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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공회의 역사


(작성:2024.10)
우리 공회의 역사 우리 공회는 백 목사님 생전에 100개 교회에 30개 분교가 있어 총 130개 시절일 때 서부교회는 당시 세계 10대 교회였고 국내 5대 교회였으며, 서울 외 최대 교회였습니다. 주일학교와 중간반은 세계 단일 예배 최대였고 전국의 교회는 모든 교단이 부러워했습니다. 언론에는 80년대 10년간 서부교회 뉴스가 최대 최고 집중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사후 대책 백 목사님은 1989년 돌아가시기 직전에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3분 2가 탈퇴할 것으로 봤고 나머지 3분 1도 신앙의 노선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결국 속화된다고 봤습니다. 목사님 장례 후 3분의 2는 바로 대구공회로 탈퇴했고, 부산공회 3분의 1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부공3 우리의 출발 1987년 8월 15일, 백 목사님 별세 2년 전에 그 후계자로 기르던 서영준 목사님이 돌아가자 서부교회 실무 핵심 3명인 주교 부장 장영목, 연구소장 이민영, 중간반 부장 이치영, 그리고 연구부장 이영인 4인이 백 목사님 사후를 서 목사님께 부탁했으나 그 장례 후 그 묘지에서 목사님 사후를 4명이 힘을 합하면 대신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8월 19일 장유 묘소에서 약속한 것이, ‘표시’한 우리 공회의 첫 출발이었으나 말만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장례 1988년부터 그 해 성탄절이 목사님께 마지막 성탄절이 된다면서 부산시민 360만 모두에게 전도지 1장씩을 전하고 가겠다며 연구소에 전도지 360만장을 인쇄하게 하고 전 교인에게 마지막 성탄절 기념으로 부산의 전 시민에게 전도지를 나누게 해서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부산 시절에 가장 많이 다니던 금정산 70인 바위를 마지막으로 돌아본다고 가셨고 89년 1월 서부교회 성찬식과 3월의 총공회 성찬식에 이 땅 위 마지막 성찬이라며 진행했고 봄에는 일제 투쟁과 해방 후 환란을 겪은 개명교회를 70인 바위처럼 평생에 처음 방문하고 8월 집회 때는 그가 없어도 ‘교회’란 이런 것이라고 계1-3장으로 사후 교회를 가르쳤으며 8월 18일 금밤 설교 때 ‘내가 마지막 작성하는 공과’라는 말을 23회 하면서 공과를 가르쳤고 8월 26일 토요일 오전과 오후에 신풍과 주변에 챙길 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일일이 남겼고 8월 27일 새벽 평생 예배 인도의 습관과 달리 비누 하나까지 이제 다 사용했다며 정리하고 새벽 설교 중 뛰어오는 범인을 보면서도 설교를 중단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할 수 없어서 그 칼을 그대로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을 주변에서 모시던 딸들과 신풍은 목사님의 장례는 갑작스러울 것이라며 1987년 초 묘자리를 미리 봐 두었고, 87년 3월에 신풍으로 보내는 목사님의 조처 때문에 장례 준비를 가족 부탁으로 주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는 상황을 전제로 신풍은 장례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공회의 분열 때 반대편에 있던 신풍의 일부와 서부교회 일부는 신풍에서 목사님을 살해하기 위해 미리 계획을 했다며 살인죄로 여수 경찰에 고발까지 했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장례만은 우리가 주관하고 이후 벌어질 분쟁에 우리는 첫 방향만 잡고 빠진다고 생각했으며, 장례는 전국 공회 1만 5천 명이 모인 가운데 잘 치렀습니다. 장례 후 대구공회 쪽에서 노선 변경을 시도했고 상기 4명이 중심이 되어 서부교회와 총공회 3분의 1을 건졌고 그렇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고 보니 목사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66 교회와 33 교회로 나뉘었습니다. 서부교회를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33개 교회란 공회 전체의 3분 2가 됩니다. 1990년 3월의 분리 총공회가 개최 될 때 부산공회 전체는 신풍에게 총공회를 다 맡기자고 결정을 했으나 신풍은 목사님 생전에 ‘총공회 노선의 교리 정리’가 사명이라며 사양했습니다.
