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KIST
백영희 신앙노선의 오늘을 고민하는
목회 연구소
총공회 목회연구소
0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총공회
총공회 소개
인물/사건
소사/일지
역사자료
목회 연구소
역사
참고
백영희
보관자료
추가자료
출간 설교록
미출간 (준비)
설교록 발췌집
연구서적
출간목록
연구실
행정실
행정
보관
정정
회원/후원
활용자료
교리 정리
성경신학
[설교류]
원본설교(확정)
원본설교(검토)
성경단어사전
주교공과
[사전류]
교리성구사전
주해사전
용어사전
예화사전
메모사전
각주사전
참고자료
메인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0
남단에서
     
명상 또는 추천의 글
홈 > 연구실 > 남단에서
이 게시판에는
이 홈
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
남단에서 글답변
이름
필수
비밀번호
필수
분류
비밀글
날짜
제목
필수
내용
웹에디터 시작
> > > 1984년 냉장고 랩을 처음 봤다. 그런데 당시 유학 올 정도의 학생들은 이미 집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봤다. 그리고 감탄했다. 너무 싸고 편하고 알맞았다. 미국과 한국의 격차는 극심했다. 그러나 한국의 잘 사는 집들은 어느 정도 미국식 생활을 하고 있었다. 냉장고를 사용할 줄 몰라서 고장 난 냉장고에 우유를 그냥 뒀다. 우유의 윗쪽이 뻑뻑하게 굳어 있었다. 더러 푸른 색도 보였다. 나는 미제 우유는 맹물을 타지 않아서 순도가 높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된 우유를 젓어서 먹었다. 탈이 나지 않았다. 주일 날 점심이나 저녁에 교인들 가정에 식사를 하면 한 주간에 있었던 별별 사건들이 화제에 올랐다. 나는 요즘 탈북민들의 국내 정착기를 유튜브에서 많이 보며 그 때를 생각한다. 북한의 수준에서 한국 사회를 보며 놀라는 그들의 사례를 거의 이해를 한다. > > 세인트루이스 대학교는 사립대다. 박홍 서강대 총장도 거쳐 갔다. 기숙사는 학교 건너 편의 호텔을 인수했다. 나는 호텔을 가 본 적이 없다. 일본 학생과 룸메이트였다. 그는 침대를 사용했다. 나는 하루 사용해 보고 허리가 아파서 침대를 벽에 세워 두고 바닥에서 잤다. 신학교 때는 2층 침대였다. 2층에 난간이 없다. 줄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2층을 사용해 보고 싶었다. 한 방을 사용한 친구는 한국에서 침대를 사용해 봤다. 난간이 없으면 자다가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는 어릴 때부터 사용했고 침대에서 떨어 지지 않는다며 2층을 사용하려면 하라 했다. 첫 날 나는 2층에서 떨어 졌다. 머리든 어디가 잘못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했고 다시는 2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빙긋 웃었다. 수준 차이다. 달리 말할 것이 있는가. > > 나는 한국에서 노동에 장사만 했다. 80kg 이상의 짐을 지고 아침 7시에서 저녁 7시까지 하루 종일 4층 5층까지 벽돌을 져 나르면 5천원 받았다. 리어커로 화장지 한 묶음을 20개 팔면 노동자 일당이 된다. 더 이상 팔면 더 남는다. 미국에서는 잔디를 깎든 청소를 해도 당시 시간당 3.5 달러였다. 한국과 미국의 용접공 일당이 20배에서 10배까지로 격차가 줄어 들고 있던 때였다. 나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다 미국에 도착하면서 수세식을 사용했다. 내가 문을 열려고 가면 여자 분이 문을 열어 줬고 나는 그냥 드나 들었다. 내가 복도를 걷다 보면 앞에 있는 분들이 모두 옆으로 물어 나 있었다. 이 것이 얼마나 왈패며 막 가는 행동인 줄 몰랐다. 모르니 그렇게 했다. > >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기숙사를 배정 받자 바로 친한 한국 유학생 2명을 알게 되었다. 한 분은 공부가 좀 떨어 지는데 주변 가족들이 미국에서 의사들이다. 한 분은 고위 관리 자녀이다. 충무로 사거리 어디에 빌딩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모두들 돈을 잘 쓰는 분이다. 그들에게 내가 다니는 세인트루이스 교회를 다니자고 하니까 흔쾌히 약속을 했다.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하나 토요일에 미리 위치를 봐 두자고 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교회 주변에 사는 백 목사님 큰 사위 집으로 갔다. 구역장 인사를 시켜 놓아야 앞으로 심방을 하게 되고 교인이 될 것이다. 서부교회 반사니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토요일 9시나 되었을까? 현관 문을 노크 하니 백순희 사모님이 문을 열다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평소 뵌 얼굴과 아주 달랐다. '메이크 업도 하지 않은 아침에 오다니!' 