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 성경 | 09사무엘상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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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5 14:39
(질문)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의 신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비느하스의 아내의 현실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
(방문자 ) 사무엘상 2장3장에 보면, 왜 비극이 일어났는지 아실 텐데요. 아시면서 물어 보셨나? 엘리가문의 죄, 제사를 멸시함,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간음. 그런 아들들을 꾸짖지 않고 그냥 그리 말라 소문이 안 좋다라는 정도로 아들들에게 말한 엘리 제사장.
결론: 결혼은 신앙 좋은 사람과 해야 된다. 비느하스 아내의 잘못은 신앙 좋지 못한 사람과 결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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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비느하스 아내의 마지막 모습에서 살필 수 있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1. 답변자에 앞서 다른 분이 옳은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결혼은 좋은 사람과 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옳은 말씀. 우리가 다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한번 더 듣고 보니까 참으로 중요한 말씀.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애당초 가지 말아야 할 곳,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기어들어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미 저주가 덮도록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넘치도록 사랑했으나 본인들이 죽을 구덩이로 기어코 들어갔다. 자유성으로 인간을 기르시도록 목적을 정하신 이 면 때문에 하나님도 지켜보고 계셨다.
엘리제사장과 그 계통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진노 받을 내력이 많았다. 그런 곳으로 결혼을 해서 가다니요. 오늘도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결혼을 해서 가놓고는 평생을 후회하고 고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서 안 될 교회로 간 다음, 그곳에서 빠질 수도 없고 그 현실을 이길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마음으로 죄만 짓고 신앙도 세상도 실패하고 결국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며 세상을 마감하는 분들을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늘 깊이 새길 대목을 지적해 주신 것 같다.
2. 한가지 답변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백영희목 회연구회를 함께 사용하는 자세로 소개한다.
물론, 비느하스의 아내를 통해 어떤 면을 봐야 할지를 질문하신 분이 1번에서 설명 드린 내용을 모를 수도 있겠으나 혹시 이 면 외에 또 다른 점을 문의하셨을 수도 있겠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답변을 드릴 때는 어떤 한 내용에 대하여 관련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답변을 충분히 적는다면 답변자의 수준에서도 어느 한 질문에 대하여 거의 책 한 권 이상으로 답변할 내용이 거의 전부다. 하물며 답변자를 어린아이 가르치듯 했던 백목사님이 어느 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한다면 그 범위는 가히 생각도 못할 많은 면이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사람 어느 형편에도 전부 다 적용되는 무한한 말씀이어서, 질문하신 '비느하스의 아내'를 평가한다면 이 땅에 다 쌓아도 둘 수 없을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결혼을 애당초 잘못한 것을 지적'하신 분의 답변은 너무도 중요한 점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또한 백영희목회연구회 답변자가 이 질문이나 다른 질문에서 여러 면으로 답변하는 것도 항상 그때 그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정도의 답변정도일 뿐이다.
함께 진리를 찾아 살피되, 늘 내 속에서 가르치는 영감을 살피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통해 가르치는 내용도 함께 살피는 면을 강조하고 싶다. 심지어 풀포기 하나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칠 바가 있다. 따라서 평생을 찾아가는 우리들임을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운영하는 의의는, 모든 사람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면이 다 각각 있지만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해서는 특별히 가장 깊고 정확한 교훈을 백영희목사님을 통해 많이 전하고 계신다는 점을 주목했고 이 계통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찾고 있다는 데 있다.
3. 엘리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의 신앙을 말씀하신 성구에서 몇 가지로 살펴보았다.
(1) 비느하스 아내에게서 좋은 점을 먼저 살핀다면
① 잘못된 가족관계로 망한 집안인데, 그 아내는 바로 된 가족 관계를 가진 인물
시부와 남편이 죽은 소문에 충격을 받았고 그 '고통의 실감'은 지극했다. 즉 정신적 충격이 육체적 충격만큼이나 되었다.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며느리로서 또 아내로서 가져야 할 정상적인 감정과 인식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엘리제사장의 집안은 잘못된 가족관계로 전멸재앙을 받는 대표적 경우다. 아들의 비행이나 그 아들에 대하여 대충 눈감고 넘어가는 아버지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 등에서 볼 수 있는 바 이 가정은 '잘못된 가족관계'로 망한 집이다.
