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성경 | 19시편5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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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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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7 09:15
'내 영광아'
영광은 은혜 입은 존재가 감사를 표시하는 모습이다. 은혜는 댓가 없이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댓가가 있다면 그 만큼은 은혜가아니다. 하나님만 절대자 완전자 창조주시니 은혜를 베풀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하나님의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이 전부이지 자기 스스로 다른 존재를 도울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만 가질 수 있다. '내 영광'이란 내가 주변에 다른 사람을 살펴 주고, 그들이 내게 감사할 때 나는 영광스럽게 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내가 조금이라도 잘 한 것이 있고 은혜를 베푼 것이 있어 '영광'을 받게 되었다면 겉으로는 나의 영광이지만 내용은 전적 하나님의 덕분이다.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이다. 그런데 우리를 앞에 세워 놓고 우리를 기르기 위해 혹독하게 징계할 때도 있고 우리를 내버려 둔 것처럼 외면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교만해서 착각할 정도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리를 자녀로 길러 가는 하나님의 인도 형태일 뿐이다.
'깰찌어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런데 자기에게 휘둘리거나 환경에 피동이 되다 보면 자기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릴 때가 있다. 실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나는 그 아들이라는 사실, 이런 자각을 할 때 '깬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인식, 의식, 생활은 자는 상황이다. 영광이란 하나님만의 것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잊고 또 내가 순종하는 매 순간이 나를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되는 만큼 영광이 따라 오게 되는데 자신도 잊었고 자신의 영광도 잊고 사는 것이 우리다.
다윗이 사울에게 계속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쫓겨 살다 보니 어느 날 생존을 위해 뛰는 벼룩이 되기 쉬웠고, 요셉이 생존을 위해 눈치를 보다 보면 그의 인격과 내용이 노예가 되고 죄수로 살기가 쉬웠다. 그들에게는 영광의 반대인 역적이나 죄인이었다. 외부 외형은 망명객이며 도망자였고, 노예로 죄수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억하고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알고 그 결말은 지난 날의 고난 전부가 영광으로 준비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다윗과 요셉은 그들의 고난기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재우지 않았고 그들의 영광도 재우지 않은 사람이 된다. 다윗이 나발 때문에 충동을 받아 칼을 들고 죽이러 갈 때, 그리고 요셉은 30세 직전에 바로의 측근이 풀려 나갈 때 청탁을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던 영광을 잠깐 재우고 수치를 앞에 세우고 있었다. 아비가일이 와서 다윗의 영광을 깨워 줬고 요셉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였으므로 출옥을 더 늦추며 스스로 깨어 나기를 기다리셨다. 어떤 노력도 어떤 인간도 어떤 것도 의지할 것은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 보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불러 냈다. 이 때 요셉이 외칠 말이 바로 '내 영광아, 깰찌어다'가 된다.
'비파야, 수금아'
비파나 수금은 팽팽하게 당겨 놓은 줄을 튕길 때 소리를 낸다. 내 속에 이런 면, 저런 순간, 저런 요소가 가장 적절하게 가장 최고로 긴장을 했을 때의 소리다. 또는 선과 선을 가로 닿게 하면서 소리를 낸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절망이나 긴장을 하는 것이 이 줄이고, 그 때에 이런 집중 기도나 충성이나 소망이 다른 줄이 되거나 쳐 주는 자극이 되면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죄인의 발악이 아니고, 악인의 절규가 아니라, 의인의 지극한 감사가 될 때 현악기의 소리가 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일반적으로 육체가 피곤하여 일어 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벽 예배 때문에 일어 나는 문제를 두고 이 성구를 많이 사용한다. 새벽에 새벽 예배를 위해 일어 나는 것도 '새벽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약적이고 너무 육체적이며 너무 외부에 치우치면 곤란하다. 밤은 마음 속에 말씀이 없어 생각하는 것이 어두울 때를 말한다. 말씀으로 생각해 보면 사건이 보이고 상황이 파악 되며 만사가 밝아 진다. 그 상태가 낮이다. 저녁은 밝은 심령의 사람이 말씀과 슬슬 멀어 질 때이고, 새벽은 어둠 속에 헤매다가 말씀을 다시 찾아 조금씩 밝아 지는 상황이다.