부산공회의 분쟁 1989년 8월의 장례 후 1990년 3월의 총공회까지 만 6개월을 분쟁하고 공회가 둘로 나뉜 후 부산공회만 남게 되고 신풍이 역할을 중단하자 부공에는 교권 투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먼저 백 목사님의 자녀들은 ‘예전 그대로’를 주장하면서 따님 2명이 만사를 주장하려 했으며, 현재 서부교회 담임인 서영호 목사님 측은 총공회의 역사는 그대로 두고 조용히 바꾸려 했고 크게 보면 2가지 운동이 나온 것은 당연한데, 저희는 부공 안에 있고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백 목사님의 따님들의 ‘예전 그대로’가 일단 공회의 처음 할 일이고 그 후는 주님의 인도를 따라 발전으로 나가는 것이지 타 교단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따님들과 같았습니다. 서영호 목사님을 따르는 사람은 몇 정도였고, 공회는 거의 따님들을 따랐습니다. 따님들이 훗날 부공1, 서 목사님 쪽을 부공2, 저희는 훗날 부공3으로 각각 나뉘게 됩니다. 1990년 3월 대공과 나뉜 뒤, 부공1은 부공 전체를 장악했다고 생각하여 부공3이 될 저희를 조용히 밀어 내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총공회의 교권에 관심이 없었고 연구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조용히 연구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를 조용히 밀어냈다고 생각한 부공1 따님들은 1991년 1월 서 목사님을 서부교회로 모십니다. 마음 속에 서 목사님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있다고 생각한 따님들이, 막상 데려와서 세우면 실망할 것이고 2년 후 투표로 보낸다 했고 저희는 데려오는 것은 자유지만 한번 들어오면 밀어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반대했습니다. 따님들은 자신있게 데려왔고 이후 10년을 대규모 충돌을 하며 언론에 대형 보도가 되었으나 결국 서 목사님은 버텼고 그 과정에 따님들을 따르던 분들은 반대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부공3의 출발 1991년 1월 서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오는 순간, 1987년 8월에 백 목사님 사후를 약속했었던 4명은 당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서부교회에 있던 3명의 개척을 준비했습니다. 1990년에 우리를 따르겠다는 분들이 있어 이민영 당시 조사님은 부산 남천에 이미 개척했고 1991년의 서 목사님 부임과 함께 남아 있던 주교 총무와 중간반 책임은 개척 준비를 했고 서부교회에 남아 있는 잠깐의 기간에 최대한 개척 후를 준비하기 위해 몇 개월이 걸렸으며 중간반을 대신하던 특수반 이치영 목사님이 먼저 서진교회를 개척하고 장영목 목사님은 동천의 전신인 성남교회를 현 동천교회 큰 길 건너편인 좌천동센터 자리에서 개척했습니다. 또 1990년 광양제철 직원들의 부탁으로 광양의 중마동에 개척할 일이 있어 이도영 조사님을 보냈으니 1991년의 서 목사님 부임과 함께 그 해에 우리는 5개 교회가 따로 모일 수 있었고 여수 신풍 이영인, 서울 하계동 이진헌, 부산 광남 이민영, 광양 중마동 이도영, 부산 서진 이치영, 부산 성남 장영목 훗날 목사님들이 당시 목사 2명, 조사 4명으로 훗날 부공3을 조직하게 됩니다. 1991년 서영호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부임한 이상, 그리고 따님들의 성향과 공회의 흐름에 부산공회의 분열과 장기간 끝장 볼 분쟁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전에 준비를 했었고 1992년 11월에 두 따님들은 서 목사님을 투표에서 불신임했고 서 목사님은 불법 투표였다며 수백 명씩 각목으로 예배당에서 맞붙고 포크레인으로 교회 철문을 걷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1993년부터 우리는 분쟁에서 완전히 벗어나 목사님이 부탁한 설교록 출간과 교리 정리 작업 그리고 우리 6교회가 조용히 잘 나가면 저절로 빛이 되어 훗날 모두 돌아올 것을 소망했고 1992년에 이미 모덕교회 이신영 목사님이 성남에서 개척했고, 1993년에 조례도 순천에서 신풍의 분교로 장천용 조사님이 이미 출발 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8개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산공회에 소속은 두고 있으나 설교록 출간과 연구에만 매진하게 되자 따님들은 신풍부터 하나씩 밀어 내기 시작합니다. 회원 출석에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법으로 실제 제명을 시켜 나갔습니다. 그와 상관 없이 우리는 그동안 연구한 결과와 설교록을 1997년에 출간하기 시작했고 허락 없이 출간을 했다며 1997년 9월에 연구소에서 3명을 제명했습니다. 이영인 이치영 이신영은 교역자로서 또 장천용 장현주 등은 직원으로 고발까지 받습니다.
