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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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 성경 42누가복음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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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다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은 것은 실제 사건이다. 실제 사건이란 진리대로 된 실체니 더 명확한 것은 없다. 그러나 심령이 어두워지면 실체를 보고도 느끼지 못하고 파악조차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는 비유를 통해 어두운 심령을 밝혀 준다. 비유라는 말은 실체와 비슷한 일을 실체 옆에 나란히 놓고 비교를 시키는 것이다. 비유란 어떤 비유도 실체만큼은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어두워 지면 더욱 복된 것을 보고도 모르기 때문에 더욱 흐미한 것을 가지고 깨우친다. 죄인이니 죄와 가까운 것으로 가르쳐야 비로소 느낌이 있는 식이다. 인격의 붕괴가 더 큰 문제이나 인격의 중요성을 모르면 돈을 잃는 상황으로 비교를 해서 깨우친다. 돈! 돈이라니까 집중을 하고 관심을 보이다가 비로소 깨닫게 되어 인격 문제로까지 자라 가게 하는 방식을 비유라 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주인이라면 다음 이야기와 같이 하게 되어 있다. 과수원 주인의 이야기다. 이 주인은 비유이고, 이 주인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야 하는 실제 주인은 주님을 말한다.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과수원 주인의 이야기를 먼저 전개하고 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 포도원이면 당연히 포도나무가 많고 포도 열매는 많다. 그런데 주인이다 보니 이왕 포도원 농사는 당연하고 포도뿐 아니라 무화과 열매가 필요했다. 그래서 포도원인데 포도나무뿐 아니라 포도원 한 곳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심었으니 주인이 무엇을 원했겠는가? 장미나무를 심었다면 꽃을 원했을 것이고 울타리용으로 가시나무를 심었다면 가시가 짐승과 타인을 막아 주기를 원한다. 포도원에 포도는 충분하다. 이제 무화과 열매를 더하고 싶다. 그래서 심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게 된다면, 너희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포도원'이란 요15:1에서 주인이 하나님 아버지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택하고 세상을 운영하는 모습이 포도원이다. 여기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으니 주님이다. 예수님의 사활 대속이야 말로 극상품 포도나무다. 그 열매란 우리가 주님으로 구원 받고 주님처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과 행위와 생활을 맺어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어도 짓지 않고, 의에 대하여 죽어도 그 뜻으로 살며, 화친에 대하여 주님과 동행으로 살며, 이 땅 위에 모든 생활의 목표는 항상 세상이 아니라 영생의 천국을 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죄 칭의 화친 영생의 대속이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의 신앙 노력 끝에 맺어져야 한다. 이 면까지만 가르친 것이 요15장의 포도나무 비유다.

여기서는 그런 포도원에 그런 노력 그런 열매는 그렇게 진행을 하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 '무화과'를 원했다. 정상적인 신앙이란, 주님의 인도를 따라 주님처럼 고난을 겪으며 주님과 같은 자기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 우리의 신앙이 어려서 고난이 심하거나 오래 가면 낙심을 하기 때문에 때때로 격려도 하고 또 사람들이 부러워 할 여러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는 이것을 복이라고 하는데 복이라는 것은 주님을 닮은 것이고, 주님을 닮으려면 고난을 겪어야 하니 고난이 바로 복이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 우리를 격려하느라고 주시는 땅에 좋은 것을 복인 줄 안다. 이것이 일반 신앙이다.

이런 포도 농사를 짓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처럼 가끔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자타 모든 인간이 봐도 십자가의 길만 있고 영광은 전혀 볼 수 없는, 그런데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그 시선과 의지와 순종이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신앙을 하나씩 원한다. 포도원인데 무화과 나무를 하나 심은 이유가 여기 있다.


포도원, 구원의 기회로 주신 오늘 세상, 믿는 우리의 매일 현실. 여기에서 이런저런 신앙들이 새로 움이 돋고 이런저런 열매가 맺는 소식은 어디나 넘친다. 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것이 교회며 그 것이 신앙의 세계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중에서도 이름 없이 또는 영광이나 보람을 느낄 기회를 주지 않고 끝까지 거지 나사로처럼 순종하는 신앙을 하나씩 만들고 싶어 한다. 보고 싶어 한다. 그런 신앙을 하나씩 두시고 그 주변의 신앙들에게 세상이 알아 주는 그런 복에 매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말 기대하는 신앙인에게는 위로도 격려도 상도 주지 않고 끝까지 고난만 요구하는 수가 있다. 이런 신앙은 일반 신앙을 초월하는 대단한 신앙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하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신앙인이 왜 내게는 좋은 결과를 주지 않는가? 낙담하고 주저 앉게 되면 무화과나무로 심었는데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은 셈이 된다. 신앙의 정말 차원 높은 세계에서 살아 간 이들은 주를 위해 죽기만을 노력하고, 고난만을 원하여 걸어 갔다. 자기 생전에 이 땅 위에서 뭔가 댓가를 원치 않았다. 심지어 성프란시스는 하늘 나라에 가서도 십자가 있는 곳만 찾고자 했다.

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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