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KIST
백영희 신앙노선의 오늘을 고민하는
목회 연구소
총공회 목회연구소
0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총공회
총공회 소개
인물/사건
소사/일지
역사자료
목회 연구소
역사
참고
백영희
보관자료
추가자료
출간 설교록
미출간 (준비)
설교록 발췌집
연구서적
출간목록
연구실
행정실
행정
보관
정정
회원/후원
활용자료
교리 정리
성경신학
[설교류]
원본설교(확정)
원본설교(검토)
성경단어사전
주교공과
[사전류]
교리성구사전
주해사전
용어사전
예화사전
메모사전
각주사전
참고자료
메인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0
남단에서 2
     
명상 또는 추천의 글
홈 > 연구실 > 남단에서 2
이 게시판에는
이 홈
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
남단에서 2 글답변
이름
필수
비밀번호
필수
분류
비밀글
비밀번호
제목
필수
내용
웹에디터 시작
> > > <p></p><p></p><br/>순교자 가정의 고난에서 6.25 참전 <br>애양원 의무과에서 현미경 전문가로<br><br>심보라 - 하나님의 은혜<br/><br/><br/><br/>(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가본’ 상태로 공개합니다. 자료의 인용이나 개인 보관은 금합니다. 자료 공개를 통해 자료 확인이 끝나면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그대로 공개하겠습니다.)<br/><br/><br/><br/><br/><br/><img border="1" height="34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1.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567"/><br/>▲1958년 애양원 의무과 직원 일동<br/><br/><br/><br/>심보라 부친 심봉환<br/>32.4.4.생 고향 신월교회 설립<br/>전남 구례군 신월리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 말 순교<br/>6.25 학도병 첫 전투, 평양 전투 등 참전 독립운동 김철주 동지 심보라 지도 후원<br/>애양원 의무 직원, 현미경 기술 전문가, 유진벨재단 기술 고문<br/><br/><br/><br/><br/><br/><br/>1. 가정과 신앙 역사<br/><br/>- 선교사 통행로 <br/>부친 ‘심봉환’ 집사님은 신사참배 때 순교한 전남 지역 3 인 중 한 분입니다. 고향 신월리에서 유지로 살았으며, 가정의 경작지가 외지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인 구례구 기차역 앞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일찍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제 때 미국의 남 북 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선교부까지 모든 선교사들이 지리산 노고단 지역에 선교사 휴양관을 운영했고 이 곳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이 부친 심봉환 집사님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br/><br/><br/><img border="1" height="184"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2.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74"/><img border="1" height="195"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3.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31"/><br/>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운해 ▲노고단에서 본 섬진강과 구례 지역<br/><br/>- 구례군 신월리<br/>지리산의 노고단을 올라가려면 구례 화엄사를 거쳐야 하고, 일제 때는 외지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구례구역에서 내린 다음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바로 강을 건넌 첫 구례 진입 마을이 신월리입니다. 강을 건너 구례 땅에 첫 발을 딛는 곳, 바로 여기에 심보라 가정이 대대로 농사를 짓던 논밭이 넓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 부친을 모든 선교사들이 지리산 수양관을 드나들며 전도를 했고 누가 봐도 믿을 것 같지 않던 이 가정에 장차 순교자가 나올 복음의 씨앗이 떨어집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177"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4.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32"/><img border="1" height="167"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5.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23"/><br/> ▲지리산 입구인 구례구 기차역 ▲역 앞 섬진강을 넘은 지리산 입구 <br/><br/><br/><br/><br/>- 철저한 불교 가문<br/>신월리는 섬진강을 한 눈에 굽어 보며 들이 넓어 큰 마을이 형성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 눈에 예사 시골마을과는 달리 재력가나 영향력 있는 주민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심보라 가정은 중앙 통행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조부의 기념비를 조성해 놓았고, 그 통행로 맞은 편에 있는 가정의 밭에는 일제의 경찰 주재소가 들어섰습니다. 이 곳이 현재까지 파출소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일대에 가정의 농지가 많았습니다. 