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 성경 | 40마태복음2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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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6 10:08
4복음서에 다르게 기록한 부분의 이해, 돌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대화 상대가 다른 경우
(답변) 성경의 수없는 기록착오는 ‘차이’일 뿐이다. 기록해 주신 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다.
1. 우선 본문을 정확하게 다시 살펴보겠다.
① 마28:1-7, 천사가 마리아와 이야기 하는 부분.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② 막16:1-6, 흰옷 입은 한 청년이 마리아와 이야기 하는 부분.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③ 눅24:1-7,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마리아와 이야기하는 부분.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2. 성경을 조금 유심히 보신 분들이면 누구라도 다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① 교회가 성경을 정확무오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부분이다.
일점일획도 가감 없고 정확무오 한 것이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은 출발하고 있다. 유교나 불교도는 그 경전에 흐르는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그 글의 일점일획의 정확성을 두고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는 그렇게 적을 수도 없고 그리 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을 믿고 아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확무오를 주장하게 되어 있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 착오는 착오에서 끝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② 질문 내용을 포함해서 성경에는 수도 없는 기록착오가 있다고 보인다.
성경을 한 장 읽고 나면 읽은 것은 잊어버리고, 그다음에 읽고 있는 내용만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분들은 이런 의문점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읽은 것과 뒤에서 읽은 부분을 비교하되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이 곳과 저 곳의 말씀을 자꾸 맞추어보는 분들에게는 당장에 모순으로 지적되는 부분이 한도 없이 많다. 질문하신 내용도 대표적인 부분 중에 하나다.
질문하시는 분의 입장은 단순한 질문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부분은 신앙을 반대하는 교회 밖의 분들과 또 기독교 내에서도 순수 신앙을 거부하는 분들이 성경은 있는 그대로 다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때마다 예를 드는 부분이다.
③ 이번 질문자께서 마주친 경우와 같이, 잘 모르는 문제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질문 내용 자체를 답변 드리기 전에, 질문자께서 마주친 경우처럼 잘 알지 못하시는 성경 내용을 질문 받는 경우, 그런데 상대방이 그냥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성경 내용이 이렇게 모순이 있으니 기독교라는 것도 인간들이 기술로 만든 그런 종교 중에 하나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질 때, 질문 내용 자체는 잘 몰라도 일단 이런 답변을 드렸으면 한다.
우선,
'질문 받은 그 내용은 내가 봐도 모순 같다.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또 내가 봐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학 공식은 공식이고, 내가 설명하지 못하고 내 수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수학 공식은 내 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공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인지, 좀 알아 봐야겠다'
고 답변하는 것이다. 솔직한 것이 옳다. 그러나 연구해 볼 문제이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을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고 그분이 기록한 성경이라면 틀리지 않을 터인데, 인간들이 대충 만들어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여러 모순이 많다고 한다면, 오히려 인간들이 이렇게 아무나 조금 생각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냥 탄로날 뻔한 일을 그냥 기록했겠는가, 이왕 종교를 하나 멋지게 만들어 보려고 마음먹고 글을 적는 사람들이라면 앞에 나온 성경들을 보면서 그 기록에 맞도록 가감을 해버리지. 또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지를 못해서 착오가 있었다면 교회가 성경 전체 내용을 하나로 맞추어 내놓을 수 있는 힘과 여건이 주어졌던 그 수백년 또는 1천년 이상 계속된 초대교회 중세교회 시절에 그렇게 해버리면 간단했을 것인데, 왜 그대로 두었는가?'
