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총공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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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5. 총공회 역사
1952년, 부산 서부교회로 부임했던 고신 소속의 백영희조사(전도사의 당시 명칭)은 고신과 총회의 극심한 교권 투쟁이 세상 법정으로까지 진행되던 일을 두고 고신 소속 교역자로서 내부 비판에 앞장을 섰고 1959년 그를 따르던 교역자들과 함께 그는 고신 내부에서 제명되었습니다.
당시 극심했던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의 교권 투쟁은 끝없는 핵분열을 하고 있었고, 백조사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교역자와 교회들이 있어 또 하나의 중앙 집권적 교권을 형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개교회주의 운영이 교단주의 운영보다 더 낫겠다는 깨달음으로 1966년 개교회주의를 천명한 총공회를 발족하게 됩니다.
1) 고신의 제명
⑴ 반소 문제
원래 한국 장로교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과 찬성했던 측으로 내분이 생겼는데, 신사참배를 했던 분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다수결의 힘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분들을 제거해 버립니다. 제거당한 반대측이 부산의 고신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고신교단이었고 소수였으며,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이들은 서울의 총신대 장신대 한신대를 운영하고 있는 통합 합동 기장측 교단들인데 당시에는 장로교 단일 총회에 함께 있었습니다.
장로교 교단이 두 개로 나뉘게 되자, 지방에 있는 교회들 중에는 한 교회 내에 교인들이 서로 좋아하는 교단이 각각 나뉘게 되는 경우가 생겨지고 이 양측 교인들은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교단으로 자기 교회를 속하게 하려고 많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결국 예배당은 하나이므로 누가 주인이 되느냐는 문제를 두고 소송을 하게 됩니다. 소송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측이 고신측을 상대로 먼저 하게 됩니다. 이때 고신 안에서는 상대측이 소송을 먼저 시작했으니 '피고의 자격'으로 법정에 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법정에서 맞서자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백목사님은 민사재판에서는 예배당을 뺏길 망정 출석치 않으면 소송을 피하게 된다고 하여 피고로 출석하는 것도 반대를 했습니다.
이것이 '반소' 즉, 소송 반대라는 뜻입니다. 이때 소송 반대라는 말은 먼저 소송을 하는 '원고 소송' 뿐 아니라 '피고'로 불려가는 소송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백목사님 사후 1990년 이후 총공회 신앙노선의 교회들은 이 노선을 버렸습니다. 현재 부산공회(3)으로 분류된 공회 외에 전공회는 백목사님의 '반소노선'을 1992년 이후로 폐기하고 원고 또는 피고 소송으로 1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배당 소송 등에 관련된 문제는 사이트(www.pkist.net)에서 검색어로 찾아보시면 자세한 자료가 있습니다.
⑵ 유엔군 철수 문제
6․25 때,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뺏기고 1개월을 넘기면서는 낙동강까지 밀리게 되어 눈깜빡할 사이에 한국 교회는 점령하에서 다 죽게 될뻔 했습니다. 이후 미국이 유엔군을 모아 겨우 오늘의 휴전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3년 전쟁에 수백만명이 죽고 특히 점령 치하에서 교인들이 당한 참상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데, 휴전이 끝나자 유엔군이 철수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1973년 월남에서 미국이 철수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맹에게 공산화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당시 한국민 전부가 궐기를 하여 유엔군이 물러가면 한국은 또 다시 적화가 된다고 온 나라가 들끓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한국의 각계각층과 함께 띠를 두르고 서명을 하며 유엔군이 철수하면 한국 교회가 다 죽는다고 힘껏 반대를 하게 됩니다. 고신교단까지도 이 운동에 동참을 하여 미국에 있는 친분있는 교회들을 통해 미국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등 난리였습니다.
백목사님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한국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유엔군이 물러가면 죽는다고 세상 사람들과 하나되어 유엔군철수 반대 운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무시하고 세상 권세에 따라 생사화복이 결정된다고 행동한 것이라고 대단히 크게 비판을 하고 나섰습니다.
