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고신의 외형과 주남선의 경건 선상에서 나타나는 백영희의 신앙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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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고신의 외형과 주남선의 경건 선상에서 나타나는 백영희의 신앙노선

서기 0 7
4) 주남선의 경건 선상에서 나타난 백영희의 신앙노선

⑴ 정통은 정통에서 이어가는 것

한국 교회사의 중앙에 우뚝 선 신사참배라는 사건은 승리자라고 자처하는 고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반대측에 의하여도 그 의미는 부인되지 않습니다. 반대측이 오늘까지 주장하는 것은 신사참배 사건의 승리라는 값진 것을 고신교단이 한국 교회의 교권을 잡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며 또한 승리자들이 너무 자만했다는 것을 지적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사참배에 실패한 한국 교회들에게서는 교회의 정통성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교회의 일부에서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체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범죄를 하고 여기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교회적으로 정통성을 잃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정통성을 잃게 된다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게 됩니다. 첫째, 회개치 않은 교회는 그 교회가 가졌던 촛대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둘째, 교회가 잃어버린 촛대는 그 교회 안에서 그 범죄에 상관이 없는 사람을 통해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⑵ 정통성의 이동 경로

고신과 주남선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의미

① 한국 교회의 촛대가 고신에서 이어진 해방 교계

'고신'이란 의미는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어디를 향하는가를 살필 수 있는 도로 안내판입니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이라는 외형은 사람이 붙들고 있지만, 교회가 교회인 이유는 촛대이며 촛대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때 가지게 되는 '진리노선' 때문입니다. 신사참배와 같이 교회가 교회 전체적 차원에서 이방신을 섬긴 범죄는 이 촛대가 옮기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이런 범죄에 대하여 회개를 거부하게 되면 촛대라는 진리노선, 교회의 위치를 잃게 됩니다. 회개는 임시 잃은 위치를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만 회개에는 기간이 있는 바,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이로써 그 교회는 역사 속에 이름으로만 남게 되고 그 교회 안에는 그 교회를 대체할 새로운 운동이 다시 태동합니다. 그리고 촛대를 잃어버린 교회는 촛대를 이어가는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으로 남게 됩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 전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회개는 당시 교회가 회개를 해야 했고 그 후시대의 손에서 회개가 나타나려면 루터와 칼빈식의 회개가 있어야 교회적 회개가 됩니다. 천주교는 거부했고 루터와 칼빈을 통해 교회가 가질 정상적인 위치, 정통의 노선은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의 범죄를 회개할 그 당시 그 책임자, 회개의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해당되는 사람은 거부하고 이런 회개의 책임과 고통에 상관없는 훗날 천주교의 반성 발표는 회개가 아니라 위장일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루터 칼빈으로 이어지는 이곳으로 옮겨오는 길 하나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는 일시 촛대의 자리를 잃었던 사건이며 따라서 상황은 유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회개의 기회를 놓친 것은 촛대의 자리를 아주 잃어버렸던 사건입니다. 당시 승리자들의 교만과 교권 확보에 대한 반발로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홧김에 자살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회개를 하려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는 어려움 이상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 모든 환란이 공통된 성질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했던 죄 하나에 더하여, 회개할 수 있도록 주신 재시험 기회를 한국교회는 거부하였고 이 죄가 더해지면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주관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정통성은 고신측을 통해 이어져 왔고 한국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위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교회의 불씨는 어디에 위치해 있겠는가? 두말할 것 없이 고신 계열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신의 역사는 대단히 주의깊게 또 냉정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② 해방 후 고신의 진리노선이 이어진 곳은 백영희