나도 잘 모르지만, 좀 더 차원 높은 신앙에서 볼 때는 이 기록과 저 기록이 착오가 아니고 일치기 때문에 그냥 둔 것이라고 봐야 더 상식에도 맞을 것 같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셨으면 한다. 대개 성구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분들은 냉정하고 이지적이며 분석적이고도 내심 판단에 장점을 가진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 설명에 자신이 없을 때는 오히려 그분들의 의문에다가 반론의 첫 걸음만 던져두고 숙제를 그분들에게 풀어보도록 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딱 잘라 말해서, 기독교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아버님 수준에서도 단번에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이 부분을, 성경을 기록하면서 몰랐고 또 성경이 배껴 적으며 전해 오면서 그냥 놔둘 리가 있겠는가? 아버님이 교주시라고 해도 당장에 이 부분을 표시 없이 맞추라고 하지 않겠는가? 현대 사회는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고대 중세 사회에서는 아주 쉬웠던 일이다.
3. 질문하신 내용을 직접 살펴보겠다.
① 3곳의 내용이 모순이 될 수 없는 여러 의견 중 한 가지만 예로 들겠다.
우선 이번 질문 내용에 대하여는 그 성경적인 해석이나 뜻을 살피지 않고 또한 3곳 성경의 기록은 이렇게 봐야 한다고 단정하지도 않겠다. 단지 이렇게 본다면 전혀 모순이 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하나의 가능성만 말씀드리겠다.
이렇게 설명 드리려는 것은,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그 수를 다 헤아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한 문제씩을 따로 놓고 설명하려면 기회나 시간문제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원리만 알게 되면 그 모든 모순들이 다 해결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몇 가지 원리 중 하나정도만 여기서 설명해 드리고, 그다음 문제들은 읽으시는 분들이 스스로 시야를 넓혀서 해결해 보셨으면 하는 것이다.
② 천사가 청년으로 나타났다. 천사는 그 신분을 말했고 청년은 그 외형을 말한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천사가, 마가복음에는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다. 천사는 영물이기 때문에 원래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나타나서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천사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주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창18장 1-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람 3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16절과 22절에서는 둘은 소돔으로 가고 하나는 아브라함과 마주 대하고 있다. 그가 바로 여호와였다. 33절에 아브라함과 마주하던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고 했다. 그리고 19장 1절에서는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롯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과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성경에 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천사'로,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청년'으로 기록된 것은 모순이나 착오가 아니다. 그 정체가 천사니까 천사라고 했고, 그 천사가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청년으로 표시한 것이다. 나 한 사람을 두고 사위가 왔다 갔다고 일기에 적고 아들이 왔다 갔다고 일기에 적은 두 아버지가 있다면 한 분은 장인이고 한 분은 친 아버지일 것이다.
어느 기준에서 누구 시각으로 어떤 면을 강조했느냐는 것이 다를 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모순이나 착오로 보지 않고, 왜 하나님께서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천사로 기록하고 또 마가복음을 통해서는 한 청년으로 기록했을까를 두고 기도하고 살펴보는 것이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③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하나가, 누가복음에서는 둘이 나타났다.
성경 기록은, 회의록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회의록이라면 누가 어떤 발언을 하고 그 당시 누가 동의를 했으며 그 결정에 가부는 몇대 몇이라고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부활 직후의 상황을 만일 회의록으로 남기지 않고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 이치로 기록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자세하게 기록될 것이고 그 목적과 상관없는 부분은 통합해서 표현하거나 아니면 누락까지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집을 사겠다는 상대방에 대하여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부부가 의논해 본 뒤, 최점{으로 두 부부가 응접실에서 복덕방 주인을 만나서 안 판다고 통고했다면, 복덕방 주인이 그 집을 사겠다는 손님에게 '찾아 갔는데 그 집 주인이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고, '찾아 갔는데 두 부부가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고, '찾아 갔는데 온 집 식구들이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 된다.
비록 남편이 주로 말을 했고 또 아내가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고 해도, 얼른 볼 때 그 집의 결정은 남편이 확실하게 주도를 하는 경우, 그 남편과 이야기 한 내용만을 전해도 맞는 말이다. 아내의 곁말은 배경 음악으로 또 맞장구 정도로 들었다면 '아내 없이 남편 혼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고 단순하게 그냥 '아이, 그 집 남자가 아주 안 되겠다고 하더라'고 말한다면, 아내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을 뿐이지 맞는 말이 된다.
