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고신과 주남선을 거쳐 백영희 신앙노선까지 움직인 한국교회사

주제별 정리      

                   ▒ 2.고신과 주남선을 거쳐 백영희 신앙노선까지 움직인 한국교회사

서기 0 8
2. 해방후 고신으로 이어진 한국 교회의 중심

신사참배가 고신과 주남선을 거쳐 백영희의 신앙노선 에까지 이어지는 과정

1) 한국 교회사의 중앙에 위치한 신사참배

한국 교회가 겪었던 신사참배 환란 문제는 세계 교회사적으로도 정통 개혁교회의 범위에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으며 특히 한국 교회사에서는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이설이 없는 사건입니다. 한국 교회사를 구분하는 여러 기준에 따라 또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수많은 학설들이 있습니다. 자연히 시대 구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흔하지만, 신사참배라는 사건만은 어떤 학자의 어떤 기준 어떤 접근 방법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현재까지 한국교회사에서 거의 모든 면에서 정 중앙에 위치하며 한국교회사를 양분시키기에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의 모든 교회가 한꺼번에 다 연루가 되었고, 이 환란에 대하여는 승패가 눈으로 또렷이 구별이 되어졌으며 특히 교회의 제일 대표적인 인물들이 전부 실패하였습니다. 해방 후 그 처리 건은 어떤 식으로든지 한국 교회 전체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2) 신사참배의 중앙에 위치한 고신교단의 의미

한국 교회의 외형적 계량에서 고신의 의미란 참으로 미미한 것입니다. 우선 그 주 세력이 거의 경남이라는 지방에 편중되어 있고 또한 교세도 상대가 되었던 교단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형편입니다. 교단을 대표할 만한 중심적인 대형교회 하나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고신교단 스스로도 일반인의 외부적 평가에 대하여는 변명이 없습니다. 현저히 열세임을 자인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역사적 의미 또는 전 교파적 의미에서 모임을 본다면, 고신이 제외된 상황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신사참배문제를 기준으로 본다면 고신은 절대다수의 한국 교회를 죄인으로 묶으면서 자신들은 그 대칭점에 홀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당했던 억지였던 상관없이 어떤 반대측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신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한국 교회사는 해방 후 많은 교회사적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일반 교단들로서는 고신이라는 작은 장애물 하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하는 유혹을 느껴보지 않았던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신이 한국 교회에서 이런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⑴ 북한 교회의 완전몰락

해방 후 기독교 선진 지방이었던 북한쪽에는 공산주의에 의하여 완전히 그 외형이 제거되어 버렸고 남한 교회만으로 한국 교회가 유지 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로 일컫던 시절을 생각해보더라도, 또 해방 후 3.8 이북의 관리권이 총독부에 의하여 기독교 세력인 조선민주당 조만식에게 넘겨졌던 예만 보더라도, 그리고 경남지방의 모든 목회자들이 평양에까지 유학을 하며 목사 길을 배웠음을 고려해 본다면 해방 후 북한 교회는 완전히 몰락 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⑵ 장로교의 한국 교계에서의 특수한 위치

미국 등과 달리 독특하게도 한국 교계에서만은 장로교가 신앙의 모든 면, 즉 정통성 보수성 건전성 활동성 외형성에 이르기까지 주도적 입장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곧 한국 교회사는 장로교 교회사라고까지 할 수 있으며, 장로교의 중심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⑶ 한국 교회의 보수성

