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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p>THE CHRISTIAN TIME<br /><br>2022년 9월 14일 (제426호)</p><br><p>특집4</p><br><p>신사참배와 한국교회<br /><br>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p><br><p>선교사들의 신사참배에 대한 두 가지 입장</p><br><p>신사참배 문제와 관련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선교사들이 일치된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그처리결과도 일치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신사참배의 여부가 선교학교의 존폐와 관련되었고 거기에 따라 강경한 반대 자세와 타협적인 유화 자세가 있었다. 선교사들의 입장과 논쟁은 한국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본국 선교부의 자료를 활용해 가면서 연구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간단히 설명하면서 종래 비타협적 자세만 소개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당시의 타협적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해를 돕고자 한다.</p><br><p>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요구가 이 의식을 통하여 젊은 세대들의 과도한 애국심을 증진시켜 젊은이들로 하여금 군인이 되도록 하고 일본의 더 큰 영광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려는 군국주의자들의 결정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반복해서 신사의식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애국적인 것임을 발표하고 있다고 했다. 신사의 성격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선교사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을 때، 일본 정부는 거기에 대한 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1936년 북장로회 선교부 실행위원회 총무 홀드크로프트가 신사의 성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선교사회의를 착수하려고 했을 때 경찰은 그를 불러 신사에 관해 정부가 규정한 이외의 어떤 논의도 할 수 없다고 통고했다.<br /><br>다른 선교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온 선교사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복음전파를 주력하는 선교사와 교육이나 의료 등 봉사를 중시하는 선교사다. 전자는 선교비를 복음전파 이외에 붙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펴는 선교사들로서 마펫(SamuelA. Maffett)과 평양 중심의 선교사들이다. 봉사를 중시하는 선교사들은 후자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다. 신사참배에 대한 견해 차이도 이런 선교방식이나 분위기에 따라 달라졌다. 전자를 대표하는 선교사가 평안도에서 활동한 맥균(George Shannon McCune)이었다. 그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명확한 신앙노선은 홀드크로프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홀드크로프트의 노선은 실행위원장으로서 그 뒤를 이은 솔타우(David L-Soltau)에게 받아들여졌다. 거기에 비해 서울지역에 거주하는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중에는 학교 존속을 주장하며 신사참배에 타협적인 자세를 갖는 이들이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H.HUderwood)와 쿤 스(E.WKoons) 등이었다. 서울측 주장은 캐나다 선교부 관하의 함경도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자유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했다. 그 때문인지 쿤스가 한 때 학교장으로 관여하고 있던 미 북장로회 산하 경신(新)학교와 정신 여학교의 생도들이 1935년에 심사참배를 했다고 전한다.</p><br><p>평양측 선교사들이 신사참배에 대한 비타협적 자세를 취한 데는 한국인 목회자들과의 교감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 16일، 원로교장 마펫과 함께 도지사에게 불려가 참배실시 여부를 독촉받은 맥균이 18일 이사회의 양해에 따라 교장이 학교 대표자로서 신사에 참배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하고 이를 당국에 통보하기 전에 박형룡과 주기철 목사들에게 자문을 구한바가 있다. 결국 그들의 권고를 받아 그는 신사참배를 완전히 거부키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경찰에 불려가서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한 평양의 목사들은 결속하여 선교사들에게 불참배를 관철하도록 요구했다. “신자에게 신격화되는 여러 영을 예배하는 것은 신의 계명에 위반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무서운 압력이 교회에 가해질 것이라는 것도 또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견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교회의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오늘날 선교사 여러분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신사에 찬성하는 선교사는 조선에서 정상적인 지도력을 잃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50년 동안 조상숭배를 엄히 금지해왔다. 만약 이것을 범하면 파문시켰다. 선교사는 한국교회에 반대되는 결단을 하지 않기를바란다" 선교사에 대한 이같은 요구 속에는 선교사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통치를 피하기 어려운 한국인들보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내세워 일본 정부를 설득하고 때로는 투쟁하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라는 한국인의 기대가 숨겨져 있다. 