신사참배 때는 한국 교회가 힘이 없어 당했으니 강간이라고 한다면 유엔군 반대 때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설치고 나섰으니 화간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힘이 없어 당한 신사참배보다 스스로 세상과 짝하고 나선 죄는 더 크다고 외쳤기 때문에 고신에서는 전부 백목사님의 주장을 인정하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인재목사님이 고신 교단 차원에서 정식으로 이를 기록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안면 체면 위신 때문에 고신의 지도부는 알고 있으면 되었으니 이후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면 족하다 하여 결국 공식적 회개는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모든 국가의 대소사 일에 한국의 교회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나서고 있는 바 다 일맥상통한 잘못입니다. 당시 전도사로서 교단의 어른들과 절대다수의 교역자들이 찬성하고 했던 일을 마구 비판하여 꺾어 놓았으니, 백목사님은 훗날 이런 일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 되어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⑶ 고신의 교단지 '파수군' 문제
고신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장로교 주도측에 비하여 모든 면으로 현저하게 열세였지만 '파수군'이라는 책자를 통해 왜 고신의 노선이 옳은지 등을 조목조목 열거해가며 한국 교회를 향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분명 고신이 옳았기 때문에 총회는 파수군의 외침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고 반면 고신은 고신의 진리운동이 파수군을 중심으로 전파된다고 할 만큼 파수군의 지위는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신교단이 파수군이라는 월간지를 출간하는 데 들어가는 경비 보조에는 인색하였고 결국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여 파수군은 폐간이 됩니다. 백목사님은 서부교회 단독의 경제로 이 파수군 폐간을 막고 계속해서 출간을 시켰다가 훗날 백목사님을 고신이 제거할 때 '파수군'이 서부교회에서 출간되고 있다면 고신의 정통성 문제 등에 영향을 미칠까 하여 고신이 교단 차원에서 다시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백목사님은 그런 책자 출간 문제를 가지고는 투쟁할 필요가 없다 하여 그냥 다시 내어주게 됩니다.
고신에서 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백목사님께서 고신 회의에서 고신이 항상 진리 운동 한다고 말은 하는데 왜 파수군 출간 문제처럼 실제 자기 교회가 희생하고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면 다 빠져버리느냐고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슴에 찔리는 말을 서슴없이 했기 때문에 제명당하게 되는 원인을 또 하나 추가하게 된 것입니다.
⑷ 진리의 종들 제거 문제
고신은 해방 직후 '진리운동'을 내걸고 출발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출신을 불구하고 양심적인 분들이 전부 고신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러나 모이면 다수결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고 교권을 잡은 쪽은 마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신이 첫 출발을 할 때는 해방 직후 비장한 마음으로 죽기를 각오하며 옳은 진리를 한국 교회에 세우겠다는 일념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서 교권 단체화 합니다.
우선 세월이 가면 교권 단체로 변질되는 것이 역사이며, 둘째 이렇게 되는 데에는 고신이 장로교 총회에게 제명을 당하게 되자 극단적으로 싸우게 되는데 싸움이 생기면 '진리'보다는 '전법'에 밝은 사람들이 설치게 됩니다. 마치 전쟁이 나면 일단 전쟁 사령부가 국가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장기화 되다보면 외부 전쟁을 이유로 하여 내부 이권 등 모든 권력을 쥐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모든 교단이 그러하듯이 고신이 타락해 가는 과정도 어느 하루 아침에 두부 자르듯 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에 총회가 고신측을 잘라 내기 위해 완전히 팔을 걷어붙였고 이후 법적 제명, 이후 고신교단의 정식 출범 등이 있게 됩니다. 2년 안팎의 이런 전투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고신 내부에는 전시 사령부와 같은 내적 지도부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이 그 중심에 있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신의 지도부는 바로 그 밑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고신 안에 '진리운동'을 한다고 하여 들어왔던 분들이 적지 않았고 그 중에 일부가 고신 지도부를 향해 직설적으로 탈선 타락 교권화되고 있다며 비판을 하게 됩니다. 고신 지도부는 이들을 여러 형태로 잘라 내게 됩니다. 사실상 본인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탈퇴하는 모습을 만들게 되는데 전칠홍, 이병규, 김창인목사님 등이 주도한 서울 경기 지방 고신측 인사들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제명이 될 때까지 내부에서 투쟁한 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지만 그 대가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고신 안에서는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이를 발표하는 사람은 끊어지게 되었고 입을 닫고 현실에 안주한 사람들만 남아있게 됩니다.
