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50년대 10년의 한국교회 교권투쟁사

주제별 정리      

                   ▒ 4.1950년대 10년의 한국교회 교권투쟁사

서기 0 6


4. 한국 교회의 진로 방향 5가지

1) 6․25와 1950년대 한국 교회의 모습

1950년대 10년의 한국 교회 역사는 속에 묻었던 세상주의를 외부로 마음껏 표출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전란이 실질적으로 전국을 휩쓸었던 것은 1950-1951년 사이였습니다. 3개월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세를 역전시켰고 곧 다시 북한 전역을 손에 넣게 되는 때가 그해 12월이었습니다. 이듬해 1월 4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를 하게 되지만 그 전세는 개전초와 같이 그렇게 급박하지 않았고 이미 6개월만에 극단에서 극단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공포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휴전이 되는 것은 1953년의 일이지만 1951년에는 이미 남한 내 교회는 6․25 전란이라는 하나님의 전멸재앙을 급속히 잊고 있었습니다.

신사참배에 신앙이 짓밟혔을 때는 회개의 모습이라도 있었습니다. 6․25까지 겹쳐 유린당한 한국 교회는 이제 당당하게 직업전선으로 나가는 여성과 같았습니다. 전멸 재앙이라고 할 수 있었던 6․25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회개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라는 논리로 당당했습니다. 잃은 것은 복구 불능의 신앙 정조였으며 가진 것은 교권 투쟁 유일주의였습니다. 6.25 전란이 육체의 생명을 휩쓰는 정도는 아니겠다고 숨쉴 틈이 생기자 교회는 즉시 대속의 정조를 팔아 세상을 거머쥐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에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2) 전쟁 와중의 고신 제거

비록 초기 개전의 급박함은 지나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전쟁의 결과일 것인데 한 숨을 쉴 만한 여유가 생기자 아직도 전방에서는 전란이 진행 중이었으나 한국 교회는 고신을 바로 제거시켜 버렸습니다. 기준은 단 하나, 힘의 우위였습니다. 총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의원 숫자에서 자기쪽 대의원의 숫자가 많았고 이미 쥐고 있던 교권이라는 힘이 있었습니다. 1951-1952년 사이에 총회는 그 모든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고신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신사참배 때에도 기도로만 준비하고 승리했던 손양원 주남선과 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고신을 대표하는 한상동은 전국적인 조직 투쟁에 힘을 썼던 이였습니다. 환란 전에는 단체 교육을 시킬 때이지만 이미 환란이 닥친 시점에는 평시 준비한 자기 신앙으로 자기가 통과하는 때입니다. 자기가 준비한 기름을 나눠줄 시기가 아닙니다. 신사참배 때에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활동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나라에서는 마음껏 자유롭게 대처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지하는 교회의 숫자를 넓히고 또 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분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부지런하게 활동한 결과 전국적 단체인 총회에서는 일방적으로 당했으나 경남노회라는 지방 차원에서는 대의원의 숫자나 또 노회 지도부가 대부분 고신측이었기 때문에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총회측이 절대다수로 전국적 세력을 결집하고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신측을 성공적으로 제거합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해방 전에는 총독부에 의하여 제거된 이들을 해방된 나라에서는 스스로 필요하여 다시 한번 제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하다고 반대하는 고신측도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인간적 방법으로 살아남기 위한 맞투쟁에 나섰습니다.

3) 총회측의 재분열과 고신측과 통합

고신을 완전히 제거한 총회측은 1954년 성경을 부인하는 기장측을 제거하게 됩니다. 물론 이번에는 신신학을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함께 하지 못할 이들과 6․25 전란 중인 1950-1952년 기간에 힘을 합해 고신을 상대하여 고신을 제거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장측 역시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총회는 무난히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1959년에는 총회가 두 개로 나뉘게 됩니다. 세계 기독교를 교리에 상관없이 통합하자는 기독교 혼합주의를 주장하는 통합측과 이것을 반대하는 총회측이었습니다. 고신이나 기장측을 제거할 때와 달리 거의 반반씩으로 세력이 나뉘어졌고 따라서 그 충돌은 연일 세상 언론에 특필이 되고 있었습니다. 총회장소 내부에 경찰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서로가 교권 확보를 위해서는 갈 데까지 다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로교는 전란 중에 기장으로 나갈 신신학과 합해서 고신을 제거한 것이 모략적 처사가 되었고, 장차 노선이 달라 통합측으로 갈라질 세력과 합해서 기장을 제거했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있었습니다. 통합측을 중심으로 본다면 고신을 제거하기 위해 신신학인 기장을 이용한 뒤 제거하고, 자신들의 주장인 교회 혼합 운동의 반 대세력과도 기장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합했다는 말이 됩니다. 처음부터 함께 할 수 없는 신학적인 반대 세력, 교회 노선의 반대 세력과 힘을 합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정리한 뒤 최점{으로 남은 가장 큰 세력들은 정면충돌로 물고 뜯는 싸움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전법으로 혈과 육이 좋아할 교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혜롭게 처리 했다고 자평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확보한 것은 진리가 없어진 교회의 재산과 주도권일 뿐이었습니다.