고신을 반대하는 일반 교계에서는 고신의 죄를 일러 교만죄, 형제를 정죄한 죄 등으로 지적을 합니다. 여기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은 촛대의 소재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다음 시대로 이어가는 생명선을 따져보는 교회의 정통성 문제는 내부에 잠재된 죄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죄 문제로 확정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고신에게 교만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속에 든 것이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고, 교회사적으로 교회의 정통성을 논할 때는 객관적인 죄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신이 한국 교회로부터 교회의 정통성을 넘겨받았던 위치를 포기한 것은 여러 가지가 겹쳤습니다. 그러나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은 바로 예배당 소송건과 유엔군 철수 반대결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만, 교권 투쟁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를 교회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걸어갈 노선으로 정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신은 교회적으로 결국 예배당 소송이 가하다는 노선을 밝히고 교회의 신앙 문제를 불신 판사 앞으로 가져갔고, 유엔군 철수를 반대하는 세상 운동을 교회가 하고 나섰으며 이를 지적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고신이 이렇게까지 나아가게 되는 데에는 주남선과 같이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경건으로 지켰던 이가 일찍 없어진 데에서도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상동을 비롯한 고신의 지도부는 고신의 정신을 고신의 정치력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주남선의 경건이 없어진 상태에서 고신의 정치력만 고신의 지도부에 남았습니다. 이런 정치력은 고신의 교권을 지키는 데에는 일견 유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주남선의 골방 생활이 세상을 떠나자 인간이 인간만을 상대하던 지도부는 불신 판사 앞에 하나님을 믿는 일을 판결해 달라는 데까지 나아가는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교회의 원래 신앙노선을 신사참배에서 굽히지 않음으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 고신이라면, 고신의 정통성을 배제하는 예배당 소송과 유엔군 철수 반대 운동과 같은 입장을 반대하다가 제거된 백영희에게서 우리는 고신을 이어 다시 한번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정하게 됩니다.

⑶ 고신 속에 나타난 백영희, 그리고 그 의미

① 장차 고신의 중심부, 경건의 중심부에서 출발한 백영희

고신의 중심부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지방이었습니다. 한국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서로 담당하는 구역을 정하였고 호주 선교부가 부산으로부터 경남 남해안을 따라 서부지역 전체를 맡았습니다. 바로 이 호주 선교부의 선교 담당 구역에서 거의 모든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배출되었고 경남 서부지방을 대표할 만한 이가 바로 주남선이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1936년 주목사님이 도맡고 있던 거창 지방에서 신앙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주목사님의 신앙 영향이 지방 전체에 크게 미치고 있었습니다.

불과 3년만에 닥쳐온 신사참배 전면 탄압 중에서 주목사님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백목사님밖에 없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이미 일제 감옥을 드나들었으며 그 고초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는 이였습니다. 그리고 주목사님은 옥중 6년을 평양에서 보내며 장차 고신의 중심 인물이 되고 또 한국 교회에도 뚜렷하게 설 수 있는 단계를 밟고 있었습니다. 한편 백목사님은 집사로서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온 교인들과 함께 6년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신사참배 승리자들에 대한 교계적 평가는 출옥성도냐는 것으로 기준이 잡혔고 백목사님의 특이한 승리는 출옥성도들 중에서만 극진히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출옥성도가 아닌 경우는 신사참배를 피해 국내외를 전전한 이들이기 때문에 승리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해방 교계 속에는 신사참배 승리자들이, 신사참배 승리자들 속에는 백영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옥성도라고 분류되는 고신의 중심 인물들을 해방 후 한국 교회의 진리운동에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출옥성도 못지 않은, 오히려 더 큰 승리를 했던 백영희는 해방 직후 한국 교회의 정화운동 전면에서 하나님은 늘 빼놓고 있었습니다. 대신 출옥성도로 이루어진 고신의 진리 운동 내부에서 가장 진리에 강한 점8로 또 앞으로 사용할 때를 위해 잠시 고요한 때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고신이 해방 후 한국 교회와 정통성을 두고 치열한 투쟁을 벌일 때 고신 안에서는 고신을 고신되도록 만드는 진정한 신앙의 실체를 만들던 이는 백영희였습니다.

