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백영희 신앙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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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5. 백영희목사님 신앙의 본질
총공회 신앙노선은 백영희 신앙노선입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의 소개를 일반 교단의 교단 소개서와 같이 소개 한다면 그 외형이나 규모가 참으로 보잘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총공회 신앙노선은 원래 그출발 성격이 조직과 인간들은 숫자에 있지 않고 단 1명이 가도 옳고 바른길로 가겠다는 ‘신앙노선’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영희목사님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그 본질을 파악 하는 것은 총공회 노선을 파악하는데 특별히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교회사의 근본원리에 익숙하지 않아 많은 분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 되겠으나 총공회가 일반 교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신앙노선이라고 생각 한다면 비록 이해 하기에 어렵다 해도 한번쯤 그 본질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 경건의 신앙
⑴ 진정 하나님만을 상대했던 사람
① 경건의 내적인 면
백영희, 그는 순간의 생각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혼자 있으면 명상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까지 모셔놓고 3자간의 대화로 사람을 상대했습니다. 모든 교회 안팎의 일 처리에도 하나님을 모셔놓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처리하였으니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동행했던 경건의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이나 하나님 동행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너무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간단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사 속에서 성프란시스나 산다싱 칼빈 등 불과 몇 사람밖에 손 꼽을 수 없는 신앙의 수준입니다. 그가 대인관계에서 늘 첫머리에 떠올리고 지켜 산 제목이 바로 '하나님은 안 보고 사람만 대한 죄를 회개하여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대할 것'입니다.
② 경건의 3갈래 외적인 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살아갔으니 가족 동지 교계를 향하여 그 처신이 또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 범위 안에서 형제 사랑도 희생도 교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섭섭해 할 일을 두고는 어떤 인간과 어떤 오해와 비난과 박해와 배척이 생기더라도 단호하였습니다. 넓게는 일본 총독부나 6․25의 점령군에게 말씀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할 일이 생겼으니 늘 생명을 버리고 살았습니다. 죽음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세계에서 살았으니 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습니다.
평화시 교권을 두고 흥정하고 접근하는 동지들에게는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으니 교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교단의 교권을 쥘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주저하거나 뒤돌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교회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의 변영태총리 시절 총리 부인과 장관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청빙하겠다는 간청에 대하여도 '교회란 특별한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마디에 거절하였던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대통령을 배출한 서부교회였지만 재임 전, 재임 당시, 재임 후 단 한 마디도 광고해 본 적이 없었던 차원에서 살았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의 결과로 돌아오는 교회내의 여러 가지 대접을 두고는 가족 친지들의 인간적 간청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그였기 때문에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따뜻한 가정과 형제애를 나누기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 친지들이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로부터 가족애를 느낀 이들은 그가 길렀던 신앙의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이나 사후 그의 신앙길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는 그 신앙의 자녀들이며 그의 육의 형제 친지 목회자들 중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③ 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시대적 경건
말로는 쉬우나 진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기 눈 앞에 모셔 놓고 정권과는 육체 생명을 내놓고, 교계와는 목회생명을 매장당하고, 가족친지와는 의와 정을 단절하기란 어렵습니다. 신사참배와 6.25는 경건의 심층분석을 2번에 걸쳐 시험했고 신사참배라는 예비 분석에서 통과한 이가 불과 수십이었고 6․25라는 본험에서 통과한 이는 주남선 백영희로 이어지는 신앙 계통만 현재 한국 교회에 이어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교회사에 이어지는 맥은 끊어졌으나 이 두 사람과 같이 가정과 교권과 정권을 완전히 초월하고 넘어선 경건은 주기철, 김현봉목사님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전혀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고 숨겨둔 경건은 더 많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점L 아니니라'
⑵ 인간 제도에 초월하여 살았던 사람
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나선 신약의 제도
구약은 정하신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상대하였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대속 완성으로 각자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대제사장이 되셨고 따라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상대하고 그 말씀에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신약교회의 나갈 길이지만 이런 정상의 길을 걸었던 교회시절을 대표적으로 예를 든다면 2천년 교회사에서 불과 2번 정도, 그것도 아주 잠깐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1차로 신약교회의 원형이 잠깐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약의 제도를 통한 구원론이 교회를 잠식하여 결국 천주교로 결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상대를 개인들이 직접 하도록 교회가 협조하고 지원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 신약교회인데 오히려 유형적 교회가 나서서 신약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상대하는 절차를 만들어 이 인간 제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도록 차단하고 나선 것이 바로 천주교라는 형태로 신약교회사 1천년을 잠식해 버렸습니다. 그 시기를 590년대에서 1500년대로 잡고 있지만 그 시작은 벌써 초대교회 도중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기독교는 이 천주교 역사를 정죄하고 출발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제도의 벽을 루터와 칼빈이 전부 제거를 하였지만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개혁기를 막 벗어나는 시점부터 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경건 대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인간의 여러 제도들을 개발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천주교에 못지 않은 제도들이 완벽하게 설정되었습니다. 1500년 전이라는 시대차이를 고려한다면 천주교 못지않은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가졌고 교단과 교회마다 그 조직 체계의 피라밋 구조가 또한 천주교에 못지않습니다. 성직자로 대표되는 교회의 타락 역시 천주교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화려함과 정교함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에 편리하도록 시작했으나 그 마침은 육체라고 하겠습니다.
