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주해사전 (5600개)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 성경 40마태복음02:09
서기 0 22
(질문) 예수님 탄생시 동방박사와 목자가 온 것이 동일 사건인지 아니면 다른 사건인지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가 오고 누가복음에는 목자들이 온다. 이부분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하나님께서 마태복음을 통해 하실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을 통해 하실 말씀이 있다 했는데 그렇다면 그 동방박사와, 목자 사건을 한 사건으로 보는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다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할까?


(답변) 목자들도 왔고 동방박사들도 왔다.

1. 요20:30-31과 딤후3:16에서 성경기록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고하게 잡으셨으면
① 성경 기록은 당시 기록의 전부가 아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②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에 쌓아 둘 수 없는 양이다.
요21:25,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부족할 줄 아노라'

③ 기록된 내용은 우리 '교육용'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④ 예를 들면 창4장은 두 사람만 필요했습니다.
'가인과 아벨만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고 '가인과 아벨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2. 위의 원칙을 가지고 질문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
①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계된 교훈을 넓은 면에서 살피고 있다.
마태복음 2장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 하나님께서 직접 오시던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주님이 오시기 전 구약교회를 이끌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던 지도부는 왕의 주변에 서성거리며 지위와 권세와 대접만 받고 있었지 오시는 주님을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짐승으로 취급하던 이방인들이 하늘의 뜻을 살피다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 분이 오셨다는 것을 통고받게 된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썩었고 특히 그들을 책임진 지도부가 얼마나 썩어빠졌는지를 말씀한다.

구원 밖에 있던 자들이 은혜로 구원 길을 보게 되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길을 가르쳐 줄 분들이 아닌가 해서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눈을 열어 믿게 한 이방인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이미 알아차리고 따라왔는데, 구약교회의 지도급들은 그제서야 서둘러 신학상식을 동원해서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짐작을 하게 된다. 그들의 신학상식은 성경을 상대한 것이었으나 영감에 붙들린 평소의 순점L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용된다.

나귀를 통해서라도 선지자를 깨우쳤지만 결국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방 불신자들, 성경을 알지도 못하는 초보들을 통해서라도 주님을 모실 기회가 있었던 교계 지도부들은 그들을 따라 나서지 않고, 그 순간부터 마지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까지 끝까지 예수님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들이 가졌던 세상에 좋은 조건들이 그들에게는 구원이고 하나님이었다.

자기 백성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을 구원할 구주가 오셨는데 버선발로 뛰어 나와 엎드려 모실 연구는 하지 않고 교묘하게 없애 죽일 연구만 하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출생은 베들레헴이었지만, 그 젖먹이 시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는 안 될 애굽으로 가서 숨어 살아야 했다. 중국선교사 한분의 말씀에, 오늘 이 나라가 기독교국가가 된다면 참으로 바로 믿으려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그 표현을, 혹 비유가 너무 심하지 않았나 라고 반론하실 분이 계실 것 같다. 심한 것이 아니고 그 표현이 너무 부드럽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안에서 출생하셨다가 그 목숨을 건지려고 애굽나라, 이스라엘의 반대쪽에 있는 애굽에서 그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은 그냥 읽고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천주교가 그 어두운 시대에 지방 일개 목회자 한 사람이 옳은 복음을 전하자 뒤따라 나서기는커녕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 루터 칼빈의 시대분위기였다. 오늘 어느 교단 어느 시대의 교회라 해도, 교계의 지도부가 세상이 좋아하는 돈과 명예와 권세에 맛을 들이고 나면 그 교계 지도부가 교인들을 구원 길로 인도 하기는 커녕 구원 길을 박멸해서라도 자기 현 세상살이 좋은 것을 유지하려고 새로 돋아나오는 진리운동을 없애게 된다. 신사참배 문제로 이 나라 해방 후 형편이 그러했다. 오늘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교계의 지도부는 세상 정권들도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사회 저명가들이 되어 있다. 그들이 옳다는 것은 틀린 것이 많고, 그들이 틀렸다는 것에는 옳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마태복음 2장의 예수님 출생에 관련된 기록은 그 표현 하나하나를 놓고 오늘 우리가 믿어가야 할 길에 어떤 면을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려면 그 양이 너무 많지만, 누가복음 2장과 바로 비교하되 목자와 동방박사들의 기록 문제를 놓고 살펴보려면 이 면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②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 탄생에 관계된 은밀하고 깊은 신앙 내면을 가르치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출생했을 때, 예수님의 위치는 뉠 곳이 없어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구유에 자리를 잡았다. 이 낮아짐 이 가난 이 천대 이 멸시가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출발 모습이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낮아지시고 모멸당한 모습을 세밀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구유에 눕기까지 당한 과정도 그러했지만 이 분을 알아보고 찾아와서 자기 구주로 영접했던 이들을 현미경으로 자세하게 살피고 있는 것이 누가복음 2장이다. 누가복음 2장에서는 동방박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일반 교인 된 우리들, 교계의 지도자나 신학자나 유력한 부흥사가 아닌,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매일 생활 속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평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 시간에 마태복음 2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왕궁 내 상황은 먼 나라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왕이 교계지도자들을 불러 국가적 비상사태를 맞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거창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 베들레헴은 왕궁에서 진행되고 있던 잘난 사람 높은 사람 신학자 교계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나 아니면 죽여 없애버리냐, 이 구주탄생이 사실이냐 위장이냐 착각이냐 이런 것을 의논하던 것과 전혀 세계가 다른 세계였다. 베들레헴에 있던 목자들은 그냥 내 현실 속으로 오신 주님, 나에게 천하고 고생하는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그날 밤도 자기 맡은 바 신앙의 식구들을 위해 땀 흘려 전도하고 가르치고 이리로부터 자기 신앙식구를 지키기 위해 긴장하며 그런 현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던 그들에게 그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주님 나심을 알려 그들의 그 현실 그 자리에서 주님을 모시게 되었다.

