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신앙적 모델로서의 다윗의 역사 문학적 의미,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

주제별 정리      

                                   26. 신앙적 모델로서의 다윗의 역사 문학적 의미,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

서기 0 18

26. 질문 : 신앙적 모델로서의 다윗의 역사 문학적 의미,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의미 10(쉬)

저는 필수 교양과목으로 성경개론을 듣고 있는 학생인데요. 이번 기말 시험 때 교수님께서 내주신 문제가 있는데 도저히 찾기가 힘들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꼭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신앙적 모델로서의 다윗의 역사 문학적 의미
2.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3.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의미


답변 :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1번 질문에서 '역사문화적 의미'라는 단어가 정확한지 모르겠습 니다. '역사와 문화적 의미'인지 '역사 문화적 의미'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 만일 '역사 문화적'이라는 말이 맞다면 그 표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사용하신 분께 물어 주셨으면 합니다. 현대 신학의 난맥상 중 하나는 영어식 표현을 단순 한글 번역함으로 원 뜻이 실종되는 현상입니다.)

답변1 :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

1. 정의

신앙적 삶이란 하나님께 속하여(①소속)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②행동) 생애를 말합니다. 비 신앙적 삶이란 에덴동산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고 (①소속이탈)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 인생이 자기 자유로 살게 된(②행동 이탈)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1:1-18, 요15:8-20)

2. 성질

① 투쟁점인 두 삶의 접촉점

신앙적 삶이란 비 신앙적 삶과 별개로 살 수 없고 반드시 한 울타리 속에 섞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 섞여 살면서도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은 공존할 수 없고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투쟁적 대립적 독자생존적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1:에서 빛과 어두움으로 비유했습니다. 천국은 빛만 있고 지옥은 어두움만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두 존재가 함께 섞여 삽니다. 그러나 이 둘이 접하는 곳에서는 어두움이 이기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그만큼 없어지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 문화 심지어 종교에서 대립적으로 내려온 모든 개체들이 평화공존이나 융화모색을 해야 한다고 하여 통일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또 하나의 성경부정입니다. 성경은 악령의 역사가 죽어야 성령의 역사가 살며 죄가 없어져야 의가 일어나며 기독교는 비 기독 반 기독을 복음으로 점령하여 복음대로 재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융화 공존을 모색한다는 것은 이미 그 기독교는 내적 생명이 죽고 이름만 남은 것이며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행4:12, 롬8:5-11)

② 전도점으로서의 두 삶의 접촉점

물론 신앙적 삶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하여 살지 못하게 막고 또 순종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상과 또 외부 세력과는 생사 투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 적극적으로는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와 접촉을 하되 생사전투로서가 아니고 죽은 자신들이 살아날 복음을 가진 우리로 상대하게 되면 우리를 살린 우리의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도 역시 우리처럼 살려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극적으로 먼저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지 않도록 애쓰는 한편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이들을 하나님게 속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 살게 하는 적극적인 복음생활이 이 두 삶의 접촉점에서 이루어집니다.
(*마28:19-20)

3. 종류

① 대내적 접촉점

믿는 사람의 승리생활은 흔히 대외전에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외부 박해세력 또는 복음 반대운동과 싸운 역사만을 교회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너무도 역사의 본질과 외형을 구별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속한 믿는 사람, 아직도 소속되지 않은 안 믿는 사람의 투쟁 마찰 오해 극복을 논하기 전, 우리는 우리 속에 두 자아가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중생된 사람이며 성도라는 이름이 분명한데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께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온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내부에서부터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할 때,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을 듣던 마16:15-24은 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꼭 같은 몸과 마음을 가졌던 베드로였고 또 이때는 예수님을 믿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려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서 없어지고 악령에 붙들려 순간 악령의 사람으로 움직일 수도 있음을 보입니다.