아들은 아내에 대하여 해야 할 이하의 행동을 했고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해야 할 이상의 행동을 했다. 이렇게 시부와 남편은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지 않았으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호적상 위치로만 살지 않았고 남의 이목 때문에 참고 사는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한 가족으로 생사와 화복이 하나 된 '올 바른 가족관계'를 가지고 살았다.
시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자기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 충격으로 받았고 그 결과 뜻하지 않은 해산과 그로 인해 자신이 죽는 데에 이르고 있다. 물론 정상 분만에서도 사망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여기 비느하스 아내는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오직 이스라엘과 자기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처분만을 보고 있었고 자신의 생사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이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저주받은 가정에 발을 들여놓은 연고로 이렇게 죽게 되지만, 이 정도의 심정과 자세는 오늘도 찾아보기에는 참으로 희귀한 신앙이다. 하나님이 치면 오기와 반발로 더 악과 독을 품는 것이 일반 신앙이다. 혹 좀 나은 신앙이라면 두려워 떨면서도 아직 자기 품에 있는 보물은 거머쥐고 그 보물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도다. 이 아내는 자신의 생사와 막 출생한 불쌍한 제 자식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은 수준이었다. 인격 깊숙이 숨어 있는 예사롭지 않은 신앙을 여러모로 살필 수 있는 인물이다.
원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엘리의 가정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아는 가정에서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가장 먼저 없어지는 항목 중에 첫째라고 할 수 있다. 도둑놈 집안에 시집간 사람이 도둑질 배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직자 가정이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그 가정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단번에 놓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② 눈앞에 좋은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계산하는 신앙 자세
비록 시부와 남편의 사망이 큰 불행이었으나 태어나는 새 생명에 대하여 여자가 가지는 애착과 보호 본능은 무조건적으로 발동하는 법이다. 시부와 남편의 사망으로 받은 충격보다 막 태어난 어린 것을 두고 먼저 죽어야 하는 애미의 본능적 발동은 앞뒤 가릴 것 없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시부와 남편이 죽었으나 이 아들이 대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며, 인간은 이런 작은 소망 하나를 가지고 끝없이 이어질 앞날의 고통을 견디기도 하고 또 소망까지 가지고 웃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가정에 하나님이 단정하고 심판한 저주를 먼저 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였고 이제 그 칼을 들었으니 이 가정에 아이가 출생한들 그 아이가 남자아이인들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예화 중에 ‘깨진 독에 물 담는 법'이 있다. 깨진 독이라도 바다물 속에 넣어두면 그 독 안에 물이 담겨있고 멀쩡한 독이라도 세상이 가물면 독안에 물이 담겨있지 않는 법이라는 내용이다. 주변이 복된 환경으로 조성되면 그 복이 우리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법이고, 주변이 깨지면 나 하나가 성할 수 없다는 자연이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나라가 전쟁이면 한 가정의 따뜻함이 아무 의미가 없다. 엘리제사장 집에 하나님이 칼을 들고 휘둘렀고 그 칼이 어떠할 것인지는 이미 예언을 해 두었다. 이런 칼이 임했으니 이 아이에 대한 일말의 소망도 가질 필요도 가질 이유도 없다는 점을 인식했고 그 인식이 여자의 폭발적 본능을 조용히 재우고 있었다.
비록 복 없는 가정에 시집을 갔고 닥친 불행은 안됐지만,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식은 일반 가정의 '더럽게 재수 없는' 소식으로 그치지 않았고 이는 하나님의 전멸재앙의 시작으로 보았으므로 깨끗하게 포기하고 당신 손에 맡겨두고 그냥 숨을 거두었다. 아이에게 붙인 이름도 그러한 것이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라고 했다. 어디 그럴 일이겠는가? 아이낳은 여자의 본능이 어디 대답지 않을 일이며 관념치도 않을 일이겠는가?
③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났다는 큰 범위를 실감하여 작은 기쁨을 접는 계량이지
가정적으로도 그러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범위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치시면 어찌 되는지만 그 불행만이 남아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못 박고 있다. 하나님의 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었다. 그 말씀 안에서만 하나님은 역사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만 은혜를 베푸시고 그 말씀으로만 동행한다. 이 진리를 세상에 빼앗겼다. 하나님을 세상 속에 묻어버렸다. 이미 엘리와 그 아들들이 대표가 되어 해온 짓은 교회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택해서는 안 될 걸음으로 세상화 되었다. 더 이상 교회라고 간판만 남아있지 그 알맹이는 세상이나 교회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다는 표시로 하나님께서 궤를 블레셋에게 넘겨주었다.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엘리와 이스라엘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증표로 궤를 블레셋으로 보낸 것이다.