현재는 위치를 바꾸어 교량이 건설 되어 있으나 구 교량의 경우 구례구역에서 구례에 발을 딛게 되는 첫 토지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br/><br/>아버지 심봉환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철저하게 출발했고 장손인데도 제사 등 모든 신앙 문제를 두고 일체 타협 없이 불붙어 나가자 가문과 동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원래 심봉환의 가정은 뒷산의 사성암이라는 1천년 고찰을 운영해온 골수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br/><br/><br/><img border="1" height="159"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6.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39"/><img border="1" height="16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7.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40"/><br/>▲섬진강변 신월리 들판 - 사성암에서 ▲집안 소유 사찰 - 전남문화재 33호 <br/><br/><br/><br/><br/><br/>- 강한 가정에 강한 복음<br/>불교에 철저했고, 가문의 기풍이 철저한데다, 식구들의 강단도 예사가 아니어서 조부는 일제 순사들과 멱살을 잡으며 부딪힌 인물입니다. 심보라는 어린 시절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가 밭에 거름을 하고 있으면 경찰 주재소 마사오 소장이 냄새가 난다며 호통을 치고 사정없이 할아버지를 일격하면 할아버지는 그 순사의 멱을 잡아 치켜 올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며 심성이 보통 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순사를 죽일 수는 없고 그들에게 무참하게 당해야 합니다. <br/><br/>이런 가정에서 아버지는 신앙에 완전히 빠져 들었고 그 옛날에 그 잘 사는 가정의 장남인데도 신앙 때문에 결국 고향과 재산과 가정까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됩니다. 믿되 제대로 믿었고, 가르치되 제대로 가르쳤으니 이 가정을 전도하고 가르쳤던 선교사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신약을 번역했던 핵심들이었고, 남한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자 거의 전부를 양육한 호주 선교사들도 이 마을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br/><br/><img border="1" height="17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8.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27"/><img border="1" height="167"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09.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23"/><br/>▲지리산 입구표시 대로 변의 조부 비각 ▲왼쪽 건물이 일제 때 주재소, 현 경찰 파출소<br/><br/><br/><br/><br/>-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br/>이 가정을 통과하던 선교부 중에 미국의 남장로교는 주변의 호남 전부와 북한 지역은 물론 만주까지 맡고 있었고, 호주 선교부는 규모가 작았으므로 경남 지방을 맡았으나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 고신 신앙을 길러 냈던 선교부입니다.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1년에 40일 정도는 지리산의 노고단에 선교사 수양관에서 수양회를 하게 됩니다.<br/><br/>위생 관념이 없고 의료 체계가 없던 당시, 외국에서 조선으로 선교를 왔던 분들과 그 가족들은 병균이 창궐하는 여름 지역에 주로 병고를 치르고 죽는 수가 많았습니다. 지리산의 노고단은 기차역에서 내려 조금만 가면 바로 1천 미터 이상의 고산 지역이 나타나고 여름에도 기온이 낮아 전염병을 피하고 1 년을 고생한 이들이 몸을 추스르는 곳입니다. 또한 각지에 흩어졌던 이들이 이 곳에 모여 복음운동에 필요한 의논과 기도를 하던 곳입니다.<br/><br/><br/><br/>- 부친 ‘심봉환’의 순교<br/><br/>- 순교자<br/>부친 심봉한은 고향 신월리에 예배당을 세웠고, 교회를 인도하던 여 전도사님을 집 안에 모셨으며, 제사를 없앴고 절 운영에도 손을 뗐으므로 문중에서는 부친을 추방했습니다. 동네나 문중에서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39년부터 본격화 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투옥 됩니다. 어린 심보라는 구례중앙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나 요주의 인물의 자녀로 분류가 되어 초등학교의 정규 학생으로는 입학이 거부 되고 오후에 수업을 받는 2부 학생으로 입학을 합니다. 생활기록부에도 사상범의 자녀로 기록이 되어 특별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심보라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동생은 그런 조건조차 없이 입학이 거부 되었습니다. 결국 부친 심봉한 집사님은 1943년 12월에 옥중 순교를 하게 되어 전남 지역의 신사참배 순교자 3 명에 기록 되며, 평신도로는 유일한 경우입니다. 모친도 남편의 옥고 수발과 문중의 외면과 총독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고생 끝에 돌아 가시고 어린 자녀들만 남게 되어 가정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됩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155"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2.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188"/><img border="1" height="122"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3.