따라서 신앙적 삶과 비 신앙적 삶의 접촉점은 우선 대내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늘 존재하는 것이며 두 삶은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공존 타협이 될 수 없는 관계이므로 죄를 짓는 자기 속의 부패성을 없애나가야 자기 속에 의의 성화가 이루어져가는 것이고 자기 속에 모든 음란 시기 투쟁 비방을 버려야 신령한 젖으로 자라가는 참 사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평생에 남모르는 자기 내면의 투쟁의 삶, 우선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고 자기를 꺾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바로 이 십자가로 표현되는 고난의 삶이 실은 우리 속에는 두 삶이 있고 이 두 삶은 투쟁 후 하나만 살아남을 수가 있기 때문에 전투로 진행하는 것이고 이 전투에서는 말씀의 법칙대로 살기는 살되 모든 세상 좋은 것은 다 포기를 해야만 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 믿기 이전 옛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고난의 길이며 가시밭의 길이기 때문에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본 이마다 하늘이 주는 평강을 자기 내부에서 받아 충만케 되므로 자기 안에는 주님이 가졌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대외적 접촉점에서와는 약간 달리 대내적 접촉점인 우리 몸과 마음에서는 복음으로 우리 심신을 이기면 이기는 대로 우리 내부가 점점 복음화되어져 갑니다. 투쟁점이자 곧 자기 속에 있는 자신의 여러 요소들을 살려가는 성화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골3:5-10, 벧전2:1-2)

② 대외적 접촉점

우선 교회가 어느 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면 하나님 모르던 기존 사회의 모든 요소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만 움직이려는 교회와는 마찰을 갖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과 바울의 모든 전도걸음에서 발생되는 마찰이 그런 것이며 오늘도 교회가 교회로 유지 존속한다면 사도 때와 꼭 같은 핍박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교단이 하나님 앞에 교회의 전통과 정통을 바로 세워 나가려면 타락한 일반 교단으로부터 불신 세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서라도 투쟁과 마찰 오해와 박해가 끊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가르쳐 촛대라고 하였으니 빛을 가진 위치요 어두움을 삼키는 주체를 모신 곳이니 공중에 권세 잡은 악령이 점령하고 있는 오늘 땅 위에서 교회가 교회이기를 원한다면 교회가 교회로 움직이는 모든 대외접촉점은 전부가 투쟁이며 마찰이 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는 대외 현실 속에서 교회는 생사를 두고 이겨야 하는 접촉점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가 믿는 바, 교회가 가야하는 바 이 모든 것은 세상 안에 있는 교회로서는 세상과 현실적 접촉을 피할 수가 없으니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전투적 승리를 다른 한편으로는 감화적 복음화를 추진해 나가는 곳이 바로 두 삶의 접촉점의 성질이라고 하겠습니다.
(*마10:16-23, 엡2:2)


답변2 :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의미

I. 문제를 쉽게 이해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이며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이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는 말입니다.
'그 의미'란 출애굽 공동체가 가진 특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II. 출애굽 공동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가나안을 자신들이 살 곳으로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곱 때에 이르러 애굽으로 이주하였다가 400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왕 바로에게서 구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출애굽 공동체였습니다.

III.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

정체성이란 다른 존재로부터 구별이 되는 특성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란

① 시기적 정체성

모세를 하나님이 불러 출애굽을 명하시게 되는 출애굽기 2장으로부터 만나가 그치는 여호수아 5장 12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을 좁은 의미에서 출애굽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이라는 주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② 공간적 정체성

지역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학대받고 건축하던 애굽의 국고성이 있던 라암셋에서부터 출발하여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 앞 길갈에 이르렀던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출애굽 공동체라고 합니다.