한국 교회는 초기 복음주의적 노선에 충실한 선교사들로 인하여 특수하게 보수적 교계가 되었습니다. 이런 보수적 경향은 수도 없이 많았던 사건들 중에 한 사건으로 지나갈 수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를 오히려 확대 재생산해가며 오늘에까지 그 영향력을 교계 운영의 한 축이 될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민주화의 기준으로 교계 입장을 보는 이들은 해방 이전과 이후가 권위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 입장이었다면서 그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으며, 인권의 기준으로 보는 이들은 인권이 완전히 확보된 최근을 기준으로 양분을 하기도 하며, 민족주의적 기준이라면 남한은 일제 청산이 현재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오히려 북한의 자주적 정통성을 인정하고 남한은 아직도 일제 침략의 다른 모습으로 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입장이 강했던 장로교는 해방 직후에만 해도 순수 복음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는 신신학적 학설들은 설 수 있는 입지조차를 없앴고 오직 '제2계명을 어긴 교회냐 지킨 교회냐'라는 지극히 작은 한 교리의 모퉁이로만 가지고 한국 교회를 간단하게 양분시킬 수 있었습니다. 2계명을 지킨 이들은 전부 옳고 2계명을 어긴 쪽은 다 틀렸다는 방향으로 대세가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로 극보수적인 복음주의 입장이 대세를 이루었기 때문에 장로교 안에서는 도저히 교권 투쟁에서 맞상대가 될 수 없었던 고신이라는 한 지방의 소수파가 전국의 대다수 교회를 향하여 동등한 입장에서 찬반 논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⑷ 한국 교회의 분열과 경쟁의 상호 작용

결과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는 비록 신사참배라는 대사건이 없었더라도 오늘에 보는 분열상은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 한국 교회의 분열상을 신사참배 사후 처리 과정의 갈등에서 그 시작을 연구하는 것은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당연히 속화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주장입니다. 물론 일제 점령 하의 한국인 활동은 전체적으로 위축이 되었고 더구나 교회는 신사참배로 극히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지배가 없었다고 해도 한국교회는 성장기를 넘어서면서 같은 종류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초기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기에 대하여 현실 방향과 속성을 파악하고 자신감이 붙고 나면 그동안 겉돌며 겸손하고 조심스러웠던 소심함이 갑자기 돌변하여 수습 못할 영웅으로 바뀌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어느 작은 자극이라도 가해지면 감정과 자기 주장을 급진적으로 관철시키며 반대측과는 합리와 논리적 연구 과정을 생략하고 체제를 분리하고 또 한번의 분리는 결국 핵분열로 치닫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그런 예를 하나 보게 되면 이후 헤아리기도 어려운 정도로 그 범위를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신학교의 범람, 개별 교회들의 분열 범람, 교계 단체들의 분열 범람, 출판사 연구소의 분열, 신학박사학위까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정도입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의 분열은 꼭 신사참배 하나에 그 원인을 다 지울 수 없는 사안들입니다. 신사참배 사건이 없었더라도 다 나타날 일들이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분열상은 한편으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면만 거론되어 세상 기준의 통폐합론이 제시되곤 합니다. 그 취지는 원래대로의 복구하라는 것이 아니고 다시는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도록 제3의 변형질로 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내재된 공통적 속성입니다. 교계의 통합 운동에 대한 입장은 이러합니다.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잘못된 분리는 회개하여 재통합이 되어야 하나 분리 당시 또는 그이후 교리나 신앙노선적 상이점이 있게 된다면 물량적 통합은 금물입니다. 철저한 연구와 신중한 신학 신앙적 접근이 전제되지 않은 복구는 이전보다 더 복잡한 문제로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끝내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교회의 갈등과 분리는 대개 외부적 문제가 원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통합은 외부적인 단점으로 분리되었던 양측에게 내부적 내면적 문제를 새로 던지게 되고 결국 교회는 안팎의 갈등 요인들 속에서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후 교회는 더 큰 분리와 모순으로 겉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고신과 총신이 분리되었다가 재통합되면서 이후 교단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진행되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신사참배 문제가 원인이었으나 그 문제가 없었더라도 그런 극단적 투쟁은 있었으리라는 주장입니다.