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164"/><br/>▲고향의 현재 신월교회 ▲구례 입구 대로의 조부 심광록 비석 <br/><br/><br/><br/><br/><br/><br/><br/>2. 심보라의 고난<br/><br/>- 해방과 김철주<br/>1945년 3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해 8월에 광복을 맞았습니다. 광복이 되어도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상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에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김철주라는 분이 여수로 내려 와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br/><br/>김철주 장로님은 애양원이 광주에 있던 시기부터 선교부에 속하여 애양원 직원으로 일했던 분입니다. 몰래 삐라를 만들어 뿌리다가 대구형무소에서 2 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3.1 독립운동 때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1년 정도 옥고를 치렀지만 대구교도소까지 이송 되어 2년을 고생한 철저한 독립투사였습니다. 이 분이 애양원의 김장용 배추를 부친 심봉환 집에서 구입했습니다. 신월리가 원래 배추가 유명했고 이 곳은 선교사들의 길목이며 집사님의 신앙이 철저하여 특별히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심 집사님이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를 하고 가정이 몰락해 가는 것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br/><br/>그는 애양원이 광주에 있던 시기, 광주에서 나환자 수용 시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총독부와 선교부가 애양원을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이전하려 할 때 이전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수의 신풍이 이주지역으로 선정 된 후, 이주 실무자로 먼저 신풍으로 와서 이주에 필요한 사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신풍에 새로 이전할 병원과 예배당과 환자들의 숙소를 건립하는 노무자 관리까지 총괄했습니다. 그가 해방 후에는 의사가 되었고 애양원의 실무는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결재만 하고 애양원의 병원장으로 실무 총책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여수군수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국회의 보사위원까지 되자 우리 나라의 나환자 정책을 대변하는 인물이 됩니다. <br/><br/>- 여수 상업학교<br/>여수로 내려 와서 상업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기에는 모든 것이 억울했고 어두웠고 눌려 살았지만 이제 해방 된 조국은 그 반대였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철저한 기독교인들이었고 전남 도지사도 이남기 목사님이 맡고 있었습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난 뒤에 김철주 장로님은 여수군수로 부임했고 군수 관사에서 야간상업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진남관을 교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 9월에 입학을 했고 한 학년을 무사히 잘 다니며 행복하고 희망이 보이는 생활을 하던 3학년 재학 중에 6.25 전쟁이 터집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181"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4.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70"/><img border="1" height="198"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5.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39"/><br/>▲여수 중심의 조선 객사 전라좌수영. 국보 304호 ▲일제와 해방 직후는 학교로 사용 <br/><br/><br/><br/><br/><br/>- 학도병으로 참전<br/>전쟁이 터지자 여수와 순천에서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를 했습니다. 1950년 7월 13일에 순천에서 결성 되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 이 지역에서는 여순 반란 사건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위험과 실상을 생생했고 주로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여수는 14연대 반란의 피해가 많았기 때문에 지원병도 많았으며, 평소 학교마다 기독학생회가 있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지원하게 됩니다. 전쟁의 기미가 보이자 정부는 1949년에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을 설치했고 전쟁과 함께 학도의용대로 바뀌면서 학도병이 된 것입니다. 여수의 수산학교와 상업학교, 그리고 순천에서는 기독교 학교인 매산학교가 많았고 농업학교와 사범학교도 포함 되었습니다. 여수 순천 벌교 강진까지 모두 200명입니다. 순천에 주둔하던 국군 5사단 15연대에 입대하고 1 주일 정도 총 쏘는 훈련만 받고 소총 한 자루에 주먹밥 1개를 들고 3일간 행군하여 경남 하동 전선에 투입 됩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20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6.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27"/><img border="1" height="161"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7.