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성경 | 40마태복음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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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6 09:26
마태복음 1장은 믿음의 계통으로, 누가복음 3장은 혈통으로 보셨으면.
1.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를 적고 있으며, 누가복음 3장은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75대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만을 두고 말한다면 55대다. 두 곳의 족보는 사람의 이름도 문제지만 그 숫자도 뚜렷이 다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이 정확할 수 없고 엉망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늘 예로 드는 문제다.
2. 성경은 그 기록이 우리나라 족보책과 같은 차원에서 기록된 족보전문서가 아니다.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은 너무나도 차이가 많다. 일부러 틀리게 하려고 하지 않고는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날 수 없고 또 술에 한껏 취해서 적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틀릴 수는 없다. 성경은 그 기록의 목적이 우리나라 족보책과 같은 차원에서 기록된 족보전문서가 아님을 먼저 참고하셨으면 한다.
우리나라 족보책은 그 집안 조상 한 명으로부터 내려온 자녀 전부를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족보책에 이름이 올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집안에 출생한 적이 없다는 증명이 가능하게 되는 정도다. 가문을 중심으로 인생사 전부를 엮어오던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서적 형태다.
그렇다면 성경도 인류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또 이스라엘의 직계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때까지의 정확한 족보기록에 목적을 두고 기록이 되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족보 2가지 기록만을 가지고도 아주 몹쓸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조상의 숫자가 전부 기록되고 출생의 연결이 100% 이어지는 족보책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구원의 이치를 위해 기록해 주셨다.
따라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족보적 정확성에 있지 않고 구원에 필요한 말씀으로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42대로 기록하여 적게 되는 이유가 있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75대를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를 살피고 그래서 그 조상의 이름들 중에 빠지고 들어간 사람들을 세밀히 살펴 연구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를 찾아가는 자세가 된다.
3. 마태복음의 족보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이며, 누가복음은 육체적 조상이다.
예수님의 출생은 비록 하나님이시라도 육체를 입고 오셨고 그 육체는 아무 혈통을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알리시고 가르쳐야 할 필요에 따라 필요한 혈통을 만들어 내려오셨고 일부러 아브라함의 계통에서 출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으로 나타난 예수님 육체의 계통은 단순히 누구가 조상이라는 정도에서 그칠 수 없고 왜 12아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유다같은 부도덕한 아들을 통해 계통을 이었으며 왜 이런저런 조상을 그 계통에 이름을 올려놓았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전체적으로 마태복음은 믿음의 조상으로 내려온 계통이기 때문에 육체의 출생 대수와 계통은 필요가 없는 경우 생략을 했다.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바울을 낳고 바울이 디모데를 낳았다고 한다면 육체적 혈통으로는 성립될 수 없으나 믿음 계통으로는 정확한 기록이 되어진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보이는 육체 범위에서 신앙계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대개 육체의 혈통과 믿음의 계통이 한 사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계통과 육체의 계통이 완전히 분리되어 내려오지 않고 가다가 한쪽에서는 몇 명이 빠지기도 하고 또 중도에 다시 한 사람으로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다.
이삭이나 야곱은 그 아버지에게 육체로도 또 신앙으로도 대를 이어가고 있는 자녀가 되고 있으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꼭같이 연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 다윗의 육체 혈통이며 또한 신앙의 계통이지만 육체 혈통은 나단으로 기록되고 마태복음에서 신앙계통으로만 다윗을 잇고 있음을 기록해 주신 것은,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를 구약에서 해석할 수 없는 점까지 신약에서 보충하고 또 필요한 대목을 가르치고 있다.
유다와 요셉이 야곱의 계통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1. 유다와 요셉의 관계는 보다 넓게 보셔야 한다.
①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 나라의 계통을 점령하고 복 받는 이름이다.
야곱의 혈통적 장남은 르우벤이다. 대상5:1에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어떤 경우에도 출생 순서로만 본다면 르우벤은 장남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첫 출생이었으나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받지 못했고 에서도 장자였기 때문에 통째로 굴러오는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일없이 받을 줄 알았다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뺏기는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장자의 명분이 어떠함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 복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자로 내려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고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변경시켜 주실 수도 있으며, 에서와 같이 장자의 명분을 망령되게 여기는 경우 다른 아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있다.