다행히 인간의 실수까지도 의롭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분리 일변도로 나간 한국 교회는 자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단점 중 하나인 시기심이 경쟁의식으로 변환이 되었고 이것이 더 큰 충성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성장이라는 뜻밖의 결과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성장 과정이 이렇게 되었으나 결국 한국 교회는 세계대형교회 10개 중 4개를, 50개 교회 중 30여개를 보유하고 세계교회를 주도하는 입장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역시 대단히 특이한 경우입니다. 경쟁심이 한국 교회에게 지극히 큰 장점이 되었고 보배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생각 못했던 결과가 있었습니다. 곧 보수논쟁이었습니다.

1992년 이장림의 재림 논쟁은 원래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일이 언제라고 못박을 수 있느냐는 신학적 문제였습니다. 이장림 측이 세상 사람들에게 물의를 일으키자 이장림은 사이비고 따라서 이장림이 주장하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온다는 재림까지 비웃음을 사게 되어 이장림의 재림론을 비판하면서 시한부만 잘못된 것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론 전부를 부정하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신신학 관련 학자들이 대거 세상 언론에 나가 재림론 전체를 매도해 버린 것입니다. 재림론은 진리이며 이장림의 잘못은 시기를 한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통신학은 앉을 자리도 없었습니다. 여론이 무서워 숨어만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이비 주장 때문에 정통 재림론이 변명 한번 못하고 연금되는 형편이 되었던 것과 같이 한국 교회의 보수 논쟁은 반대로 한국교회에게 속화와 타락을 크게 지연시켜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분열은 극단적인 경쟁심으로 이어졌고 고신보다 낫기 위해, 또 총신보다 낫기 위해 양측의 구호는 '정통', 노력은 '교세'였습니다. 이후 양교단이 합동을 하고 또 반복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모든 분열 교단들에게 해당되어, 보수, 정통, 개혁이라는 구호가 한국의 장로교회를 뒤덮었습니다. 내심 자유주의에 동의를 하고 교회를 움직이고 싶어도 경쟁 교회에서 비난을 할까, 경쟁 교단의 보수 정통 경쟁에서 불리해질까 하여 한국 교회는 실력 이상의 보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워지면 더 풀려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보수로 묶어 두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보수가 무엇인지, 자기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군중심리 경쟁심리 때문에 원치 않게 보수신앙을 더 오래 지키게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결과적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순복음교회가 1990년대까지 이단으로 몰린다는 것은 미주교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사안입니다.
한편 한국 교회는 문제가 된 사안이라도 대개 1-20년이 지나면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는 오늘까지도 그 의미가 살아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의 모든 경제력 두뇌력 기술력 거의가 서울에 집중하듯 서울 장안의 고신은 극소수파에 지나지 않는데 서울 장안에서 모이는 범교단 회의에서는 고신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이런 특수성이 있었습니다.

3) 고신에서 가지는 주남선의 의미

주남선은 교파적으로만 본다면 이미 독자교단으로 출발하던 시점에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고신이 없을 뻔했다고 해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고신의 중심이었으나 그가 없어도 고신은 고신으로서 오늘까지 존재하는 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할 인물입니다. 교계적으로 그 비중과 위치가 훨씬 크게 인식되는 손양원목사님은 생전에 자진하여 고신 범주에서 벗어났고 이 사건은 초기 고신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고신은 자신을 지켜가는 데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손목사님 역시 처음부터 고신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⑴ 고신의 진리 운동에서 교권은 한상동, 경건은 주남선

