.24.28. 이재순(창동교회) 새벽 60, 오전 90, 밤 110 명
1984.6.18.-23. 김응도(여산교회) 새벽 70, 오전 100, 밤 150 명
1985.1.14.-18. 이진헌(청량리교회) 새벽 80, 오전 100, 밤 170 명
1986.1.13.-18. 송용조(사직동교회) 새벽 80, 오전 110, 밤 180 명
1986.7.28.-30. 유년 중등 수련회, 밀양팔복산, 유년 66 명, 중간반 32 명, 교사 등 23 명
1987.2.23.-27. 김철수(산창교회) 새벽 110, 오전 160, 밤 230 명
1988.8.8.-11. 3박4일 전교인 매포 연합수련회 - 산창교인 남 37, 여 77, 합 114 명
낮: 송용조, 밤: 김철수 정의진, 새벽: 송용석 방영남
1990.1.3.-5. 청지기수련회, 정찬용 목사님(서울 브니엘교회)
1990.8.15.-16. 전교인 하기수련회, 창녕 온누리캠프장, 김철수 목사님 강사, 200 명
1990.12.31.-91.1.2. 2박3일 제직 수련회, 경기도 청평믿음기도원, 전가화 목사님
1991.1.10.-11. 제직세미나, 김철수 목사님 강사
1991.1.28.-2.2. 중고등부성경다독회, 배승철 목사님(산청 특리교회)
1991.5.2.-3. 부흥사경회, 김형천 목사님(대구 온천교회), 밤 집회만 2 일
1991.7.29.-8.3. 3박4일, 경기도 이천 대덕산 수련관, 산청교인 73 명
1992.1.1.-3. 기도수련회, 감림산 기도원
1992.1.6.-9. 3박4일 제직수련회, 방영남 (충주용산교회) 홍근성 목사님(마산 한샘교회)
1992.1.13.-17. 성경통독사경회, 낮: 김철수 목사님 37, 밤 김영욱 권찰님 38 명, 구약 1회
1992.1.24.-28. 중고등부 성경 사경회
1992.1.27.-29. 유년부 동기학교
1992.7.27.-29. 하기연합수련회, 대덕산기도원, 유년 13 명, 중고등부 43 명
199.2.7.29.-8.1. 하기연합수련회, 대덕산기도원, 장년 30 명
1992.8.17.-20. 성경통독사경회, 교육부 주관 31 명
1993.1.4.-8. 성경통독사경회, 교육부 주관 34 명
1993.1.25-27. 유년부동기학교
1993.8.2.-4. 중고등부하기수련회, 남해 창선 진동분교, 중등46, 고등17, 장년31, 유년6
1993.11.14. 안강자 집사님 전도간증 집회
1994.1.17.-18. 제직수련회
1994.1.24.-28. 중고등부 성경통독회
1994.1.27.-28. 유년부동기학교
1994.4.17. 주일오후 해병대 부사령관 소장 김기홍장로님 간증집회
1994.4.17. 주일오후 김만철 집사님 간증집회, 탈북 수기
1994.8.1.-4. 전교인 하기수련회, 거창 위천초등학교,
장년 73, 고등 23, 중등 36, 유년 59, 유치 14, 영아 3, 외부 8, 총 212명1995.7.31.-8.3. 전교인하기수련회, 위천초등학교,
산창(유년89, 중고60, 장년96) 왕성,온누리 30명 성지,상기 10명, 총286명
1996.1.22.-23. 중고등부 동기수련회, 손양원기념관, 남30, 여46, 교사18, 유년10, 총118명
1998.8.3.-5. 전교인하기수련회, 의령 대유수련관, 유년 71, 중고 60, 장년 110, 계 241명
2000.7.31.-8.2. 전교인하기수련회, 의령대유, 유년50, 중등31, 고등21, 장년 135, 합234명
2001.7.30.-8.1. 전교인하기, 의령청소년수련관, 유치22,유년77,중고46,장년102, 총247명
2002.8.5.-7.전교인하기수련회, 거창월성, 유치17,유년72,중고32,장년123, 계244명
■ 출석과 연보 통계
연도 장년주전 주후 삼일 오일 새벽 유치 유년 중고 연보
80년 27 18 16 4 81
81년 42 25 21 5 141 9 2000만
82년 90 53 48 11 207 25 2500만
83년 122 75 50 12 248 42 4000만
84년 161 98 66 21 337 49 3500만
85년 216 127 103 27 395 62 3000만
86년 217 143 122 35 618 112 6000만
87년 245 149 132 31 425 141 6500만
88년 203 128 111 29 275 136 7000만
89년 208 118 103 25 298 124 9500만
90년 199 130 100 28 284 105 1억
91년 206 136 111 25 275 97 1억2천
92년 228 150 110 26 199 102 1억25백
93년 231 158 116 55 32 30 128 94 1억6천
94년 236 163 110 52 33 27 130 98 1억7천
95년 249 175 119 56 31 27 129 108 2억2천
96년 290 205 128 61 31 36 133 108 3억
97년 293 212 122 67 29 38 123 103 2억8천
98년 309 230 130 79 49 44 155 128 2억7천
99년 286 214 119 68 38 40 128 105 2억7천
00년 292 220 112 62 39 34 118 99 3억1천
01년 276 206 95 66 36 29 115 89 3억4천
02년 263 189 77 67 42 29 100 63 3억75백
■ 간증
‘최고의 복’ - 회고록, 박은혜 권사님