한 편으로는 교인을 전도하여 인사 시키러 왔다는 소식에 사모님은 반가워 어쩔 줄 몰랐고, 한 편으로는 쉬는 날 이 시간에 전화 없이 현관에 왔다는 뜻이다. 뒤에 알았다. 가발에 눈썹에 모든 얼굴은 사회 생활을 할 때와 집 안에서가 다르다는 것을. 서부교회 주일학생 심방과 교인 전도에 무슨 예고가 있는가? 첫 날에 2명을 전도한 것도 한국식이고, 교회에 소개한다고 데려 간 것도 한국식이다. 그 분들로서는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이제 그런 일이 얼마나 실례가 되는지 느끼고 있다. 나는 평생 화장 하는 사람과 살아 보지를 않았다. 가족 중에 주변에 살며 화장을 하는 분이 한 분 있었다. 거창을 나올 때까지 늘 그 분과 부딪혔다. 사회 생활의 최소한이다, 멀쩡한 얼굴에 고속도로 포장이다... 이 문제로는 다툴 일도 거론 할 일도 아닌데 백 목사님이 설교 중에 '남자가 먼지나 톡톡 털고...' 라며 비판적으로 표현한 부분을 가지고 나대로 해석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아내는 지금도 화장을 하지 않는다. > > 먹고, 입고, 돈을 사용하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모든 면에서 작은 신학교 너무 튀어 버렸다. 목사님은 일단 미국이라는 곳으로 가는 이상 그 곳에 실례가 되거나 그들에게 약아 보이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 그들이 형성한 그들의 세계를 흔들지 않고 사는 것을 주의 시켰다. 목사님은 자녀들을 통해 미국의 내면을 수십 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출신은 조부로부터 당시까지 낱낱이 알고 계신다. 별별 일을 내고 별별 탈을 일으킬 사람이다. 그런데 그 곳에는 신학교와 함께 그 지역 사회에 공회라는 인지도가 있다. 백영희 목사의 자녀들이 공회 교회로 모여 있고 본국에서 직접 보낸 학생이라는 이름이 따라 다닌다. 서로 경쟁하며 서로를 의식하는 교회 중에는 담임이 1980년대와 90년대 총신대 총장으로 10여년을 부임했던 인물도 있다. 이들과는 공회가 여러 깊은 인연이 있다. 오늘의 북한 사람이 오늘 서울 한복판에서 북한에서 하던 언행을 그대로 다 해 버리면 이상하기도 하고 수상하기도 하고 괴이하기도 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오해를 받을 듯하다. > > 나는 그런 것을 인식할 줄 몰랐다. 하지 않도록 만들어 져 있었다. 서부교회의 전형적인 반사.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 주변을 둘러 보면 변심이 되거나 신앙이 흐려 진다고 의식화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피동이 되면 속화라고 생각했다. 백 목사님의 부탁은 한 번이었고 구체적 행동 지시는 없이 그냥 오해 받지 말고 야비하게 보이면 안 된다, 돈이 필요하면 더 보내겠다... 이 정도다. 그렇다면 내가 자립을 해서 백 목사님께 돈을 부탁하지 않아야 한다. 갈 때 주신 돈 외에 추가로 돈을 부탁해 본 적이 없다. 장소만 옮겨 놓았지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대로 했다. 토요일에 학생을 심방했다. 이 것도 그들에게 얼마나 괴로움이 되는지 뒤에 알았다. 주일학교에서 모은 연보는 성탄절 학생을 위해 사용했다. 이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낭비가 되는지 뒤에 알았다. 주일 예배만 드리던 교회에 밤예배를 시작 시켰다. 얼마나 그들에게 고통이 되는지 몰랐다. 새벽예배는 더욱 그런 셈이다. 한국보다 일은 1/3 정도로 쉬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회가 유학을 보내며 돈을 책임진다 해놓고 돈을 보내지 않으니 학생이 혹사를 한다고 송금을 요청했다. 목사님은 내게 실제 어떠냐고 물었다. 한국보다 쉽게 돈을 벌고 한국보다 물가가 엄청 싸니 걱정을 마시라 했다. 문제는, 나의 생활이 세인트루이스의 다른 한인교회들의 교육 전도사들과 비교가 되고 있었다. > > 당시 카브난트 신학교의 학생은 한 달에 200달러를 벌면 학비와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느 신학생이 어느 교회를 가든 30분 정도의 모임을 맡으면 주교든 유아든 학생이든 청년부든 월 200달러를 준다. 일종의 장학금 차원으로 교회마다 투자를 한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교회는 공회 교회다. 그러니 경제 지출은 한국의 공회식이다. 나는 교회로부터 어떤 혜택도 없이 반사를 한다. 주일 오전 오후뿐 아니라 토요일에는 목사님이 운전을 하지 못하니 운전을 하고 심방을 함께 한다. 그리고 밤예배 새벽예배까지 기본적으로 다 참석한다. 신학생들은 주일에 자기 맡은 한 타임이 전부고 성실한 사람은 그 교회 대예배나 다른 프로그램에도 참가한다. 