그렇다면 고신에서 주목사님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고신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한상동목사님이, 고신에서 없어도 별 불편이 없는 주목사님을, 고신에서 없으면 안되는 주목사님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목사님 때문에 주목사님은 관심도 없고 또 신앙 성격상 맞지도 않게 고신의 최고 자리에 앉게 되었고 오늘까지 고신 역사에서는 주남선의 이름이 첫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고신을 오늘의 고신으로 출발시키고 자리를 잡게 한 이는 한상동, 그가 왜 주남선을 고신의 중심에 앉도록 모셨을까? 결과적으로 오늘 한국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고신의 위치는 독보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바, 그런 고신의 외형, 고신의 모습에서 빠져도 상관없었던 주목사님이 고신 역사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한상동목사님의 고려가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교권 활동에는 무관한 인물이며 하나님 앞에 숨어 움직이던 분입니다. 이런 신앙 성격 때문에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고신운동의 중심에 늘 세워 드렸고, 그로 인해 주목사님은 고신운동에 특별한 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백영희목사님은 고신운동의 심장부로 직행하는 길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목사님이 주목사님을 적극적으로 앞세웠던 점을 몇 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⑵ 주남선은 한상동에게 교권에 동원된 경건이었습니다.

① 정치적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었던 한상동목사님은 고신의 진리운동 초창기부터 정치적 색채가 강했던 분들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정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점은 전혀 뜻밖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전혀 사심이 없었고 오로지 신앙내면만 가졌던 인물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했다고 훗날에 몫을 챙길 성향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운동의 필요성만 확실하면 동참할 수 있으며 진리운동이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상태에서 교권이 유지될 때가 되면 주목사님은 소리없이 숨을 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목사님 만한 분이 없었습니다. 활동적인 한목사님이 자신을 가리기에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현재도 훗날도 대립각을 세울 위험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장차 고신대학교가 되고 고신대학원이 될 고려신학교 초대 이사장에 추대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작았으나 교회사적으로나 교회 정치사적으로는 장차 대단히 의미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한상동은 알았고 주남선은 몰랐습니다.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정치적 입장에서 앉혔고, 주목사님은 경건으로 받았습니다.

② 고신의 초기는 자기 홍보를 피할 줄 알았습니다.

교회의 이름에 '제일'이라는 말을 피하라고 할 만큼 고신의 초기는 겸손했습니다. 교인들이 개척을 한 다음 '서부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기를 원했을 때, 교단의 총무 일을 보고 있던 한명동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죄송하니 '제일'이라는 이름을 빼자고 하여 '서부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예가 있습니다. 초기 고신의 지도부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총신측에는 여러 면에서 고신측에 비교가 되지 않는 훌륭한 간판을 가진 목사님들이 두루 많았고 이것을 큰 힘으로 삼았습니다. 한목사님이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주목사님을 앞세워야 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장차 자신의 이름이 갖게 될 의미도 모르고 고신의 대표 자리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목사님에 의하여.

③ 물론 다른 사람도 많았으나 굳이 주남선이었습니다.

평양감옥의 동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세울 동지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사참배 후 진리운동을 시작하는 초기였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정치적 계산이 늘 깔려 있었지만 경건이 그래도 함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곳은 신앙세계였고 아직까지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남선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유별 크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자연 그를 선택하는 데는 순수한 신앙적 필연도 있었던 것입니다.

④ 거창이라는 유벽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가 주남선이었습니다.

현 교통 체감으로는 외국 출장을 각오할 이상으로 거창은 고신의 본부였던 부산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고신의 중심이 경남지방이었는 데 고신의 본부가 있는 부산에서 주목사님이 있는 거창은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주목사님이 가지게 되는 자리는 이름만이었습니다. 물론 회의에 참석했다하여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발표할 분도 아니었습니다. 의견 충돌이나 대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측과 존립을 두고 대립하는 과도기 형편에서 교회가 안정을 갖는 데는 긴급한 조처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유벽지에서 모든 의사를 맡겨 주고 서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둘을 찾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진리운동에 필요해서 맡으라면 직책을 맡는 것도 진정 십자가를 지듯 맡을 수 있는 이가 주목사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짐을 다른 사람이 맡으려 한다면 그는 반가워할 수 있는 분입니다. 고신이 총신과의 현장 투쟁이 끝나고 분리되는 선포만 남았을 때, 이때부터는 고신 단독의 걸음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이제부터는 내부 교권 투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주남선은 자기 갈 날을 계산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진리운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어졌어도 교권운동에는 사용되는 것조차 제외가 되었으니, 그는 진정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4) 주남선의 경건 선상에서 나타난 백영희의 신앙노선