우리들의 구원 성공은 국가를 통치하는 최고위직 왕궁에 서성거리고 그들의 결정으로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는 그런 고위직에 있지 않았고,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그 시대의 교계지도자로 존경받는 총회장직에서 구원성공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 중에 진정으로 이 시대 교인으로서 자기 구원을 잘 이루어 하늘나라 하나님 앞에 지극히 존귀한 자로 영접 받게 되는 것은 교단 지도부에 진입을 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하가 어지럽고 천하에 좋은 자리 모두들 부러워하는 목회성공 훌륭한 교인 되는 그런 길에 있지 않고 모두들 깊이 잠든 그 순간에도 말씀으로 묵묵히 자기 맡은 교인 하나를 돌보는 바로 그에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에서는 목자들에 대한 기록에 이어 바로 성전에서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던 시므온, 84년간 과부로 홀로 살며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주님만을 사모하던 100세가 넘었던 안나와 같은 이들이 주님을 영접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목자나 시므온이나 안나는 모두들 마태복음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국가적 큰 방향과 상관없이 한 개인 개인이 조용히 은밀히 주님과 동행하며 자기 구원을 바로 이루어가는 면을 가르치고 있다.

③ 눅2장과 마2장을 별도로 기록한 내용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다.
교계의 지도자, 신앙의 인도자의 눈이 하나 잘못되면 온 나라에 임한 구원이 애굽으로 쫓겨 가게 되고, 교회 안에서는 주님을 찾아 볼래야 찾을 수도 없는 이런 상황이 생긴다. 여기서 교회의 지도자 신앙의 인도자 한 사람의 중요성이 얼마나 크다는 것도 알 수 있고

그렇든 말았든 주님만 바로 보고 구원의 현장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고 또 주님 앞에 모든 것을 의논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무명의 신앙인들은 그 당시 세상은 알지 못했으나 또 교계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의 구주가 해외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그들은 자기 주님을 모시는 일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늘 교계 지도자가 된 자들이 회개할 바와 조심할 바와 오늘 교계 지도자를 향해 일반 교인들이 알아야 하고 조심할 바와 그리고 오늘 못난 교인으로 믿고 가는 우리들이 지도자를 탓할 것 없이 구원에 있어서는 내 구원 손해 보지 않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여러 면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 보았다. 따라서 이 동방박사의 일과 목자들의 일은 단순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한 다음 글자의 개수와 알파벳의 배열이 맞지 않으니까 성경기록의 착오가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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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문) 그러면 4복음의 차이까지 포함하여 모든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봐야하는지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들 4복음서들의 차이점까지 그 모든 것들을 역사적 사실로 봐도 되겠는가? 실제로 모두다 하나하나 이 땅에 있었던 일로 봐도 되겠는가? 신학교에선 구약에 이적과 기적이나 사복음서에서 있었던 일도 하나의 문학으로 표현할 때도 가끔 있는 것 같다.