⑸ ICCC 가담 문제
백목사님이 자주 언급하며 또한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두 단체를 소개하면 하나는 WCC 라는 단체로 소련 북한이 과거 해방 후에 만들었던 기독교까지 모두 포함하여 교회라는 교회는 무조건 하나 되자는 운동입니다. 또 하나는 ICCC 라는 단체로서 꼭 진리 중심으로 근본주의 신앙으로 믿는 교회들이 하나되자는 운동입니다. 문익환씨나 세상 뉴스에 기독교 대표로 나와서 환경 운동, 북한 돕기 운동 등을 하는 교회들이 WCC, 고신 총신과 같은 교단들이 ICCC에 속한 교회들입니다.
WCC는 세계 교회를 합하기 위해 공산주의 꼭두각시 노릇을하는 교회도 환영을 하였는데, 해방 후 세계가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WCC는 공산주의가 민주국가에 침투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보수측 교회들이 생각하고 심각한 위기감에서 그 대응 단체로 제시한 것이 바로 ICCC였습니다. 6․25전쟁을 겪은 한국 보수교회로서는 특히 이 단체의 의미가 특별했습니다. 고신교단을 지원해 주는 미국 교단들이 주도하는 단체이며 공산 침략 전쟁을 겪은 나라에 지부를 세우는 것은 또한 그 단체가 특별히 욕심낼 만한 조건이었습니다.
고신이 ICCC에 가담하는 것을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고 추진할 때, 백목사님은 교회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구호로 앞장 설 수 없다고 비판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냥 예수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전부인데, 공산주의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것은 '기독교가 반공'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반기독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반공을 구호로 걸고 나서는 것이 ICCC이기 때문에 비록 보수교단이 다 모였다 해도 고신은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묵살됩니다.
이후 백목사님이 고신에서 제거된 뒤, 경기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경기노회도 ICCC에 가입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은 자진 탈퇴하게 됩니다.
⑹ 교권 문제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와 겹치는 문제입니다만 고신이 진리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수년이 지나면서 교권 단체로 변하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으로 대표되는 양파가 서로 가진 힘을 바탕으로 고신을 운영했지, 숫자에 상관없이 과연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권이 교단 운영의 힘이었지 진리에 옳은 주장이 교단을 운영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면? 오늘 백목사님 사후 총공회의 모습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인 진리 이탈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⑺ 고신의 신학교 정치학 강사 문제
송상석목사님은 약칭하여 '송목사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입니다. 고신의 모든 법적 처리 대응 해결을 최일선에서 맡았던 분입니다. 세상 행정 체계 법률 체계에 전문가적 수준을 가진 분이어서 교단에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발언하고 모든 면을 주도하던 분입니다. 사실 고신에는 무식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송목사님이 한번 쭈욱 설명하고 나면 전부 입만 벌리고 듣기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고려신학교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법과 정치를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으니 '교회정치'라는 과목입니다. 교회가 성경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떤 교리와 어떤 신앙노선을 가지고 어떻게 되어야 옳은 것인지를 가르치는 과목인데, 세상 정치와 법률을 잘 안다고 송목사님을 강사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백목사님이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목사님을 만나 세상법을 잘 안다고 교회헌법을 가르치게 하고, 행정 관청 체제와 세상 정치를 잘 한다고 교회 정치를 가르도록 맡긴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수정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백목사님의 논리와 주장에 밀려서 송목사님이 교체됩니다.
신학교 교수 자리를 잃게 된 분이, 그후 백목사님에 대하여 어떻게 상대했을까 하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신을 살리고 고신이 교권 교단이 아니라 진리로 나가는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 말하면 후에 보복당해 죽을 줄 알면서도 외쳤고 그 외침 때문에 고신에서 결국 제거되는 것입니다.
