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KIST
백영희 신앙노선의 오늘을 고민하는
목회 연구소
총공회 목회연구소
0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총공회
총공회 소개
인물/사건
소사/일지
역사자료
목회 연구소
역사
참고
백영희
보관자료
추가자료
출간 설교록
미출간 (준비)
설교록 발췌집
연구서적
출간목록
연구실
행정실
행정
보관
정정
회원/후원
활용자료
교리 정리
성경신학
[설교류]
원본설교(확정)
원본설교(검토)
성경단어사전
주교공과
[사전류]
교리성구사전
주해사전
용어사전
예화사전
메모사전
각주사전
참고자료
메인
총공회
백영희
보관자료
연구실
행정실
활용자료
참고자료
0
일반자료
     
이곳의 신앙성향을 고려하여 소개하고 싶은 일반 자료
홈 > 연구실 > 일반자료
일반자료 글답변
옵션
비밀글
이름
날짜
제목
필수
보충설명
웹에디터 시작
> > > 프랭크 윌리암 커닝햄 선교사<br><br>권임함-탁월한 한국어 실력، 신약성경 번역'빛' 밝혀<br><br>xa0<br><br>프랭크 윌리암 커닝햄은 1913년 내한하여 진주، 마산، 부산에서 사역하였고، 1941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기까지 28년간 한국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해방 후 1947년، 다시 내한하여 한국전쟁 발발까지 3년간을 더 사역함으로 그가 한국에서 사역한 기간은 총 31년간에 이른다.<br><br>xa0<br><br>xa0<br><br>고전어 우등학생<br><br>xa0<br><br>xa0<br><br>한국 이름 권임함(權任咸)으로 알려진 프랭크 윌리암 커닝햄(Frank William Cunningham، 1887-1981)은 1887년 12월 19일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리차드 커닝햄(William Richard Cunningham)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빅토리아주 킬모어(Kilmore)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감리교 목사의 딸이었다.<br><br>xa0<br><br>xa0<br><br>프랭크 커닝햄의 아버지는 원래 감리교 목사였으나 후일 장로교로 이적하였고 자식들의 교육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관심만큼이나 12남매들의 머리는 명석했고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다. 장남인 권임함은 후일 훌륭한 한국선교사가 되었으며، 차남인 케네스 스튜어트(Kenneth Stewart Cunningham)는 철학박사(Ph. D) 학위를 얻고 호주에서 저명한 교육학자가 되어 멜버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랭크 커닝햄은 초등، 중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중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곧 멜버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08년 그가 21세가 되던 해، 고전어에서 우등성적으로 석사학위(M.A)를 받았다. 그의 고전어 능력은 후에 그로 하여금 한국어 성경번역을 가능케 하였다.<br><br>xa0<br><br>xa0<br><br>그리고 그는 장로교회의 신학교육기관인 오몬드 대학(Ormond College)에 입학하였다. 오몬드 대학은 1866년 멜버른대학에 인접한 기숙관에서 시작된 장로교회의 신학교육 기관인데 이 당시 장로교 다른 지역에서나 다른 교파로부터 부러움을 살 정도로 좋은 교육시설과 교수진을 갖춘 학교였다. 이 학교는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Free church)의 전통을 계승했으며 에딘버러 출신의 신학교수들이 주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대 호주의 저명한 학자들이었다.<br><br>xa0<br><br>xa0<br><br>커닝햄이 멜버른대학에서 고전학을 전공한 것도 목사가 되기 위한 준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공부한 고전어에 대한 지식 때문에 신학교육기관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였고 모든 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주었다.<br><br>xa0<br><br>xa0<br><br>오몬드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는 25세 때인 1912년 9월 15일، 이 학교를 졸업하고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미 빅토리아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으므로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한국에서 사역하기를 원했다. 한국에서의 호주장로교 선교사역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호주선교부가 관할하는 부산، 경남지방의 인구는 당시 150만에 이르고 있었으므로 이들에 대해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더 많은 선교사와 물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위한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그는 한국선교를 자원하였고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그를 한국에 파송하였다.<br><br>xa0<br><br>xa0<br><br>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교회와 성도들의 환송을 받고 1913년 초 호주를 떠나 1월 16일 부산에 도착하였다.<br><br>xa0<br><br>1913년 내한한 커닝햄은 진주지부로 배속되었다. 진주지부는 부산에 이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우선 언어공부에 몰두하였다. 스톡스(M. B. Stokes)선교사가 쓴 『한국어문법』(Korean by Clause- Method)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미 언급했지만 언어 능력이 탁월한 그였기에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익혀가기 시작하였다. 당시로는 국한문이 혼용되고 있었으므로 한국어 공부는 한자공부를 겸해야 했고 이것이 선교사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으나 커닝햄은 어려운 한자공부와 한국공부에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내한한 선교사 중에서 한국어 실력이 가장 뛰어난 선교사였다.