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주해사전 (5600개)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 성경 01창세기09:20
서기 0 9
창9:20-27 본문에 노아의 실수와 아들 셋을 기록했다.

아버지 노아가 홍수 후 방심했다가 술에 취하여 벗고 누웠다. 둘째 아들 함이 보고 이 사실을 셈과 야벳에게 전했고 첫째와 셋째는 아비의 옷을 어깨에 매고 뒷걸음쳐 들어갔다. 흉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또 남들이 보지 않도록 그 옷으로 가렸다. 술에서 깬 아버지가 둘에게는 복을 둘째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술김에 뱉은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동을 보고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의 이치를 따라 예언한 것이다. 첫째는 복 중에도 신앙의 복을, 그리고 셋째는 세상 복을 갖도록 했다. 간단한 본문이지만 세 아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예상 못한 일이 갑자기 닥쳤지만, 평소 그들의 속에 형성되어 있던 신앙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둘째를 통해 아비의 소식을 듣자 두 아들이 취한 행동은 평소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 앞에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홍수를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평소 5계명을 지키며 살았고 막연히 그냥 부모로 존경한 것이 아니라 천하를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아버지 노아의 의미를 알고 존경했다. 그것은 5계명이며, 약속한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이런 사건을 만들고 그 후 모세를 통해 이 사실을 일부로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우리에게 부모라는 위치를 상대할 때 평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또한 신앙의 지도자를 대할 때를 함께 가르치고 있다.

함은 아비의 실수를 먼저 보았다. 두 아들의 행동과 같은 행동은 없다. 오히려 아비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여 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안내를 했다. 평소 함의 신앙이 강퍅했고 또 불효했다는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신앙노선과 행동을 가졌다면 당연히 멸망의 조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함과 같이 오늘도 자기 부모나 신앙 지도자를 아주 쉽게 만만하게 발가락 사이의 먼지처럼 대하는 분들이 있다. 부모를 착취의 대상으로 놀고먹을 자본을 제공하는 식민지민으로 상대하는 자식들이 허다한 세상이다. 자기 신앙지도자를 정치인들 평하듯 상대하는 교인들이 많다.

지도자를 너무 지나치게 우상화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상적인 교회로 말하면 우상화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는 희귀하다. 우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목회자에 대하여 너무 무시하는 일은 교인으로서 조심해야 한다. 목회자도 그런 대우를 받아야 당연한 경우가 많다. 목회자는 그런 교인 때문에 억울하다면 하늘의 복을 바라보는 직업이니 사실 하등 문제될 것이 없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아 아버지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다. 노아는 노아의 그런 대성공 후에 잠시 방심하다 큰 실수를 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후회할 것이다. 그것은 노아의 자기 신앙 문제다. 세 아들에 대하여 질문을 주셨으니 그들을 중심으로 말한다면 아버지가 실수를 해서 내 신세를 망쳤다고 탓하지 못한다.


이 성구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백영희의 설교 자료에서 확인하면 좋겠다.
1981.06.17 수새벽, 창세기 9:21-27 셈에 대하여
1981.06.18 목새벽, 창세기 9:24-27 배은은 망한다


(/pkist.net/문의답변/423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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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저주론)
1. '가계저주론'은 교리적으로 성경적이 아니다.
① 구원은 개별 개인적이다. 휩쓸려 함께 취급되는 수는 없다.
겔14:12-20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겔18:4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고 하셨다. 남이 지은 죄 때문에 자기가 당하는 경우가 없고, 내가 잘 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상급을 앗아가는 경우도 없다. 죄와 의는 증여가 되지 않고 유전도 되지 않으며 매매가 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행한 그대로 하나님이 갚으시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 따라서 '구원'이란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개인별로 일일이 따로 계산하시는 개별적 개인적 구원이다.