25년 전에 산창교회 처음 왔을 때는 아기를 둘 가진 아기 엄마였고 아무 철도 없는 스물 일곱 살 나이였습니다. 그 때는 이만기 목사님이 계셨고 제가 왔을 때 있던 성도들의 수는 약 20명 정도였습니다.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조그마한 공간으로 된 교회에 들어섰을 때 정말 이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교회는 교회겠지’ 하고 다녔으나 차츰차츰 교회를 들어 설 때면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여 주위를 살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아래층이 동경회관이라는 술집이었고 교회간판은 초라하고 술집 간판은 색깔이 진하여 눈에 확 들어오는데 누가 볼 때 술집에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경숙 집사는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 했으니 그것은 삼일예배 가는 것을 보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올라가는 계단이 술집계단으로 1층까지 장식이 되어 잇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배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수요일 밤 집회 때는 마이크 노래 소리, 쿵쿵거리는 악기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장소와 분위기에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약 2년이 지났을 즈음에 새로운 목사님을 맞이한답시고 철없는 성도들 고병우, 백숙이, 신선애와 함께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신 젊은 신사가 쓰윽 들어오시더니 이곳 저곳을 살피시더군요. 그리고 짐을 올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으시는 겁니다. 짐이 다 올려지고 나니 점심시간이 넘었지요. 철없는 저희들은 목사님의 식사대접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공회 분위기 속에 젖은 타성 때문인지 반가워 할 줄도 모르고 그저 맹종 외에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저희들에게 점심식사를 했느냐고 물으시길래 ‘안 먹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자장면을 시켜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배가 고파서 그냥 먹었지요.
참! 기가 찰 일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째 그리 철이 없었는지 심히 부끄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은 예배실 뒤쪽에 있는 부엌을 보시더니 ‘여기 싱크대 하나 사 놓고 이 위에 찬장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더니 당장에 밖에 나가서 시켜서 설치를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목사님은 많이 다르구나 단번에 처리가 이루어지는구나’ 놀랍게 느꼈습니다.
교회는 좁고 부엌은 연탄이다 보니 연탄가스 냄새가 늘 났습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과 식구들이 연탄 가스에 취해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 사정은 빚이 있었고 재정도 심히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첫 설교는 막혔던 하수구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았고 소망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후, 목사님이 오신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서울 잠실동교회 백태영 목사님을 강사로 집회를 했는데 울산 우인목 장로님이 아파트 한 채를 헌물 하셨는데 그 돈은 경우 400만원 정도였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이 부채를 구하여서 양덕 타워맨션 맞은 편 개울가에 아담한 흰 건물의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몇 명 안 되는 교인들도 얼마 안 되는 헌금이지만 자기 분수 이상으로 헌금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예정인 여학생이 30만원을 작정하였으며 그것은 1년 내내 갚아 나갈 계획이었는데 그 당시 처녀들의 월급은 10만원 미만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교회를 지으면서 무리하였고 대장염으로 죽을 고비도 당하였던 것 같고 많은 고생도 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목사님이 많이 늙으셨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다시피 하셨으니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집념과 사랑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후 1 - 2 년이 지났을까? 교인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가득 차고, 자리가 없어 옥상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중고등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좁아서 들어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좁으니 무덥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교회를 지어야 된다는 뜻을 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면서 많을 곳을 살피시다가 오늘의 교회 위치가 공터로 남은 것을 보고 선택하여 전부 빚으로 구입하였던 것입니다.
