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총공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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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총공회 역사

서기 0 9


5. 총공회 역사

1952년, 부산 서부교회로 부임했던 고신 교단 소속의 백영희조사님(전도사의 당시 명칭)은, 당시 장로교가 고신측과 총회측으로 분열되면서 극단적인 교권투쟁이 진행되자, 소속 교단 지도부의 잘못을 지적하게 됩니다. 고신측 목회 현장에서 그의 발언과 영향력은 지대했으므로 지도부는 1959년 그를 제명 조처하여 일단 교단을 수습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고신 지도부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을 고신 내에서 결집할 수 있었으나 교회가 교단 정치력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은 또 다른 교권과 타락의 시작이 되는 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개교회주의 노선으로 다시 출발하게 됩니다. 개인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교회는 각 개교회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신앙양심으로 믿고 나가는 것이 옳다는 노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총공회 출발의 배경이 된 사안들을 예로 들면

① 반소 문제

한국 장로교는 원래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단일 교단이었으나 해방 이전 교회가 신사참배를 총회적으로 시행했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론을 두고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대부분 교회는 그 처리를 조용히 넘어가자고 주장했고, 반대를 했던 교회들은 먼저 깨끗하게 회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장로교 헌법은 모든 것이 다수결로 처리되므로 신사참배를 했던 분들이 옥고를 치른 소수파를 장로교 내에서 제거하게 됩니다. 제거 당한 측이 부산의 고신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고신교단이고,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이들은 서울의 총신대 장신대 한신대를 운영하고 있는 통합 합동 기장측 교단들인데 해방 직후 고신측을 제거할 때는 이들이 힘을 합했습니다.

장로교 교단이 두 개로 나뉘게 되자, 양측 지도부 소속의 지방 교회들은 일제히 소속 문제를 두고 교회 내 의견 대립을 하게 되고 결국 재산 분할 등의 문제로 세상법정에 서게 됩니다. 고신 소속이었던 백영희목사님은 세상 모든 면으로 불리해도 소송은 할 수 없다고 고신측 내부에서 반론을 펼쳤으나 오히려 이 주장 때문에 고신에서 제거됩니다.

참고로, 백목사님 주장은 교회 신앙문제에 관련한 소송은 원고소송은 물론 피고소송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 유엔군 철수 문제

6?25 전쟁이 끝나자 UN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한국교회가 입은 피해도 아주 컸으므로 한국교계는 일제히 UN군 철수 반대운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고신측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모든 세상 사회 단체들과 기독교계는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전쟁의 참화 때문이었겠지만, 교회의 철수 반대운동은 교회가 교회로서 할 수 있는 범위와 선을 넘어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소속 교단이던 고신 지도부를 향해 백목사님은 이 문제를 두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게 됩니다.

그 주장이 옳았기 때문에 고신 지도부는 이를 회개하고 돌이키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지적으로 지도부의 신앙 지도력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자 훗날 백목사님을 고신에서 제거하는 일에 큰 배경이 됩니다. 예배당 소송 문제만큼 큰 사안은 아니었지만 소송 문제로 극심하게 대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발언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③ 고신의 교단지 '파수군' 운영 문제

소속 교단이었던 고신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장로교 주도측에 비하여 모든 면으로 현저하게 열세였지만 '파수군'이라는 책자를 통해 왜 고신의 노선이 옳은지 등을 조목조목 열거해가며 한국 교회를 향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분명 고신이 옳았기 때문에 반대측은 파수군의 외침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고 반면 고신은 고신의 진리운동이 파수군을 중심으로 전파된다고 할 만큼 그 교단지의 역할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신 지도부가 초기 진리 운동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교권투쟁에 전념하게 되면서 이 파수군 월간지 운영은 폐간을 하게 됩니다. 이미 진리보다 교권확보 등 세상 이권에 민감했던 지도부와 백목사님 사이에 파수군 운영 문제를 두고 그 우선순위와 중요성에 대한 시각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비록 기관지 발간 문제라는 작은 사안이었으나, 이면에는 고신의 향방을 교권에 두자는 측과 진리에 두자는 충돌이었습니다. 최점{으로 지도부는 발간을 포기했고 백목사님은 서부교회 단독으로 발간합니다. 훗날 교단의 요구로 다시 되돌려 주게 되었지만 이 문제는 양측이 신앙노선을 함께 갈 수 없는 형편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④ 진리의 종들 제거 문제

해방 된 한국교회는 비록 그 숫자는 적었지만, 고신이 교계의 중심에 서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해방 직후 '진리운동'을 내걸고 출발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한국교계에 진리운동을 할 종들은 고신에 다 모였다 할 정도였습니다.