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90"/><br/>▲참전하는 학도병 ▲국방부의 전사자 발굴 작업 <br/><br/><br/><br/><br/><br/>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한 달만에 전선은 최남단 남해 바다까지 이르게 됩니다. 국군은 전부 밑의 신리에서 지연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학도병들은 전쟁 후 정확히 1개월이 되는 7월 25일의 하동 화계장터에서 첫 전투 3시간 만에 30여 명이 전사합니다. 이 전투는 학도병 중에서 실전 투입으로는 첫 전투로 기록 됩니다. 인민군의 주공은 북에서 남으로 부산을 향해 바로 내려 오고 있었고, 한 편으로 인민군 6사단은 호남을 점령한 후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옆에서 침공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아군은 참모총장 출신 채병덕 장군의 지휘 하에 하동에서 적을 저지한다는 계획으로 미군의 지원은 물론 학도병까지 최대한 동원했습니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으나 진주까지 적의 침공을 7 일이나 지연 시켰고, 전쟁 초기에 다급했던 전황에서 이 기간은 반격을 준비할 수 있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br/><br/>후일에 심보라는 이 곳에 전우들을 위해 십자가를 세웠고, 하동군은 충혼탑을 건립하고 경남도 역시 정식 기념물을 조성하였으며, 2007년 국방부는 화개장터 유해 발굴 과정에서 학도병들의 십자가 등 유품을 발굴합니다. <br/><br/><br/><img border="1" height="213"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8.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84"/><img border="1" height="163"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19.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44"/><br/>▲2007년 국방부 하동전투 감식단 ▲학생의 십자가 유품 - 하동 전투 발굴 <br/><br/><br/><br/><br/>하동의 첫 전투에서 진주로 마산 진동 전투까지 겪은 심보라는 인천상륙작전 후에 전개 된 북진의 최선봉인 국군 1사단에 편재 되어 평양 전투를 치르고 평양에 들어 갑니다. 평양신학교와 김일성 관사까지 두루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자지게 되나 1951년 평양에서 북진 중 부상을 입고 C46 군수송기로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후송 됩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284"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0.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15"/><img border="1" height="22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1.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75"/><br/>▲북진하는 국군, 남하하는 피난민 ▲평양의 시가전 <br/><br/><br/><br/><br/><br/>- 부산 생활<br/>부산에는 제5육군병원이 영도 대교 바로 옆의 부산시청 청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부상이 심하여 1951년 10월 15일에 제대를 하게 됩니다. 제대 후에 부산항에서 미군 부대에 노무자로 취업을 했는데 근무하던 여자가 타이핑을 너무 잘 쳤고 그를 보면서 자갈치 시장 옆의 침례교회 옆에 있는 학원을 다니며 영문 타자를 배웁니다. 영문 타이핑을 잘 치게 되어 송도에 있던 CIC 미군 특수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하숙을 했고 부대 내에서 숙식하는 직원들이 있어 부대 내에 함께 살게 됩니다. <br/><br/>이 시기에 부산의 교회들을 겪어 보게 됩니다. 고려파 교회에는 박윤선 목사님이 제일 머리 되는 분으로 보였고 그 반대 편에는 한경직 목사님으로 생각 되었습니다. 송도의 부대 부근에 피난 온 이북 출신 최 목사님이 송도교회를 개척하여 출석했고 1년 반을 지내고 있었습니다.<br/><br/><br/><br/><img border="1" height="248"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2.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08"/><img border="1" height="242"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3.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23"/><br/>▲1950. 부산 시가와 영도. 영도다리 입구 육군5병원 ▲전쟁 시기 50년대의 부산항<br/> 다리 우측이 자갈치시장, 그 오른쪽은 송도지역<br/><br/><br/><br/>3. 애양원 직원 생활<br/><br/>- 김철주 장로님의 권유<br/>근무 중 휴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수를 오게 되었습니다. 김철주 장로님은 애양원 원장을 맡고 계셨습니다. 애양원에서 일해 보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1954년 5월에 다시 여수를 오게 되면서 이 번에는 신풍에서 살게 됩니다. 