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 성경 | 16느헤미야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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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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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7 09:45
'때에'
1장에서 예루살렘의 상태를 두고 애통했고 회개했다. 2장에서 왕에게 구하여 예루살렘으로 왔고 상황을 파악했다. 절망이었지만 하나님의 직접 은혜와 섭리 역사를 통해 다시 신앙의 재건에 나서려는데 세 종류의 방해가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백성 전체의 서열로 보면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대제사장이다. 온 백성이 레위 지파를 앞에 세우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을 앞에 세운다. 그 제일 앞에 1명인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다. 순서 상 하나님에게 제일 앞에 나서는 자리다. 또 신앙의 높이로 보면 세상의 저 밑에 바닥에 사는 일상 생활과 일반 신앙들이 신앙으로 장성하면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다. 그 중에 있는 성전으로 가려면 계단을 밟고 더 올라 가야 한다. 안뜰은 더 올라 가야 하고 성소도 그렇고 마지막이 지성소다. 하늘과 한 걸음씩 더 가까와 지다가 제일 위에 올라 가면서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직책이 대제사장이다. 그래서 평소 백성이 땀 흘려 수고하여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면, 레위 지파는 그 중에 또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친다. 뭐든지 가장 귀한 것 첫 것 소중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그 제일 위에 대제사장이 그 대접을 받았다. 평화시에 바로 가르칠 때는 그렇게 되지만 잘못 가르쳐 온 나라가 망했고, 이제 다시 신앙으로 재건을 하려는데 원수들이 지켜 보고 있다. 누가 제일 앞에 나서야 할까? 또 느헤미야 3장에서 누구를 제일 먼저 기록해야 할까?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대제사장이 제일 앞에 서야 한다. 목회자가 제일 앞에 서야 하고, 가정 교회도 그렇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 또는 제일 가까운 이들이 함께 해야 한다. 제사장은 모두가 아론의 후손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범위로 넓혀 보면 모두가 대제사장의 형제가 된다.
'양문을 건축하여'
예루살렘은 수도 서울이니 성곽도 길고 문들도 많다. 문 이름을 붙이다 보니 양문 분문 샘문 수문 분문 어문들이 있다. 이름과 실체는 다를 수 있으나 용도와 목적에 맞출 수도 있다. 성경에 기록을 할 때는 일점일획도 괜히 적고 우연히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신앙에 필요한 진리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양문이란 양의 문이니 성전을 향하는 우양 또는 양과 염소를 위해 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대제사장은 목자요 목자장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그의 양이었다. 양의 문을 통해 양들이 안전도 숙식도 또 평안도 누린다. 또 밖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는 양떼는 주로 성전의 제물로 간다.
목회자가 자기 교인을 그렇게 인도해야 했다. 가정교회도 마찬 가지다. 각자 자기 내면의 심신이 수 많은 요소로 되어 있고 그 것이 모두 자기의 양 떼이다. 말씀 어겨 사느라고 자기는 물론 자기의 심신과 그 요소가 아주 세상에 버려 졌다. 다시 믿을 마음도 없고 그럴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 설 기회를 주셨다. 먼저 양의 문을 복구하고 나섰다. 기록을 먼저 해주셨다. 이제는 드나드는 양을 조사하고 막아야 하고 내보내야 하는 일을 할 때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갈 때도 있고 또 세상을 통해 주신 것을 신앙에 잘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성별하고'
이 양의 문은 특별히 구별한다. 목적도 존재도 다른 문과는 다르다.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문이 있다 해도 문짝이 없으면 헛일이다.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에서 막을 수 있고 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성벽은 아예 출입이 불가하다.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을 모신 신앙의 중심, 신앙의 가장 귀하고 깊고 소중한 그 곳을 지켜 내려면 아예 출입을 금지해야 하는 성곽이 필요하다. 신앙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출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성벽이다. 교회로 말하면 그 것이 교리며 신조다. 또 신앙의 노선이다. 이런 것은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돌아 봐야 하지만 외부에서 힘으로 공격으로 유혹으로 들어 올 수 없는 철벽이라야 한다. 흥정으로 이해 관계에 따라 변동이나 출입을 시켜서 아니 된다.
장로교가 스스로 회개하여 감리교를 따라 가는 것은 할 수가 있지만 감리교가 성벽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면 그 것은 무너진 예루살렘이다. 불교인이 양의 문으로 들어 오면서 전도를 받고 회개를 하는 것은 양의 문의 목적이다. 그러나 성벽으로 넘어 오고 성곽을 부수고 들어 오는 것은 탈선이며 타락이며 속화다. 교회의 자멸이다. 개인도 이런 지식은 잘 배웠다가 주를 위해 쓸 수가 있으면 문으로 통과 시킬 수 있다. 신앙에 아예 상관이 없거나 신앙에 백해무익의 지식, 그런 친구, 그런 취향은 성벽으로 막아 버려야 한다.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함메아 하나넬의 이름과 같은 명칭은 신학이나 고고학이나 현대의 세계 지리와 상식에서 찾으려 말고 성경 전체에 사용 된 사례를 가지고 짐작하면서 세월에 맡겨 두면 된다. 성경 전체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알아 가면 이런 부분은 저절로 밝아 진다. '망대'란 높아야 한다. 미리 봐야 한다. 바른 지식으로 지난 날의 경험으로 멀리 오는 적을 미리 볼 수 있다. 높이 쌓으려면 밑 부분에는 공간이 생긴다. 성벽 위에 또는 성벽에 붙여 쌓은 것이며 공격을 준비하는 곳이니 아가서 4: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라고 하신 대로 전투용 물품을 비축해야 한다.