고신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제거되는 모습이 주로 관찰되었기 때문에 거저 억울하게 당했다면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리를 놓지 않으려던 노선이라는 말을 들을 뻔하였습니다. 실은 인간적 활동으로 제거 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역부족으로 포기를 했고, 끌려 다니는 소수보다는 차라리 제거되어 자신들만으로 일정한 담을 쌓고 독립하려고 했으니 역시 정치적 계산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추론이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1960년에 있었던 총회측과 합동이었습니다. 고신과 고신을 제거했던 총회측이 합하여 '합동'이라는 이름의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총회측은 신사참배 회개 문제에 소극적이었음을 후회하고 또 고신을 제거했던 일도 후회했습니다. 고신을 제거한 후 기장의 신신학과 통합측의 기독교 혼합주의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총회측은 신앙의 본질은 역시 고신측과 함께 할 수 없는 입장임을 밝히게 됩니다. 외형만 보면 고신의 승리였습니다. 억울하게 당했으나 교권으로 자신들을 제거했던 총회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과거를 회개하고 자신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확실한 모습을 챙겼습니다.

4) 교권이라는 세상주의만 남은 한국 교회

⑴ 고신과 총회측이 추진했던 '양 교단 합동'의 실상

양측의 교단 합동은 자세히 속을 들여다 보면 발표된 합의문과는 다른 저의들이 있었습니다. 합의문에 발표된 회개의 모습 속에는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고도의 정치적 예단이 있었습니다.

고신측에서는 회개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총회를 받아주는 형식을 갖추게 되어 교단 내부의 자긍심을 챙기게 되고, 동시에 독자적으로 지나왔던 과거 10년간 경남지방을 주로 하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교세 싸움에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을 총회측과 합동하면서 전국적 세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이점을 계산했습니다. 또 동시에 이런 욕심을 제도적으로 담보할 수 있도록 동등한 통합 지분을 확보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통합 후 총회측 내부에 심정적으로 고신을 사모하던 이들을 그들과 같은 울타리 안에서 고신측으로 점령해 나가고 그렇다면 결국 총회 전부를 확보할 수 있다는 빨치산적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총회측은 기장의 신신학에 이어 통합이라는 기독교 혼합주의를 제거하는 것은 해야만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기의 순수성을 주장하지만 이런 논리는 10년 전에 고신을 제거한 일이 있어 자기 모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기장의 신신학과 통합의 기독교 혼합주의라는 것은 어떤 희생이 있어도 제거하거나 결별해야 될 사안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이들과 합해 고신을 제거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국 교권 욕심이 동기가 되었고 그 일을 위해서는 이유를 적당히 제조하여 죄목을 붙인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죄책감이 없지 않는 데다가 더 큰 현실적 문제는 통합측과의 분리 과정에서는 그 세력이 팽팽하여 어느 쪽도 확실히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고 또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력이 반반에 가깝게 되므로 서로가 회원 확보를 위해 전국적 투쟁을 소리없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고신, 기장을 제거할 때와는 위기감이 달랐습니다. 결국 총회측은 고신이라는 세력이 신앙 본질상으로는 한 뿌리였기 때문에 이들과 세력을 합하여 통합측을 교세로 제압하고 또 신사참배 지지 세력이었다는 전과와 해방 후 교권 투쟁만을 벌였다는 죄책감도 함께 해결하게 됩니다. 물론 고신과는 교세로서는 비교가 되지 않으나 고신이 가진 정통성만 회수하게 되면 결국 고신이라는 작은 세력은 총회 내부에 합류되므로 와해 흡수된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⑵ 교권욕의 극치, 고신과 총회의 합동과 재분열