② 그러나 분명히 아실 것은, '가계저주론' '단체저주론'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롯이 택한 소돔의 생활 여건은 여호와의 동산같이 좋았으나 창13:13 말씀대로, 소돔사람은 악하여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다. 소돔은 말하자면, 저주의 땅이다. 그것은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저주를 받아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롯이 그곳에서 패가망신한 것은, 소돔이 저주의 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곳에서 그 악한 죄인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 죄에 물들어 그도 그 죄인들 중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롯과 그 가정으로 하여금 죄인을 만들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소돔지역이지만, 결국 죄를 배우고 죄를 지은 것은 롯과 그 가족들이기 때문에 소돔에서 패가망신한 것은 롯과 가족들의 자기 책임이지, 땅을 원망하고 주변 환경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자세하게 분석한다면 죄지은 죄인만 멸망 받는 것이 성경이지만, 일반 사람의 시야로 얼른 본다면, 어느 지역이나 어느 단체나 어느 가정이 소돔처럼 롯의 집안처럼 집단적으로 저주의 대상이 되어 망한다고 보여 지는 현상은 뚜렷하게 보인다. 따라서 그 내용을 자세하게 분석한다면 개인이 개별적으로 범죄 하여 마땅히 멸망 받을 일을 했고 그 결과로 닥쳐진 불행인데, 그것이 그 지역과 그 가정 전부에게 임하니까 마치 '가계저주론'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③ 예를 들면, 룻은 '가계저주론'에 해당되는 모압 여인
신23:3, '암몬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룻은 모압 여인이었으나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출생 계보에 오르게 된다. 모압과 암몬족속은 롯이 죄지어 만든 족속이고 또 출애굽을 막은 죄로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가계저주론'에 포함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모압과 암몬족속의 발생과 그 행위는 영원한 멸망에 해당되지만 그 속에서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그 구원계통을 사모하여 회개한 사람은 그 모든 해를 벗고 오히려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도 가장 복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가계 저주론이나 단체 저주론은, 교리적 입장이 아니라 목회적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교리적 입장에서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모압 족속과 결혼을 하던 소돔고모라로 가서 살던 자기만 신앙에 바로 서면, 그들 민족과 지방 전체를 휩쓸고 있는 죄악의 풍조와 그 결과에 자기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환경에 결국 피동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본다면 분명히 가장 조심할 것 중에 하나는, 그 가족이나 그 교회나 그 사회 전체의 분위기다. 솔로몬이 결국 이방여인을 데려왔다가 그들의 이방신을 섬기고야 말았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10지파가 지상에서 없어지고 남은 2개 지파도 그런 고난 속에 살고 말았음을 기억하신다면, 교리가 아니라 목회적 입장에서 어린 사람을 길러가야 하는 직책이라면, 가계 저주론을 아주 쉽게 예로 들며 조심을 시킬 수 있다. 물론 가계 저주론을 들고 나올 때는, 구원의 결국은 개인 개별적인 것임을 말해야 오해가 없다.

어머니를 닮지 않는 딸이 없고 아버지를 닮지 않는 아들이 없으며 섬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벗어나는 섬나라 사람이 없고 노예근성을 벗는 노예출신이 없다. 물론 이런 말은 일반적이고 통계적으로 말할 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게 되는 것까지를 부인하고 절대로 어머니를 닮는 딸은 없다고까지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상식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그 사람에게 특별히 주의시키고 또 특별히 격려할 일이 있으며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면이 크게 도움 될 것이다.

3. 함에게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함의 인간성을 그대로 본 것이다.
노아가 저주한다고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저주가 임할 요소가 함에게 있어야 그리 된다. 함의 후손은 과연 그 이후 오늘까지 구원역사에서 아주 참 비참한 민족이 되어 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면 '가계저주론'으로 명칭을 붙인다면 꼭 적당할 정도다.

함의 죄는 하나님이 자기 위에 계통으로 세운 것을 무시했다. 하나님이 세운 은혜의 계통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무시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그 은혜의 계통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보급품이 그 은혜의 계통을 무시하는 자기의 행동 때문에 자기에게 전달이 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함에게는 이런 면이 있었으니 그 이후 그 함으로부터 교육받고 양육 받는 자손들은 함의 이 죄악성에 영향을 받아 그들도 함과 같이 될 것이고 자연히 함과 함의 자손은 마치 가계 자체가 저주를 받아 영육간에 비참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

앞에서 드린 설명대로 말한다면, 함에게 내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 기관을 무시하는 죄악성으로 함이 당할 앞날을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함의 자손 중에서도 이 면을 조심하고 룻과 같이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함과 함의 자손이 마치 가계적으로 무조건 당하는 듯 보이는 오늘까지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8장의 에디오피아 여왕 겐다게의 큰 권세 가진 내시는 그 먼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 계통을 사모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의 구원'을 예언한 이사야서를 풀지 못하다가 빌립에게 배우고 세례를 받게 된다. 성령의 역사가 이를 이루었으니 그는 함의 자손이나 함으로 통해 내려가는 저주를 피하고 오히려 그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 노아의 실수를 대하는 세 아들들의 세 가지 모습

1. 우선 창9:20-27 본문 전체를 다시 보셨으면 한다.
본문을 얼른 보면, 실수는 아버지가 했고 아들은 셋인데, 둘째에게만 그 모든 저주가 다 내려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성구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버지의 실수가 있고 함의 잘못이 있으며 셈과 야벳의 의로운 행동이 있다. 우선 본문에 함을 두고 '가나안'이라고 했다. 이는 함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후 함의 아들 중 하나인 가나안만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질문과 관련하여 보다 넓은 면으로 살펴보겠다.