부공3의 1차 분열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분열의 역사입니다. 항상 두길이며 항상 한길로 생명은 내려왔습니다. 분열이 있을 때마다 양측의 말만 들으면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나 세월은 늘 밝혀왔습니다. 부공1이 될 백 목사님 따님들이 부공3이 될 우리를 연구소에서 정식 제명하고 고소를 할 때 이민영 목사님에게 우리를 제명하고 고소하는 데 앞장서면 연구소를 모두 맡기겠다고 했고 이민영 연구소 소장은 우리와 함께 원래 약속대로 갈 것인가 부산공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따님들에게 갈 것인가, 고민 끝에 부공1의 따님들의 요구대로 우리를 고발하고 나섭니다. 그리고 이진헌 목사님은 훗날 부공1이 서부교회를 가지게 될 때 서부교회 담임이 될 가능성, 이도영 목사님은 이진헌 목사님의 사위라는 어려운 입장 때문에 우리와 나뉘게 됩니다.
부산공회의 대세 변화 1992년 11월부터 부산공회가 훗날 부공2가 될 서 목사님 측 소수와 훗날 부공1로 우리가 이름 붙인 절대 다수가 교역자회, 총공회, 집회, 서부교회를 두고 항상 맞붙어 싸우는 과정에 부공1의 지도부가 조직 장악을 한다며 목사가 될 조사님들을 5년 이상 유보를 시키게 되자 목사가 되고 싶은 조사님들에게 안수를 해 주겠다는 서 목사님 측 제안을 받아 요동을 하고 갑자기 부공1의 대세에 대거 이탈이 생기고 부공2 서 목사님 측으로 넘어가게 되자 부산공회는 서영호 목사님이 우리가 빠진 상황에서 서부교회의 대세를 잡았고, 안수 조건에 부공1의 조사님들을 대거 확보하게 되면서 부산공회 전체는 부공2가 대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안수와 상관 없던 목사님들도 부공1에서 부공2로 대부분 옮겨 가버립니다. 이 과정에 부공1의 따님들을 따른 이진헌 이민영 이도영.. 3명도 부공2로 넘어 가게 됩니다.
*부공3, 우리의 재출발 이진헌 이민영 이도영과 3개 교회는 부공1로 또 부공2로 넘어 갔지만 부산의 성남교회도 우리와 함께 하면 부흥이 되지 않는다며 전체적으로 부공2와 교류하며 독자적으로 가겠다 했고 이 과정에 김기곤 문익섭 두 분이 부공3의 우리로 고수하겠다고 1998년에 밝히셨고 성남교회 장영목 목사님은 떠났고, 성남교회를 개척했던 두 가정이 신풍을 찾아 원래부터 원했던 길로 재출발을 원하여 동천교회가 개척되고 서진에서 이치영 목사님이 부임합니다. 1998년 봄에 서부교회 1등의 최고 반사였던 손돈 집사님이 동천교회 개척에 합류했고 서울의 송파구에 우리 공회로 개척하고 싶은 교인들이 있어 강동교회 목회자로 파송합니다. 서진은 이미 자리를 잘 잡은 교회여서 목회자가 없는 우리 공회 상황에서 일반 교인이라도 보내면 목회자로 잘 모시고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손용모 장기웅 두 분으로 되지 않아서 우리 공회가 다르나 우리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거창 창동교회 김형렬 집사님을 조사님으로 2000년에 모십니다. 신풍, 서진, 조례, 모덕, 동천, 강동의 6개 교회가 되었습니다.