의무과에 근무를 하게 됩니다. <br/><br/>- 직원 교회<br/>처음 애양원에 왔을 때는 신풍에는 애양원교회만 있었고, 직원들은 애양원의 출입구 쪽에 가까운 직원 사무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애양원에 오기 전부터 이미 손양원 목사님의 부인인 정양순 사모님과 차종석 장로님의 부인인 서귀덕 집사님은 선교부와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애양원교회가 성암교회를 개척하게 되고 애양원 직원들이 성암교회로 출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암교회는 직원을 위한 교회지 일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br/><br/>직원들은 보이열 선교사가 원장으로 확실하게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이 없었으나 조수로서 직원이었던 김윤선 씨의 경우도 그 부인은 손 목사님 사무님 쪽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애양원에 근무하고 있던 1956년에 광양읍교회 손문준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br/><br/><br/><img border="1" height="212"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4.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86"/><img border="1" height="238"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5.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153"/><br/>▲애양원의 직원교회 시절 - 성암교회 ▲성암교회 1대(손활인) 2대(박창호) 목회자의 고신 졸업 <br/> 정양순 서귀덕 두 분은 애양원과 전혀 다른 길입니다.<br/><br/><br/><br/><br/>- 의무과 근무<br/>의무과에는 강석원 군의관과 심보라 윤후근 3 명의 직원이 근무를 했습니다. 군의관은 애양원이 특수 시설이어서 군에서 파견했고 그는 그만 둘 때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윤후근 집사님은 검사실 직원으로 매산학교 출신이나 학도병 전우였습니다. 당시 직원 채용은 제대를 해야 가능했는데 심보라는 직원 추천을 받게 되자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부산에서 제대한 친구를 소개하여 함께 근무하게 됩니다. <br/><br/>이 3 명은 의무실의 필수 직원이며 실제 1800여 명의 환자를 수용했던 애양원 전체 환자를 돌보는 데는 환자 중에서 50 명을 따로 선발하여 간호 보조를 하게 했습니다. 이미 DDS라는 나병 치료제가 개발 되어 있었으나 약의 독성이 강했기 때문에 투약을 거부하는 환자들이 있어 일일이 투약을 확인해야 했는데 이런 업무를 비롯하여 어지간한 의료 조처는 간호보조를 맡은 분들이 자체적으로 하게 되고 직원들은 수술처럼 중요한 것만 맡았습니다. <br/><br/><img border="1" height="340"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6.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567"/><br/>▲1955.5. 의무과 직원 일동 - 첫줄 좌에서 병리기사 윤후근 집사님, 의무과장 장석원 의사님<br/> 원장 스미스 박사님, 의무계장 심보라 집사님<br/><br/>- 보이열 선교사<br/>애양원의 신풍 시절 초기부터 손양원 목사님 계실 때까지 직원의 중심에 섰던 차종석 장로님은 선교부와 고려파 문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선교부의 선교사들 중에는 좋은 분들이 많았으나 손양원 목사님이 계시던 시기부터 이 때까지 책임을 맡고 있던 보이열 선교사님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정도였고 직원들과 관계도 악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심보라는 의협심 때문에 원장 선교사님을 상대로 미국과 한국의 하나님이 다르냐고 언성을 크게 높이며 맞서기도 했으며 결국 심보라의 의무과 3 명은 하루에 동시 퇴직을 했습니다. 양일만 장로님 역시 중도 사퇴하게 됩니다. <br/><br/>그래도 하루 해가 끝나거나 주일 오후가 되면 종종 애양원 앞의 바닷가 거북바위에 올라 혼자서 영어로 또 일어로 찬송가를 크게 불렀습니다. 미쳤다는 말도 들렸으나 순교하신 아버님만큼 신앙을 갖지는 못해도 식민지 시절과 전쟁에서 그리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은혜만 생각해도 감사했습니다. <br/><br/>심보라는 미군 CIC 부대를 거쳐 이 곳으로 왔고 어릴 때부터 선교사들을 접촉했으므로 애양원 선교부의 정책이나 선교사의 성향을 잘 아는 편입니다. 우리에 비할 때 그들은 경제적이었습니다. 투자를 최소화하고 효과를 최대화 하려는 면이 뚜렷했습니다. 직원들의 월급도 가족이 많다고 더 주는 것도 아니어서 식구가 많은 가족들은 모두가 어려웠고 심보라처럼 가족이 없는 사람은 괜찮았습니다. 보이열 선교사는 우리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뚝심 있게 밀고 나가기 때문에 곰이라는 별칭을 가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후임 서현식 목사님은 선교부와 좋은 관계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애양원의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선교부와 보이열 선교사 원장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br/><br/>- 현미경에 대한 심취<br/>의무실에 근무하게 되면 각종 검사를 하게 되고 현미경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습니다. 미국의 남장로교가 운영하는 미국 병원이었고 초기 의사들도 미국 의사들이었기 때문에 선진 의료 기술과 함께 당시로는 첨단 기기를 접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현미경은 나환자 치료를 위해 늘 필요한 장비인데 고장이 생기면 수리가 어려웠습니다. <br/><br/>한 편으로는 공부에 대한 의지도 강했고 현미경에 대한 열정이 있어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의 기회를 찾았으나 미국은 대학의 입학허가에도 불구하고 학비를 자체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일본의 올림푸스 광학공업사에서 기술을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수 년을 편지로 호소하게 됩니다.<br/><br/>- 애양원의 직원 조직도<br/>심보라 직원이 애양원에 왔을 때 애양원의 실무 총책인 차종석 총무과장은 보이열 원장님이 신앙 문제로 내보냈고 심보라의 근무 기간인 1953년 이후 1960년의 퇴직 때까지 차 장로님은 외부인이었습니다. 