2. 성경은 일어났던 일 전부를 기록하는 역사서가 아니라, 필요한 내용의 최소를 기록했다.
요21:24에서 성경기록은 참이라고 한 다음 25절에서는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고 하셨다. 성경은 필요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여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요약으로 주셨다. 있는 내용을 다 기록하려면 쌓을 곳이 없다고 했다. 생략된 내용은 다른 성경과 전체 성경을 보면 알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동시에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가르쳐 주신다.

3. 노아의 실수는 분명히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노아는 그 값을 분명히 받았다.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신앙어린 사람들에게 보여 실족하게 했고 그 결과가 참으로 컸다. 그렇다면 눅17:1-2에 기록한 값은 노아에게 따로 기록되지 않아도 갔다. 어떤 벌이 어떻게 갔는지를 일일이 다 기록하려면 성경을 다 쌓아두지도 못한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갔다가 공짜로 바로에게 불의한 재물을 받아온 적이 있었다. 이후 아브라함의 자손은 4백년간 애굽에서 그 값을 민족적으로 갚게 된다. 일일이 기록치는 않지만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의 값은 절대로 그냥 덮어두고 가는 수가 없다. 가까우면 더 엄하고 신앙이 높아지면 그 매가 더욱 강해진다.

창세기 9장만 본다면 실수는 노아 자신이 해놓고 함을 저주할 때는 남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는 빠지듯이 읽을 수도 있다만 과연 세상 일반 사람은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의인으로서 노아는 비록 실수는 했으나 깨어난 후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잘못으로 그 아들이 우선 큰 저주를 받게 된 데에 대하여 무책임할 수준이 아니다. 함에게 가게 된 그 저주를 노아는 함 이상으로 가슴 아픈 고통으로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전도해도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에게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그 사람으로 믿게끔 하지 못한 자신의 부족을 탄식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평생 빚진 자로 살았으나 그는 남에게 돈을 빌린 빚쟁이는 아니었다. 노아에게도 이런 여러 면을 다 기록해 두지는 않았으나 성경 전체는 하나의 진리이므로 성경 전체를 통해 노아에 대하여 기록되지 않았던 모든 면을 다 풀어낼 수 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알아서 적어 두신 것이다. 우리가 알아서 필요한 만큼은 조금도 실수 없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4. 셈과 야벳의 행동은?
함은 아버지의 단점 곧 잘못된 점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광고한 것이 전부다. 그 깊은 속은 비방이며 조롱이며 물 건너 불구경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셈과 야벳은 노아의 단점은 노아 자신의 단점으로 노아만이 입을 손실로 보지 않았다. 상한 뿌리를 그냥 두면 둥치와 가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니 노아의 단점과 허물은 곧 자신들이 곧 입게 될 집 안의 화재였다. 두 사람이 옷 하나를 어께에 메고 간 것을 보니 노아에게 필요하고 관련된 것은 공손하고 정성스럽기 이를 데가 없다.

대통령이 외투 한 벌 필요하다고 할 때, 그 옷을 두 손으로 받혀 가는 사람과 한 손으로 질질 끌고 가는 사람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뒷걸음 쳐서 들어갔다. 노아의 잘못을 잘했다고 선전하는 것도 아니며 노아의 단점은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노아의 후손이며 신앙의 후배 된 사람이 그 단점을 선전하고 물 건너 불구경하듯 하거나 아니면 조롱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이는 은혜의 계통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 저수지에서 자기 집으로 오는 수도관을 스스로 막는 일이 된다. 노아의 단점을 덮었다. 이는 죄를 은폐하고 없던 것으로 했다는 뜻이 아니라 노아의 단점이 현재 벌거벗은 것이니 옷으로 가리면 되는 것이고 노아의 단점이 만일 다른 것이었다면 그 단점의 원인 해결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셈과 야벳은 그 신앙의 계통인 아버지를 보고 상대하는 인격과 행동이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실상이었다. 따라서 노아는 두 아들들의 행한 행동을 보며 현재 너희들이 가진 너희들의 장점 그 신앙 그 복된 행위는 하나님께서 복되게 갚아주시고 그 뒷날이 이러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노아의 예언은 정확했다. 물론 셈과 야벳에게 간 복은 각각 달랐다. 그것만 기록이 되어있지만 그 복의 종류를 볼 때 셈이 그렇게 행동한 내면과 야벳이 그렇게 행동한 내면은 또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벳에게는 세상에서 창대하게 되는 복을 주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육체의 성공과 세상의 자랑은 백인들에게 많으나 결국 셈의 장막에 거한다고 하신 말씀처럼 셈의 보호와 혜택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 것이다. 구주 탄생과 신앙의 계통은 셈을 통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pkist.net/쉬운문답/38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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