부공3
우리의 연구소 활동
우리는 처음부터 서부교회나 총공회의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 노선의 신앙 연구가 우리의 사명이므로 손에 들어온 제의나 기회를 다 버렸고 오히려 이로 인해 제명을 당하고 이제는 연구소의 원래 사명에만 전념하겠다는 5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으로만 형성이 되자 1998년 12월에 연구소 사이트를 개설하고 백영희 설교 10만쪽을 무제한 무조건 전하였고 어떤 조건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를 통해 백영희와 총공회와 서부교회의 상황과 우리의 걸음과 신앙의 원칙을 마음껏 외쳤습니다. 모든 공회들은 물론 백 목사님께 관심 가진 교계는 총공회와 서부교회와 백영희에 관한 자료와 상담과 대화는 신풍에 집중을 했고 이 과정에서 2백여 명의 교인이 우리 5개 교회 안으로 교인이 되어 들어오게 되었고 그 외 수백 명의 교인들은 위치나 신앙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타 공회에 안내를 해서 보냈습니다. 모든 자료를 다 제공하고, 공회 관련 모든 출간과 소식과 상담이 진행 되자 우리 공회는 즉시 총공회 전체의 중심에 섰고 비판을 해도 속으로는 이곳을 보며 배우고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오셨던
수많은 분들의 추세
① 어느 날 백영희나 서부교회나 총공회에 대한 소식이나 교리를 듣게 되는 사람이 ② 알아 보려다가 결국 신풍의 연구소 사이트를 접하게 되고 ③ 첫 인상에 복잡고 어렵고 싸우는 곳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바로 외면하고 나갔고 백영희 설교와 문답의 안내를 통해 우리를 제대로 파악한 분들은 만사 제치고 왔습니다. ④ 3개월 또는 6개월 밤낮으로 목사님 설교에 빠져 신앙을 기본적으로 전환했다는 분들, 또는 문답을 통해 우리 공회를 이해한 분들은 공회에 들어 와서 핵심 교인이 되었고 ⑤ 위치 때문에 교회가 되어야 할 곳은 교회로 출발하도록 최대한 안내를 하고 도왔으며 목회나 교회 개척이 어려운 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공회의 각 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⑥ 보통 몇 개월은 좋게 계시나 너무 갑갑하면 다시 나갔고, 1-2년을 노력하다 나간 분들도 있으나 아무리 오래 견디려 해도 10여년이면 결국 이 곳의 생활이 어려워 다시 나갑니다. 교인은 교인대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호칭부터 떼고 모든 조건이 까다로워 그렇습니다.
*참으로 좋은 분인데
 결국 나가신 분들
우리 공회의 원래 수준에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 좋은 분들이 이곳이 어려워 결국 나갔는데 -거제의 김경욱 조사님, 통합 교단 목회자, 실력 충성 만사 좋았으나 10년 만에 나갑니다. 우리는 진주든 어디든 개척을 위해 예배당과 사택과 차량과 운영비와 월급을 약속했으나 교회의 개척과 예배당 마련부터 우리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동센터를 제공하면서 구례에서 개척을 했고 우리는 교인을 2가정 7명을 이주시켜 보냈습니다. 신풍 사택과 울산에서 꼭 신풍으로 오시려던 분을 구례를 위해 보냈습니다. 10년쯤 된 어느 날 자녀의 결혼 건이 중단되자 바로 사직했고 이후 교인들은 있으려 해도 연보한 것까지 돌려주며 신풍으로 보냈습니다. 구례의 센터가 그분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순천 최혁중 조사님, 순천에서 새벽예배까지 신풍으로 출석했고 순천의 개척하던 초기부터 공회 찬송가 사용과 전도사 인허까지 신풍에서만 받겠다 하고 연구소 주소록에도 게재를 부탁했습니다. 어느 날 호주 선교를 간다는 말과 함께 통합 출신에게 교회를 넘겼습니다. -우정교회, 울산에서 두 가정이 연구소를 통해 설교록만 재독하며 수년을 이어갔습니다. 연락이 되면서 울산에서 2가정으로 교회가 되면 좋겠고 일단 가정교회 정도로 표시하며 장기간 독자적이기 어렵다 하여 동천교회로 출석하게 했습니다. 이후 신풍 이주를 원하여 구례로 가시게 했으나 구례 김경욱 조사님 교회에 교인으로 있을 수가 없어 신풍으로 오고 이후 가정 형편 때문에 울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울산의 중심 상권에 명품을 운영한 분이며 다른 한 가정은 울산은 떠나지 않았으나 아이들을 신풍에 보냈고 울산 전체 중심에 가장 큰 부동산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 5년 또는 10년이란 세월을 이곳에 있기는 어렵습니다.