조직은 총무계 의무계 서무계 교도계 재무계가 있었고 보육원도 있었습니다. 총무과장은 차종석 장로님의 후임인 양일만 장로님이 맡고 있었고, 의무과는 3 명이었습니다. <br/><br/><br/><br/><br/>4. 현미경 전문가의 여생<br/><br/>- 일본 기술 유학<br/>애양원에서 근무할 때부터 4 년을 편지하며 설득한 끝에 일본의 올림푸스 광학공업사는 심보라의 연수 기회를 허락합니다. 1960년 4.19로 들어선 민주당 정권 때 여권을 받았으나 출국 신고를 하려고 고향에 왔다가 1961년에 5.16 혁명이 일어나고 모든 국민의 해외여행과 여권을 무효화하여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재수속으로 인해 12월에야 여권이 발급 되어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br/><br/>- 일본의 올림푸스<br/>일본의 기술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동안 학습에 목말랐던 것을 다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의 나라지만 배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일본의 교회를 출석했을 때 간증을 부탁 받고 일제 당시를 생생히 증언했습니다. 듣는 이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욱 배움에 매달렸습니다. 1961년 12월부터 6개월에 걸쳐 광학기기 중에서도 위내시경과 현미경 관련 수리 및 정비 기술에 집중했습니다. <br/><br/>- 평생의 활동<br/>이미 일본에서도 기술을 인정 받고 동경대병원 등에서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연구 논문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에는 국내 거의 유일한 이 분야 전문가가 되어 30여 년 한 분야에서 전국의 주요 대학병원과 의료기관 및 생물학 실험실 등을 상대로 활동하게 됩니다. 1970년부터는 전국의 보건소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관련 기술 전수를 위한 교육을 맡기도 하며, 대학 관련 교수들이나 일반 학교 과학교사에 이르기까지 활동하며, 부친의 순교로 겪었던 성장기의 모든 어려움을 보상 받게 됩니다. 지금과 달리 언론도 적고 보도 분량도 현저하게 적었던 1974년경부터는 국내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아 중앙일간지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br/><br/><br/><br/><br/>5. 노년<br/><br/>- 부친의 순교비 <br/>은퇴 후에도 관련 업무에 고문이나 기술 지원을 할 때가 있으면 적극 돕고 있으나, 마음 속에는 나이가 들어도 잊을 수 없는 순교하신 부친과 일제의 탄압으로 흩어진 모친과 형제들에 대한 아픔이 늘 간직 되어 있습니다. 현재 출석하는 순천중앙교회에도 부친의 존재는 알리지 않았으나, 교회 바로 옆의 순천 선교부 뜰에는 부친의 순교비가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br/><br/><br/><img border="1" height="194"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7.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60"/><img border="1" height="193"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8.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258"/><br/>▲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 순천 (우, 심보라) ▲박물관 선교사 공적비 중 ‘심봉환’ 순교비 <br/><br/><br/><br/><br/>- 현재 활동<br/>부친 심봉환 집사님을 전도하고 지도했던 선교사들 중에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 인요한 박사 가족이 북한의 결핵 환자를 돕는 의료지원사업에 기술고문을 맡고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순천 용당동 현대아파트 111 동에 부부가 거주하고 계십니다.<br/><br/><br/><img border="1" height="208"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29.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02"/><img border="1" height="196" src="http://paikist.net/ftp/album2/한국동란사진/남단2-심보라-애양원역사/noname30.jpg" style="border-color:black;" width="326"/><br/>▲유진벨 선교사 가족 ▲선교사 가족들과 심보라 집사님 <br/><br/><br/><br/>인요한,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 국제선교회 지원으로<br/>그 부지 20만 평을 간척하여 교인들의 생활 터전으로 <br/>삼으려 했으나 주민 반대로 무산<br/><br/><br/><br/><br/>화개장 전투 - 지연작전간 기도비닉 및 기만대책 강구 <br/>※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전장사례연구(3)』,1987<br/><br/>작전기간 : 1950년 7월 25일 <br/>작전지역 : 경남 하동 <br/>적 군 : 북한군 제6사단 <br/>아 군 : 제5사단 제15연대(이영규부대) <br/><br/>1. 