이 건물을 신축하기에는 2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문제는 주민들의 반대였습니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집 값이 떨어지고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착공 예배를 드릴 때 여기저기 큰 녹음기에 염불 테이프를 틀어 놓았고 물을 끼얹겠다고 물통과 다라이에 물과 바가지가 즐비했고 주민들은 성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치거나 떠밀고 예배를 방해하고 예배를 다 마친 후에는 난장판이 되었고 경찰이 동원되었습니다.
지하 굴착공사를 하기 위하여 포그레인이 들어오는 날에는 이웃사람들이 비상종을 치면서 모여 들었고, 내가 설던 집에 살던 아주머니 김창희씨는 포크레인 밑에 들어 눕고 기절을 해버립니다.
이웃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가며 교회를 짓느냐고 책임추궁 했고 목사님은 그 큰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키러 가고 우리는 거짓인줄 알지만 한편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웃 주민들과 마찰은 이루다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경찰관들도 수 차례 동원되었으나 그런 불법 행위를 지켜만 보고 있었고 누가 폭행하는가만 관망하였고 전혀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법이란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신문기사에도 몇 차례 기사화 되었습니다. 그들과 우리들은 집을 방문하거나 반상회와 동사무소, 경찰서, 시청, 신문사, 변호사, 법원 등 몰려 다니면서 투쟁했고 그때 우리들은 주민들을 볼 때마다 맹수를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마을 주민인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갈 대나 시장엘 가도 사람들만 몇 명이 모여 있으면 온통 이 동네 주민들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악독하고 무지막지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을 욕하고 삿대질하고 그러다가도 한편 목사님에게 호소하거나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싸움 중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밤잠을 못 자면서 고민했다고 하였으며 피차간에 큰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습니다.
법원에 제기한 공사반대 가처분 신청에서 우리가 승소하여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여름에 하려던 공사를 한 겨울에 가서야 하게 되어 또한 손해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모든 면으로 약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그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교회를 짓기 위해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흙이나 나무 치우는 일, 못도 빼고, 벽돌과 시멘트 올리기, 모래 나르기, 지하실 시멘트 긁어내기, 종 탑을 올릴 때 도르래 식 콘크리트 올리기 등 너무나 일이 많았습니다. 땅에 큰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으면서 일했습니다.
그 뿐 아닐 또한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있었던 성도들은 알고 있는 줄 압니다. 바로 공회 탈퇴 문제였습니다. 큰 다툼 끝에 많은 교인이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저도 처음 신앙생활을 공회에서 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그때 공회사람들은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회 사람들은 최고로 잘 믿고 다른 교회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건설구원은 못 받는 것으로 그렇게 사상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타 교회와 교류도 없었고 성가대, 전도회, 분과위원회 활동과 다른 교회들과 종교서적들을 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속화되고 타락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교회가 공회 사상에서 해방되기까지는 목사님이 얼마나 많고 오랜 고민과 기도, 교훈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지금의 우리는 이러한 자유와 은혜와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 설립26주년인 되는 이 시점에 돌이켜 보면 어린양과 같은 성도로서는 목자와 같은 목사님 잘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느껴집니다. 목사님은 어리고 철없는 양떼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시고 ‘항상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성경공부 소책자나 주제별 성경연구, 크로스웨이, 조직신학, 사역훈련, 다락방 공부, 찬양과 암송,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 등으로 성숙한 신앙, 성장하는 성도로 이끌어 왔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였고 우리도 여러기관에 가서 선교와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목사님의 노고였고,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게 하셨음을 저희들은 분명히 보았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 있게 하셨고 다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큰신 은혜와 목사님의 교회를 아끼시는 그 애정과 성도들의 응답이 지금의 산창교회를 이웠음을 새삼 고백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어떠한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앙망하는 믿음으로 하나 되어 전진을 계속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참 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였고 앞으로 크신 은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2003년 2월 3일 박은혜 권사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
개혁의 길은 험로였다
- 하명철 장로님
1983년 봄이었습니다. 꼭 20년이 지났습니다.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지면서 도청에 근무하던 저는 창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창워느이 몇 교회를 가 보았으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조현권 집사의 인도로 산창교회로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산창교회의 모습은 교회로 건축되어 있었으나 그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가정집 크기였고 그나마 2층은 예배실이었으나 1층은 사택과 전세 사는 정재우 집사님이 살고 잇었고 옥상에 천막을 치고 중고등부 예배실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하여서 예배시간이 걸었고 특히 설교시간이 길었습니다. 잘 알아 듣지 못했으나 목사님의 메시지는 강하고 힘이 있었고 감동적이고 놀라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주일 오후 예배를 밤에 드리는데 산창교회는 오후2시에 하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잘 적응이 되지 않아 오후예배는 많이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 성수에 대한 확신을 차차 배우게 도었고 성도들의 진지한 모습과 경건한 예배 모습에 끌리게 되었고 저도 차차로 산창교회 교인이 되어왔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목사님과 반사들과 구역장들이 열정과 집념으로 어린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모두가 나서서 심방을 다녔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산창교회로 모였고 많은 교회에서 산창교회 주일학교를 배우기 위하여서 견학을 오는 교회들이 매주 찾아오다시피 했습니다.