⑻ 교회 이동 문제
백목사님이 1952년 서부교회로 부임하던 시절 고신의 지도부 목사님 대부분이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들의 교인들이 백목사님이 담임하는 서부교회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김현찬 나인숙 서봉월 김효순 등 서부교회 주축 교인 거의 전부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주변 교회들이 시기와 질투로 기회를 엿보다가 서부교회 내에 있었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이유로 개입하게 됩니다. 전도사가 담임목회자로 있는 교회는 노회에서 목사님을 한 분 세워 그 교회 내부를 주도하게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신의 목사님들이 서부교회 내부에서 백목사님에게 반론을 가진 교인들중 몇명을 잡고 분란을 계속 조장한 뒤 타협점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후에 나온 타협안이 백목사님이 서울로 이동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눈 감아 주고 덮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노회 문제로 제기하여 재판을 열고 처벌을 하겠다는 협박입니다.
교회 내에 분란을 만들어놓고 그 분란을 가지고 목회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인간의 장난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 하여 노회의 제시를 전면 거부하게 됩니다. 많은 논란을 거쳐 결국 목사님은 교회 내 교인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하였으나 백목사님 직계 가족들만 투쟁을 피하기 위해 서부교회를 떠나자는 뜻으로 이동에 찬성을 하게 되고 일반 교인들은 전부 목사님을 그대로 모시겠다고 투표를 하게 됩니다. 모든 교인들이 고신 지도부에 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서부교회를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고신측은 고신 지도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동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상회명령불복종'이라는 최종 죄목으로 백영희조사님을 제거하게 됩니다.
2) '총공회'의 특색과 신앙
"예수교 장로회 한국총공회"는 교회의 행정보다 교훈을 더 귀중히 여기는 교훈 중심의 진영이며, 교회 행정에서는 조직과 제도를 앞세우는 단체성보다는 하나님과 연결된 한 개체성의 신앙 자유를 더 귀중히 여기는 진영입니다.
총공회는 많은 교단의 헌법이 다수결로 채택되고 개정되면서 모든 교권 싸움의 출발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성경만으로 법을 삼는 불문 헌법주의를 채택하며, 둘째는 모든 공회의 결의는 전원일치로 하여 다수가 소수를 숫자로 눌러가는 면을 지양하고, 셋째는 총공회의 권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집중되지 않도록 개교회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일사분란한 교단 운영, 대형 사업 추진 등에서는 대단히 불편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교단의 무한 투쟁, 교권 타락을 막고 교회의 성결을 지키는 데 유리한 것이 좀더 낫겠다는 점을 본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겠다는 것이 총공회 신앙 정신입니다. 바꾸어서 좋을 때는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바꿔야 한다는 것이 또한 총공회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 제도에 있어서는 수백년 주일학교 제도의 천편일률을 일대 개혁하여 세계 최고라는 주일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무한 임기로 재직할 수 있는 교역자 기득권을 교역자들 스스로가 철폐하고 매 2년마다 교회별로 교역자의 2년간 시무에 대하여 교인들의 자유 비밀 투표를 통해서 75%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이동을 원칙으로 하는 교역자 신임 투표제를 1970년 부터 오늘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는 과거도 오늘도 또한 앞으로도 지켜갈 신앙이라고 총공회는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변질되더라도 변치 않고 지켜 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또한 한국 교회가 거의 통일하여 사용하는 찬송가 채택 문제는 새로운 찬송가로 자꾸 바꾸어 나가는 것보다는 입에 익고 깊은 신앙의 선배들이 번역한 이전 찬송이 더 은혜롭다는 판단에서 이전의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세계 유례없는 불치병인데, 이제는 덮어놓고 통일한다는 점 역시 총공회는 같은 불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교회의 찬송가와 성경은 각 교회의 신앙에 따라 적절히 선택할 문제로 두고 있지 그렇게 국가적으로 하나로 엮어 두지는 않고 있습니다.
1998년 9월 1일부터 보급된 개정판 성경 역시 옛날 글체를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고쳤다는 것이 성서공회의 발표인데, 이런 경우에서도 한국 교회가 어느 성경을 통일로 사용하느냐, 어느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냐는 것은 총공회에서는 전혀 성경 채택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 통일시켜 사용한다 해도 우리 신앙에는 이전 성경이 더 낫겠다고 한다면 그리하는 것이 총공회 신앙의 흐름입니다. 즉 대세나 획일적 통일에 하나되는 것보다 어느 것이 더 신앙에 옳겠느냐는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1952년, 부산 서부교회로 부임했던 고신 소속의 백영희조사(전도사의 당시 명칭)은 고신과 총회의 극심한 교권 투쟁이 세상 법정으로까지 진행되던 일을 두고 고신 소속 교역자로서 내부 비판에 앞장을 섰고 1959년 그를 따르던 교역자들과 함께 그는 고신 내부에서 제명되었습니다.