1장에서 예루살렘의 상태를 두고 애통했고 회개했다. 2장에서 왕에게 구하여 예루살렘으로 왔고 상황을 파악했다. 절망이었지만 하나님의 직접 은혜와 섭리 역사를 통해 다시 신앙의 재건에 나서려는데 세 종류의 방해가 있었다. 바로 그런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백성 전체의 서열로 보면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대제사장이다. 온 백성이 레위 지파를 앞에 세우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을 앞에 세운다. 그 제일 앞에 1명인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다. 순서 상 하나님에게 제일 앞에 나서는 자리다. 또 신앙의 높이로 보면 세상의 저 밑에 바닥에 사는 일상 생활과 일반 신앙들이 신앙으로 장성하면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간다. 그 중에 있는 성전으로 가려면 계단을 밟고 더 올라 가야 한다. 안뜰은 더 올라 가야 하고 성소도 그렇고 마지막이 지성소다. 하늘과 한 걸음씩 더 가까와 지다가 제일 위에 올라 가면서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직책이 대제사장이다. 그래서 평소 백성이 땀 흘려 수고하여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면, 레위 지파는 그 중에 또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친다. 뭐든지 가장 귀한 것 첫 것 소중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그 제일 위에 대제사장이 그 대접을 받았다. 평화시에 바로 가르칠 때는 그렇게 되지만 잘못 가르쳐 온 나라가 망했고, 이제 다시 신앙으로 재건을 하려는데 원수들이 지켜 보고 있다. 누가 제일 앞에 나서야 할까? 또 느헤미야 3장에서 누구를 제일 먼저 기록해야 할까?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대제사장이 제일 앞에 서야 한다. 목회자가 제일 앞에 서야 하고, 가정 교회도 그렇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 또는 제일 가까운 이들이 함께 해야 한다. 제사장은 모두가 아론의 후손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범위로 넓혀 보면 모두가 대제사장의 형제가 된다.
'양문을 건축하여'
예루살렘은 수도 서울이니 성곽도 길고 문들도 많다. 문 이름을 붙이다 보니 양문 분문 샘문 수문 분문 어문들이 있다. 이름과 실체는 다를 수 있으나 용도와 목적에 맞출 수도 있다. 성경에 기록을 할 때는 일점일획도 괜히 적고 우연히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신앙에 필요한 진리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양문이란 양의 문이니 성전을 향하는 우양 또는 양과 염소를 위해 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대제사장은 목자요 목자장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그의 양이었다. 양의 문을 통해 양들이 안전도 숙식도 또 평안도 누린다. 또 밖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는 양떼는 주로 성전의 제물로 간다.
목회자가 자기 교인을 그렇게 인도해야 했다. 가정교회도 마찬 가지다. 각자 자기 내면의 심신이 수 많은 요소로 되어 있고 그 것이 모두 자기의 양 떼이다. 말씀 어겨 사느라고 자기는 물론 자기의 심신과 그 요소가 아주 세상에 버려 졌다. 다시 믿을 마음도 없고 그럴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 설 기회를 주셨다. 먼저 양의 문을 복구하고 나섰다. 기록을 먼저 해주셨다. 이제는 드나드는 양을 조사하고 막아야 하고 내보내야 하는 일을 할 때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갈 때도 있고 또 세상을 통해 주신 것을 신앙에 잘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성별하고'
이 양의 문은 특별히 구별한다. 목적도 존재도 다른 문과는 다르다.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문이 있다 해도 문짝이 없으면 헛일이다. 통로가 있고 그 통로에서 막을 수 있고 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성벽은 아예 출입이 불가하다.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을 모신 신앙의 중심, 신앙의 가장 귀하고 깊고 소중한 그 곳을 지켜 내려면 아예 출입을 금지해야 하는 성곽이 필요하다. 신앙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출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성벽이다. 교회로 말하면 그 것이 교리며 신조다. 또 신앙의 노선이다. 이런 것은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돌아 봐야 하지만 외부에서 힘으로 공격으로 유혹으로 들어 올 수 없는 철벽이라야 한다. 흥정으로 이해 관계에 따라 변동이나 출입을 시켜서 아니 된다.
장로교가 스스로 회개하여 감리교를 따라 가는 것은 할 수가 있지만 감리교가 성벽으로 자유롭게 드나들면 그 것은 무너진 예루살렘이다. 불교인이 양의 문으로 들어 오면서 전도를 받고 회개를 하는 것은 양의 문의 목적이다. 그러나 성벽으로 넘어 오고 성곽을 부수고 들어 오는 것은 탈선이며 타락이며 속화다. 교회의 자멸이다. 개인도 이런 지식은 잘 배웠다가 주를 위해 쓸 수가 있으면 문으로 통과 시킬 수 있다. 신앙에 아예 상관이 없거나 신앙에 백해무익의 지식, 그런 친구, 그런 취향은 성벽으로 막아 버려야 한다.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함메아 하나넬의 이름과 같은 명칭은 신학이나 고고학이나 현대의 세계 지리와 상식에서 찾으려 말고 성경 전체에 사용 된 사례를 가지고 짐작하면서 세월에 맡겨 두면 된다. 성경 전체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알아 가면 이런 부분은 저절로 밝아 진다. '망대'란 높아야 한다. 미리 봐야 한다. 바른 지식으로 지난 날의 경험으로 멀리 오는 적을 미리 볼 수 있다. 높이 쌓으려면 밑 부분에는 공간이 생긴다. 성벽 위에 또는 성벽에 붙여 쌓은 것이며 공격을 준비하는 곳이니 아가서 4: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라고 하신 대로 전투용 물품을 비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