교회의 완전 속화타락을 확정짓는 말씀이다. 어느 한 가정이 롯의 가정처럼 완전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느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전혀 없게 된 경우에도 이 말씀은 그대로 교훈으로 해당된다.
이렇게 헤아려 가다보면 구약성경도, 잠깐 지나가는 역사 사실 하나로부터 오늘 신약교회의 타락, 어느 교단의 속화역사, 어느 교회에 교회적 사건, 어느 신앙가정의 파괴 등등에 공식처럼 대입하고 적용할 수 있고, 이래서 성경은 진리다.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이 말씀 하나로 새기다 보면 끝이 없다. 백영희목회연구회가 집중하는 백영희신앙노선에 속한 공회와 교회들도 정확하게 이대로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찾아볼 바를 다 찾지는 못하겠으나 대표적으로 위에 설명 드린 몇 가지를 참고하셨으면 한다.
(2) 비느하스의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점을 찾는다면
① 이 날이 오기 전, 이 가정을 살리는 의인이 되었어야 했음
물론 하나님께서 끝장을 내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이렇게 끝이 났지만, 그래도 비느하스의 아내와 오늘 우리는 마지막 전멸재앙이 닥치기 이전에 우리 하나로 인하여서라도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멈추시기를 노력해야 한다.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신다면 외부에서 볼 때는 우리 회개가 약하여 막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 신앙은 기뻐 받으시고 결과는 당신 뜻대로 하는 것이다. 나타나는 결과는 달리 보이지만 내적 하나님 앞에 충성과 신앙은 동일하다.
일단, 이 가정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정에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이 이 비느하스의 아내였으므로 그를 향해 안타까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날이 오기 전 이 가정을 살리고 또 이 가정을 돌이킴으로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이 여인을 향해 그냥 내뱉을 말이 아니다. 오늘 자신을 향해 참으로 끔찍한 날을 피할 수 있는 채찍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계가 신사참배 앞에 이 엘리제사장 부자처럼 행실을 했고 해방후까지 그러하여 완전 뿌리가 뽑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그들 중에는 이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고 자신의 생명과 태어난 새 생명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탄식한 이는 들어보지 못했다. 고신 역시 그 길을 바로 따라갔다. 오늘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예고된 진노가 임하고 교회가 그 교회성을 잃어버리고 완전 세상이 되어버리는 데까지 나갔지만, 이제 그들이 앞서간 순서가 오늘 우리에게 코앞에 닥쳐졌다. 오늘 공회는 아직 끝장난 때는 아니지만 그 끝이 거의 보일정도로 깊어져 있다.
오늘 이 공회에 이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고 숨을 거두는 사람은 혹 한 둘이 있을지 몰라도, 참으로 아쉬운 것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좀더 일찍 서둘러 그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미리 공회를 돌려세웠더라면 하는 것이다. 자기 교단의 지도자가 그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소속 회원 한 사람이라도 미리 외치고 엘리야처럼 움직였더라면 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완전 끝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남아 다음 세대로 넘겨가며 살아있는 교회를 지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데까지는 가지 않도록 할런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② 두려운 것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시는 약2:19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며 비느하스의 아내와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그래도 그 아내만은 신앙이 있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귀신도 하나님이 두려워 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극하심 때문에 떨기는 떨지만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지경에서도 소망을 이루기 위해 떠는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지극하심을 보고 떨지만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어 절망 때문에 떨고 있다. 우리의 떨림은 구원에 이르나 그들의 떨림은 지옥에 이르게 된다.
여기 이 비느하스 아내의 모든 언행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스라엘과 교회 안에서 그래도 탄식이라도 할 수 있는 의인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비느하스 아내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절망만을 가지고 마지막을 맞는다면 이는 귀신도 믿고 떠는 귀신의 믿음이 될 수도 있다. 귀신들도 너무도 아는 것이 많아 신앙의 구석구석을 다 훑고 있다. 답변자는 이 비느하스 아내가 결국은 멸망 받는 엘리제사장 집안의 멸망 받는 한 식구로서 끝났다는 점이 크게 보인다. 비록 그 집안 다른 식구에 비하여는 앞에서 설명드린 여러 장점이 있었다.
참고로, 엘리제사장과 집안 식구들은 불택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으로 건설구원적으로 완패하는 예를 보였다. 그중에 안타까운 비느하스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다.
