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 성경 | 19시편4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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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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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6 04:56
(질문) 다윗의 글에서 신약에서 본 성구가 나와서 신기하다. 16-19절에도 그렇고, 다윗이 언제 수족에 찔려서 죽었나? 시편 묵상하다가 참으로 대단하고 신기한 구절을 찾아 볼수가 있다.
(답변)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며,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1. 성경의 '다윗'의 의미
구약의 다윗은, 구약의 다윗이면서 신약의 예수님을 구약교회에 미리 보이신 계시기관이다.
다윗이 인간이므로 인간으로 출생하고 성장하고 행한 모든 일은 역사적인 다윗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 중에서 인간 다윗으로서 이룰 수 없고, 넘어설 수 없고 또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신약의 예수님을 구약교회에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역사하고 계셨다.
2. 시편에 나타나는 다윗의 기록
특히 시편에는 다윗이 볼 수 없고 겪을 수 없었던 여러 표현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고 질문하신 시편 22장은 대표적인 곳이다. 다윗이 자기에게 닥친 일을 가지고 고백했고 호소했고 발표를 했다. 어떤 일은 작게 닥쳤는데 다윗이 너무 크게 과장해서 슬퍼한 것도 있고, 어떤 일은 다윗이 경험했을 일이 아닌데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 '사무엘상'으로부터 다윗이 성경 역사에 수없이 기록되고 있지만 그 기록이 다윗에 관련된 생애 전부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서에 다윗을 기록한 것은 그 성경에서 필요한 부분만 기록했고, 시편에는 시편이라는 성경에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만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시편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시편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심정을 시로 발표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다윗이 어떤 일을 겪었으며 그때 심정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후에 성경으로 기록할 때 성령이 다윗을 감동시켜 어떻게 성경을 기록하게 했는지 우리는 그 이면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편의 기록이 일반 다른 성경의 역사에 없다고 해서 없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 대신 우리 일반 인간들이 볼 때는 지극히 작은 일로 한번 겪은 것을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지극히 큰 일로 기록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일반 신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나 학문적 연구로 접근하게 되면 과장이거나 아니면 없었던 일을 적은 것이라고 하기 쉽다. 성경신학이나 주석의 내용들을 한번씩 볼 때마다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참고로 말씀드렸다.
3. 질문하신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마27:46, 막15:37 등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다. 다윗이 시22:1을 기록한 것이 마27:46과 우연히 일치한 것이 아니다. 시편을 기록한 분도 하나님이며 마태복음을 기록한 분도 하나님이다. 말하자면 오른 손으로 시편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왼 손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시22:16에서 '개들이 나를 애워쌌으며' 22:18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등 자세하게 살펴나가면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며 성취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신학 교과서 기록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질문자처럼 조금 주의 깊게 성경을 보면 성경을 읽는 분들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4. 질문자의 성경 읽는 차원이 좋은 단계로 접근하고 계신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읽으시는 구절에 무슨 말씀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도 자세하게 훑어보시고, 또 그 구절 바로 앞에서 이어지는 전체 내용 흐름도 유심히 보셔야 한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마태복음에서 주의 깊게 눈여겨 본 말씀이 이렇게 시22:1 이하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읽으시고 비교하시고,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등을 조금 생각해나가다 보면 그렇게 읽으시는 분, 그 본인이 바로 성경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대하며 바로 배우지 않고, 성경신학이라는 수백페이지 교과서 몇 권을 뒤져가며 신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그런 주제 몇 개를 파악하는 것으로 일반 신학교에서는 성경신학이라고 가르친다. 질문자의 자세는 성경신학을 신앙으로 공부하는 자세이고, 후자의 경우는 성경신학을 세상학문으로 상대하는 일이다.
앞으로 모든 성경을 읽으실 때 늘 말씀들의 연결에 주의하시되, 마태복음과 시편에서 이렇게 한번 일치 된 것만 비교하지 마시고, 이런 내용이 창세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까지 연결을 찾아내시고 그 후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비록 그런 표현들이 일일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성경에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교회를 면면히 이어온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기록에는 그런 구원의 내면이 있었다는 것까지 봐야 한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성경을 '연결'이라는 측면에서만 공부하기 쉬운데 이렇게 공부하면 체계화와 넓은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만 한 말씀 자체가 주는 좁고 깊은 세계를 파악하는데 소홀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셔서 이 시대 주님 소원하는 귀한 말씀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
(/pkist.net/문의답변/3829번)
(답변)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며,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1. 성경의 '다윗'의 의미
구약의 다윗은, 구약의 다윗이면서 신약의 예수님을 구약교회에 미리 보이신 계시기관이다.