② 요셉의 경우, 그의 신앙행적은 과연 열두 아들 중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
요셉의 경우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높이 들어쓰려고 꿈으로 두번이나 계시해 주셨으니 이미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가도록 되어 있었고 또한 그 예언대로 요셉이 17세 이후 아버지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갔고 이후 애굽을 구한 다음 야곱의 집 전체를 구하는 순서로 걸어가게 된다. 두말 할 것 없이 요셉은 야곱시대에 야곱의 12아들 중에 '그 역할과 기능'으로 본다면 뚜렷히 장자를 감당했으며 이 공로를 그대로 인정하신 것이 바로 12지파 중에서 요셉은 분깃도 2배를 주어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삼촌들과 같은 서열에서 12지파 중 2지파를 차지하였고 야곱의 원래 12아들 전체 중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③ 유다는, 요셉과 달리 이스라엘의 앞날을 두고는 영원한 구원의 지파가 될 신앙이 있었다.
그 당대만으로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두고는 요셉과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이 있었다. 야곱 시대만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형제와 약간 표가 날 몇몇 장점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12아들 중에 하나였고 요셉은 12아들 중에 단연 하나밖에 없는 대표였다. 그러나 야곱의 당대에 외부적으로 표시가 나는 면으로는 그러했지만 유다에게는 장차 예수님의 구원계통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정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장자가 될 수 있는 움싹이 있었다.
반면에 요셉은 야곱 당대만 본다면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요셉의 신앙은 '자손으로 이어지며 자라가는' 신앙의 성질을 가지지 못했다. 요셉 한 사람이 자기 당대에 신앙의 사람으로는 성경역사 전체를 통해 어느 인물보다도 성자의 모든 요소를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후손으로 이어지며 점점 자라가는 신앙의 면을 주지 않았다.
⑤ 따라서, 신앙은 오늘 나타난 것과 함께 그 나타날 앞날의 움싹도 함께 보아야 한다.
오늘로 예를 든다면, 손양원목사님이나 김현봉목사님과 같은 분은 그분들 자신의 단독 성화와 경건면을 본다면 참으로 기독교 역사상 한 세대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고 끝이났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복음역사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사람은 아주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도 신앙이지만 그의 신앙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계통적 은혜가 있어 그의 신앙 후손으로 세계교회를 옳고 바르게 잡고 나올 수 있었던 역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유다가 어떤 면에서 역사로 이어지면서 가면 갈수록 그 신앙의 실상이 크게 나타나게 되고 다윗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원의 유다지파라는 이름으로 늘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다른 기회에 크게 연구해 볼 제목일 것이다.
(/pkist.net/문의답변/882번)
1.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를 적고 있으며, 누가복음 3장은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75대이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만을 두고 말한다면 55대다. 두 곳의 족보는 사람의 이름도 문제지만 그 숫자도 뚜렷이 다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이 정확할 수 없고 엉망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늘 예로 드는 문제다.
2. 성경은 그 기록이 우리나라 족보책과 같은 차원에서 기록된 족보전문서가 아니다.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은 너무나도 차이가 많다. 일부러 틀리게 하려고 하지 않고는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날 수 없고 또 술에 한껏 취해서 적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틀릴 수는 없다. 성경은 그 기록의 목적이 우리나라 족보책과 같은 차원에서 기록된 족보전문서가 아님을 먼저 참고하셨으면 한다.
우리나라 족보책은 그 집안 조상 한 명으로부터 내려온 자녀 전부를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족보책에 이름이 올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집안에 출생한 적이 없다는 증명이 가능하게 되는 정도다. 가문을 중심으로 인생사 전부를 엮어오던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서적 형태다.
그렇다면 성경도 인류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또 이스라엘의 직계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때까지의 정확한 족보기록에 목적을 두고 기록이 되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족보 2가지 기록만을 가지고도 아주 몹쓸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조상의 숫자가 전부 기록되고 출생의 연결이 100% 이어지는 족보책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구원의 이치를 위해 기록해 주셨다.
따라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족보적 정확성에 있지 않고 구원에 필요한 말씀으로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42대로 기록하여 적게 되는 이유가 있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75대를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를 살피고 그래서 그 조상의 이름들 중에 빠지고 들어간 사람들을 세밀히 살펴 연구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를 찾아가는 자세가 된다.
3. 마태복음의 족보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이며, 누가복음은 육체적 조상이다.
예수님의 출생은 비록 하나님이시라도 육체를 입고 오셨고 그 육체는 아무 혈통을 그냥 사용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알리시고 가르쳐야 할 필요에 따라 필요한 혈통을 만들어 내려오셨고 일부러 아브라함의 계통에서 출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으로 나타난 예수님 육체의 계통은 단순히 누구가 조상이라는 정도에서 그칠 수 없고 왜 12아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유다같은 부도덕한 아들을 통해 계통을 이었으며 왜 이런저런 조상을 그 계통에 이름을 올려놓았는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전체적으로 마태복음은 믿음의 조상으로 내려온 계통이기 때문에 육체의 출생 대수와 계통은 필요가 없는 경우 생략을 했다.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바울을 낳고 바울이 디모데를 낳았다고 한다면 육체적 혈통으로는 성립될 수 없으나 믿음 계통으로는 정확한 기록이 되어진다. 구약은 기본적으로 보이는 육체 범위에서 신앙계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대개 육체의 혈통과 믿음의 계통이 한 사람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계통과 육체의 계통이 완전히 분리되어 내려오지 않고 가다가 한쪽에서는 몇 명이 빠지기도 하고 또 중도에 다시 한 사람으로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다.