(/pkist.net/문의답변/ 844번)
(방문자 ) 사무엘상 2장3장에 보면, 왜 비극이 일어났는지 아실 텐데요. 아시면서 물어 보셨나? 엘리가문의 죄, 제사를 멸시함,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간음. 그런 아들들을 꾸짖지 않고 그냥 그리 말라 소문이 안 좋다라는 정도로 아들들에게 말한 엘리 제사장.
결론: 결혼은 신앙 좋은 사람과 해야 된다. 비느하스 아내의 잘못은 신앙 좋지 못한 사람과 결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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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비느하스 아내의 마지막 모습에서 살필 수 있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1. 답변자에 앞서 다른 분이 옳은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결혼은 좋은 사람과 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옳은 말씀. 우리가 다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한번 더 듣고 보니까 참으로 중요한 말씀.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애당초 가지 말아야 할 곳,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기어들어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미 저주가 덮도록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넘치도록 사랑했으나 본인들이 죽을 구덩이로 기어코 들어갔다. 자유성으로 인간을 기르시도록 목적을 정하신 이 면 때문에 하나님도 지켜보고 계셨다.
엘리제사장과 그 계통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진노 받을 내력이 많았다. 그런 곳으로 결혼을 해서 가다니요. 오늘도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결혼을 해서 가놓고는 평생을 후회하고 고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가서 안 될 교회로 간 다음, 그곳에서 빠질 수도 없고 그 현실을 이길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마음으로 죄만 짓고 신앙도 세상도 실패하고 결국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며 세상을 마감하는 분들을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늘 깊이 새길 대목을 지적해 주신 것 같다.
2. 한가지 답변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백영희목 회연구회를 함께 사용하는 자세로 소개한다.
물론, 비느하스의 아내를 통해 어떤 면을 봐야 할지를 질문하신 분이 1번에서 설명 드린 내용을 모를 수도 있겠으나 혹시 이 면 외에 또 다른 점을 문의하셨을 수도 있겠다. 백영희목회연구회에서 답변을 드릴 때는 어떤 한 내용에 대하여 관련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답변을 충분히 적는다면 답변자의 수준에서도 어느 한 질문에 대하여 거의 책 한 권 이상으로 답변할 내용이 거의 전부다. 하물며 답변자를 어린아이 가르치듯 했던 백목사님이 어느 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한다면 그 범위는 가히 생각도 못할 많은 면이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사람 어느 형편에도 전부 다 적용되는 무한한 말씀이어서, 질문하신 '비느하스의 아내'를 평가한다면 이 땅에 다 쌓아도 둘 수 없을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결혼을 애당초 잘못한 것을 지적'하신 분의 답변은 너무도 중요한 점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또한 백영희목회연구회 답변자가 이 질문이나 다른 질문에서 여러 면으로 답변하는 것도 항상 그때 그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정도의 답변정도일 뿐이다.
함께 진리를 찾아 살피되, 늘 내 속에서 가르치는 영감을 살피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통해 가르치는 내용도 함께 살피는 면을 강조하고 싶다. 심지어 풀포기 하나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칠 바가 있다. 따라서 평생을 찾아가는 우리들임을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백영희목회연구회를 운영하는 의의는, 모든 사람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면이 다 각각 있지만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해서는 특별히 가장 깊고 정확한 교훈을 백영희목사님을 통해 많이 전하고 계신다는 점을 주목했고 이 계통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찾고 있다는 데 있다.
3. 엘리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의 신앙을 말씀하신 성구에서 몇 가지로 살펴보았다.
(1) 비느하스 아내에게서 좋은 점을 먼저 살핀다면
① 잘못된 가족관계로 망한 집안인데, 그 아내는 바로 된 가족 관계를 가진 인물
시부와 남편이 죽은 소문에 충격을 받았고 그 '고통의 실감'은 지극했다. 즉 정신적 충격이 육체적 충격만큼이나 되었다.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며느리로서 또 아내로서 가져야 할 정상적인 감정과 인식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엘리제사장의 집안은 잘못된 가족관계로 전멸재앙을 받는 대표적 경우다. 아들의 비행이나 그 아들에 대하여 대충 눈감고 넘어가는 아버지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 등에서 볼 수 있는 바 이 가정은 '잘못된 가족관계'로 망한 집이다.
아들은 아내에 대하여 해야 할 이하의 행동을 했고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해야 할 이상의 행동을 했다. 이렇게 시부와 남편은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지 않았으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호적상 위치로만 살지 않았고 남의 이목 때문에 참고 사는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시부와 남편에 대하여 한 가족으로 생사와 화복이 하나 된 '올 바른 가족관계'를 가지고 살았다.
