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고신에서 가지는 주남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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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3) 고신에서 가지는 주남선의 의미
주남선은 교파적으로만 본다면 이미 독자교단으로 출발하던 시점에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고신이 없을 뻔했다고 해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고신의 중심이었으나 그가 없어도 고신은 고신으로서 오늘까지 존재하는 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할 인물입니다. 교계적으로 그 비중과 위치가 훨씬 크게 인식되는 손양원목사님은 생전에 자진하여 고신 범주에서 벗어났고 이 사건은 초기 고신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고신은 자신을 지켜가는 데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손목사님 역시 처음부터 고신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⑴ 고신의 진리 운동에서 교권은 한상동, 경건은 주남선
그렇다면 고신에서 주목사님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고신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한상동목사님이, 고신에서 없어도 별 불편이 없는 주목사님을, 고신에서 없으면 안되는 주목사님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목사님 때문에 주목사님은 관심도 없고 또 신앙 성격상 맞지도 않게 고신의 최고 자리에 앉게 되었고 오늘까지 고신 역사에서는 주남선의 이름이 첫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고신을 오늘의 고신으로 출발시키고 자리를 잡게 한 이는 한상동, 그가 왜 주남선을 고신의 중심에 앉도록 모셨을까? 결과적으로 오늘 한국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고신의 위치는 독보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바, 그런 고신의 외형, 고신의 모습에서 빠져도 상관없었던 주목사님이 고신 역사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한상동목사님의 고려가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교권 활동에는 무관한 인물이며 하나님 앞에 숨어 움직이던 분입니다. 이런 신앙 성격 때문에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고신운동의 중심에 늘 세워 드렸고, 그로 인해 주목사님은 고신운동에 특별한 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백영희목사님은 고신운동의 심장부로 직행하는 길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목사님이 주목사님을 적극적으로 앞세웠던 점을 몇 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⑵ 주남선은 한상동에게 교권에 동원된 경건이었습니다.
① 정치적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었던 한상동목사님은 고신의 진리운동 초창기부터 정치적 색채가 강했던 분들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정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점은 전혀 뜻밖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전혀 사심이 없었고 오로지 신앙내면만 가졌던 인물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했다고 훗날에 몫을 챙길 성향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운동의 필요성만 확실하면 동참할 수 있으며 진리운동이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상태에서 교권이 유지될 때가 되면 주목사님은 소리없이 숨을 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목사님 만한 분이 없었습니다. 활동적인 한목사님이 자신을 가리기에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현재도 훗날도 대립각을 세울 위험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장차 고신대학교가 되고 고신대학원이 될 고려신학교 초대 이사장에 추대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작았으나 교회사적으로나 교회 정치사적으로는 장차 대단히 의미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한상동은 알았고 주남선은 몰랐습니다.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정치적 입장에서 앉혔고, 주목사님은 경건으로 받았습니다.
② 고신의 초기는 자기 홍보를 피할 줄 알았습니다.
교회의 이름에 '제일'이라는 말을 피하라고 할 만큼 고신의 초기는 겸손했습니다. 교인들이 개척을 한 다음 '서부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기를 원했을 때, 교단의 총무 일을 보고 있던 한명동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죄송하니 '제일'이라는 이름을 빼자고 하여 '서부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예가 있습니다. 초기 고신의 지도부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총신측에는 여러 면에서 고신측에 비교가 되지 않는 훌륭한 간판을 가진 목사님들이 두루 많았고 이것을 큰 힘으로 삼았습니다. 한목사님이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주목사님을 앞세워야 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장차 자신의 이름이 갖게 될 의미도 모르고 고신의 대표 자리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목사님에 의하여.
③ 물론 다른 사람도 많았으나 굳이 주남선이었습니다.
평양감옥의 동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세울 동지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사참배 후 진리운동을 시작하는 초기였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정치적 계산이 늘 깔려 있었지만 경건이 그래도 함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곳은 신앙세계였고 아직까지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남선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유별 크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자연 그를 선택하는 데는 순수한 신앙적 필연도 있었던 것입니다.
④ 거창이라는 유벽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가 주남선이었습니다.