서인교회
대동교회의 개척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부 교인보다 더 잘 계시는 분들도 있으나 숫자는 적습니다. 강동교회가 서울의 동쪽에 치우쳐 서울과 수도권의 서쪽에서 우리를 원하는 분들 때문에 개척이 필요했고, ? 서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그 시점에 세종시에서 실시간으로 신풍으로 출석하는 가정이 있어서 대동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서인과 대동에 파송할 목회자는 없었고, 서인의 경우 김정수 장로님과 대동은 김태휘 집사님이 어느 날 목회자가 될 신앙과 실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 생전에 총공회 기둥이며 인재로 유명했고, 집사님도 표시는 나지 않았으나 알 만한 분들은 기둥처럼 신뢰하던 인재였습니다. 우선 두 분이 서인과 대동에서 중심 교인이 되고, 전도가 되고 두 분이 목회자가 되면 가장 좋은데 장로님은 부인이 신앙으로 전혀 달리 걸어 왔기 때문에 목회자로 아예 부탁할 수가 없었고, 장로님이 서인에 교인들은 모일 듯하나 교회를 주인처럼 섬길 교인 가정 하나가 있어야 되겠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모두가 생각해도 전혀 대상이 없었으나,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의 가능성만 있어도 무조건 한 가정씩 물어봤고 의외로 박해수 집사님 가정이 신풍에 있던 2개의 시설을 정리하고 서인으로 갔습니다. 이분들은 공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을 지켜보며 대동은 시간 문제지 더 쉽게 더 좋게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서인과 대동이 신풍의 교인으로, 그 다음에는 가정교회로, 그 다음에는 분교로, 그리고 출석이 20명을 넘기고 있던 시점에 교회로 독립을 시켰습니다. 2014년쯤일 듯합니다.
부공3의 우리의 2차 분열 서인과 대동이 독립을 하고 교역자회 회원으로 모신다고 하자 모덕 강동 서진 3곳에서 무조건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공회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경제 문제를 조사하자, 가족 조사를 하자. 3 가지였습니다. 모덕은 세상을 살다 막 들어오면서 1년 만에 목회자로 개척했고, 강동은 초여름에 들어 왔다 그해 겨울에 목회자로 개척했고, 서진은 다른 공회에서 우리 공회를 하루도 거치지 않고 바로 목회자로 임명을 했는데 그 분들이 세월이 지나자 다른 분들에게는 경력을 요구하고 따지며 보자 하고 조사를 원했는데, 공회는 그 3분이 목회자로 출발할 때 그 분들이 말한 것은 조사 없이 다 믿어 드렸습니다. 3명에게는 목회자로 출발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으나 목회를 하다 보면 우리 공회 분위기에서는 저절로 해결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라고 해 봐야 신풍 서진 조례 모덕 동천 강동 6개이고, 이제 2개가 개척을 하는 상황인데, 6개 교회 중에 3개가 회원 가입을 결사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반대하는 이들이 무조건 반대하고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3개 교회는 3개 교회가 원하는 대로 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세월을 좀 지켜보면 서로 파악이 될 터이니 자연스럽게 당분간 별거처럼 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동천은 이 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행동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신풍은 모덕 강동 서진의 모임을 동천이라고 이름을 붙여 동천까지 4개 교회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러면 신풍 쪽은 조례와 2개만 남습니다. 대세는 모덕 쪽으로 넘어 간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적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동천이 모덕 쪽이 명확히 잘못 되었다고 입장을 밝혀 3대 3이 되었고 우리는 2개 교회가 개척이 되어 5개 교회 체제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LA교회가 가정 교회에서 분교로 나가야 하는데 미주에 교회가 하나뿐이어서 공회 분교이지 신풍 분교라 하기는 그렇고, 애매하여 그냥 교회라고 했습니다. 가정교회로 진행하다 가족 외에 한두 분이 출석하게 되었고 미국이나 대구공회 기준에는 대구공회에서 인허 받은 전도사님이 계셨으나 우리 기준에서는 호칭만 인정하지 교회 목회자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속으로 아주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체면에 문제가 생기면 이후 모든 문제는 이것이 바탕에 흐르면서 표면적으로는 이런저런 이유를 찾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공회의 교회에 목회자를 최소 기준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LA교회가 포함 되어 우리는 6개 교회가 되고, 모덕 쪽은 3개 교회가 됩니다. 인천에도 모덕교회의 분교가 있었으며 비록 가족만 모인다 해도 실력과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우리는 ‘인천교회’로 표시하자 해서 그렇게 등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총 10개 중에서 6개 교회는 현재처럼, 4개 교회는 분열이 된 상태였습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부공1이 그 동안 덮어 두었던 연구소 문제를 저작권이라고 해서 고소가 들어 왔고 이 고소가 들어오게 되자 모덕 등 3개 교회는 무조건 부산 편이 옳다고 나옵니다. 이제는 사사건건 무조건 반대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으로서 달리 길이 없습니다.




