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KIST
백영희 신앙노선의 오늘을 고민하는
목회 연구소
총공회 목회연구소
0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총공회
총공회 소개
인물/사건
소사/일지
역사자료
목회 연구소
역사
참고
백영희
보관자료
추가자료
출간 설교록
미출간 (준비)
설교록 발췌집
연구서적
출간목록
연구실
행정실
행정
보관
정정
회원/후원
활용자료
교리 정리
성경신학
[설교류]
원본설교(확정)
원본설교(검토)
성경단어사전
주교공과
[사전류]
교리성구사전
주해사전
용어사전
예화사전
메모사전
각주사전
참고자료
메인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0
남단에서
     
명상 또는 추천의 글
홈 > 연구실 > 남단에서
이 게시판에는
이 홈
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
남단에서 글답변
이름
필수
비밀번호
필수
분류
비밀글
날짜
제목
필수
내용
웹에디터 시작
> > > (주남선과 백영희) > 백 목사님의 기록뿐 아니라 고려파에서 백 목사님을 제명할 때 주력이었고 평생 반대만 했던 남영환 목사님의 기록에서도 일치하는 부분은 백 목사님의 고신 내 영향력입니다. 고신 전체를 흔들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고신의 초기 지도자들은 주남선의 애제자며 후계자를 백영희로 봤습니다. 그래서 주 목사님이 6.25 전쟁 초기에 돌아 가셨는데도 1959년에야 백 목사님을 제명한 것은 주남선 목사님 때문에 그렇게 망설인 것입니다. 주 목사님이 돌아 가실 때 평생 사용하던 성경과 설교할 때 입던 두루마기 등을 백 목사님께 맡기는 장면을 뺄 수 없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 > 주 목사님을 사경회 강사로 초빙을 하면 당시 백 집사님을 대신 보냈고 고신 내에 두루 소개하여 시골의 말단 전도사가 고신 지도부들에게 총애를 받고 교단적 인물로 급부상한 것도 전적 주 목사님의 후원 때문입니다. > > (거창읍교회의 후계자) > 하나 의문이 남습니다. 돌아 가실 때 주 목사님은 고려신학교 설립자로서 한상동에게 깍듯이 선배 예우를 받았고, 거창지방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왜 임종 때 백 조사님을 급하고 불러 놓고 다른 말씀은 하시면서 후계자로 지목은 하지 않았을까? 남영환 목사님은 후임으로 임명을 받고도 거창교회에서 2차례나 밀려 나서 다른 곳으로 갑니다. 신앙도 설교도 지도력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주 목사님이 너무 잘 알면서 왜 그러셨을까? > > 반대로, 주 목사님이 백 목사님과 비교를 하지 못할 남 목사님에게 후임을 맡김으로 백 목사님은 1951년에 이미 600여명의 교회를 담임하며 영향력을 키울 기회를 놓칩니다. 거창읍교회에 주 목사님의 후임이 되면 거창군 합천군 함양군이라는 3개 군의 교회들 전체의 지도자가 됩니다. > > (목사직을 거부했기 때문일까?) > 어떤 분들은 백 목사님이 목사라는 직책을 백 목사님이 아주 싫어하여 신학교도 가지 않았고 오로지 순교 준비에 전력했으니 주 목사님이 거창읍교회를 맡긴다 해도 빨치산 속에 있던 위천교회를 두고 오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거창읍교회는 3개군의 수십 개 교회의 중심이면서 신년행사까지 맡아야 하므로 장로교 체계의 고신 상황에서 목사가 아닌 분을 후임으로 맡기지 못했을 것으로 말합니다. 말하자면 교회 행정적 입장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 목사님은 전쟁 전인 1949년에 위천교회로 이동할 때 이미 목사 안수 과정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보고 고려신학교에 입학을 했고, 이후 전쟁과 주 목사님 임종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고신의 창립 초기면서 고신이 장로교 총회로부터 제거 되는 과정이었고 교단의 모든 행정은 법이 따로 없고 필요에 따라 특별 조처를 했습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 주 목사님의 부탁이면 안수를 당장에 하지는 못할지라도 최단시간에 시행하고 그 이전의 임시 조처는 다른 분이 대행할 수 있습니다. > > (훗날 돌아 볼 때) > 전성수 목사님 생전에 늘 '그 때 주 목사님이 거창을 맡겼다면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공회가 전국 규모의 교단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 목사님이 당시 백 조사님을 거창에 잡아 두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위천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서부교회로 바로 갈 수 있었고, 서부교회는 전쟁 때문에 피난 정부와 전국의 인재들이 피난으로 모인 한복판을 통해 백영희를 전국화 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 > 능치 못하심이 없으니 어떤 방법도 동원할 수 있지만, 이치와 현실을 자연스럽게 조화 시켜 나가는 것이 주님이시며, 그 방법을 주 목사님 유언에서 백 조사님을 뺐고, 서부교회를 통해 공회 노선을 준비 시켰습니다. 이런 원리는 1950년대 후반에 이병규 목사님이 김현봉 목사님을 백 목사님과 연결 시켰고, 1965년 전국 최대 교회인 아현교회도 김 목사님이 백 목사님에게 맡기고 가야 맞는데 이병규 목사님의 역할 때문에 중단이 됩니다. 이 건은 어떤 문제로 이어 질까? 서울에 가셨다면 교회의 규모는 순복음교회를 압도하지 않았을까? 다만 이 노선의 정미한 설계와 시행은 어려웠다 봅니다. 서울 한 중심에서 돌풍을 일으키면 전국의 훼방이 일어나면서 평생 고소와 논쟁에서 헤어 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봅니다. 아현교회 내부는 백 목사님이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할 정도의 구조였고, 외부 교계도 그렇습니다. > > 거창읍교회 후임이라는 막강한 자리를 놓친 대신, 서부교회를 주셨고 > 아현교회라는 전국 최고의 기회를 주지 않으시고 대신, 세계 교회사적 가치의 이 노선을 서부교회를 통해 주셨습니다. > > > 우리는 우선 좋은 것이 늘 좋아 보이고 꼭 잡고 싶어 합니다. > 그런데 사55:8에서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최근, 연구소의 각종 장애들을 겪으며 뭔가 큰 것을 마련한다는 것은 확실히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싹도 보입니다. > >
웹 에디터 끝
링크 #1
유튜브, 비메오 등 동영상 공유주소 등록시 해당 동영상은 본문 자동실행
링크 #2
날짜수정
자동(선택)
추가태그
첨부파일
파일추가
파일삭제
첨부사진
상단출력
하단출력
본문삽입
본문삽입시 {이미지:0}, {이미지:1} 형태로 글내용 입력시 지정 첨부사진이 출력됨
자동등록방지
숫자음성듣기
새로고침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작성완료
취소
정리
(세부)▶
①'백영희신앙노선'총괄(요약)
②'백영희신앙노선'총괄(전체)
③교리정리
④성경신학
⑤문답방정리
⑥기타정리
자료
분류자료
●
문의답변
쉬운문답
발언/주제연구
연경교재
참고연경
일반자료
남단에서2
+
새글..
03.04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03.04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03.04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03.04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03.04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03.03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
03.0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새댓글
01.01
01.01
01.01
01.01
01.01
01.01
01.01
State
현재 접속자
195(
1
) 명
오늘 방문자
5,991 명
어제 방문자
7,234 명
최대 방문자
7,646 명
전체 방문자
3,303,953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