또 두번째로 예를 든 것처럼 두 부부가 거절했다고 할 때, 남편과 아내 중 누가 가정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는지 또 그 가정의 대표적 발언은 누구인지에 중심을 두지 않고 단순히 이야기 하던 모습을 중심으로 보고할 때는 '두 부부가 거절하더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세번째로, 그 집 자녀들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거절하는 내용이 온 집 식구들의 의견이 있었고 남편이 최종적으로 안 된다고 통고를 했다면, 그 결정에 이르게 된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입장을 중심에 두고 말을 한다면 '온 집 식구들이 다 거절했다'고 말을 해도 맞는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 그 집 식구들이 다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고 표현한다면 거짓말이 되겠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회의록으로 기록했다면 당시 무덤에 출석한 회원이 몇 명이며 누구 누구이며 발언권을 가진 회원과 방청객을 따로 표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면이 따로 있고, 마가복음을 통해서, 또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내용을 3개의 복음서로 기록해 주셨다.
그것의 표현과 기록이 일치되어 후세에 가짜냐 진짜냐는 것을 막아야 될 필요가 있었다면 애초 한 권을 기록했을 것이고, 3권을 기록했다고 한다면 서로 짜서라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과 표현의 일치를 생명으로 하는 회의록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 면으로 또 저 면으로 각각 가르칠 것이 있어 3권의 복음서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표현과 기록이 차이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천사가 둘이 있었다는 누가복음과 하나 있었다고 기록한 다른 성경은 그 숫자로 따질 필요는 전혀 없다. 민22:21-35에서 한 자리에서 나귀와 선지자가 함께 앞을 보고 있었으나 나귀의 눈에는 보이는 천사가 발람 선지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천사의 존재다. 천사이기 이전에 무덤에 갔던 사람의 숫자, 무덤 속의 천사의 숫자, 그 주고 받은 대화의 모든 기록은 회의록이 아니라 어떤 면으로 우리를 가르치려고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④ 우리나라 지도를 꼭 같이 사실대로 그려도, 관광지도와 교통지도와 지형지도는 전혀 다르다.
관광지도에는 설악산 지리산 불국사 해인사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면이나 리까지도 기록되는 경우가 있는데 도청 소재지도 누락되는 관광지도가 허다하다. 수원 청주 대구가 빠진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하던 당시에 이 도시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도는 관광지도로 제작되었다는 제작 이유를 먼저 살필 일이다. 행정 지리 지도를 작성하면서 이런 도시들이 누락되었다면 그 당시 이 도시들이 존재했던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후 시대는 역사적 증거로 삼고 큰 의미를 부여하겠다.
관광지도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그려지게 되는 경우와 아주머니들 술 먹고 춤추는 관광지도로 그려지는 경우에 따라 아주 차이가 많아진다. 지형지도가 된다면 산과 강은 전부 지도에 등장하게 된다. 교통지도가 되면 오로지 도로를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지도의 사용용도, 목적, 이유를 먼저 살펴보셔야 한다는 것이다.
⑤ 설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도, 그 출생 모습도, 심지어 창세기로 계시록까지를 쭉 살펴보신다면, 그 기록과 표현의 차이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착오는 '착오'가 아니라 지도로 설명 드린 것처럼, 회의록으로 작성되었느냐 아니면 구원 목적의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했느냐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기록의 착오는 기록의 차이가 되고, 기록의 차이는 수없는 연구 과제를 우리에게 주고, 이 과제는 우리가 천국을 이 세상에서 준비하는 그 진리다. 우리는 그 차이 때문에 오해하고 의심하고 주저할 것이 아니고 그 차이 때문에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 배우고 깨닫기를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 차이들이야 말로 우리가 오늘 왜 열심히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 성경 속에 묻어 둔 또 하나의 열쇠다.
(/pkistnet/문의답변/1215번)
(답변) 성경의 수없는 기록착오는 ‘차이’일 뿐이다. 기록해 주신 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다.