양측은 이렇게 서로의 계산이 치밀했고 또 결과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선 여건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급전되고 있었습니다. 결심이 서자 양측은 대표들을 파송하여 협상을 가지게 됩니다. 가감승제 계산에 빠른 두뇌들, 또한 과거 생사를 걸고 싸웠던 일을 빨리 잊을 수 있고 그 대신 웃는 낯으로 바꿀 수 있는 처세가들, 겉으로는 웃으나 속으로는 이권을 챙길 수 있는 양측의 사업가들이 만났고 서로가 훗날을 계산하며 합의문을 작성해 나갔습니다. 1960년 양측은 그야말로 감격의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합동총회에서는 회개, 하나님, 진리, 형제, 사랑 .... 모든 성경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자 고신측의 예상이 빗나갔고 총회측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동등한 지분을 확보하고 총회측과 합동하게 되면 고신의 우수한 영적 능력 앞에 총회측이 녹아 들어오게 되리라는 기대는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총회측은 야산에 돌아다니던 먹이감을 우리 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고신을 안락사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 상태로 조금만 진행되면 고신측은 뿌리까지 뽑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더 늦어질 수 없자 아무 명분없이 아무 핑계도 대지 못하고 오직 입었던 옷까지 벗어던지고 다시 원위치로 환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거된 고신과 총회가 합했다고 하여 교단이름이 '합동'이 되었고, 재분열되면서 되돌아갔다고 고신은 '환원파' 남은 측은 그대로 '합동측'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총회측, 또는 합동측이라는 이름의 세력이 완승했습니다.

고신은 합동 이전 경남지방에서 경북지방까지 일부 진출한 경우도 있었으나 환원을 결정하자 많은 교회들이 이제는 교권욕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많은 숫자의 교회들이 잔류를 선언하게 됩니다. 고신은 참담했습니다. 현저히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전부를 신사참배 죄인들로 낙인찍고 스스로 정통성을 가졌다고 했었는데, 이 정조까지도 잃었습니다. 소속 교회를 적에게 많이 헌납한 꼴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합동으로 인하여 장차 고신의 수많은 인재들이 합동측으로 자진 월북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실제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분명히 고신적인 인물들이 전혀 개의치 않고 합동측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써 고신은 한국 교단의 중소형급 교권 세력 중에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⑶ 이후 한국 교회의 교권 투쟁과 핵분열의 공식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년간 계속된 한국 교회의 분열과 재결합, 그리고 재분열은 신앙도 양심도 상식도 없이 교권욕만을 위해 정신 없이 나가고 있었으며 이것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 세상주의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열상은 이후 한국 교회의 끝없는 핵분열의 공식이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교단 숫자는 전문가조차도 그 계보 파악을 할 수 없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몇 개의 교단이 몇 개로 분열되고 있는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통계조차 잡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정통을 주장하기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단일 간판을 사용하는 교단이 최소 100여개 이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분열과 재통합의 반복에는 늘 신학 문제 신앙노선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였고 배후에서는 교권 분배 문제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5) 세상주의 한국 교회 속에서 출발하는 백영희의 개교회 주의

⑴ 고신에서 제거된 백영희의 신앙노선

다시 1952년으로 되돌아 가서 고신이 총회에서 제거되는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1952년 고신이 총회측에서 제거되며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자 총회측은 산하 교회의 모든 재산이 총회측에 있다는 주장으로 고신측에게 모든 예배당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총회측과 고신측은 성경 논리와 교단 헌법 규정으로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어 폭력 강단 쟁탈 대문 폐쇄 등 실력행사로 대결하였으며 마침내 세상 법정으로 이 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세상 언론이 집중 보도를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느 교단이 옳으냐는 것을 불신 판사에게 판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총회측은 먼저 소송을 시작했고 고신측도 민사소송에 응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다 뺏긴다는 현실적 문제를 들어 응소를 시작했습니다.

총회측과 달리 고신내부에서는 재산을 다 빼앗겨도 성경이 명문으로 금한 세상 소송은 원고의 자격이든 피고의 자격이든 법정에 설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그 제일 선봉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는 바로 백영희전도사였습니다. 현 고신 최고 원로인 남영환목사님이 이 일을 두고 자기 저서에서도 고신이 두고 두고 후회할 인물로 백영희를 지목하였고 이런 백영희의 영향력은 고신의 많은 지도층 인물들이 추종하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신은 백영희의 주장이 논리적으로는 옳기 때문에 반박을 하지 못하였으나 당시 전도사라는 신분이었고 또 인간적 맞대응을 피하는 그였기 때문에 교권으로 제거를 하게 됩니다.