다윗이 인간이므로 인간으로 출생하고 성장하고 행한 모든 일은 역사적인 다윗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 중에서 인간 다윗으로서 이룰 수 없고, 넘어설 수 없고 또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신약의 예수님을 구약교회에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역사하고 계셨다.
2. 시편에 나타나는 다윗의 기록
특히 시편에는 다윗이 볼 수 없고 겪을 수 없었던 여러 표현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고 질문하신 시편 22장은 대표적인 곳이다. 다윗이 자기에게 닥친 일을 가지고 고백했고 호소했고 발표를 했다. 어떤 일은 작게 닥쳤는데 다윗이 너무 크게 과장해서 슬퍼한 것도 있고, 어떤 일은 다윗이 경험했을 일이 아닌데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 '사무엘상'으로부터 다윗이 성경 역사에 수없이 기록되고 있지만 그 기록이 다윗에 관련된 생애 전부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서에 다윗을 기록한 것은 그 성경에서 필요한 부분만 기록했고, 시편에는 시편이라는 성경에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만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시편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시편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심정을 시로 발표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다윗이 어떤 일을 겪었으며 그때 심정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후에 성경으로 기록할 때 성령이 다윗을 감동시켜 어떻게 성경을 기록하게 했는지 우리는 그 이면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편의 기록이 일반 다른 성경의 역사에 없다고 해서 없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 대신 우리 일반 인간들이 볼 때는 지극히 작은 일로 한번 겪은 것을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지극히 큰 일로 기록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일반 신학자들의 고고학적 연구나 학문적 연구로 접근하게 되면 과장이거나 아니면 없었던 일을 적은 것이라고 하기 쉽다. 성경신학이나 주석의 내용들을 한번씩 볼 때마다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참고로 말씀드렸다.
3. 질문하신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마27:46, 막15:37 등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다. 다윗이 시22:1을 기록한 것이 마27:46과 우연히 일치한 것이 아니다. 시편을 기록한 분도 하나님이며 마태복음을 기록한 분도 하나님이다. 말하자면 오른 손으로 시편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왼 손으로 마태복음을 기록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시22:16에서 '개들이 나를 애워쌌으며' 22:18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등 자세하게 살펴나가면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며 성취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신학 교과서 기록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질문자처럼 조금 주의 깊게 성경을 보면 성경을 읽는 분들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4. 질문자의 성경 읽는 차원이 좋은 단계로 접근하고 계신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읽으시는 구절에 무슨 말씀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도 자세하게 훑어보시고, 또 그 구절 바로 앞에서 이어지는 전체 내용 흐름도 유심히 보셔야 한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마태복음에서 주의 깊게 눈여겨 본 말씀이 이렇게 시22:1 이하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읽으시고 비교하시고,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등을 조금 생각해나가다 보면 그렇게 읽으시는 분, 그 본인이 바로 성경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대하며 바로 배우지 않고, 성경신학이라는 수백페이지 교과서 몇 권을 뒤져가며 신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그런 주제 몇 개를 파악하는 것으로 일반 신학교에서는 성경신학이라고 가르친다. 질문자의 자세는 성경신학을 신앙으로 공부하는 자세이고, 후자의 경우는 성경신학을 세상학문으로 상대하는 일이다.
앞으로 모든 성경을 읽으실 때 늘 말씀들의 연결에 주의하시되, 마태복음과 시편에서 이렇게 한번 일치 된 것만 비교하지 마시고, 이런 내용이 창세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까지 연결을 찾아내시고 그 후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비록 그런 표현들이 일일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성경에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교회를 면면히 이어온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기록에는 그런 구원의 내면이 있었다는 것까지 봐야 한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성경을 '연결'이라는 측면에서만 공부하기 쉬운데 이렇게 공부하면 체계화와 넓은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만 한 말씀 자체가 주는 좁고 깊은 세계를 파악하는데 소홀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셔서 이 시대 주님 소원하는 귀한 말씀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
(/pkist.net/문의답변/382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