1. 우선 본문을 정확하게 다시 살펴보겠다.
① 마28:1-7, 천사가 마리아와 이야기 하는 부분.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② 막16:1-6, 흰옷 입은 한 청년이 마리아와 이야기 하는 부분.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③ 눅24:1-7,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마리아와 이야기하는 부분.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2. 성경을 조금 유심히 보신 분들이면 누구라도 다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① 교회가 성경을 정확무오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부분이다.
일점일획도 가감 없고 정확무오 한 것이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은 출발하고 있다. 유교나 불교도는 그 경전에 흐르는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그 글의 일점일획의 정확성을 두고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인간으로는 그렇게 적을 수도 없고 그리 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을 믿고 아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확무오를 주장하게 되어 있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 착오는 착오에서 끝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② 질문 내용을 포함해서 성경에는 수도 없는 기록착오가 있다고 보인다.
성경을 한 장 읽고 나면 읽은 것은 잊어버리고, 그다음에 읽고 있는 내용만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분들은 이런 의문점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읽은 것과 뒤에서 읽은 부분을 비교하되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이 곳과 저 곳의 말씀을 자꾸 맞추어보는 분들에게는 당장에 모순으로 지적되는 부분이 한도 없이 많다. 질문하신 내용도 대표적인 부분 중에 하나다.
질문하시는 분의 입장은 단순한 질문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부분은 신앙을 반대하는 교회 밖의 분들과 또 기독교 내에서도 순수 신앙을 거부하는 분들이 성경은 있는 그대로 다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때마다 예를 드는 부분이다.
③ 이번 질문자께서 마주친 경우와 같이, 잘 모르는 문제로 질문을 받았을 때는?
질문 내용 자체를 답변 드리기 전에, 질문자께서 마주친 경우처럼 잘 알지 못하시는 성경 내용을 질문 받는 경우, 그런데 상대방이 그냥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성경 내용이 이렇게 모순이 있으니 기독교라는 것도 인간들이 기술로 만든 그런 종교 중에 하나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질 때, 질문 내용 자체는 잘 몰라도 일단 이런 답변을 드렸으면 한다.
우선,
'질문 받은 그 내용은 내가 봐도 모순 같다.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또 내가 봐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학 공식은 공식이고, 내가 설명하지 못하고 내 수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수학 공식은 내 수준이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공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인지, 좀 알아 봐야겠다'
고 답변하는 것이다. 솔직한 것이 옳다. 그러나 연구해 볼 문제이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을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하나님이 참으로 계시고 그분이 기록한 성경이라면 틀리지 않을 터인데, 인간들이 대충 만들어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여러 모순이 많다고 한다면, 오히려 인간들이 이렇게 아무나 조금 생각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냥 탄로날 뻔한 일을 그냥 기록했겠는가, 이왕 종교를 하나 멋지게 만들어 보려고 마음먹고 글을 적는 사람들이라면 앞에 나온 성경들을 보면서 그 기록에 맞도록 가감을 해버리지. 또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지를 못해서 착오가 있었다면 교회가 성경 전체 내용을 하나로 맞추어 내놓을 수 있는 힘과 여건이 주어졌던 그 수백년 또는 1천년 이상 계속된 초대교회 중세교회 시절에 그렇게 해버리면 간단했을 것인데, 왜 그대로 두었는가?'
나도 잘 모르지만, 좀 더 차원 높은 신앙에서 볼 때는 이 기록과 저 기록이 착오가 아니고 일치기 때문에 그냥 둔 것이라고 봐야 더 상식에도 맞을 것 같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셨으면 한다. 대개 성구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분들은 냉정하고 이지적이며 분석적이고도 내심 판단에 장점을 가진 분들이기 때문에 적극적 설명에 자신이 없을 때는 오히려 그분들의 의문에다가 반론의 첫 걸음만 던져두고 숙제를 그분들에게 풀어보도록 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딱 잘라 말해서, 기독교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아버님 수준에서도 단번에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이 부분을, 성경을 기록하면서 몰랐고 또 성경이 배껴 적으며 전해 오면서 그냥 놔둘 리가 있겠는가? 아버님이 교주시라고 해도 당장에 이 부분을 표시 없이 맞추라고 하지 않겠는가? 현대 사회는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고대 중세 사회에서는 아주 쉬웠던 일이다.