당시 극심했던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의 교권 투쟁은 끝없는 핵분열을 하고 있었고, 백조사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교역자와 교회들이 있어 또 하나의 중앙 집권적 교권을 형성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개교회주의 운영이 교단주의 운영보다 더 낫겠다는 깨달음으로 1966년 개교회주의를 천명한 총공회를 발족하게 됩니다.
1) 고신의 제명
⑴ 반소 문제
원래 한국 장로교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과 찬성했던 측으로 내분이 생겼는데, 신사참배를 했던 분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다수결의 힘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분들을 제거해 버립니다. 제거당한 반대측이 부산의 고신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고신교단이었고 소수였으며,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이들은 서울의 총신대 장신대 한신대를 운영하고 있는 통합 합동 기장측 교단들인데 당시에는 장로교 단일 총회에 함께 있었습니다.
장로교 교단이 두 개로 나뉘게 되자, 지방에 있는 교회들 중에는 한 교회 내에 교인들이 서로 좋아하는 교단이 각각 나뉘게 되는 경우가 생겨지고 이 양측 교인들은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교단으로 자기 교회를 속하게 하려고 많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결국 예배당은 하나이므로 누가 주인이 되느냐는 문제를 두고 소송을 하게 됩니다. 소송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측이 고신측을 상대로 먼저 하게 됩니다. 이때 고신 안에서는 상대측이 소송을 먼저 시작했으니 '피고의 자격'으로 법정에 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법정에서 맞서자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백목사님은 민사재판에서는 예배당을 뺏길 망정 출석치 않으면 소송을 피하게 된다고 하여 피고로 출석하는 것도 반대를 했습니다.
이것이 '반소' 즉, 소송 반대라는 뜻입니다. 이때 소송 반대라는 말은 먼저 소송을 하는 '원고 소송' 뿐 아니라 '피고'로 불려가는 소송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백목사님 사후 1990년 이후 총공회 신앙노선의 교회들은 이 노선을 버렸습니다. 현재 부산공회(3)으로 분류된 공회 외에 전공회는 백목사님의 '반소노선'을 1992년 이후로 폐기하고 원고 또는 피고 소송으로 1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배당 소송 등에 관련된 문제는 사이트(www.pkist.net)에서 검색어로 찾아보시면 자세한 자료가 있습니다.
⑵ 유엔군 철수 문제
6․25 때,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뺏기고 1개월을 넘기면서는 낙동강까지 밀리게 되어 눈깜빡할 사이에 한국 교회는 점령하에서 다 죽게 될뻔 했습니다. 이후 미국이 유엔군을 모아 겨우 오늘의 휴전 상태를 만들게 됩니다. 3년 전쟁에 수백만명이 죽고 특히 점령 치하에서 교인들이 당한 참상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데, 휴전이 끝나자 유엔군이 철수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1973년 월남에서 미국이 철수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맹에게 공산화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당시 한국민 전부가 궐기를 하여 유엔군이 물러가면 한국은 또 다시 적화가 된다고 온 나라가 들끓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한국의 각계각층과 함께 띠를 두르고 서명을 하며 유엔군이 철수하면 한국 교회가 다 죽는다고 힘껏 반대를 하게 됩니다. 고신교단까지도 이 운동에 동참을 하여 미국에 있는 친분있는 교회들을 통해 미국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등 난리였습니다.
백목사님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한국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유엔군이 물러가면 죽는다고 세상 사람들과 하나되어 유엔군철수 반대 운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무시하고 세상 권세에 따라 생사화복이 결정된다고 행동한 것이라고 대단히 크게 비판을 하고 나섰습니다.