이삭이나 야곱은 그 아버지에게 육체로도 또 신앙으로도 대를 이어가고 있는 자녀가 되고 있으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꼭같이 연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 다윗의 육체 혈통이며 또한 신앙의 계통이지만 육체 혈통은 나단으로 기록되고 마태복음에서 신앙계통으로만 다윗을 잇고 있음을 기록해 주신 것은,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를 구약에서 해석할 수 없는 점까지 신약에서 보충하고 또 필요한 대목을 가르치고 있다.
유다와 요셉이 야곱의 계통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1. 유다와 요셉의 관계는 보다 넓게 보셔야 한다.
①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 나라의 계통을 점령하고 복 받는 이름이다.
야곱의 혈통적 장남은 르우벤이다. 대상5:1에서도 이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어떤 경우에도 출생 순서로만 본다면 르우벤은 장남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첫 출생이었으나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받지 못했고 에서도 장자였기 때문에 통째로 굴러오는 장자의 명분에 따라오는 복을 일없이 받을 줄 알았다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뺏기는 생각 못 할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장자의 명분이 어떠함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 복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자로 내려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삭과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고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에게 변경시켜 주실 수도 있으며, 에서와 같이 장자의 명분을 망령되게 여기는 경우 다른 아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있다.
② 요셉의 경우, 그의 신앙행적은 과연 열두 아들 중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
요셉의 경우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높이 들어쓰려고 꿈으로 두번이나 계시해 주셨으니 이미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가도록 되어 있었고 또한 그 예언대로 요셉이 17세 이후 아버지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갔고 이후 애굽을 구한 다음 야곱의 집 전체를 구하는 순서로 걸어가게 된다. 두말 할 것 없이 요셉은 야곱시대에 야곱의 12아들 중에 '그 역할과 기능'으로 본다면 뚜렷히 장자를 감당했으며 이 공로를 그대로 인정하신 것이 바로 12지파 중에서 요셉은 분깃도 2배를 주어 요셉의 두 아들이 그 삼촌들과 같은 서열에서 12지파 중 2지파를 차지하였고 야곱의 원래 12아들 전체 중에서도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③ 유다는, 요셉과 달리 이스라엘의 앞날을 두고는 영원한 구원의 지파가 될 신앙이 있었다.
그 당대만으로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장차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두고는 요셉과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이 있었다. 야곱 시대만으로 볼 때 유다는 요셉과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형제와 약간 표가 날 몇몇 장점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12아들 중에 하나였고 요셉은 12아들 중에 단연 하나밖에 없는 대표였다. 그러나 야곱의 당대에 외부적으로 표시가 나는 면으로는 그러했지만 유다에게는 장차 예수님의 구원계통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정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장자가 될 수 있는 움싹이 있었다.
반면에 요셉은 야곱 당대만 본다면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사람이었으나 요셉의 신앙은 '자손으로 이어지며 자라가는' 신앙의 성질을 가지지 못했다. 요셉 한 사람이 자기 당대에 신앙의 사람으로는 성경역사 전체를 통해 어느 인물보다도 성자의 모든 요소를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는데 그 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후손으로 이어지며 점점 자라가는 신앙의 면을 주지 않았다.
⑤ 따라서, 신앙은 오늘 나타난 것과 함께 그 나타날 앞날의 움싹도 함께 보아야 한다.
오늘로 예를 든다면, 손양원목사님이나 김현봉목사님과 같은 분은 그분들 자신의 단독 성화와 경건면을 본다면 참으로 기독교 역사상 한 세대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고 끝이났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복음역사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사람은 아주 대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도 신앙이지만 그의 신앙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지는 계통적 은혜가 있어 그의 신앙 후손으로 세계교회를 옳고 바르게 잡고 나올 수 있었던 역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유다가 어떤 면에서 역사로 이어지면서 가면 갈수록 그 신앙의 실상이 크게 나타나게 되고 다윗과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까지 구원의 유다지파라는 이름으로 늘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다른 기회에 크게 연구해 볼 제목일 것이다.
(/pkist.net/문의답변/88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