원칙적으로 주일날 교인도 활동하는 정도가 그들의 전부다. 그들 기준으로 내가 활동비를 받으려면 500달러는 최소한 받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한국의 공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섭섭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서부교회 1천명 반사들처럼 당연히 자급자족이었고, 공회나 목사님 돈은 목사님이 1원 하나를 아끼는 면을 생각해서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 학기가 거듭 되며 돈이 부족하여 일하는 시간을 늘려 갔다. 미국의 신학교는 대학원 과정이다. 학기당 15학점 정도를 신청한다. 이 정도 과목을 이수하려면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학교는 주 20시간 이상 일을 하려면 native들도 별도 승인을 받게 되어 있다. 나는 매주 40시간 일을 했다. 물론 학교에 보고하지 않았다. 학생을 위한 승인 제도니 나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내 양심이었다. 지금에야 그 기준을 이해하고 지금에야 그 기준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쳤는지 낯이 부끄럽다. 학생 1명이 돈을 벌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니니 가족 분위기의 학교 전체가 안스러워 지고 바늘 방석이 된다. 세인트루이스교회의 중심 교인 한 분이 이 문제를 알았기 때문에 여러 번 개인적으로 알 듯 모를 듯 해명을 했었다. 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하느라고 달리 돈을 지출할 수 없어 미안하다... 한국에 이야기 해서 돈을 보내라고 하겠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확실하게 막았다. 또 미안해 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또 한 마디를 전한다. 전임자 시절에 중심 교인 한 분이 전임자와 부딪히게 되자 신학교에 가서 유학생을 맡은 Dr. Soltau 교수에게 문제를 제기했고 교수가 사과를 했다. 사과를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학교를 입학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생활을 하면서 대략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입학하기 직전의 문제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는 설명에 일부 이해도 되지만 그 것은 나와 관련 없는 문제다. 어려움이 많으면 나의 실력이 좋아 진다고 배웠다. 다른 것을 더 생각할 내가 아니다. 부산의 본부에서 오는 돈은 내가 막았고, 교회는 건축 때문에 줄 형편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올 때 세인트루이스교회는 나의 유학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책임 지겠다고 했고 이 보증서가 학교에 들어 갔다. 그래서 학교는 내게 대해 장학금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 선교사로 나왔던 부친을 가졌고 스스로 일본 선교사로도 있었던 유학생 담당 교수는 모든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백영희 신앙 세계는 바로 이런 순간에 빛이 난다. 원망을 하려면 할 곳이 많다. 따질 곳도 많다. 또 처음부터 나를 보낸 서부교회와 공회와 백 목사님에게 그냥 청구서만 보내면 된다. 그런데 적게 받을수록 그리고 내가 수고를 더할수록 십자가라고 배운 사람에게 무슨 이런저런 말이 필요할까? > > 교회에 있는 힘껏 충성했고 돈을 버는 일에 신 나게 밤을 새며 했고 남는 시간만 가지고 공부를 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비슷한 형편의 유학생과 눈대중으로 비교해도 약 3배 정도의 실력이 늘게 되었다. 성적이 괜찮은 정도니 학생으로 됐고, 주 40시간 노동을 했으니 노동자로서 됐고, 어떤 한인교회 누구와 비교해도 제일 많이 충성했으니 일단 3인의 몫을 했다. 바로 이런 노력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주는 돈으로 공부를 했으면 사람을 아주 많이 버려 놓았을 듯하다. 그런 참 묘한 면이 있는 것이 교회 내부 모습이다. > > 나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으나 나의 이런 언행은 뒤에 알고 보니 부산의 목사님께 일일이 전해 지고 있었다. 목사님의 신임을 얻게 된 기회였고 이로 인해 유학 후 목사님은 내가 목사님의 모든 가족들을 모두 돌보거나 심부름 하는 일을 두고 일체 막지 않았다. 