신사참배 때는 한국 교회가 힘이 없어 당했으니 강간이라고 한다면 유엔군 반대 때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설치고 나섰으니 화간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힘이 없어 당한 신사참배보다 스스로 세상과 짝하고 나선 죄는 더 크다고 외쳤기 때문에 고신에서는 전부 백목사님의 주장을 인정하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인재목사님이 고신 교단 차원에서 정식으로 이를 기록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안면 체면 위신 때문에 고신의 지도부는 알고 있으면 되었으니 이후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면 족하다 하여 결국 공식적 회개는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모든 국가의 대소사 일에 한국의 교회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나서고 있는 바 다 일맥상통한 잘못입니다. 당시 전도사로서 교단의 어른들과 절대다수의 교역자들이 찬성하고 했던 일을 마구 비판하여 꺾어 놓았으니, 백목사님은 훗날 이런 일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 되어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⑶ 고신의 교단지 '파수군' 문제
고신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장로교 주도측에 비하여 모든 면으로 현저하게 열세였지만 '파수군'이라는 책자를 통해 왜 고신의 노선이 옳은지 등을 조목조목 열거해가며 한국 교회를 향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분명 고신이 옳았기 때문에 총회는 파수군의 외침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고 반면 고신은 고신의 진리운동이 파수군을 중심으로 전파된다고 할 만큼 파수군의 지위는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신교단이 파수군이라는 월간지를 출간하는 데 들어가는 경비 보조에는 인색하였고 결국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여 파수군은 폐간이 됩니다. 백목사님은 서부교회 단독의 경제로 이 파수군 폐간을 막고 계속해서 출간을 시켰다가 훗날 백목사님을 고신이 제거할 때 '파수군'이 서부교회에서 출간되고 있다면 고신의 정통성 문제 등에 영향을 미칠까 하여 고신이 교단 차원에서 다시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백목사님은 그런 책자 출간 문제를 가지고는 투쟁할 필요가 없다 하여 그냥 다시 내어주게 됩니다.
고신에서 제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백목사님께서 고신 회의에서 고신이 항상 진리 운동 한다고 말은 하는데 왜 파수군 출간 문제처럼 실제 자기 교회가 희생하고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면 다 빠져버리느냐고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슴에 찔리는 말을 서슴없이 했기 때문에 제명당하게 되는 원인을 또 하나 추가하게 된 것입니다.
⑷ 진리의 종들 제거 문제
고신은 해방 직후 '진리운동'을 내걸고 출발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출신을 불구하고 양심적인 분들이 전부 고신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러나 모이면 다수결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고 교권을 잡은 쪽은 마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신이 첫 출발을 할 때는 해방 직후 비장한 마음으로 죽기를 각오하며 옳은 진리를 한국 교회에 세우겠다는 일념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서 교권 단체화 합니다.
우선 세월이 가면 교권 단체로 변질되는 것이 역사이며, 둘째 이렇게 되는 데에는 고신이 장로교 총회에게 제명을 당하게 되자 극단적으로 싸우게 되는데 싸움이 생기면 '진리'보다는 '전법'에 밝은 사람들이 설치게 됩니다. 마치 전쟁이 나면 일단 전쟁 사령부가 국가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장기화 되다보면 외부 전쟁을 이유로 하여 내부 이권 등 모든 권력을 쥐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모든 교단이 그러하듯이 고신이 타락해 가는 과정도 어느 하루 아침에 두부 자르듯 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에 총회가 고신측을 잘라 내기 위해 완전히 팔을 걷어붙였고 이후 법적 제명, 이후 고신교단의 정식 출범 등이 있게 됩니다. 2년 안팎의 이런 전투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고신 내부에는 전시 사령부와 같은 내적 지도부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이 그 중심에 있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신의 지도부는 바로 그 밑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고신 안에 '진리운동'을 한다고 하여 들어왔던 분들이 적지 않았고 그 중에 일부가 고신 지도부를 향해 직설적으로 탈선 타락 교권화되고 있다며 비판을 하게 됩니다. 고신 지도부는 이들을 여러 형태로 잘라 내게 됩니다. 사실상 본인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탈퇴하는 모습을 만들게 되는데 전칠홍, 이병규, 김창인목사님 등이 주도한 서울 경기 지방 고신측 인사들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제명이 될 때까지 내부에서 투쟁한 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지만 그 대가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고신 안에서는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이를 발표하는 사람은 끊어지게 되었고 입을 닫고 현실에 안주한 사람들만 남아있게 됩니다.