신축한 합성동 현재교회의 지하실은 70여 평 정도로 넓었으나 가득하게 차고 들어 갈 공간이 없었고 800 - 1000 명 이상까지 모였으며 1986년 4월 평균출석은 756명, 5월 평균 출석은 727명 6월 22일 주일은 전도주일로 1862명, 29일 주일에는 1229명이며 6월 평균 출석수는 119명, 7월 평균 출석수도 831명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학용품이나 먹을 것이나 선물을 계속 주었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말씀만 가르쳤고 이것을 아이들은 불평하면서도 우리교회로 찾아왔고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물어보면 거의 다 산창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산창교회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와 교사들의 열정을 볼 때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어린이 인도가 이렇게나 어려워 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파에 대해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교회는 다 같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나 부산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은 무두가 나를 보고 이상한 교회에 다닌다고 수근 거렸고 이 지역 교계에서도 냉대뿐만 아니라 이단교회라고 정죄도 하고 교회 주소록에도 없고 기독교 연합회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고 언제까지나 증어와 적대감으로 대하였습니다.
가입된 총공회를 탈퇴한 후에도 7년이나 지난 1995년에서야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 가입하게 되는 정도로 교파의 학대는 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서 우리교회 김철수 목사님이 수년간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2001년도에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고신 마산노회에서는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 회장 김철수 목사는 자신들과 신앙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회비도 안 내고 부활절 연합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하면서 마산 교도소 선교협의회에서도 제명하고 아직까지도 불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외부적 고립과 나쁜 위상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부활동에 더욱 노력하여 교도소 선교, 군 선교, YWCA, 경남기독교 연합회와 각종 연합사업과 구제 선교와 선교기관 돕기 등에 적극 동참하였고, CBS 경남방송 설립공동회장으로 물심양면 협력했고, 창원극동방송과 기독교 경남방송에 30분씩 매주 설교 방송도 하였습니다.
매월 두 번씩 마산 삼성병원 신우회 주관 환우예배에서 설교를 10여년간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연합 집회에서 기도나 사회나 설교 또는 축도 등으로 순서를 맡았으며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의 10여 명의 고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 기관과 우리는 교훈과 행사를 교류하고 있으며, 우리 찬양팀이 여러 기관에 가서 찬양도 하고 선교 활동도 적극참여를 하여 왔습니다. 이제 산창교회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목사님도 소속한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개혁) 총회에서 두 번 총회장으로 일하셨고 헌법위원으로 또한 신학교에 출강, 전국 초교파 목회연구회와 기도 동지회를 설립하여 총무와 회장으로 또한 부산 경남 기독교 합심회에서도 회장과 감사 등으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9행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1년에 1억원 정도를 ‘주는 교회’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1년에 지경 확장축적금으로 1억원 정도를 저축하여 주변 주택을 네 번째로 구입하여 주차장이나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신 마산 노회나 지역교회에서 경계하면서 비판하거나 냉대하는 것도 어쩌면 일면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산창교회가 이전에 속하여 있던 총공회(속칭 백파)는 세속을 멀리하고 전적으로 믿는 것은 좋으나 좁고 편협적인 사상과 강한 교파 관념 때문인 듯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과 인식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교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열린 뜻을 품은 김철수 목사님의 교훈과 행정과 공회에 대한 충성도를 공회에서 불신임했는지 경계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산창교회의 주일학교 분교로서 70여명이 모이는 장소였던 진해 허창민 김성은 부부의 가정을 충무동교회로 분립시켰습니다.