3. 질문하신 내용을 직접 살펴보겠다.
① 3곳의 내용이 모순이 될 수 없는 여러 의견 중 한 가지만 예로 들겠다.
우선 이번 질문 내용에 대하여는 그 성경적인 해석이나 뜻을 살피지 않고 또한 3곳 성경의 기록은 이렇게 봐야 한다고 단정하지도 않겠다. 단지 이렇게 본다면 전혀 모순이 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하나의 가능성만 말씀드리겠다.
이렇게 설명 드리려는 것은, 성경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그 수를 다 헤아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한 문제씩을 따로 놓고 설명하려면 기회나 시간문제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원리만 알게 되면 그 모든 모순들이 다 해결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몇 가지 원리 중 하나정도만 여기서 설명해 드리고, 그다음 문제들은 읽으시는 분들이 스스로 시야를 넓혀서 해결해 보셨으면 하는 것이다.
② 천사가 청년으로 나타났다. 천사는 그 신분을 말했고 청년은 그 외형을 말한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천사가, 마가복음에는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다. 천사는 영물이기 때문에 원래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나타나서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천사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가 있다. 주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창18장 1-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람 3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16절과 22절에서는 둘은 소돔으로 가고 하나는 아브라함과 마주 대하고 있다. 그가 바로 여호와였다. 33절에 아브라함과 마주하던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고 했다. 그리고 19장 1절에서는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롯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과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성경에 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천사'로,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청년'으로 기록된 것은 모순이나 착오가 아니다. 그 정체가 천사니까 천사라고 했고, 그 천사가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청년으로 표시한 것이다. 나 한 사람을 두고 사위가 왔다 갔다고 일기에 적고 아들이 왔다 갔다고 일기에 적은 두 아버지가 있다면 한 분은 장인이고 한 분은 친 아버지일 것이다.
어느 기준에서 누구 시각으로 어떤 면을 강조했느냐는 것이 다를 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모순이나 착오로 보지 않고, 왜 하나님께서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천사로 기록하고 또 마가복음을 통해서는 한 청년으로 기록했을까를 두고 기도하고 살펴보는 것이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③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하나가, 누가복음에서는 둘이 나타났다.
성경 기록은, 회의록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회의록이라면 누가 어떤 발언을 하고 그 당시 누가 동의를 했으며 그 결정에 가부는 몇대 몇이라고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부활 직후의 상황을 만일 회의록으로 남기지 않고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 이치로 기록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따라 필요한 부분은 자세하게 기록될 것이고 그 목적과 상관없는 부분은 통합해서 표현하거나 아니면 누락까지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집을 사겠다는 상대방에 대하여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부부가 의논해 본 뒤, 최점{으로 두 부부가 응접실에서 복덕방 주인을 만나서 안 판다고 통고했다면, 복덕방 주인이 그 집을 사겠다는 손님에게 '찾아 갔는데 그 집 주인이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고, '찾아 갔는데 두 부부가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고, '찾아 갔는데 온 집 식구들이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보고를 해도 맞는 말이 된다.
비록 남편이 주로 말을 했고 또 아내가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고 해도, 얼른 볼 때 그 집의 결정은 남편이 확실하게 주도를 하는 경우, 그 남편과 이야기 한 내용만을 전해도 맞는 말이다. 아내의 곁말은 배경 음악으로 또 맞장구 정도로 들었다면 '아내 없이 남편 혼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고 단순하게 그냥 '아이, 그 집 남자가 아주 안 되겠다고 하더라'고 말한다면, 아내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을 뿐이지 맞는 말이 된다.