신학교에선 성경의 오류같이 보이는 것들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 같다. 그 해석 중엔 구약에 출애굽은 하나의 문학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기적을 베 풀때 사람이 이만명정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모두 들리게 설교를 하셨을까? 뭐 이런 것들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해석을 할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성경에 나오는 일점일획의 말씀도 모두가 실제로 일어난일로 봐도 될까,아니면 신학교에서처럼 합리적으로 해석해야할까, 아니면 정말 무대포 신앙으로 그 모든 말씀이 이 땅 위에 실제로 일어난 말씀으로 봐도 될까? 4복음서의 차이가 나는 어떤 사건의 부분도 분명 모두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어난 말씀으로 봐도 될까? 성경66권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실제 이 모든 땅에서 일어난 일로 봐도 될까?

신학을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져가는 제 자신을 발견한다. 특히 사복음서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것이 많은 것 같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다른 관점으로 해석을 했다는데 된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어떻게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건지. 제가 보기엔 사복음서의 모든 말씀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모든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답변을 부탁드린다.



(답변) 과학적 기준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다.

1. 성경에 이런 표현들이 있다.

① 관련 몇 성구
유1:4 : '가만히 들어온 사람'
요10:1, 12 : '절도, 강도, 삯군'
마7:15 : '거짓선지자'
벧후3:4 : '기롱'하는 자

'믿는 사람'이란? '목사'란? 그리고 '신학자'란?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한번쯤 살필 때다.
성경에 나를 맞추고 따라가면 성경을 '믿는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들은 예배당을 출석하는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지식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성경이 말씀한 것만 살펴서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사람을 기르겠다는 직업을 목회자라고 한다. 한 교회의 책임자가 되고 그 교회 강단에 올라가는 사람이면 무조건 목회자라고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름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붙이든, 목회자의 일을 하는 사람이 목회자다.

목회자를 가르치는 곳을 신학교라 하고, 가르치는 선생을 신학자라 한다. 그러나 성경을 믿지 못하거나 믿는다 해도 주저하는 사람을 확실하게 믿도록 만들면 목사를 기르는 신학자가 될 것이고, 만일 성경을 주저 없이 믿던 학생을 신학교 강의실에서 폭 삶아서 주저하게 만든다면 그가 바로 성령의 불을 꺼버리는 소방수고, 그의 그런 행동은 가만히 넘어 들어온 자의 행동이며, 그는 분명히 거짓선지자 노릇을 하는 기롱하는 자다. 무참하게 그 행동을 단죄해도 좋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③ 위 성구의 공통점은 인간 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려 한다.
인간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신화와 전설로 만들거나 아니면 이솝 동화책으로 만들려고 한다. 또 될 수 있으면 자연과학이나 일반 역사자료에 꿰맞추어 그런 근거 때문에 조금 믿으려고 하는 정도다. 이런 신앙을 인본주의 신앙이라고 한다. 인본주의란 인간이 하나님을 판단해서 인간 중심으로 믿겠다는 것인데, 인본주의신앙이란 불신자들의 종교학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독교는 아니다.

이곳이 건설구원을 몰랐더라면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전부 지옥에 갈 불택자라고 비판을 했을 것인데, 천만다행으로 이곳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알기 때문에 그들도 '대부분' 택자들인데 미혹에 빠져 지금 귀신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④ 현재 국내에서 신학교를 대학이나 대학원으로 정식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교육법''고등교육법'에 의하여 신학교가 단군사상으로 인간을 기르겠다고 약속하고 시설과 교수진을 교육부 기준에 맞추면 '신학대학교' 또는 '신학대학원'을 허가해주고 학사와 석사 또는 박사과정을 인정해준다. 이 자격증들은 세상에서 그대로 다 공인을 받는다.