⑴ 정통은 정통에서 이어가는 것

한국 교회사의 중앙에 우뚝 선 신사참배라는 사건은 승리자라고 자처하는 고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반대측에 의하여도 그 의미는 부인되지 않습니다. 반대측이 오늘까지 주장하는 것은 신사참배 사건의 승리라는 값진 것을 고신교단이 한국 교회의 교권을 잡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며 또한 승리자들이 너무 자만했다는 것을 지적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사참배에 실패한 한국 교회들에게서는 교회의 정통성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교회의 일부에서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체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범죄를 하고 여기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교회적으로 정통성을 잃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정통성을 잃게 된다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게 됩니다. 첫째, 회개치 않은 교회는 그 교회가 가졌던 촛대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둘째, 교회가 잃어버린 촛대는 그 교회 안에서 그 범죄에 상관이 없는 사람을 통해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⑵ 정통성의 이동 경로

고신과 주남선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의미

① 한국 교회의 촛대가 고신에서 이어진 해방 교계

'고신'이란 의미는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살필 수 있는 도로 안내판입니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이라는 외형은 사람이 붙들고 있지만, 교회가 교회인 이유는 촛대이며 촛대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때 가지게 되는 '진리노선' 때문입니다. 신사참배와 같이 교회가 교회 전체적 차원에서 이방신을 섬긴 범죄는 이 촛대가 옮기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이런 범죄에 대하여 회개를 거부하게 되면 촛대라는 진리노선, 교회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회개는 임시 잃은 위치를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만 회개에는 기간이 있는 바,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이로써 그 교회는 역사 속에 이름으로만 남게 되고 그 교회 안에는 그 교회를 대체할 새로운 운동이 다시 태동합니다. 그리고 촛대를 잃어버린 교회는 촛대를 이어가는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으로 남게 됩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 전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회개는 당시 교회가 회개를 해야 했고 그 후시대의 손에서 회개가 나타나려면 루터와 칼빈식의 회개가 있어야 교회적 회개가 됩니다. 천주교는 거부했고 루터와 칼빈을 통해 교회가 가질 정상적인 위치, 정통의 노선은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범죄를 회개할 그 당시 그 책임자, 회개의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해당되는 사람은 거부하고 이런 회개의 책임과 고통에 상관없는 훗날 천주교의 반성 발표는 회개가 아니라 위장일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루터 칼빈으로 이어지는 이곳으로 옮겨오는 길 하나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는 일시 촛대의 자리를 잃었던 사건이며 따라서 상황은 유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회개의 기회를 놓친 것은 촛대의 자리를 아주 잃어버렸던 사건입니다. 당시 승리자들의 교만과 교권 확보에 대한 반발로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홧김에 자살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회개를 하려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는 어려움 이상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 모든 환란이 공통된 성질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했던 죄 하나에 더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주신 재시험 기회를 한국교회는 거부하였고 이 죄가 더해지면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주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측을 통해 이어져 왔고 한국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위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교회의 불씨는 어디에 위치해 있겠는가? 두말할 것 없이 고신 계열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신의 역사는 대단히 주의깊게 또 냉정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② 해방 후 고신의 진리노선이 이어진 곳은 백영희