창원에는 창천교회를 세워서 이도범 집사 방남희 김현주 권찰 등 몇몇 사람이 옮겨가더니 1988년 2월에는 총공회에서 김철수 목사님을 산창교회를 떠나라는 결의를 했고 그 결과 1988년 2월 14일 주일에는 총공회냐 김철수 목사냐 한편을 선택하는 전교인 신임투표를 했고 물론 김철수 목사 지지율은 찬성 218명 반대 26명으로 90%정도였습니다.
총공회에서는 다른 목사를 지명, 파송하여 내적 투쟁을 시도했으나 총공회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을 가지고 떠나간 성도들도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하여 창천교회로 옮겨갔는데 그들은 대개는 오랜 경륜을 가진 신자들이었고 산창교회에 남은 사람은 숫자는 많아도 경륜이 얕거나 설교에 은혜를 잘 받는 순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떠나간 분들도 일생 아픔으로 그때를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뿐인 장로 이형 장로님도 가셨는데 그분은 사회적으로나 신앙과 인격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신임을 얻는 분이었고 장로로 피택된 정재우 집사와 권사로 피택된 전우남 집사와 초대 담임목사 이만기 목사님의 아들 이성복집사와 나를 산창교회로 인도한 조현권 집사 정철포 이충현 정상효 집사와 여집사로서는 음영희 임용자 차경림 백숙이 김태선 선귀엽 김순희 신선애 이도순 김금악 백정순 박경자 최효선 백복남 집사 등이었고 그 가족과 그들이 인도한 구역식구와 상당수의 권찰님들까지 포함하면 약 100명 정도가 떠나갔다고 짐작됩니다.
참으로 교파사상은 얼만 무서운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장년부 출석이 200명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그후 약 1-2년에 걸쳐서 친분과 친천관계 등으로 또다시 떠나간 제직은 배종필 진선희 정동열 진영순 배종기 안순정 진정선 집사 등이었습니다.
15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개인교류는 되고 있으나 교회적으로는 산창교회와 창천교회나 충무동교회는 우리와 멀기가 북한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어 전혀 교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길은 험난하고 연단의 길,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목사님과 산창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소속했던 교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도 소외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길이 참으면서 극복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교회의 중매와 목사님의 주례로 1984년 10월 27일에 산창교회 초창기 교인인 정춘지 집사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반사 일을 하였는데 잘 할 줄도 몰랐으나 어쨌건 열심히 했고 직장이 울산으로 옮겨진 86-88년 약 3년이란 기간에도 신혼이었으나 나 혼자 울산에 머물면서 주말부부로 주일에는 산창교회로 빠짐없이 와서 반사로서의 충성을 다 했던 것입니다.
나의 신앙 노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목사님의 교훈과 아내인 정춘지 집사의요동 없는 신앙 때문에 지금까지 복 된 교회에서 은혜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특히 IMF 직후 직원 퇴출 위기에서도 퇴출 각오를 하면서도 주일을 성수했고 1995년 6우러 25일에는 안수집사로 1996년 11월 26일에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로 임직받아 이제 내년도에는 47세로 수석 장로가 될 형편에 있습니다.
나의 아내 정춘지 집사는 김철수 목사님이 부임한 80년 그 당시 산창교회의 반사로서 설립 26주년에 대한 감회는 몇 권의 책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면서 특히 목사님의 믿음과 집념에 따른 노고와 착하고 고마운 성도들의 믿음의 응답과 교회에 대한 충성의 결과라고 감격하여 합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발판으로 산창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후손들의 믿음과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겠고 우리의 신앙성숙을 더욱 승화시켜갈 사명감과 믿음의 비전과 리더쉽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열매 맺는 건강한 교회’ (막4:28-19)란 표어처럼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 사랑 중에 축북 받는 가정,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 우리 산창교회가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44:22)처럼 영육간에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후 2003년 1월 31일 하명철 장로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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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2011.11.15. '김철수 회고록' 교정을 위한 통화 중에서
정리: yilee
(백 목사님 면담)
총공회를 탈퇴하기 전 백 목사님을 직접 찾아 뵙고 대화함.