백영희는 1959년 지도부의 명령 불복점; 죄목으로 하여 최종 제명됩니다. 선지자는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외치라는 사명을 다합니다. 그러나 제거되어 소속 교회에 책임이 없게 되면 다시 주신 현실에서 나갈 길을 찾게 됩니다. 백영희가 제거되자 곧 이어 박윤선도 고신에서 제거됩니다. 고신은 주일을 어긴 죄명으로 오늘까지 역사로 기록하지만 박윤선 역시 신앙의 소신이 뚜렷한 신학자였기 때문에 고신 지도부의 교권 행사에 늘 걸림이 되었습니다. 교권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고 결국은 제거의 순서를 밟게 되었습니다. 고신으로서는 박윤선이라는 신학의 보배를 스스로 방출하였고 신앙의 생명노선인 백영희라는 인물을 스스로 분리시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백영희 신앙노선이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가지고 시작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⑵ 백영희 신앙 노선의 성격

백영희는 원래 신앙 시작부터 인간적 도움보다는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따랐던 인물입니다. 굳이 인간적 모습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을 든다면 두말할 것 없이 주남선입니다. 주남선의 신앙 계열이며 주남선의 신앙을 그대로 잇는 수제자라고 표현한다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훗날의 신앙모습은 주남선의 신앙을 단순한 제자로 이어 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단순 수평적으로 주남선과 백영희를 비교하자면 백영희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가 주남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심층분석으로 주남선과 백영희를 비교하게 된다면 특별했던 백영희의 신앙세계에 유일하게 대입이 될 수 있는 이가 주남선이며 이런 의미에서 주남선의 신앙은 단순한 선배가 아니라 백영희에게 신앙의 유전인자를 전했던 신앙의 스승 위치에 확실하게 서게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고신 신앙의 생명은 주남선에게 있었고 이 신앙의 생명성은 백영희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주남선과 이후의 백영희 신앙은 외면적으로는 단절된 점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 신앙 성격을 연구해보면 한 신앙 뿌리의 두 모습이며 그 두 모습은 각각에게 맡긴 현실이 달랐음으로 당연히 맡겼던 모습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 바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백영희의 신앙노선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고신의 주장이 하나님 중심이며 개신교의 노선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어찌 하나님 중심의 노선에서 또 하나님 중심의 노선이 의미를 갖겠는가? 개신교 역사, 특히 장로교의 역사는 분명히 개혁의 초기 살아있었던 하나님 중심의 실상은 없어지고 또 다른 천주교와 같이 그 제도와 운영이 인간화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시대와 같이 또 종교개혁 초기와 같이 백영희의 신앙노선은 외부의 모습이 아주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개교회주의'로 그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실은 칼빈의 진정한 신앙노선이었으며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개교회주의를 인간 제도로 묶었던 것이 교회 세속화의 과정과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극단의 모습이 한국 교회 분열상이었습니다. 교단 헌법에 의한 장로교 제도에 의한 분열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장로교 헌법의 제일, 제이원리는 바로 개인과 교회의 독자적 신앙 양심 자유입니다. 개교회주의여야 하고 개교회주의가 아니고는 안되는 것이 성경이며 교회이며 역사입니다. 이 개교회주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이미 교회는 시간 문제이지 세상 집단과 꼭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개교회주의란 바로 믿는 이에게 얼마든지 바로 믿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타락할 이에게는 얼마든지 타락하게 되는 노선입니다. 백영희는 개교회주의 노선에서 그가 가진 깨달음, 그가 원하던 복음운동 유일주의에 진력을 다할 수가 있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교권에 의하여 제재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행정노선상 개교회주의를 가졌기에 그에게는 또한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 개신교의 절반 성취를 개인의 노력으로 건설해야 할 성화구원이 있음을 체계적으로 밝혀 개신교의 남은 절반을 찾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보관하게 되는 작은 범위에서 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 역사를 움직이는 내부 요인, 즉 교리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그 이름을 칼빈에 이어질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⑶ 1966-89년까지 계속 정립되어 가는 백영희의 개교회주의