한국인 목사들은 선교사들을 권고하여 그 태도에 의연한 자세를 취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인 목사들의 이같은 권고가 주효했다고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는 이렇게 썼다. “이 말이 우리들의 신사에 대한 태도도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날 자유롭게 명확히 말해준 조선의 형제들의 판단을 엄숙하고 성스러운 위탁으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한국인 지도자의 대부분은 뒤에 압력에 의해 약해지고 마음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그 기억해야 할 모임에서 나온 입장의 정당성과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p><br><p>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그것이 단순한 반국가 감정이나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편승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국가의 시책을 존중해야 하고 그 명령에 따라야 하며 시민의 기본적인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같은 그들의 의도를 당국에 납득시키려고 했다. 때문에 그들은 그때까지 당국과 선교사들이 누렸던 우호적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또 기독교인이 양심을 범하는 일이 없이 한국인의 교육에 정부와 협력할 수 있을 길이 발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같은 자세는 맥균이 신사문제로 교장직을 물러나야 할 즈음에 뉴욕 선교본부에 보낸 그의 서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에 앞서 그가 평남도지사 야스타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사의식을 단순한 교육적 애국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려는 정부의 명백한 의도를 이해하려 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p><br><p>그러나 어떤 경위를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되었든، 선교사들은 일본정부에 대한 존경과 우호적 관계가 신사참배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신사는 당국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국가의식이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데에 그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신사참배 문제를 처음으로 클로즈업시킨 맥균은 신사 의식이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분명히 지적했다. 이 젊은 선교사의 아들로 일본 사정에 익숙한 美 남장로회의 풀턴(C.Darty Fulton)도 "정부가 말하는 신사비종교성은 기만이며 신사의식은 조상숭배를 포함하고 있고 기독교도는 일치하여 그것을 금해왔다"면서 신사가 종교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제1، 2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로 규정해 온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서 더욱 진지했다. 그들은 과거 50여 년 동안 조상숭배인 제사를 거부함으로 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숱한 박해를 받아왔는데، 이제 완전히 같은 의식으로 일본의 황실의 조상을 숭배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자가당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br><p>맥균의 신사참배 반대 논리에는 또 다른 것도 보인다. 그것은 ‘양심의 자유' 문제였다. 그는 종교적 행위는 그것을 행하기 전에 각개인의 양심이 확신하여 결정해야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국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더 나아가 맥균은 양심 자유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는 일본 관리들도 기독교인들에게 양심에 거슬러가면서 신사참배를 행하도록 강요할 의사가 없다고 누차 지적한바 있다고 상기시켰다. 때문에 선교사들이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진리와 양심의 자유에 반하여 신사에 참배하거나 학생들을 신사참배에 참여시켜 우상숭배를 여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학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타협적 입장을 취했던 선교사도 있었다. 일찍이 타협적 태도를 취한 감리교회 선교사들과 안식교 등의 선교사 등이 있으나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장로교 계통에서는 언더우드(H.H.Underwood)와 쿤스(E.W.Koons). 그리고 캐나다 선교부의 태도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p><br><p>언더우드는 1936년에 들어서서 "나 자신은 국가적 의식으로서의 신사를 받아들인다. 이것에 의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시적은 흥분 때문에 거짓된 민족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선교사는 1895년، 1910년، 1919년에도 기독교 기관이 다른 목적으로 잘못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 왔다. 이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부의 언명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의식적 존경을 표하는 것 뿐이요 만약 정부가 우리들에게 스스로 진상품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든가 또 학교 내에 신사와 같은 것을 세우도록 한다면 나는 반대한다. 나로서는 지금이 결정적 대결의 때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들은 일본 정부의 손님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이 땅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치에 반대하는 형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성의를 가지고 정부에 충실하고자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점차 한국에서 신사참배 거부를 결정한다면 일본 정부는 반항적 혹은 파괴적으로 보고 이로부터 오는 복음전도나 의료사업에도 지장을 가할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그 뒤 McAfee 및 쿤스 린튼(WA.Linton)“ 스왈론(WL.Swallen)등에게 동시에 보낸 편지에서، 신사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다수 선교사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라고 하면서 신사의식의 본질، 신사를 대하는 두 개의 입장과 연희전문학교의 입장 등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총독부가 반복적으로 모든 학생들의 참배를 강요하는 상황에서 유억겸 부학장과 백낙준 등 세 학부장 및 감리교 파송 대표 베커(A.I.BeCKER)와 의논한 결과 참배하도록 권고를 받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큰 위험은 상존하고 있다고 실토하면서 타협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p><br><p>서울에서 경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쿤스도، 기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언더우드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1935년에 정신학교와 함께 '시험적으로' 이미 신사참배를 했던 경신학교의 쿤스는 신사참배를 종교적 의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936년에도 학생들을 이끌고 신사에 갔다고 이렇게 보고했다. "그는 홀드크로프트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개최된 선교부 실행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대화를 나눈 후، 50명의 학생을 거느리고 신사에 갔다. 