또 두번째로 예를 든 것처럼 두 부부가 거절했다고 할 때, 남편과 아내 중 누가 가정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는지 또 그 가정의 대표적 발언은 누구인지에 중심을 두지 않고 단순히 이야기 하던 모습을 중심으로 보고할 때는 '두 부부가 거절하더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세번째로, 그 집 자녀들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거절하는 내용이 온 집 식구들의 의견이 있었고 남편이 최종적으로 안 된다고 통고를 했다면, 그 결정에 이르게 된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입장을 중심에 두고 말을 한다면 '온 집 식구들이 다 거절했다'고 말을 해도 맞는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 그 집 식구들이 다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고 표현한다면 거짓말이 되겠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회의록으로 기록했다면 당시 무덤에 출석한 회원이 몇 명이며 누구 누구이며 발언권을 가진 회원과 방청객을 따로 표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면이 따로 있고, 마가복음을 통해서, 또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면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내용을 3개의 복음서로 기록해 주셨다.
그것의 표현과 기록이 일치되어 후세에 가짜냐 진짜냐는 것을 막아야 될 필요가 있었다면 애초 한 권을 기록했을 것이고, 3권을 기록했다고 한다면 서로 짜서라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과 표현의 일치를 생명으로 하는 회의록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 면으로 또 저 면으로 각각 가르칠 것이 있어 3권의 복음서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표현과 기록이 차이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천사가 둘이 있었다는 누가복음과 하나 있었다고 기록한 다른 성경은 그 숫자로 따질 필요는 전혀 없다. 민22:21-35에서 한 자리에서 나귀와 선지자가 함께 앞을 보고 있었으나 나귀의 눈에는 보이는 천사가 발람 선지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천사의 존재다. 천사이기 이전에 무덤에 갔던 사람의 숫자, 무덤 속의 천사의 숫자, 그 주고 받은 대화의 모든 기록은 회의록이 아니라 어떤 면으로 우리를 가르치려고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④ 우리나라 지도를 꼭 같이 사실대로 그려도, 관광지도와 교통지도와 지형지도는 전혀 다르다.
관광지도에는 설악산 지리산 불국사 해인사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면이나 리까지도 기록되는 경우가 있는데 도청 소재지도 누락되는 관광지도가 허다하다. 수원 청주 대구가 빠진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하던 당시에 이 도시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도는 관광지도로 제작되었다는 제작 이유를 먼저 살필 일이다. 행정 지리 지도를 작성하면서 이런 도시들이 누락되었다면 그 당시 이 도시들이 존재했던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후 시대는 역사적 증거로 삼고 큰 의미를 부여하겠다.
관광지도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그려지게 되는 경우와 아주머니들 술 먹고 춤추는 관광지도로 그려지는 경우에 따라 아주 차이가 많아진다. 지형지도가 된다면 산과 강은 전부 지도에 등장하게 된다. 교통지도가 되면 오로지 도로를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지도의 사용용도, 목적, 이유를 먼저 살펴보셔야 한다는 것이다.
⑤ 설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도, 그 출생 모습도, 심지어 창세기로 계시록까지를 쭉 살펴보신다면, 그 기록과 표현의 차이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착오는 '착오'가 아니라 지도로 설명 드린 것처럼, 회의록으로 작성되었느냐 아니면 구원 목적의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했느냐는 것으로 이해를 한다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기록의 착오는 기록의 차이가 되고, 기록의 차이는 수없는 연구 과제를 우리에게 주고, 이 과제는 우리가 천국을 이 세상에서 준비하는 그 진리다. 우리는 그 차이 때문에 오해하고 의심하고 주저할 것이 아니고 그 차이 때문에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평생 배우고 깨닫기를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 차이들이야 말로 우리가 오늘 왜 열심히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 성경 속에 묻어 둔 또 하나의 열쇠다.
(/pkistnet/문의답변/121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