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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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 성경 40마태복음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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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지리, 지역)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리 지역에 대한 단어가 나오면 우선 그 이름에 과거와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피고,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 땅에서 위치가 어디인지 살피면 그 단어에 포함한 뜻을 대략 살필 수 있다. 12지파의 이름으로 붙여진 지역은 여호수아 13장에서부터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너머 동쪽에 자리 잡는 과정을 세밀히 적었다. 그리고 나머지 9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전체를 15장에서 19장까지 표시했다. 그림은 아니지만 주변에 어느 땅이 있고 전체적으로 동서남북을 알 수 있다. 시간은 걸리지만 차분히 살피면 성경으로 성경 내 지역의 의미를 살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름 외에 어떤 면으로도 알 수 없는 지역도 나오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을 먼저 파악을 하고 나면 전혀 알 수 없는 지역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에 설명하지 않은 지역을 성경 외적 세상 자료로 해석하려 들면 성경은 성경인데 그 해석을 세상에게 맡기는 결과가 되어 성경을 아주 틀어 버릴 수 있다. 성경에 없는 세상 자료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현재 지리나 어떤 고고학에 근거를 둔다 해도 그런 말도 있다는 정도로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세상의 자료들은 성경을 읽으며 성경에서 확인 되는 것만 인정하면 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가능성만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스불론 땅'
이스라엘 전체 지역에서 북쪽에 있다. 성경에 북쪽은 춥고 살기 어렵다.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더욱 어려운 환경을 말한다. 먹고 살기 어렵던 고대 사회에서는 신앙 생활에 보이는 어려움도 포함하고, 오늘은 일상 생활이 너무 좋아 져서 신앙으로 잘 믿기가 정말 어려운 때다. 어떤 면이든 예수님은 흑암에 큰 빛이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비춘다. 스불론 땅이 비록 세상으로 살기 어렵고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면 정말 어려운 환경을 만났으니 오늘 우리는 모두 스불론 땅에 살고 있다.

'납달리 땅'
스불론 땅도 북쪽이어서 살기가 어렵지만 납달리 땅은 더 북쪽이다. 더 춥고 더욱 어려운 환경을 말한다. 아무리 신앙에 혹독한 현실이라 해도 예수님의 사활 대속은 우리에게 기본구원의 빛이며 우리의 신앙 건설에 필요한 모든 은혜는 역사한다. 마10:16에서는 우리를 이리 가운데 두셨다. 여기서는 흑암과 사망과 그늘로 적으면서 우리의 신앙 환경을 자각하라 하신다. 알고 보면 더 어렵고, 깨닫고 보면 과거 몰랐던 위험을 느끼게 된다. 성경을 기록할 때는 스불론이 있고 그 위에 납달리가 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두 곳이 다른 환경일 수도 있고, 깨달아 가면서 자기 현실을 처음에는 스불론 정도라고 생각하다가 납달리로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더 어려움을 깨닫게 하셨다.

'요단강 저편 해변 길'
'요단강'은 이편이 하나님의 품이고 저편은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세상이다. 요단강은 세상과 천국의 경계를 말한다. 생사를 말한다. 신앙의 생사 문제로 불신자가 요단강 저편에 있는 이들이다. 언제든지 빛 가운데로 데려 와야 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기본구원의 큰 빛이다. 기본구원적으로 하나님 없이 불신자로 사는 세계, 그 환경, 그런 사람의 여건이 요단 저편이다. 믿은 우리에게는 매 현실에 주님 없이 사는 마음과 행위, 그 상황이 바로 요단강 저편이다. 언제든 말씀으로 성령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영생의 소망을 통해 요단 이편을 만들 수 있다.

'해변길'이란 한 쪽이 바다고 한 쪽은 육지다. 땅과 물이 맞닿은 곳이며 바다와 육지가 좌우로 펼쳐 있다. 그런데 이 곳이 요단 저편이라면 세상이라는 뜻인데 세상에는 위험한 곳이 있고 세상이지만 안전한 곳도 있어 보인다. 계13장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육지에서 나온 짐승이 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무자비하고 무섭다. 육지에서 나온 짐승은 곱고 여리며 좋아 보인다. 그런데 짐승은 짐승이다. 세상이 서로 돕고 남을 이해하고 웃으며 환대한다 하여 천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세상이다. 겉보기에 빠지면 죽는 것이 바다이니 세상이 봐도 험한 죄악의 세상을 바다라 하고, 겉보기는 안전하고 좋아 보이는 것이 육지다. 그래도 천국은 아니다. 도덕 세상을 땅이라 한다.

해변길이란 세상의 한가운데를 가고 있다는 말이고 이것이든 저것이든 세상은 세상일 뿐이니 세상에는 구원이 없다.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사활의 대속으로 열어 놓은 예수 구원뿐이다. 예수는 해변길의 좌우 모두에게 하나뿐인 구원이다. 구원의 빛이며 햇살이다. 하늘에서 내려 주는 무한한 신령한 은혜의 손길이다.

'이방의 갈릴리'
원래는 갈릴리가 북쪽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런데 이방의 침입이 북쪽에서 시작 되다 보니 주님이 오실 때 이 곳은 아주 이방 세계가 되어 버렸다. 요단강 저편도 원래는 모세가 처음 점령하였던 곳이다. 이방과 가까운 곳은 우선 살기 좋고 또 현재는 신앙이 있어서 그 세상을 정복하여 신앙에 유익하게 사용한다 해도, 세상과 많이 접하고 세상과 위험하게 접하는 직업, 결혼, 주거, 취미, 생활, 전공, 사회 생활이란 평소에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의 신앙은 다윗과 솔로몬도 오르고 내린다. 나의 신앙이 방심하고 후퇴할 때 접하는 세상이 바로 맹수가 된다. 주님이 오실 때 갈릴리는 이방 나라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래도 주님의 구원은 그 곳에도 간다.

전체적으로 어떤 환경 어떤 세상 어떤 불신 세계라 해도 기본구원은 우리가 생각할 것도 없이 성령이 직접 가서 역사한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신앙 건설이란 우리에게 맡겨 놓은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그리고 우리가 살고 그 결과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모습이 결정 된다. 믿는 우리로서는 오늘 아무리 신앙에 어렵고 더 어려워 이제는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 해도, 심지어 세상 이런 저런 곳에 깊이 빠져 소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마4:15-16의 말씀에 소망을 받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자기 마음에 기억 나는 말씀, 자기 양심을 찌르는 말씀. 바로 여기서부터 사죄의 빛은 이미 비추고 있다. 그 안으로 들어 가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칭의의 은혜로 기다린다. 말씀으로, 그 말씀 속에 주님의 뜻을 찾고, 그리고 내 인격 내 마음 깊은 곳이 주님을 모시고 하나 되어, 오늘 이 세상이 아니라 영생을 소망한다면 주님이 이 시간에도 신앙의 건설면에 구주로 애태우며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3.12.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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