⑸ ICCC 가담 문제
백목사님이 자주 언급하며 또한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두 단체를 소개하면 하나는 WCC 라는 단체로 소련 북한이 과거 해방 후에 만들었던 기독교까지 모두 포함하여 교회라는 교회는 무조건 하나 되자는 운동입니다. 또 하나는 ICCC 라는 단체로서 꼭 진리 중심으로 근본주의 신앙으로 믿는 교회들이 하나되자는 운동입니다. 문익환씨나 세상 뉴스에 기독교 대표로 나와서 환경 운동, 북한 돕기 운동 등을 하는 교회들이 WCC, 고신 총신과 같은 교단들이 ICCC에 속한 교회들입니다.
WCC는 세계 교회를 합하기 위해 공산주의 꼭두각시 노릇을하는 교회도 환영을 하였는데, 해방 후 세계가 공산화 되는 과정에서 WCC는 공산주의가 민주국가에 침투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보수측 교회들이 생각하고 심각한 위기감에서 그 대응 단체로 제시한 것이 바로 ICCC였습니다. 6․25전쟁을 겪은 한국 보수교회로서는 특히 이 단체의 의미가 특별했습니다. 고신교단을 지원해 주는 미국 교단들이 주도하는 단체이며 공산 침략 전쟁을 겪은 나라에 지부를 세우는 것은 또한 그 단체가 특별히 욕심낼 만한 조건이었습니다.
고신이 ICCC에 가담하는 것을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고 추진할 때, 백목사님은 교회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구호로 앞장 설 수 없다고 비판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냥 예수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전부인데, 공산주의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것은 '기독교가 반공'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가 반기독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반공을 구호로 걸고 나서는 것이 ICCC이기 때문에 비록 보수교단이 다 모였다 해도 고신은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묵살됩니다.
이후 백목사님이 고신에서 제거된 뒤, 경기노회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경기노회도 ICCC에 가입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은 자진 탈퇴하게 됩니다.
⑹ 교권 문제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와 겹치는 문제입니다만 고신이 진리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수년이 지나면서 교권 단체로 변하게 됩니다. 한상동목사님과 송상석목사님으로 대표되는 양파가 서로 가진 힘을 바탕으로 고신을 운영했지, 숫자에 상관없이 과연 어느 것이 옳으냐는 것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권이 교단 운영의 힘이었지 진리에 옳은 주장이 교단을 운영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면? 오늘 백목사님 사후 총공회의 모습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인 진리 이탈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⑺ 고신의 신학교 정치학 강사 문제
송상석목사님은 약칭하여 '송목사님'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입니다. 고신의 모든 법적 처리 대응 해결을 최일선에서 맡았던 분입니다. 세상 행정 체계 법률 체계에 전문가적 수준을 가진 분이어서 교단에 문제만 생겼다 하면 제일 먼저 발언하고 모든 면을 주도하던 분입니다. 사실 고신에는 무식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송목사님이 한번 쭈욱 설명하고 나면 전부 입만 벌리고 듣기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고려신학교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법과 정치를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으니 '교회정치'라는 과목입니다. 교회가 성경적으로 운영되려면 어떤 교리와 어떤 신앙노선을 가지고 어떻게 되어야 옳은 것인지를 가르치는 과목인데, 세상 정치와 법률을 잘 안다고 송목사님을 강사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백목사님이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목사님을 만나 세상법을 잘 안다고 교회헌법을 가르치게 하고, 행정 관청 체제와 세상 정치를 잘 한다고 교회 정치를 가르도록 맡긴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수정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백목사님의 논리와 주장에 밀려서 송목사님이 교체됩니다.
신학교 교수 자리를 잃게 된 분이, 그후 백목사님에 대하여 어떻게 상대했을까 하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신을 살리고 고신이 교권 교단이 아니라 진리로 나가는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 말하면 후에 보복당해 죽을 줄 알면서도 외쳤고 그 외침 때문에 고신에서 결국 제거되는 것입니다.