③ 실질적 정체성

위에서 말한 시기적 공간적 정체성은 이 시기 이 장소 외에 있었던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출애굽 공동체 구별법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공동체의 정체성은 내면적인 데 있었습니다.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체성은 첫째, 세상에서 종되었던 이들이 둘째,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셋째,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넷째, 인간이 통과할 수 없는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다섯째, 최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에서는 이 5가지 전 과정이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가 실은 없었습니다. 항상 이스라엘이란 민족은 하나님 앞에 이런 5가지 은혜의 연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공동체라는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은혜에서 살았습니다. 5가지 전 과정이 이스라엘 중 일부나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해당되었고 동시에 이 5가지 전 과정이 단 기간이나 일시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를 의미하는 40여년이라는 세월로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자연 은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자연 은혜는 불신자와 만물도 누릴 수 있습니다. 특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나 출애굽 공동체 이전 또는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특수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 시대의 은혜도 하나님의 특수 은혜였으며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은혜도 하나님의 특수 은혜입니다. 그러나 특히 출애굽 공동체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수 은혜는 다음 세대로 이어가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 임한 은혜였습니다. 전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으며 홍해와 요단강을 발로 건넜습니다. 까마귀가 먹여주는 기적을 엘리야만 보았고 요단강을 건넌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이스라엘은 남녀노소 전 백성이었습니다. 도저히 비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5천명을 먹이셨을 뿐이나 이 시기에는 전부를 40년간 계속해서 먹였습니다. 구름과 불을 동원하신 역사도 성경 여러곳에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는 40년간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이스라엘은 따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IV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의미

1. 오늘 신약 교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았던 시절 우리 신약교인 전부는 애굽 같은 세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직접 불러 구원의 말씀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 신약교인 전부는 하나님이 각각을 친히 부르셨고 천국을 향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소명이 있어 현재 우리는 천국을 향해 광야와 같은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하루하루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전적 인도 보호가 아니면 오늘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진정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신령한 양식은 어떤 세상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고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주시는 것이며 그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온 모든 과거 신앙생활의 역사 또 앞으로 믿어갈 모든 역사는 전부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인 역사는 성령으로 임하여 반드시 천국에 옮겨놓을 것입니다.

2. 오늘 신약 교회가 광야 출애굽 공동체와 같이 살고 있지 않다면

이는 단언코 출애굽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말은 구원 유일 천국 유일 하나님 능력 유일의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어떤 개인이나 어떤 개교회거나 어떤 교단이거나 어떤 큰 범위의 교계 단체일지라도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5가지 등 모든 면에서 광야 이스라엘의 걸음과 다른 걸음을 걷는다면 이는 명백히 탈선이며 타락입니다. 실은 변질된 교회이며 결국 기독교의 이름만 가진 이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출애굽 공동체는 오늘 신약의 우리가 가야할 기준이며 목표이니 곧 거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에 광야 이스라엘이 신령한 반석 곧 구원의 주님을 따라 걸어갔던 모든 일들은 전부가 우리에게 거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반복치 않아야겠고 그들이 경험한 신령한 식물 신령한 음료를 먹고 마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말씀으로 양식을 먹고 성령으로 우리 뱃속에서 솟아나 넘치는 음료를 마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성막에서 우리 신앙 인격을 다시 재조립하고 또 수리를 해야 할 것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십계명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뜻대로 사는 길만이 우리의 길일 것입니다. 곧 출애굽 공동체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기록해 주심은 오늘 신약교회가 광야같은 세상을 걸어갈 모든 것입니다. 신약의 교훈보다 구약의 기록은 간단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여 아주 신앙이 어린 사람이라도 쉽게 알 수 있고 또 그 깊은 뜻은 신약에서 해설해 놓았음을 안다면 출애굽 공동체는 천국을 향해 가는 오늘 신약 교회 전체 집단을 통째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곧 우리 모습이겠습니다.


답변3 : ‘역사문학적’ 이라는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다윗이 신앙모델로서 가지는 의미는 많습니다. 역사문학적 의미라고 하셨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윗은 시편을 제일 많이 기록했던 분이었고 그의 시편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문학적 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관점에서 다윗의 문학을 볼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이런 점에서도 다윗은 많은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교양강좌 정도에서 이런 차원의 과제가 제시되지 않을 듯합니다. 혹시 '역사적 문학적 의미'를 잘못 적은 것은 아닌지요? 우선 질문하신 내용을 한번 더 설명해 주시면 성의 있는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0 Comments
State
  • 현재 접속자 467 명
  • 오늘 방문자 957 명
  • 어제 방문자 81 명
  • 최대 방문자 957 명
  • 전체 방문자 2,545,771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