고신을 반대하는 일반 교계에서는 고신의 죄를 일러 교만죄, 형제를 정죄한 죄 등으로 지적을 합니다. 여기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은 촛대의 소재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다음 시대로 이어가는 생명선을 따져보는 교회의 정통성 문제는 내부에 잠재된 죄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죄 문제로 확정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고신에게 교만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속에 든 것이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고, 교회사적으로 교회의 정통성을 논할 때는 객관적인 죄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신이 한국 교회로부터 교회의 정통성을 넘겨받았던 위치를 포기한 것은 여러 가지가 겹쳤습니다. 그러나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은 바로 예배당 소송건과 유엔군 철수 반대결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만, 교권 투쟁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를 교회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걸어갈 노선으로 정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신은 교회적으로 결국 예배당 소송이 가하다는 노선을 밝히고 교회의 신앙 문제를 불신 판사 앞으로 가져갔고, 유엔군 철수를 반대하는 세상 운동을 교회가 하고 나섰으며 이를 지적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고신이 이렇게까지 나아가게 되는 데에는 주남선과 같이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경건으로 지켰던 이가 일찍 없어진 데에서도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상동을 비롯한 고신의 지도부는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정치력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주남선의 경건이 없어진 상태에서 고신의 정치력만 고신의 지도부에 남았습니다. 이런 정치력은 고신의 교권을 지키는 데에는 일견 유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주남선의 골방 생활이 세상을 떠나자 인간이 인간만을 상대하던 지도부는 불신 판사 앞에 하나님을 믿는 일을 판결해 달라는 데까지 나아가는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교회의 원래 신앙노선을 신사참배에서 굽히지 않음으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 고신이라면, 고신의 정통성을 배제하는 예배당 소송과 유엔군 철수 반대 운동과 같은 입장을 반대하다가 제거된 백영희에게서 우리는 고신을 이어 다시 한번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정하게 됩니다.

⑶ 고신 속에 나타난 백영희, 그리고 그 의미

① 장차 고신의 중심부, 경건의 중심부에서 출발한 백영희

고신의 중심부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방이었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서로 담당하는 구역을 정하였고 호주 선교부가 부산으로부터 경남 남해안을 따라 서부지역 전체를 맡았습니다. 바로 이 호주 선교부의 선교 담당 구역에서 거의 모든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배출되었고 경남 서부지방을 대표할 만한 이가 바로 주남선이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1936년 주목사님이 도맡고 있던 거창 지방에서 신앙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주목사님의 신앙 영향이 지방 전체에 크게 미치고 있었습니다.

불과 3년만에 닥쳐온 신사참배 전면 탄압 중에서 주목사님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백목사님밖에 없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이미 일제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그 고초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이였습니다. 그리고 주목사님은 옥중 6년을 평양에서 보내며 장차 고신의 중심 인물이 되고 또 한국 교회에도 뚜렷하게 설 수 있는 단계를 밟고 있었습니다. 한편 백목사님은 집사로서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온 교인들과 함께 6년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신사참배 승리자들에 대한 교계적 평가는 출옥성도냐는 것으로 기준이 잡혔고 백목사님의 특이한 승리는 출옥성도들 중에서만 극진히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출옥성도가 아닌 경우는 신사참배를 피해 국내외를 전전한 이들이기 때문에 승리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해방 교계 속에는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신사참배 승리자들 속에는 백영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옥성도라고 분류되는 고신의 중심 인물들을 해방 후 한국 교회의 진리운동에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출옥성도 못지 않은, 오히려 더 큰 승리를 했던 백영희는 해방 직후 한국 교회의 정화운동 전면에서 하나님은 늘 빼놓고 있었습니다. 대신 출옥성도로 이루어진 고신의 진리 운동 내부에서 가장 진리에 강한 점8로 또 앞으로 사용할 때를 위해 잠시 고요한 때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고신이 해방 후 한국 교회와 정통성을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일 때 고신 안에서는 고신을 고신되도록 만드는 진정한 신앙의 실체를 만들던 이는 백영희였습니다.