상황 ※ 6사단 기동상황 ※ 낙동강방어선 형성전 상황 <br/><br/> 1.1 '50년 7월 18일 금강을 도하한 적 제6사단 제13연대는 군산, 이리를 경유 계속 남진 중에 있었고, 나머지 2개 연대(14, 15연대)는 적 제4사단과 더불어 대전을 공략한 후 호남으로 남하하여 23일에는 광주에서 합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적 제6사단 일부병력은 목포로 향하고 다른 일부는 순천방면으로, 그리고 남원-구례-하동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참고 : 호기상실 남원을 점령한 적 제6사단의 일부 선견대는 25일 07:00에 구례를 점령한 다음 후속해 온 연대주력과 합류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1개 대대의 선발대와 전차 1대 및 야포 5문을 동반하고 화개장 방면으로 진출중에 있었다. <br/><br/> 1.2 새로 편성된 한국군 제5사단 제15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나 총병력은 1,156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약 8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제3대대는 26일 여수 주둔지에서 선편으로 거제도를 경유하여 31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24일 구례로 철수하였으나 여기서 호남지구 전투사령관으로부터 제1대대장은 "구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부대를 섬진강 남쪽 용두리(구례 남쪽 8)에 배치하고, 구례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 야간에 제2대대와 현지 주둔경찰은 하동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br/><br/><br/>2. 작전경과 ※ 작전상황도<br/><br/> 2.1 적은 25일 07:00 구례를 점령하고 계속해서 제1대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1대대장은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축차적으로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그 일부 병력을 후퇴시켰다. 후퇴도중 제2대대의 상황을 알기 위하여 화개장으로 간 제5연대 부연대장(중령 이영규)으로부터 09:00경 트럭 5대가 도착했다. 화개장 동쪽에는 359고지가 있으며 이 고지에는 과거 공비 토벌당시에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진지가 있었다. 이영규 중령은 제2대대를 지휘하여 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한편 제2대대 북방 161고지에는 경찰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br/><br/> 2.2 5대의 차량에 분승한 제1대대는 적이 뒤쫓는 상황아래 화개장을 향해 철수를 계속하여 10:00경 화개교 동쪽에 부대를 배치한 다음, 대대장은 즉각 뒤쫓는 적정을 감안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두 명령을 각 중대장에게 하달하였다. "적의 선봉은 곧 부대를 뒤쫓아 하동을 점령하려 할 것이다. 부대의 철수로 전방에는 우군이 없으며, 단지 분산된 일부 경찰병력의 철수만이 예상될 따름이다. 부대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매복으로 적을 기습하고 이를 섬멸하려 한다. 각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기도비닉과 적이 근거리에 접근할 때까지 일체의 사격을 엄금하라. 공격신호는 총성 3발이다." <br/><br/> 2.3 한편 구례를 탈취하고 25일 순천에 돌입한 적 6사단 예하 1개연대는 순천-광양 가도를 따라 동진, 하동을 공략코자 공격의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적은 용두리에 배치되었던 아군 제1대대가 저항도 없이 조기에 철수한 사실과 개전이래 후퇴만을 거듭하는 국군의 취약상으로 미루어 구례-하동간 도로 연변에는 이미 저항세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음인지 공격 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일부 보병을 5대의 차량에 분승시켜 아무런 경계도 없이 차량거리도 유지하지 않고 화개장으로 급진하고 있었다. <br/><br/> 2.4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기동소리가 아군을 뒤따라오는 적의 공격부대일 것이라고 판단한 제1대대장은 화개교를 폭파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한 경찰관이 다리를 파괴할려는 순간에, 적 차량 1대가 법화촌 방면에서 돌연히 출현하여 시속 25㎞의 속력으로 화개교에 접근하고 있었고 이어 10m의 간격을 두고 또다른 1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리하여 잠깐 사이에 적의 차량은 모두 5대로 관측되었고, 선두차는 교량의 안전을 살핀 연후에 통과하려 한듯 잠시 속력을 낮추고 머뭇거렸다. 이로 말미암아 후속 차량들은 계속 달려붙어 차량간의 거리는 불과 2-3m로 좁혀졌으며, 적 차량은 우군 진지에서 불과 200m 거리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br/><br/> 2.5 10:30경 제1대대장은 이 때를 놓칠세라 일제사격을 알리는 3발의 카빈사격을 실시했고, 섬진강 동쪽해안에서 각종 지형지물을 방벽삼아 몸을 감추고 사격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제1대대 병력들은 일제히 5대의 차량에 탑승한 적 보병들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차량에 탑승한 채 무심코 화개교를 건너 하동으로 공격하려던 적은 이 갑작스런 집중화력으로 미처 피하지도 못한채 아비규환의 참경을 연출하며 쓰러졌고 차량 또한 운전병이 모두 사살되어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br/><br/> 2.6 10분간 계속된 집중사격으로 적은 불과 2-3명만이 간신히 도주하였을 뿐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적의 처참한 광경을 지켜본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로 인해 승리감에 도취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적의 후속부대가 곧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한 대대장은 승전에 들뜬 병사들의 기분을 진정시키고 적의 주력부대의 접근에 대비토록 지시하였다. <br/><br/> 2.7 365고지에 있던 제2대대도 제1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잠시후 출현한 적의 후속부대의 공격을 받고 전열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전투경험이 없는 병사들(기간장병을 제외하고는 대전과 광주 및 순천에서 모집한 학도병으로 이들은 경우 1주간의 훈련을 받았을 뿐이었다.)