규모는 작아도 그 중심인물들 때문에 한국교회 내의 위상이 올라가자 교단 지도부는 교권 유지를 위해 지도부에 통제가 되지 않는 인물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모든 교단의 결정은 다수결이므로 아직 다수 회원을 확보하고 있을 때 그 교권을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때 제거되는 인물들이 훗날 각 교단에 흩어져 한국교회의 기둥들이 됩니다.

일반 교역자나 교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진행된 교단 내 은밀한 움직임을 차단하고 나선 것이 백목사님이었습니다. 교권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기도와 말씀으로 권면하는 선지자는 결국 제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문제도 고신으로부터 총공회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아주 깊고 은밀하게 작용했던 요인입니다.

⑤ ICCC 가담 문제

고신과 신앙노선을 함께 할 수 없는 사안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당시 세계 교회의 흐름이 반공 보수를 주장하는 ICCC그룹과 친공 자유신학를 걷는 WCC로 나뉘어 양분된 상황도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부각됩니다. 소속은 교단 전체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신은 반공이 기독교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백목사님은 교회 자체는 세상 정치문제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세계교회가 양분되어 투쟁을 벌이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선진국들은 후진국 한국교회에 돈과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결국 고신은 ICCC의 한국측 핵심 회원이 되고, 백목사님은 이를 강하게 지적하면서 고신과는 함께 갈 수 없는 신앙임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참고로, 반공을 표방하는 ICCC 운동은 공산 침략으로 6.25를 겪은 한국교회에게는 너무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교계는 세계 보수교회들이 펼치는 반공전선에 적극 동참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⑥ 교권 문제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와 겹치는 문제입니다만 고신의 교권화 과정에서 교단 운영의 모든 구조와 운영의 세부사항까지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이제 고신이라는 교단은 하나의 조직체로서 지도부의 생존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현상이 만연하게 됩니다.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으로 대표되는 양파의 발언권에 의하여 교단 운영은 완전히 치우치게 됩니다. 이미 일반 종교 단체 수준에서도 넘어서서 안 될 선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단 내에서 성경대로 모든 것을 주장하고 굽히지 않는 실력자가 있다면 교권에 의하여 제거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신에서 백목사님과 공회가 분리된 원인입니다.

⑦ 고신의 신학교 정치학 강사 문제

송상석목사님은 약칭하여 '고소파 송목사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분입니다. 세상 행정과 법률 체계에 대하여 전문가적 수준을 가진 분이어서 교단의 모든 법적 분규에 개입했고 또 발언권이 강했습니다.

그가 고려신학교 과목 중에서 교회법과 교회정치를 가르치는 ‘교회정치’과목에 강사로 임명이 되자, 백목사님은 교회법과 세상법을 혼돈한 인사라고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목사님을 만나 그 교체를 요구하여 관철시켰습니다. 이후 송목사님은 백목사님을 고신에서 배제할 때 앞장을 서게 됩니다.

⑧ 교회 이동 문제

앞에서 설명 드린 내용은 백목사님이 고신에서 제거되지 않을 수 없었던 내면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신이 막상 백목사님을 배제할 때 표면에 내세운 것은 상급기관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부산 서부교회를 떠나 서울지역으로 교회를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백목사님은 1952년 서부교회로 부임하면서 고신의 핵심 지역인 부산에서 교회 소속을 떠나 모든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실력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고신 내 지도급 목회자들은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목회에 비교가 되면서 열등감을 가지게 되는데 특히 고신 내 가장 유력한 목회자들 소속 교인들과 측근들이 백목사님께 지도를 받겠다며 교회를 이동하는 일이 많아지자 서부교회를 교단 헌법으로 압박하게 됩니다.

단순히 한 교회를 목회하고 충성하는 교역자에게 자신들의 목회가 비교된다 하여 강제로 교회 이동을 추진하게 되자, 백목사님은 이 명령이 교권으로 개교회를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이며, 특히 이 조처 뒤에는 고신 내부에서 그동안 계속된 근본적인 신앙 노선의 차이에서 오는 필연적인 보복으로 판단하여 이동명령을 전면 거부하게 됩니다.

고신 지도부는 비록 명분은 가장 궁색하지만 이런 행정 명령에 의하여 조처하지 않고 신앙노선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 백목사님과 논쟁을 벌여야 하게 되는데, 진리노선을 강조하는 고신으로서 치명적인 반론을 받게 될 것이므로, ‘상회 불신임, 당회장 명령 거부’를 이유로 고신에서 제명하게 됩니다.

고신의 이런 조처에 대하여, 백목사님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고신의 내부 개혁을 지적했고, 결국 그 진리 문제로 제명된 것이므로, 향후 총공회 신앙노선의 출발점으로 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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