타락한 우리에게는 평생 밤중이 내 생애와 내 인격과 나의 신앙 속에도 늘 들어 있다. 중생 된 우리에게는 대낮처럼 밝은 광명이 신앙 양심에 늘 대기하고 있다. 중생된 영을 통해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긁어대고 두드리고 흔들고 계신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저녁을 맞기도 하고 또 깨어 다시 시작하는 새벽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을 가질 것인가? 광명천지의 은혜로 펄펄 뛰며 살 때는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심령의 흑암기를 보내고 있다면 발버둥을 치면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새벽을 찾아 가져야 한다. 내가 찾아 나선다고 발견 되거나 발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때 그 노력을 보시고 내 심령에 흐미한 희망을 조금 비춰 주신다. 새벽을 깨우는 것은 나의 노력이다. 그런데 실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찾아 내는 것처럼 또 내가 내 속에 밝은 심령을 일으켜 세우기라도 할 것처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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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은 은혜 입은 존재가 감사를 표시하는 모습이다. 은혜는 댓가 없이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댓가가 있다면 그 만큼은 은혜가아니다. 하나님만 절대자 완전자 창조주시니 은혜를 베풀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닌 존재는 하나님의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이 전부이지 자기 스스로 다른 존재를 도울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만 가질 수 있다. '내 영광'이란 내가 주변에 다른 사람을 살펴 주고, 그들이 내게 감사할 때 나는 영광스럽게 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내가 조금이라도 잘 한 것이 있고 은혜를 베푼 것이 있어 '영광'을 받게 되었다면 겉으로는 나의 영광이지만 내용은 전적 하나님의 덕분이다.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이다. 그런데 우리를 앞에 세워 놓고 우리를 기르기 위해 혹독하게 징계할 때도 있고 우리를 내버려 둔 것처럼 외면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교만해서 착각할 정도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리를 자녀로 길러 가는 하나님의 인도 형태일 뿐이다.
'깰찌어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런데 자기에게 휘둘리거나 환경에 피동이 되다 보면 자기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릴 때가 있다. 실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나는 그 아들이라는 사실, 이런 자각을 할 때 '깬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인식, 의식, 생활은 자는 상황이다. 영광이란 하나님만의 것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잊고 또 내가 순종하는 매 순간이 나를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되는 만큼 영광이 따라 오게 되는데 자신도 잊었고 자신의 영광도 잊고 사는 것이 우리다.
다윗이 사울에게 계속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쫓겨 살다 보니 어느 날 생존을 위해 뛰는 벼룩이 되기 쉬웠고, 요셉이 생존을 위해 눈치를 보다 보면 그의 인격과 내용이 노예가 되고 죄수로 살기가 쉬웠다. 그들에게는 영광의 반대인 역적이나 죄인이었다. 외부 외형은 망명객이며 도망자였고, 노예로 죄수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억하고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알고 그 결말은 지난 날의 고난 전부가 영광으로 준비 되고 있음을 알았다면 다윗과 요셉은 그들의 고난기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재우지 않았고 그들의 영광도 재우지 않은 사람이 된다. 다윗이 나발 때문에 충동을 받아 칼을 들고 죽이러 갈 때, 그리고 요셉은 30세 직전에 바로의 측근이 풀려 나갈 때 청탁을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던 영광을 잠깐 재우고 수치를 앞에 세우고 있었다. 아비가일이 와서 다윗의 영광을 깨워 줬고 요셉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였으므로 출옥을 더 늦추며 스스로 깨어 나기를 기다리셨다. 어떤 노력도 어떤 인간도 어떤 것도 의지할 것은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 보게 만들어 놓은 다음에 불러 냈다. 이 때 요셉이 외칠 말이 바로 '내 영광아, 깰찌어다'가 된다.
'비파야, 수금아'
비파나 수금은 팽팽하게 당겨 놓은 줄을 튕길 때 소리를 낸다. 내 속에 이런 면, 저런 순간, 저런 요소가 가장 적절하게 가장 최고로 긴장을 했을 때의 소리다. 또는 선과 선을 가로 닿게 하면서 소리를 낸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서 절망이나 긴장을 하는 것이 이 줄이고, 그 때에 이런 집중 기도나 충성이나 소망이 다른 줄이 되거나 쳐 주는 자극이 되면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죄인의 발악이 아니고, 악인의 절규가 아니라, 의인의 지극한 감사가 될 때 현악기의 소리가 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일반적으로 육체가 피곤하여 일어 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벽 예배 때문에 일어 나는 문제를 두고 이 성구를 많이 사용한다. 새벽에 새벽 예배를 위해 일어 나는 것도 '새벽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약적이고 너무 육체적이며 너무 외부에 치우치면 곤란하다. 밤은 마음 속에 말씀이 없어 생각하는 것이 어두울 때를 말한다. 말씀으로 생각해 보면 사건이 보이고 상황이 파악 되며 만사가 밝아 진다. 그 상태가 낮이다. 저녁은 밝은 심령의 사람이 말씀과 슬슬 멀어 질 때이고, 새벽은 어둠 속에 헤매다가 말씀을 다시 찾아 조금씩 밝아 지는 상황이다.
타락한 우리에게는 평생 밤중이 내 생애와 내 인격과 나의 신앙 속에도 늘 들어 있다. 중생 된 우리에게는 대낮처럼 밝은 광명이 신앙 양심에 늘 대기하고 있다. 중생된 영을 통해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긁어대고 두드리고 흔들고 계신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저녁을 맞기도 하고 또 깨어 다시 시작하는 새벽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을 가질 것인가? 광명천지의 은혜로 펄펄 뛰며 살 때는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심령의 흑암기를 보내고 있다면 발버둥을 치면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새벽을 찾아 가져야 한다. 내가 찾아 나선다고 발견 되거나 발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때 그 노력을 보시고 내 심령에 흐미한 희망을 조금 비춰 주신다. 새벽을 깨우는 것은 나의 노력이다. 그런데 실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찾아 내는 것처럼 또 내가 내 속에 밝은 심령을 일으켜 세우기라도 할 것처럼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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