사전에 백 목사님과 약속이 있었고 서부교회 5층으로 찾아 뵙고 3 시간 정도 면담.
처음 1 시간 정도는 김 목사님이 평소 하고 싶은 말씀을 다 드렸음.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 난 사람이 있어 이런 사람을 일반 사람이 따라 가기가 어렵다는 등의 말씀을 드림. 공회의 잘못과 개혁해야 할 방향 등을 말씀 드리자 세세히 다 들어 주셨음.
그리고 다시 1 시간 정도는 목사님과 대화 형식으로 서로 입장을 주고 받았으며
마지막 1 시간은 과거처럼 설교 식으로 말씀하고 김 목사님은 일방적으로 듣는 식이 되었는데, 마지막 1 시간 동안 백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역시 대화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나옴.
나올 때 백 목사님은 '이 번 교역자회에 오제?' 라고 물으셨는데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변함.
(총공회 비판 문건 발표)
그렇게 나왔고 당시 김 목사님은 시리즈 식으로 공회를 비판할 많은 내용을 준비해 두고 있었으나 그 중에 12 가지를 특별하게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당시 교학실장이 박윤철 목사님이셨고 그 준비한 것 중에 2 가지를 드리며 백 목사님께 전해 드리도록 부탁.
(교역자 회의)
당시 이진헌 목사님이 교역자회의를 직접 사회한 적이 있었고, 사회를 보면서 '공회를 위해 발언을 하려면 본인이 모범적으로 모든 것을 잘 하면서 그렇게 발언해야 이해를 하지 않겠느냐' 하심. 당시 김 목사님은 교역자회에 종종 결석을 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으로 기억.
(동반 탈퇴 의혹)
1988년 2월에 총공회를 탈퇴했는데 당시 탈퇴를 전후해서 여러 사람들이 탈퇴를 했고 특히 사직동교회 송용조 목사님의 탈퇴는 2월 14일 같은 날에 이루어 졌는데 누가 봐도 총공회에 오랜 세월 교인으로서 또 목회자로서 동역자이며 총공회에 반발하고 탈퇴한 경우이므로 동반 탈퇴로 보는 시각이 있겠지만 전혀 사전에 의논한 것 없이 각자 갈 길을 간 것인데 우연의 일치가 된 것.
정의진 송용조 김철수 3 명이 단합 되어 하는 갑다 라는 공회의 말을 들었으나 탈퇴한 분들과 만난 것은 탈퇴 후 1 년이 지났을 때였고, 정의진 목사님은 당시 자신이 필요할 때 찾아 왔기 때문에 만난 경우는 있었으며 송용조 목사님과는 탈퇴하고 한 달 뒤에 만나서 서로 토로했음.
(청주교회 유인물)
청주교회에서 내가 적었던 글을 적어 교인들에게 나누었는데 그 글을 보신 백 목사님은 문서에는 청주교회라고 했으나 글은 김철수 목사님이 적었구만 하신 말씀을 전해 들음.
(탈퇴 후 단체)
김철수 목사님은 산창교회가 공회에서 탈퇴한 후에 처음에는 대한신학 쪽이나 합동보수로 가려 했는데 송용조 목사님이 마산으로 찾아 와서 여관에서 숙박하며 그 곳에서 밤 늦게까지 설득해서 대신이나 합동보수 쪽으로 가려고 준비해 두었던 것을 포기하고 송용조 목사님과 동행함.
최근까지 탈퇴했던 분들과 함께 하다가 지금은 김 목사님은 그 쪽 소속에서 빠짐. 김 목사님이 그 곳에서 총회장을 했는데도 그 곳의 총무가 실권을 행사했으니 총무는 연임을 할 수 있으므로 총무가 총회를 주도하여 김 목사님이 운영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고 논쟁으로 발전했으며, 여러 면으로 볼 때 희망이 없고 신앙 체질에 맞지 않음.
김철수 목사님은 처음부터 한 번도 고신에 속해 본 적은 없었는데 고신에서 나온 송용조 목사님의 권유로 고려개혁 소속함. 송용조 목사님 등은 고신에 정식 소속을 둔 적이 있으나 산창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