나는 목사님께 받은 은혜를 그 자녀들을 향해 사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자녀 7남매 부부 전부와 나는 개인사를 대화 한다. 손주 20명 전부 중 17명은 내가 직접 가르쳤다. 나보다 나은 손주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16명에게는 주일학교 반사였다. 그리고 이런 나를 지켜 보며 가족 중에는 나를 활용하면 백 목사님 사후의 교권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 났다. 그 중에 일부는 나를 순수하게 보고 동지로만 대한 경우도 있다. 나는 이 분들을 통해 백영희 신앙 노선에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할 백영희의 가족 이면사를 모두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조차 나만큼 가족사를 아는 사람이 없다. > > > > 이런 경험은 이 노선 백영희 세계로 끝나지 않았다. 한 의인, 한 시대적 인물을 마음껏 깊게 살피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주기철 손양원 주남선 이인재 박윤선 등등의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역사적 인물들의 드러 나지 않은 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부인이나 자녀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은 그들의 선친을 두고 그들과 내가 마치 함께 겪어 본 당사자들처럼 대화를 하게 된다. 한국의 초기 교회사를 어떤 학자와 비교해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내막을 마치 다 아는 듯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눈으로 다시 아주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피고 당대 교회를 살피게 되었다. 쪽배로 현해탄을 한 번 건너 보게 되면, 세계 오대양을 직접 다녀 본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성경과 교리는 설교록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 지식들이 산 지식이 되어 오늘에도 펄펄 뛰도록 만드는 실천적이며 실체적인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 > > > 신학을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내면서 이런 훗날까지를 계산했을까? > >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분은 기도 중에 주님의 뜻을 찾고 나서 결정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몰랐던 것도 훗날에 보면 과연 능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세계가 그렇다. 연구소를 통해 백영희의 각종 자료를 접하는 이들에게 그 지식과 그 지식이 주는 은혜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고 있다. > >
웹 에디터 끝
링크 #1
유튜브, 비메오 등 동영상 공유주소 등록시 해당 동영상은 본문 자동실행
링크 #2
날짜수정
자동(선택)
추가태그
첨부파일
파일추가
파일삭제
첨부사진
상단출력
하단출력
본문삽입
본문삽입시 {이미지:0}, {이미지:1} 형태로 글내용 입력시 지정 첨부사진이 출력됨
자동등록방지
숫자음성듣기
새로고침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작성완료
취소
정리
(세부)▶
①'백영희신앙노선'총괄(요약)
②'백영희신앙노선'총괄(전체)
③교리정리
④성경신학
⑤문답방정리
⑥기타정리
자료
분류자료
●
문의답변
쉬운문답
발언/주제연구
연경교재
참고연경
일반자료
남단에서2
+
새글..
03.04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03.04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03.04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03.04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03.04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03.03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
03.0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새댓글
01.01
01.01
01.01
01.01
01.01
01.01
01.01
State
현재 접속자
197(
1
) 명
오늘 방문자
5,992 명
어제 방문자
7,234 명
최대 방문자
7,646 명
전체 방문자
3,303,954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