<br><br>xa0<br><br>xa0<br><br>그는 내한할 당시 미혼이었으나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 중이던 미국인 감리교 여성 케서린 안나 트레시먼(Catherine Anna Treisch- man، 1886~1957)을 알게 되어 1917년 11월 16일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커닝햄은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감리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트레시먼은 독일에서 미국 아이오와(Iowa)로 이민해 온 감리교 목사의 딸로서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교사였다.<br><br>xa0<br><br>xa0<br><br>진주 경남성경학교 교장<br><br>xa0<br><br>xa0<br><br>커닝햄 목사는 내한 후 3년이 지난 때부터는 진주성경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교수능력도 겸비했던 그는 이때부터 이 일을 시작하여 20년간 진주의 경남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경남성경학교는 1911년 호주 선교부의 결정에 의해 진주의 광림학교 건물에서 개원한 신학교에 준하는 성경 교육기관이었다. 호주선교부는 성경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각 지부별로 성경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나 그 결정이 실천되지는 못했다. 단지 진주지부와 부산지부에서만 남자 혹은 여자들을 위한 성경학교나 성경반(Bible Class)이 가능하게 되었다. 진주에서는 독립된 건물이 없었으므로 진주 광림(光林)학교 건물을 이용하였다. 당시로는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또 한국인 사역자들이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을 형편 또한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남성경학교는 적절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에 평양에 장로교 유일의 신학교육 기관인 평양신학교가 있었으나 경남지방의 사역자들이 그곳에 가서 정규과정을 이수하기는 지리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남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다수의 인사들이 후일 목사가 된 것을 보면 진주의 성경학교는 중간 교육적인 의미를 가진 학교였고، 커닝햄은 이 학교 교장으로 부산، 경남지역 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br><br>진주، 거창، 함양، 의령 지역 교회 순회<br><br>xa0<br><br>xa0<br><br>커닝햄 목사는 성경학교 교육을 담당하면서도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순회하였으며، 당회장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1913년 내한한 이래로 진주지역 교회를 순회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에서 1932년까지는 진주지방의 첫 교회인 진주교회의 당회장으로 일했다. 거창지부는 1913년에 설치되었는데 선교사가 부족한 관계로 진주지부의 선교사들이 거창지역을 순회하였다. 커닝햄은 1922년 7월부터 1925년 말까지 거창 함양지방을 순회하였다. 그가 관할했던 교회로는 가천교회، 위천교회 함양교회، 초계교회، 그리고 구원교회 등이었다.<br><br>xa0<br><br>xa0<br><br>1908년에 설립된 함양교회도 앞서 언급한 바대로 권임함이 사역했던 교회인데، 그는 1922년 7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함양교회 당회장으로 일했고، 그의 후임으로 한국인 박영숙 목사가 사역하였다. 박영숙 목사는 권임함과 같이 일한 바 있고، 함양만이 아니라 거창، 합천 지역을 순회한 첫 순회목사였다. 권임함은 1936년 전후에는 서암교회 등 의령지역의 교회들을 관할하였다.<br><br>xa0<br><br>xa0<br><br>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br><br>xa0<br><br>커닝햄의 한국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한 일이다. 호주선교사 중에서 한국어 성경번역 혹은 개역사업에 동참한 첫 인물은 엥겔(G. Engel، 왕길지)이었다. 그 후 커닝햄이 1926년 구약개역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같은 해، 그는 신약개역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커닝햄은 1932년 다시 신약개역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그는 다른 위원인 크레인، 남궁억، 다른 한국인 조사 2명과 함께 지리산에 기숙하면서 마태복음을 개역하였다. 그해 8월에는 원산의 스톡스 집에 함께 기거하면서 사도행전을 개역하였다. 커닝햄، 크레인، 남궁억 등 3인조 개역팀은 1933년 요한복음، 누가복음، 빌립보서를 재 개역하였다. 이러한 성경번역과정에서 커닝햄은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바울의 옥중서신을 번역하였다. 여기서도 그의 어학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05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제2대 총무가 된 후 거의 30년간 한글 성경 개역과 편찬، 반포사업을 주도했던 밀러(H. Miller)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br><br>“호주장로교회의 커닝햄 목사는 7월에 휴가를 떠나 14개월간 부재할 예정입니다. 그는 한국의 신약개역에서 최고의 사람으로 우리는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나는 그가 돌아오면 그의 선교회가 개역작업을 그의 주된 사역으로 만들어서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주기를 희망합니다.”<br><br>xa0<br><br>xa0<br><br>안식년에서 돌아온 커닝햄은 선교의 일을 잠시 중단하고 개역작업에 몰두하였고، 1936년 개역작업을 1차적으로 완성하였다. 복음서 통일작업، 미진한 부분에 대한 재개역 등 모든 작업이 1937년 봄에 모두 완료되었다. 1906년 공인본، 『신약젼셔』가 나온 지 30여 년 만이었고، 개역작업이 시작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커닝햄은 성경번역위원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br><br>xa0<br><br>호주 장로교회의 기관지였던 『메신저』(Messenger)에서는 권임함의 사역과 활동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 “성경개역위원회의 신약분과 위원으로서 그의 사역은 대한성서공회 총무와 위원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평가는 과장이 아니었다.