생명 걸고 참으로 믿고 따르며 주님 위해 사는 종들은 성경과 기도와 설교와 전도만 하고 살기 때문에 학문을 모르고 학위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신학교를 정규 대학으로 설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학벌 만능주의의 교회가 참 신앙을 가르칠 신학교는 버리고 세상 기준에 맞는 신학교를 찾는다. 그곳에는 세상 교육부 기준에 맞는 교수님들이 신학자의 이름으로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냥 다 삶아버린다. 그 속에서 삶기지 않을 사람은 마치 가마솥에 들어간 콩이 불가마를 이기는 것과 같아서 통계적으로 이기고 나온 사람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⑤ 이미 다니고 계신다면 그대로 공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질문자 및 질문자와 비슷한 환경에 계신 분들이 아셔야 할 것은 자기가 소속 하고 다니는 곳이 평양인지 1970년대 모스크바인지 아니면 타락 전 에덴동산 안인지 알고 다녀야 할 것 같다.

훗날 잘못 배워서 나는 신앙에 손해를 봤다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대꾸를 하지 않는다. 자유성을 가지고 원해서 듣고 좋아서 따라갔지 않느냐고 문책하신다. 애굽의 바로왕궁에서 자란 모세처럼, 바벨론 느부갓네살 치하의 다니엘처럼 눈을 부릅뜨고 매일 기도하며 자기의 외형과 외모는 그들에게 맡겨져 있어도 자기의 내부 속마음은 티끌 하나 범접할 수 없는 성결을 유지하시기를 권한다.

답변자도 그런 세월을 잠깐 지나봤다. 질문자나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의 신학교 노선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국내 최고 보수신학교라고 하는 곳의 분위기는 한번씩 접촉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도 횡설수설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그런 보수신학교를 조금 벗어낫다 하면 그때부터는 팔을 걷어붙이고 삶아대고 있을 것이다.

신학교를 지원할 때는 성령에 충만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청년들일 것이니 그들에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말씀을 따라 가겠다는 정예 십자가 군병들인데, 신학교 강의실에는 미혹받은 교수들이 그 학생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타는 성령을 소방호수로 뿌려서 냉각을 시키고 그다음 그들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경제일주의 성경절대주의를 하나씩 뽑아 없애고 있다.

탄식이다.

2. 질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답변 드린다면
〈예수님이 오병이어기적을 베풀 때 사람이 이만명정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모두 들리게 설교를 하셨을까? 뭐 이런 것들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해석을 할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오병이어로 시비를 할려면 차라리 천지창조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것이 양심일 것이다. 우주를 말 한 마디로 만들었다는 말이 오병이어보다야 훨씬 더 새빨간 거짓말이다. 과학자의 시각에 의하면.

〈신학교에서처럼 합리적으로 해석해야할까? 아니면 정말 무대포 신앙으로 그 모든 말씀이 이 땅 위에 실제로 일어난 말씀으로 봐도 될까? 4복음서의 차이가 나는 어떤 사건의 부분도 분명 모두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어난 말씀으로 봐도 될까? 성경66권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실제 이 모든 땅에서 일어 난일로 봐도 될까?〉

'합리적'이라는 말은 인간들 머리로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제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믿고?
인간이 제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인간 머리에 맞도록 해석을 하고?

이것이 지금 질문자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의 문학적 해석이라 또는 합리적 해석이라는 표현의 핵심이다. 제 머리로 성경을 편집하고 가감하지 않으면 믿지를 못하겠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이라는 뜻이다. 불신자들도 신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냥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흔하다.

〈신학을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워져가는 제 자신을 발견한다.
특히 사복음서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것이 많은것 같다〉

사복음서의 기록 착오 정도에서 혼란스러우면 그보다 더 뜨거운 7배 뜨거운 풀무불에서는 어찌 견디실런지? 과거 신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만나 뵙던 하나님, 그때 실제 동행했던 하나님, 내가 어려울 때 친히 그 손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셨던 그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만 굳게 붙드시고 그 하나님을 흐리게 만들고 멀게 만드는 사람과 학문이 있다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마음속에 단단히 이름을 새겨두셨으면 한다.


(/pkist.net/문의답변/363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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