시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자기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 충격으로 받았고 그 결과 뜻하지 않은 해산과 그로 인해 자신이 죽는 데에 이르고 있다. 물론 정상 분만에서도 사망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여기 비느하스 아내는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오직 이스라엘과 자기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처분만을 보고 있었고 자신의 생사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이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저주받은 가정에 발을 들여놓은 연고로 이렇게 죽게 되지만, 이 정도의 심정과 자세는 오늘도 찾아보기에는 참으로 희귀한 신앙이다. 하나님이 치면 오기와 반발로 더 악과 독을 품는 것이 일반 신앙이다. 혹 좀 나은 신앙이라면 두려워 떨면서도 아직 자기 품에 있는 보물은 거머쥐고 그 보물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도다. 이 아내는 자신의 생사와 막 출생한 불쌍한 제 자식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은 수준이었다. 인격 깊숙이 숨어 있는 예사롭지 않은 신앙을 여러모로 살필 수 있는 인물이다.
원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엘리의 가정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아는 가정에서 살다보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가장 먼저 없어지는 항목 중에 첫째라고 할 수 있다. 도둑놈 집안에 시집간 사람이 도둑질 배우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직자 가정이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그 가정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단번에 놓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② 눈앞에 좋은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계산하는 신앙 자세
비록 시부와 남편의 사망이 큰 불행이었으나 태어나는 새 생명에 대하여 여자가 가지는 애착과 보호 본능은 무조건적으로 발동하는 법이다. 시부와 남편의 사망으로 받은 충격보다 막 태어난 어린 것을 두고 먼저 죽어야 하는 애미의 본능적 발동은 앞뒤 가릴 것 없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시부와 남편이 죽었으나 이 아들이 대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며, 인간은 이런 작은 소망 하나를 가지고 끝없이 이어질 앞날의 고통을 견디기도 하고 또 소망까지 가지고 웃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가정에 하나님이 단정하고 심판한 저주를 먼저 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진노하여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였고 이제 그 칼을 들었으니 이 가정에 아이가 출생한들 그 아이가 남자아이인들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예화 중에 ‘깨진 독에 물 담는 법'이 있다. 깨진 독이라도 바다물 속에 넣어두면 그 독 안에 물이 담겨있고 멀쩡한 독이라도 세상이 가물면 독안에 물이 담겨있지 않는 법이라는 내용이다. 주변이 복된 환경으로 조성되면 그 복이 우리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법이고, 주변이 깨지면 나 하나가 성할 수 없다는 자연이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나라가 전쟁이면 한 가정의 따뜻함이 아무 의미가 없다. 엘리제사장 집에 하나님이 칼을 들고 휘둘렀고 그 칼이 어떠할 것인지는 이미 예언을 해 두었다. 이런 칼이 임했으니 이 아이에 대한 일말의 소망도 가질 필요도 가질 이유도 없다는 점을 인식했고 그 인식이 여자의 폭발적 본능을 조용히 재우고 있었다.
비록 복 없는 가정에 시집을 갔고 닥친 불행은 안됐지만,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식은 일반 가정의 '더럽게 재수 없는' 소식으로 그치지 않았고 이는 하나님의 전멸재앙의 시작으로 보았으므로 깨끗하게 포기하고 당신 손에 맡겨두고 그냥 숨을 거두었다. 아이에게 붙인 이름도 그러한 것이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라고 했다. 어디 그럴 일이겠는가? 아이낳은 여자의 본능이 어디 대답지 않을 일이며 관념치도 않을 일이겠는가?
③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났다는 큰 범위를 실감하여 작은 기쁨을 접는 계량이지
가정적으로도 그러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전체 범위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치시면 어찌 되는지만 그 불행만이 남아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못 박고 있다. 하나님의 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었다. 그 말씀 안에서만 하나님은 역사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만 은혜를 베푸시고 그 말씀으로만 동행한다. 이 진리를 세상에 빼앗겼다. 하나님을 세상 속에 묻어버렸다. 이미 엘리와 그 아들들이 대표가 되어 해온 짓은 교회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택해서는 안 될 걸음으로 세상화 되었다. 더 이상 교회라고 간판만 남아있지 그 알맹이는 세상이나 교회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다는 표시로 하나님께서 궤를 블레셋에게 넘겨주었다.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엘리와 이스라엘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증표로 궤를 블레셋으로 보낸 것이다.