<br><br>xa0<br><br>xa0<br><br>커닝햄은 학자로서도 탁월한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가 엥겔(왕길지) 선교사의 후임으로 평양의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일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호주선교사로서 평양의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 일했던 엥겔 선교사는 1935년을 끝으로 한국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곧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신학교는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3년 동안 교수의 충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일로 커닝햄의 교수직이 예정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만일 신사참배 문제와 같은 방해적 요소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 교수로서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br><br>xa0<br><br>xa0<br><br>1913년 내한한 이래 26년간 한국에서 봉사한 권임함은 1939년 10월 선교부 회의에 참석한 후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안식년이 끝난 후에도 다시 내한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1941년 6월 30일자로 선교사직에서 공식적인 사임을 하였고 링우드 크로이돈(Ringwood Croydon) 지역 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회자의 길로 돌아갔다.<br><br>xa0<br><br>xa0<br><br>그러나 약 6년이 지나 1947년 6월 18일،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재건과 새로운 시작을 돕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좁고 불편한 2층 방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3년의 세월은 그에게 있어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1950년 9월، 그는 다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격량의 세월 속에 살았다. 호주로 돌아간 그는 브란스홈(Branxholme)에서 은퇴시까지 목회자로 일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박스 힐(Box Hill)에 거주하면서 발윈 하이츠 교구(Balwyn Heights Parish) 설립을 위해 봉사하였고، 한국 선교사로 내한한지 68년 후인 1981년 8월 18일 성 앤드류 병원(St. Andrew's hospital)에서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br><br>xa0<br><br>xa0<br><br>그의 며느리인 그웬 커닝햄(Gwen Cunningham، 87세)은 시아버지였던 프랭크 커닝햄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br><br>“시아버지는 참 조용하고 경건한 분이셨어요. 7개 박사 학위도 가질 수 있었으나 시아버지가 고사해서 박사학위 하나 가지지 않으셨다고 동료 선교사들이 얘기를 해 주셨지요. 성경 말씀을 대할 때는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두려워 하셨어요. 기억이 생생한데 걸음은 빠르셨지요. 그리고 항상 바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시아버지께서 각 지역을 다니면서 먹고 자고 하셨는데 참 굶기도 많이 하셨다고 하셨어요.”<br><br>*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의 ‘권임함 선교사’ 자료를 근거했다.<br><br>케더린 넬슨 Mrs. Catherine Nelson와 패트릭 넬슨 Mr. Patrick Nelson<br><br>- 프랭크 커닝햄 과 캐더린 트리셔만의 손녀와 증손자<br><br>xa0<br><br>xa0<br><br>권임함 선교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 말콤은 1921년에، 둘째 아들 짐은 1923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의 초청으로 지난 해 10월에 내한했던 선교사 후손 초청방문단에는 권임함 선교사의 손녀와 증손자가 일행 가운데 있었다. 캐더린은 권임함의 손녀이고، 패트릭은 권임함의 증손자이다. 그녀는 이 초청 방문 기간 중에 있었던 일 가운데 한 가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아들 패트릭과 나에게 특별했던 경험중의 하나가 있는데 우리가 아버지가 태어난 진주에 갔을 때 일이었다. 생초교회는 할아버지가 직접 최판구 씨에게 그리스도를 전도하므로 개척된 교회인데 우리가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의 가족과 후손،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만났던 일은 참으로 감동스러운 만남이었다. 내 아들 패트릭은 참으로 이번 한국여행을 즐겼다. 그의 증조부가 선교사라는 유산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놀라워하였다. 이번 여행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 (2011.8.11. 크리스천경남)<br><br>xa0<br><br>xa0 > >
웹 에디터 끝
첨부파일
파일추가
파일삭제
첨부사진
상단출력
하단출력
본문삽입
본문삽입시 {이미지:0}, {이미지:1} 형태로 글내용 입력시 지정 첨부사진이 출력됨
자동등록방지
숫자음성듣기
새로고침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작성완료
취소
정리
(세부)▶
①'백영희신앙노선'총괄(요약)
②'백영희신앙노선'총괄(전체)
③교리정리
④성경신학
⑤문답방정리
⑥기타정리
자료
분류자료
●
문의답변
쉬운문답
발언/주제연구
연경교재
참고연경
일반자료
남단에서2
+
새글..
07.03
1988년 7월 30일 조선일보 백영희목사 사경회 광고
07.03
1987년 김철수 목사님 백목사님께 보낸 엽서
07.03
1979년 3월 청도읍교회 교역자 사례 계산
07.03
1974년 9월 3일 대구 노곡동 백태영 명의이전건 논의
07.03
1975년 10월 교역자 모임 불개최 통지서
07.02
손양원 옥중서신(3판)
07.02
이광일, 손양원 옥중서신
+
새댓글
서기
03.18
공개 완료
성도A
03.16
31절에서34절말씀주해요망
State
현재 접속자
131 명
오늘 방문자
596 명
어제 방문자
637 명
최대 방문자
1,483 명
전체 방문자
2,618,985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