② 고신의 전 지도부에 의하여 고신의 전면에 등장한 백영희

고신 안에서 끝까지 변질되지 않았던 진정한 고신인, 이런 백영희가 되도록 가장 총력을 기울인 이가 주남선입니다. 목사였고 지방 교회 전체의 책임자였으며 고신의 지도부였고 이미 교계의 중심에 섰던 주남선은 시골교회 집사에 지나지 않던 백영희를 자신이 초빙받은 강단마다 대신 세우면서 고신의 보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상동, 주남선과 같은 출옥성도이며 전국의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던 박인순 이인재 조수옥과 같은 이들이 교계적으로는 한참 후배가 되는 백영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박인순전도사님과 이인재목사님의 경우는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다 할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전국 규모의 뜨거운 신앙운동은 단연 고신에 있었고, 고신에서 가장 뜨거운 부흥은 백영희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고신이 제거되기 이전 전국 많은 교회를 성령으로 불바다를 만들었던 그는 1952년부터 고신이 총회에서 외부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되자 총회측에 속하거나 속하게 될 전국의 많은 교회를 고신측으로 돌려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국적 역할과 고신 지도부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백영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신은 전도사에 지나지 않는 그를 이후 교단적으로 제거하면서도 5년이나 걸리게 됩니다.

1952년 7월 백영희는 고신 최고 지도부 7명의 연명 초빙서를 받으며 부산 서부교회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고신이 낳은 또 하나의 유명한 부흥사 김창인전도사님이 맡았던 교회였으나 그를 배척하여 교회 분규가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맡아 수습할 사람은 고신 안에서 단 한 사람 백영희밖에 없다는 지도부의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산으로 오게 된 백영희는 여기에서 결국 고신의 가장 아픈 지적자가 되고 고신으로서는 교권 유지를 위해 배제시킨 인물이 되며 한국 교회사로서는 고신으로 옮겨진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백영희에게로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③ 고신 안에서 가지는 '백영희'라는 의미

고신은 늘 스스로 공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진리의 교회이지 교세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차지한 교회이지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고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열등의식이었으며 동시에 고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해방 후 교계 투쟁 속에서 상대방이 신사참배 범죄를 덮어버리자 진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소위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독자적으로 가졌다는 순간부터 고신은 진리보다 교세, 하나님보다 교단의 지도자들의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보다는 어느 것이 교세에 유리하냐는 것이 결정의 잣대가 되었고, 어느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냐는 것보다 어느 것이 지도부의 뜻이냐는 것으로 모든 결정이 있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가 예배당 소송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성경까지 곡해시켰고 지도부가 교단법 절차를 통해 결정한 이런 죄를 반대하는 것은 고신내에서는 오히려 불법이 되어졌습니다. 이런 고신의 탈선은 주남선목사님으로 이어오던 고신의 원래 정신인 경건과 진리노선에 틀렸으니 고신 스스로 반대해야 하고, 교단법 절차로 결정했다면 그 법 절차 자체를 성경법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영희는 교단 지도부 사람들을 봐서는 찬성을 하고 따라야 하나 늘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해서 반대를 했으니 경건이었고, 교단적으로 교단법 절차를 밟았더라도 성경에 틀렸으면 교단법절차도 고쳐야 하니 진리노선이었습니다. 이것이 백영희가 고신 안에서 걸어간 길이고 결국 지도부 불복죄로 제거가 됩니다.

백영희는 고신이 고신인 이유였던 경건과 진리노선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를 제거함은 고신이 고신을 제거함이었습니다. 외형은 고신이 붙들었고 고신의 진리운동은 백영희에게로 각각 나뉘어 내려오게 되었으니 195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1960년, 고신은 고신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폐기하고 자신들이 신사참배 죄인들로 정죄하던 당시 장로교 총회 회중에 가입해 버리게 됩니다. 이후 2년만에 반대측과 통합했던 것이 범죄였다고 회개하면서 다시 분리하였지만 이미 신앙노선적으로 고신은 완전 폐기 산화된 이후였습니다. 명칭 싸움을 피하기 위해 백영희는 고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들지 않았지만 이 건으로 인하여 진정한 고신은 백영희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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