부공3의 교회 20개 역사


1. 신풍교회, 이영인 목사
1952 손양원 사후 정양순 사모님이 자녀와 학생들을 데리고 개척
1975 계신에서 공회로 소속 전환
1989 회의 6대 개척으로 11대 부임, 부임 후 부공3으로 전환
2. 서진교회, 김형렬 목사
1991 이치영 목사님이 서부교회에서 부공3 노선 때문에 개척
1998 동천 개척 때문에 동천 이동
3. 조례교회, 장천용 조사
1992 신풍의 순천 분교로 출발
1993 조례교회 이름이나 신풍 분교 형태
1998? 자립, 전념 목회
2024 5월, 장천용 조사님을 목사로 안수
4. 모덕교회, 이신영 목사
1992 성남교회 교인 1년 생활 후 개척
1998 목사 안수
5. 동천교회, 이치영 목사
1998 성남교회 교인들이 동천을 개척, 이치영 목사님 부임, 부임 전 안수
6. 강동교회, 손돈 목사
1998 동천교인으로 몇 개월 다닌 후 강동에 목회 파송, 교회는 공회가 개척
2014 서인교회 목회자 자격 미달을 이유로 목회자가 공회 소속을 분리
7. 서인교회, 박해수 조사
2008년경 안산에서 실시간 몇 교인이 신풍 교인으로 출발
2009년경 서울 신도림에 교인들이 내적으로 신풍분교, 외적으로 서인교회로 개척
2010년경 박해수 가정 안산 이주하고 교인 대표, 아동센터 3개 개척 교인 생활로 연보
2013년경 박해수 집사님이 조사로 목회 출발하고 교회 독립
2024 5월, 박해수 조사님을 목사로 안수
8. 대동교회, 김태휘 집사
2024 정동진, 대동교회 조사 인허
9. LA교회, 고영진 선생
10.인천교회, 진영현 선생
11.하계교회, 이진헌 목사, 예배당을 이전했고 새공릉교회 원로
12.광안교회, 이민영 목사, 연구소 소속 문제로 부공1 > 부공2로 소속 변경
13.성남교회, 장영목 목사, 교회 폐쇄 후, 필리핀에서 선교 중 별세
14.중마교회, 이도영 목사, 교인과 자립 문제로 언쟁 후 교회 철수, 하계동 부목 중 별세
15.구례교회, 김경욱 조사, 공회 교회로 출발 후 가정교회로 전환하며 공회 교인 돌려보냄
16.말씀교회, 윤성식 목사, 공회 소속 명확하게 원했고 교회 운영 방식은 카페 모임처럼
17.새빛교회, 미국에 있는 윤 목사님 교회. 대사관 비자 발급에도 부공3으로 서류 제출
18.율산교회, 최혁중 조사, 통합 인물에게 교회 인계하여 소속 표시 철회. 소식 무
19.울산교회, 서광욱 집사, 가정교회, 분교, 동천교인, 구례교인, 신풍교인, 현재 외부 교단
20.순천교회, 이종복 선생, 2001년 신풍에서 나간 후, 타 공회 교회, 독립교회, 현 신풍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