은 호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사격을 가하였고 공포심에 떠는 병사들은 명령없이 위치를 이탈하려는 기미마저 보였다. 대대장과 중대장들은 호와 호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독전을 거듭했으나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만한 방법은 없었다. <br/><br/> 2.8 한편 북방 161고지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 1개 중대는 적의 공격을 받고 일시 분산되어 후퇴하였으나 그후 하동에서 출동한 경찰 지원부대(약 200명)와 합세하여 원진지를 회복하였다. <br/><br/> 2.9 정오경 적의 새로운 공격이 전 정면에 가해져 피아간에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일대 접전이 전개되었다. 병사들은 앞서 적을 기습한 것과는 달리 적의 선제공격에 당황하여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전열을 이탈하는 자가 발생할 뿐 아니라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br/><br/> 2.10 제1대대장과 제2대대장은 전세로 미루어 더 이상의 교전이 불가능하며, 차후 작전을 위하여는 지금이 철수의 적기라고 판단하여 각 부대의 철수를 명하였다. <br/><br/> 2.11 화개장 전투에서 제15연대와 경찰대는 2시간여의 교전을 하고 산간 소로와 산악을 따라 하동으로 철수하였으나 이 전투로 구례에서 하동으로 진격하는 적 제6사단의 공격 속도를 몇일간 지연시킬 수 있었다. 9월 UN군의 대 반격으로 이 지역이 회복된 다음 화개장의 주민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72명의 적이 이 전투에서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전투는 진주에서 하동으로 전진하는 한·미 양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br/><br/><br/>3. 교훈 <br/><br/> 3.1 상대적으로 열세한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적의 선봉 부대를 섬멸시키고 적의 진격을 잠시나마 저지시킬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은 오로지 유리한 지형에 진지를 급편하고 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기습을 가한 데 있었다. 성공적인 지연작전은 기도비닉 및 기만방책에 의존한다. 이는 지연작전을 실시하려는 아군의 기도를 은폐시켜 적의 추격을 방지하고 적의 방해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며 적을 유인하여 격멸할 수 있는 기습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br/><br/> 3.2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제1대대장의 적극적인 공세 행동이었다. 지연작전이 결정적인 전투를 회피하는 작전이라고 하여 먼저 철수한 다른 부대들처럼 적이 출현하기만 하면 싸우지도 않고 철수만을 거듭하였더라면 적은 계속적인 주도권을 확보하여 아군에게 심대한 손실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휘관은 지연작전시에도 항시 적의 약점을 발견하여 이를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공세행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br></br></br> > >
웹 에디터 끝
링크 #1
유튜브, 비메오 등 동영상 공유주소 등록시 해당 동영상은 본문 자동실행
링크 #2
날짜수정
자동(선택)
추가태그
첨부파일
파일추가
파일삭제
첨부사진
상단출력
하단출력
본문삽입
본문삽입시 {이미지:0}, {이미지:1} 형태로 글내용 입력시 지정 첨부사진이 출력됨
자동등록방지
숫자음성듣기
새로고침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작성완료
취소
정리
(세부)▶
①'백영희신앙노선'총괄(요약)
②'백영희신앙노선'총괄(전체)
③교리정리
④성경신학
⑤문답방정리
⑥기타정리
자료
분류자료
●
문의답변
쉬운문답
발언/주제연구
연경교재
참고연경
일반자료
남단에서2
+
새글..
03.04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03.04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03.04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03.04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03.04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03.03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
03.0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새댓글
공회교인
7시간전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ysha
7시간전
저도 그 사모님이 그립습니다.
교인
7시간전
목사님, 늘 변함없이 칠흑같은 바다를 비추어지눈 등대처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
황선욱
7시간전
'성자'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할 성'이므로, 사람에게 쓰는 것은 좋지…
13.11.02
12.21
이 노선의 우리가 지켜 볼 이유와 사연이 있는 볼리비아 선교회 고광문 목사님이 보내 온 소식입니다. '선교'…
서기
03.18
공개 완료
성도A
03.16
31절에서34절말씀주해요망
State
현재 접속자
197 명
오늘 방문자
1,586 명
어제 방문자
7,234 명
최대 방문자
7,646 명
전체 방문자
3,299,548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