② 고신의 전 지도부에 의하여 고신의 전면에 등장한 백영희

고신 안에서 끝까지 변질되지 않았던 진정한 고신인, 이런 백영희가 되도록 가장 총력을 기울인 이가 주남선입니다. 목사였고 지방 교회 전체의 책임자였으며 고신의 지도부였고 이미 교계의 중심에 섰던 주남선은 시골교회 집사에 지나지 않던 백영희를 자신이 초빙받은 강단마다 대신 세우면서 고신의 보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상동, 주남선과 같은 출옥성도이며 전국의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던 박인순 이인재 조수옥과 같은 이들이 교계적으로는 한참 후배가 되는 백영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박인순전도사님과 이인재목사님의 경우는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다 할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전국 규모의 뜨거운 신앙운동은 단연 고신에 있었고, 고신에서 가장 뜨거운 부흥은 백영희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고신이 제거되기 이전 전국 많은 교회를 성령으로 불바다를 만들었던 그는 1952년부터 고신이 총회에서 외부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되자 총회측에 속하거나 속하게 될 전국의 많은 교회를 고신측으로 돌려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국적 역할과 고신 지도부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백영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신은 전도사에 지나지 않는 그를 이후 교단적으로 제거하면서도 5년이나 걸리게 됩니다.

1952년 7월 백영희는 고신 최고 지도부 7명의 연명 초빙서를 받으며 부산 서부교회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고신이 낳은 또 하나의 유명한 부흥사 김창인전도사님이 맡았던 교회였으나 그를 배척하여 교회 분규가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맡아 수습할 사람은 고신 안에서 단 한 사람 백영희밖에 없다는 지도부의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산으로 오게 된 백영희는 여기에서 결국 고신의 가장 아픈 지적자가 되고 고신으로서는 교권 유지를 위해 배제시킨 인물이 되며 한국 교회사로서는 고신으로 옮겨진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백영희에게로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③ 고신 안에서 가지는 '백영희'라는 의미

고신은 늘 스스로 공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진리의 교회이지 교세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차지한 교회이지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고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열등의식이었으며 동시에 고신의 존재 이유입니다. 해방 후 교계 투쟁 속에서 상대방이 신사참배 범죄를 덮어버리자 진리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소위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독자적으로 가졌다는 순간부터 고신은 진리보다 교세, 하나님보다 교단의 지도자들의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보다는 어느 것이 교세에 유리하냐는 것이 결정의 잣대가 되었고, 어느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냐는 것보다 어느 것이 지도부의 뜻이냐는 것으로 모든 결정이 있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가 예배당 소송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성경까지 곡해시켰고 지도부가 교단법 절차를 통해 결정한 이런 죄를 반대하는 것은 고신내에서는 오히려 불법이 되어졌습니다. 이런 고신의 탈선은 주남선목사님으로 이어오던 고신의 원래 정신인 경건과 진리노선에 틀렸으니 고신 스스로 반대해야 하고, 교단법 절차로 결정했다면 그 법 절차 자체를 성경법으로 고쳐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영희는 교단 지도부 사람들을 봐서는 찬성을 하고 따라야 하나 늘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해서 반대를 했으니 경건이었고, 교단적으로 교단법 절차를 밟았더라도 성경에 틀렸으면 교단법절차도 고쳐야 하니 진리노선이었습니다. 이것이 백영희가 고신 안에서 걸어간 길이고 결국 지도부 불복죄로 제거가 됩니다.

백영희는 고신이 고신인 이유였던 경건과 진리노선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를 제거함은 고신이 고신을 제거함이었습니다. 외형은 고신이 붙들었고 고신의 진리운동은 백영희에게로 각각 나뉘어 내려오게 되었으니 195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1960년, 고신은 고신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폐기하고 자신들이 신사참배 죄인들로 정죄하던 당시 장로교 총회 회중에 가입해 버리게 됩니다. 이후 2년만에 반대측과 통합했던 것이 범죄였다고 회개하면서 다시 분리하였지만 이미 신앙노선적으로 고신은 완전 폐기 산화된 이후였습니다. 명칭 싸움을 피하기 위해 백영희는 고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들지 않았지만 이 건으로 인하여 진정한 고신은 백영희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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