교회의 완전 속화타락을 확정짓는 말씀이다. 어느 한 가정이 롯의 가정처럼 완전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느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전혀 없게 된 경우에도 이 말씀은 그대로 교훈으로 해당된다.
이렇게 헤아려 가다보면 구약성경도, 잠깐 지나가는 역사 사실 하나로부터 오늘 신약교회의 타락, 어느 교단의 속화역사, 어느 교회에 교회적 사건, 어느 신앙가정의 파괴 등등에 공식처럼 대입하고 적용할 수 있고, 이래서 성경은 진리다.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이 말씀 하나로 새기다 보면 끝이 없다. 백영희목회연구회가 집중하는 백영희신앙노선에 속한 공회와 교회들도 정확하게 이대로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찾아볼 바를 다 찾지는 못하겠으나 대표적으로 위에 설명 드린 몇 가지를 참고하셨으면 한다.
(2) 비느하스의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점을 찾는다면
① 이 날이 오기 전, 이 가정을 살리는 의인이 되었어야 했음
물론 하나님께서 끝장을 내시기로 작정하셨으니 이렇게 끝이 났지만, 그래도 비느하스의 아내와 오늘 우리는 마지막 전멸재앙이 닥치기 이전에 우리 하나로 인하여서라도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멈추시기를 노력해야 한다.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신다면 외부에서 볼 때는 우리 회개가 약하여 막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 신앙은 기뻐 받으시고 결과는 당신 뜻대로 하는 것이다. 나타나는 결과는 달리 보이지만 내적 하나님 앞에 충성과 신앙은 동일하다.
일단, 이 가정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정에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이 이 비느하스의 아내였으므로 그를 향해 안타까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날이 오기 전 이 가정을 살리고 또 이 가정을 돌이킴으로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이 여인을 향해 그냥 내뱉을 말이 아니다. 오늘 자신을 향해 참으로 끔찍한 날을 피할 수 있는 채찍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계가 신사참배 앞에 이 엘리제사장 부자처럼 행실을 했고 해방후까지 그러하여 완전 뿌리가 뽑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그들 중에는 이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고 자신의 생명과 태어난 새 생명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탄식한 이는 들어보지 못했다. 고신 역시 그 길을 바로 따라갔다. 오늘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예고된 진노가 임하고 교회가 그 교회성을 잃어버리고 완전 세상이 되어버리는 데까지 나갔지만, 이제 그들이 앞서간 순서가 오늘 우리에게 코앞에 닥쳐졌다. 오늘 공회는 아직 끝장난 때는 아니지만 그 끝이 거의 보일정도로 깊어져 있다.
오늘 이 공회에 이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탄식하고 숨을 거두는 사람은 혹 한 둘이 있을지 몰라도, 참으로 아쉬운 것은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좀더 일찍 서둘러 그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미리 공회를 돌려세웠더라면 하는 것이다. 자기 교단의 지도자가 그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소속 회원 한 사람이라도 미리 외치고 엘리야처럼 움직였더라면 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완전 끝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남아 다음 세대로 넘겨가며 살아있는 교회를 지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데까지는 가지 않도록 할런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② 두려운 것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시는 약2:19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며 비느하스의 아내와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그래도 그 아내만은 신앙이 있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귀신도 하나님이 두려워 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극하심 때문에 떨기는 떨지만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지경에서도 소망을 이루기 위해 떠는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지극하심을 보고 떨지만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어 절망 때문에 떨고 있다. 우리의 떨림은 구원에 이르나 그들의 떨림은 지옥에 이르게 된다.
여기 이 비느하스 아내의 모든 언행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스라엘과 교회 안에서 그래도 탄식이라도 할 수 있는 의인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비느하스 아내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절망만을 가지고 마지막을 맞는다면 이는 귀신도 믿고 떠는 귀신의 믿음이 될 수도 있다. 귀신들도 너무도 아는 것이 많아 신앙의 구석구석을 다 훑고 있다. 답변자는 이 비느하스 아내가 결국은 멸망 받는 엘리제사장 집안의 멸망 받는 한 식구로서 끝났다는 점이 크게 보인다. 비록 그 집안 다른 식구에 비하여는 앞에서 설명드린 여러 장점이 있었다.
참고로, 엘리제사장과 집안 식구들은 불택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으로 건설구원적으로 완패하는 예를 보였다. 그중에 안타까운 비느하스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다.
(/pkist.net/문의답변/ 84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