1960년 이전 까지는 교계에 얽매여 자유하지 못했던 모든 제약을 고신의 '제명'이라는 징계로 풀게 되었고 이후 1989년 순교시까지 그는 성경 하나만을 기준으로 성령의 인도를 찾아 말세 교회가 나갈 길을 교회 행정노선과 교리 교훈노선을 찾게 됩니다. 1960년, 세계 교회가 주일학교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던 '교육 심리학적 체계와 운영'체계를 '말씀 위주'로 바꾸어 주일학교는 세계 주일학교 교회사에 최대 최고의 모습으로 1979년 나타나게 됩니다. 목회자 양성은 성경 100독을 읽는 말씀 중심을 원칙으로 하고 신학은 최소한의 상식적 열람에서 그치게 하여 말세 지식절대주의 신학에서 교회의 신령함을 지켰습니다. 신학이 발전된 선진 기독교국의 신앙은 완전 사장되었음이 그 증거이며 이렇게 개혁적으로 접근하지 아니하면 곧 한국의 교회도 신학 위주 목회자 양성 때문에 결국 학위가진 불신앙이 비과학적인 성경을 무시하여 마침내 선진 기독교국들의 전철을 밟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시무 신임을 매2년마다 교인들에게 물어 70세 정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2년 임기로 그만 두어야 하는 제도를 1970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망친다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 관념은 발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의 제도입니다. 이렇게 성경 절대주의로 모든 원칙을 세워 나왔으나 오히려 교회와 교단은 부흥이 되었으니, 말씀과 부흥은 함께 갈 수 없다는 신학계의 주장은 세상주의가 된 교회가 할 말이고, 부흥은 말씀과 함께 간다는 주장이 신앙주의 교회의 길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6) 백영희 신앙노선에 대한 반론과 답변

교회의 모습, 목회자의 정도, 교리적 입장, 한국 교회 정통성의 확인 등 모든 면에서 백영희 신앙노선은 어떤 반론도 잠재울 수 있는 전통이며 정통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입장에서 제기되었던 반론도 아직 백영희 신앙노선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는 적어도 보수교계에서는 한국 교회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묻혀 살았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로는 주일학교 관련 소식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계에서는 신학자 또는 교계적 인물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공개적 표현은 자신들이 관련된 교단과 교계적 입장 때문에 절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영희 신앙노선이 이렇게 특별함을 주장하게 되면 1990년 백영희 사후 총공회의 내분 사태는 역시 일반 한국교회의 한계범위를 보인 것이라고 반론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간과한 결과입니다.

백영희목사님 생전 40여년 단일교단으로 내려온 총공회는 이런 한국 교회사를 초월하고 오로지 하나님 중심 진리노선으로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목사님 사후 불과 10년만에 5개 공회로 나뉘어 있으며 비록 적지만 그 모습은 교단의 형태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한국 교회 분열상이 적용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변명이라기보다 정확한 역사 관점에서 본다면 40여년간 한국 교회의 분열상에서 전혀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백영희 신앙노선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객관적 증거입니다.

또한 총공회의 분열상은 실은 한국교회 분열상의 축소판이며 적어도 한국 교회사적 입장에서는 전혀 새로운 일도 또 과격한 일도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총공회는 그 교단의 노선이 개교회주의에 철저하기 때문에 실은 분열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총공회를 장로교 교단 중 특이한 이름을 가진 교단으로만 파악을 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분열의 재판 또는 축소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개교회주의이기 때문에 실은 분열이라는 개념이 없는 신앙노선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개교회주의로 교단을 출발시켰을까? 1950년대 10년간의 한국 교회 분열사에 대하여 백영희는 '교회의 행정노선은 개교회주의가 옳다'는 성경적 이유와 특히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는 '개교회주의'가 아니고는 형태적 존립도 어렵다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정통성은 이미 그 외부 모습에서까지 백영희의 신앙노선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이 신사참배를 통해 고신으로, 고신의 세상주의 때문에 백영희의 총공회로 넘어오게 되었음을 1930년대로부터 1960년대까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총공회의 1960년대 이후 역사는 작게는 총공회의 신앙 역사가 될 것이고 넓게는 한국 교회의 정통사가 될 것입니다. 더 확대한다면 칼빈 이후 개혁교는 또 다른 천주교의 모습으로 세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던 바, 초기 개혁교의 모습을 되찾고 오히려 그 모습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했다면 가져야 할 진정한 후기 개혁교의 모습을 가진 것이 백영희의 총공회 신앙노선이니 세계 교회사의 관점에서도 살펴볼 일입니다. 이런 교회사적 의미로 나가게 되기 전 우리는 백영희의 신앙 성격을 좀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 그의 신앙을 단면으로 분석하였으면 합니다.






0 Comments
State
  • 현재 접속자 125 명
  • 오늘 방문자 638 명
  • 어제 방문자 81 명
  • 최대 방문자 929 명
  • 전체 방문자 2,545,452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