하루 중 늦은 시각에 있는 의식은 없었지만، 우리는 각기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온 긴 행렬에 끼어 신사 앞의 목책 앞에까지 가서 한번 절하고 돌아왔다. 나는 우리가 종교적 성격의 어떤 것이나 어떤 인격이나 영이나 물질적 상징을 숭배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내가 거기에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신사에 경배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종교적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했다. 우리는 존경과 정중함을 표했고، 정부가 허락하는 방법을 따라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에 충성을 보였다"</p><br><p>위에서 본 바와 같이 쿤스는 신도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절 하는 것'은 우상 숭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어떤 상징을 숭배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신사 의식에 참여하는 행위라야만 종교적 성격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 점은 다음에서도 보인다. "우리 학교들은 노리토(신도의 기원)나 타마구시(신전에 바치는 삐쭈기 나뭇가지)를 바침으로써 신도의식에 실제로 참여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 한، 단지 절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표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하며، 성스러운 계명을 위반하지 않고 학생들과 관계자들에게 적절한 설명을 하면서، 학교들이 그러한 명령에 순응할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믿는다."</p><br><p>언더우드와 같은 입장은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부에서도 보인다. 1925년 세 교파가 연합하여 성립된 캐나다 연합교회 해외선교부의 암스트롱(A.E.Amstrong)은 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맥아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정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죽은 영령에게 신관이 봉헌물을 바친다는가 여러 영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우리의 출석을 요구할 때는 도리어 신사의 존재방식을 전부 말로 체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본 정부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대로 그들의 의식에서 종교적 제의를 하지 않는지، 또 신관이 죽은 영령에게 봉헌물을 갖다 바치는 행위 등에서 종교적인 것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지.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 일본 정부의 주장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언명한 것이다.</p><br><p>그러나 일본 정부의 주장을 체크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의 말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전제로 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캐나다 연합교회 해외선교부의 이같은 생각은 이미 한국에 있는 캐나다 선교사들에게 교감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던 스코트(WSout)는 해방 후 남긴 회고록에서 당시 그들은 도 당국과 타협하여 학교 운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 문을 닫고 증거하는 것이나 닫지 않고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둘 다 그의 영광을 위해서 써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한다고 했다. 이같이 다소 여유를 갖는 듯한 캐나다 선교부 선교사들의 입장은 1938년에 이르게 되면،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있음이 보여진다.<br /><br>"매월 6일과 휴일에는 신도 신사들에서 의식이 거행된다. 모든 학교들은 참가해야 한다. 신사에서 거행되지만 우리를 참가하도록 요구하는 행사는 단지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당국은 문서와 구두로 설명해 왔다. 우리 선교부의 학교들은 당국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공식적인 존경과 충성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기회를 주기 위한 애국적 행사로서 그 의식들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나갈 수 없다." 아직도 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 있던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 문제에서도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주의해 볼 것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곳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쪽으로 입장을 굳힌 것은 한국인들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에서 타협의 길을 걷게 되는 데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p><br><p><img src="https://pkistnas.synology.me//paikist/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5/202209/6325b1a8ddc123577118.jpg" alt="" /></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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