⑻ 교회 이동 문제
백목사님이 1952년 서부교회로 부임하던 시절 고신의 지도부 목사님 대부분이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들의 교인들이 백목사님이 담임하는 서부교회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김현찬 나인숙 서봉월 김효순 등 서부교회 주축 교인 거의 전부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주변 교회들이 시기와 질투로 기회를 엿보다가 서부교회 내에 있었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이유로 개입하게 됩니다. 전도사가 담임목회자로 있는 교회는 노회에서 목사님을 한 분 세워 그 교회 내부를 주도하게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신의 목사님들이 서부교회 내부에서 백목사님에게 반론을 가진 교인들중 몇명을 잡고 분란을 계속 조장한 뒤 타협점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후에 나온 타협안이 백목사님이 서울로 이동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눈 감아 주고 덮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노회 문제로 제기하여 재판을 열고 처벌을 하겠다는 협박입니다.
교회 내에 분란을 만들어놓고 그 분란을 가지고 목회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인간의 장난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 하여 노회의 제시를 전면 거부하게 됩니다. 많은 논란을 거쳐 결국 목사님은 교회 내 교인 투표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하였으나 백목사님 직계 가족들만 투쟁을 피하기 위해 서부교회를 떠나자는 뜻으로 이동에 찬성을 하게 되고 일반 교인들은 전부 목사님을 그대로 모시겠다고 투표를 하게 됩니다. 모든 교인들이 고신 지도부에 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서부교회를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고신측은 고신 지도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동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상회명령불복종'이라는 최종 죄목으로 백영희조사님을 제거하게 됩니다.
2) '총공회'의 특색과 신앙
"예수교 장로회 한국총공회"는 교회의 행정보다 교훈을 더 귀중히 여기는 교훈 중심의 진영이며, 교회 행정에서는 조직과 제도를 앞세우는 단체성보다는 하나님과 연결된 한 개체성의 신앙 자유를 더 귀중히 여기는 진영입니다.
총공회는 많은 교단의 헌법이 다수결로 채택되고 개정되면서 모든 교권 싸움의 출발점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성경만으로 법을 삼는 불문 헌법주의를 채택하며, 둘째는 모든 공회의 결의는 전원일치로 하여 다수가 소수를 숫자로 눌러가는 면을 지양하고, 셋째는 총공회의 권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집중되지 않도록 개교회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일사분란한 교단 운영, 대형 사업 추진 등에서는 대단히 불편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교단의 무한 투쟁, 교권 타락을 막고 교회의 성결을 지키는 데 유리한 것이 좀더 낫겠다는 점을 본 것입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겠다는 것이 총공회 신앙 정신입니다. 바꾸어서 좋을 때는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바꿔야 한다는 것이 또한 총공회 신앙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 제도에 있어서는 수백년 주일학교 제도의 천편일률을 일대 개혁하여 세계 최고라는 주일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무한 임기로 재직할 수 있는 교역자 기득권을 교역자들 스스로가 철폐하고 매 2년마다 교회별로 교역자의 2년간 시무에 대하여 교인들의 자유 비밀 투표를 통해서 75%이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이동을 원칙으로 하는 교역자 신임 투표제를 1970년 부터 오늘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는 과거도 오늘도 또한 앞으로도 지켜갈 신앙이라고 총공회는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변질되더라도 변치 않고 지켜 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또한 한국 교회가 거의 통일하여 사용하는 찬송가 채택 문제는 새로운 찬송가로 자꾸 바꾸어 나가는 것보다는 입에 익고 깊은 신앙의 선배들이 번역한 이전 찬송이 더 은혜롭다는 판단에서 이전의 찬송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세계 유례없는 불치병인데, 이제는 덮어놓고 통일한다는 점 역시 총공회는 같은 불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교회의 찬송가와 성경은 각 교회의 신앙에 따라 적절히 선택할 문제로 두고 있지 그렇게 국가적으로 하나로 엮어 두지는 않고 있습니다.
1998년 9월 1일부터 보급된 개정판 성경 역시 옛날 글체를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고쳤다는 것이 성서공회의 발표인데, 이런 경우에서도 한국 교회가 어느 성경을 통일로 사용하느냐, 어느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냐는 것은 총공회에서는 전혀 성경 채택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 통일시켜 사용한다 해도 우리 신앙에는 이전 성경이 더 낫겠다고 한다면 그리하는 것이 총공회 신앙의 흐름입니다. 즉 대세나 획일적 통일에 하나되는 것보다 어느 것이 더 신앙에 옳겠느냐는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