현 교통 체감으로는 외국 출장을 각오할 이상으로 거창은 고신의 본부였던 부산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고신의 중심이 경남지방이었는 데 고신의 본부가 있는 부산에서 주목사님이 있는 거창은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주목사님이 가지게 되는 자리는 이름만이었습니다. 물론 회의에 참석했다하여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발표할 분도 아니었습니다. 의견 충돌이나 대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측과 존립을 두고 대립하는 과도기 형편에서 교회가 안정을 갖는 데는 긴급한 조처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유벽지에서 모든 의사를 맡겨 주고 서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둘을 찾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진리운동에 필요해서 맡으라면 직책을 맡는 것도 진정 십자가를 지듯 맡을 수 있는 이가 주목사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짐을 다른 사람이 맡으려 한다면 그는 반가워할 수 있는 분입니다. 고신이 총신과의 현장 투쟁이 끝나고 분리되는 선포만 남았을 때, 이때부터는 고신 단독의 걸음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이제부터는 내부 교권 투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주남선은 자기 갈 날을 계산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진리운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어졌어도 교권운동에는 사용되는 것조차 제외가 되었으니, 그는 진정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주남선은 교파적으로만 본다면 이미 독자교단으로 출발하던 시점에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고신이 없을 뻔했다고 해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고신의 중심이었으나 그가 없어도 고신은 고신으로서 오늘까지 존재하는 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할 인물입니다. 교계적으로 그 비중과 위치가 훨씬 크게 인식되는 손양원목사님은 생전에 자진하여 고신 범주에서 벗어났고 이 사건은 초기 고신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고신은 자신을 지켜가는 데 더 이상 불편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손목사님 역시 처음부터 고신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⑴ 고신의 진리 운동에서 교권은 한상동, 경건은 주남선
그렇다면 고신에서 주목사님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고신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한상동목사님이, 고신에서 없어도 별 불편이 없는 주목사님을, 고신에서 없으면 안되는 주목사님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목사님 때문에 주목사님은 관심도 없고 또 신앙 성격상 맞지도 않게 고신의 최고 자리에 앉게 되었고 오늘까지 고신 역사에서는 주남선의 이름이 첫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고신을 오늘의 고신으로 출발시키고 자리를 잡게 한 이는 한상동, 그가 왜 주남선을 고신의 중심에 앉도록 모셨을까? 결과적으로 오늘 한국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고신의 위치는 독보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바, 그런 고신의 외형, 고신의 모습에서 빠져도 상관없었던 주목사님이 고신 역사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위치를 가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한상동목사님의 고려가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교권 활동에는 무관한 인물이며 하나님 앞에 숨어 움직이던 분입니다. 이런 신앙 성격 때문에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고신운동의 중심에 늘 세워 드렸고, 그로 인해 주목사님은 고신운동에 특별한 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 백영희목사님은 고신운동의 심장부로 직행하는 길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목사님이 주목사님을 적극적으로 앞세웠던 점을 몇 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⑵ 주남선은 한상동에게 교권에 동원된 경건이었습니다.
① 정치적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었던 한상동목사님은 고신의 진리운동 초창기부터 정치적 색채가 강했던 분들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정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런 점은 전혀 뜻밖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전혀 사심이 없었고 오로지 신앙내면만 가졌던 인물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했다고 훗날에 몫을 챙길 성향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운동의 필요성만 확실하면 동참할 수 있으며 진리운동이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상태에서 교권이 유지될 때가 되면 주목사님은 소리없이 숨을 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주목사님 만한 분이 없었습니다. 활동적인 한목사님이 자신을 가리기에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현재도 훗날도 대립각을 세울 위험이 없는 인물이었으니 장차 고신대학교가 되고 고신대학원이 될 고려신학교 초대 이사장에 추대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작았으나 교회사적으로나 교회 정치사적으로는 장차 대단히 의미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한상동은 알았고 주남선은 몰랐습니다. 한목사님은 주목사님을 정치적 입장에서 앉혔고, 주목사님은 경건으로 받았습니다.
② 고신의 초기는 자기 홍보를 피할 줄 알았습니다.
교회의 이름에 '제일'이라는 말을 피하라고 할 만큼 고신의 초기는 겸손했습니다. 교인들이 개척을 한 다음 '서부제일교회'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기를 원했을 때, 교단의 총무 일을 보고 있던 한명동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죄송하니 '제일'이라는 이름을 빼자고 하여 '서부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예가 있습니다. 초기 고신의 지도부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총신측에는 여러 면에서 고신측에 비교가 되지 않는 훌륭한 간판을 가진 목사님들이 두루 많았고 이것을 큰 힘으로 삼았습니다. 한목사님이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에 주목사님을 앞세워야 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주남선목사님은 장차 자신의 이름이 갖게 될 의미도 모르고 고신의 대표 자리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목사님에 의하여.
③ 물론 다른 사람도 많았으나 굳이 주남선이었습니다.
평양감옥의 동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세울 동지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사참배 후 진리운동을 시작하는 초기였고 어려울 때였습니다. 정치적 계산이 늘 깔려 있었지만 경건이 그래도 함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곳은 신앙세계였고 아직까지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남선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유별 크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자연 그를 선택하는 데는 순수한 신앙적 필연도 있었던 것입니다.
④ 거창이라는 유벽지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가 주남선이었습니다.
현 교통 체감으로는 외국 출장을 각오할 이상으로 거창은 고신의 본부였던 부산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고신의 중심이 경남지방이었는 데 고신의 본부가 있는 부산에서 주목사님이 있는 거창은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주목사님이 가지게 되는 자리는 이름만이었습니다. 물론 회의에 참석했다하여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발표할 분도 아니었습니다. 의견 충돌이나 대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측과 존립을 두고 대립하는 과도기 형편에서 교회가 안정을 갖는 데는 긴급한 조처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유벽지에서 모든 의사를 맡겨 주고 서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둘을 찾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진리운동에 필요해서 맡으라면 직책을 맡는 것도 진정 십자가를 지듯 맡을 수 있는 이가 주목사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짐을 다른 사람이 맡으려 한다면 그는 반가워할 수 있는 분입니다. 고신이 총신과의 현장 투쟁이 끝나고 분리되는 선포만 남았을 때, 이때부터는 고신 단독의 걸음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이제부터는 내부 교권 투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주남선은 자기 갈 날을 계산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진리운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어졌어도 교권운동에는 사용되는 것조차 제외가 되었으니, 그는 진정 복된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