② 보이는 하나님을 선호하는 것이 타락의 본능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와 형식을 벗겨 주고 말씀으로 바로 하나님을 상대케 하였으나, 육체의 눈이 하나님을 봐야 믿겠고 육체의 귀가 청감에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육으로 난 육의 사람입니다. 중생된 사람,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은 육을 벗어버리고 육 속에 영이 듣고 보고자 하는 바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되니 말씀이면 넉넉하게 됩니다. 40일간 모세를 보지 못하자 결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라도 봐야 믿을 수 있었던 타락성이 오늘에도 잔존하여 말씀의 이치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으니 종탑, 강단을 포함하여 보이는 예배당을 한껏 꾸미게 됩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함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게 된다는 심리이니 천주교가 갔던 길이었고 그 이치는 불교로 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상주의 교회로 타락하면 보이는 위주로 꾸며 사람을 위압시키는 것이 전부요 외형이 단조롭고 단순하면 도저히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당과 같은 건물뿐이 아닙니다. 설교가에게 가운을 입혀야 하고 강단용 성경을 고급화 하여야 하며 찬양대가 울리는 소리가 청중을 압도하며, 교단의 헌법이 눈 앞에 펼쳐져야 이제 교회가 정상으로 운영된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수도 없는 위원회와 부서들이 조직화되어 도표로 나타남으로 그 조직표 앞에 비로소 순종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점L라 반대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여 구약의 선지자를 신약의 목사로만 한정하는 죄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가 모여 지방으로는 노회가 전국으로는 총회가 조직되어 아무리 진리에 틀린 결정이라도 전국 교회가 교회 헌법의 조직과 운영으로 결정해 버리면 그것이 진리가 되고 반대하는 이는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천주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적 차이점을 규명해야 할 시점입니다. 여자를 교회의 장로로 세우면 정죄받던 교단이 어느날 총회 다수결 결의로 여자를 안수하도록 결정하자 그날부터 그 교단의 교리는 여자 장로를 거부하면 이단이 된다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이 교회의 제도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가 말씀만 들고 성령의 인도를 찾아가는 것으로 전부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상주의로 만들려는 사탄은 세상에 능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배제시킨 교회 안에다 세상 제도와 운영을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집어넣고 결국은 세상주의 교회를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교회의 모든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달될 때는 '복음을 위해서'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진행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③ 초대교회를 변질시킨 제도를 초월하는 경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했으니 거저 순종만이면 됩니다. 그후 시대가 인간의 고안으로 교회내에 세상을 투입하기 시작하여 몰래 넘어온 제도들이 생겨지게 되면 교회의 노선이 둘로 나뉘게 됩니다. 옳은 노선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으로는 세상주의 교회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옳은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 옳은 노선을 걷게된 동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특별 인도를 선물로 받은 이들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복된 노선에 서게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흘러 천주교가 본격 출범하고 또 개혁교가 천주교에 버금가는 진용을 갖추게 된 오늘은 그 제도를 이길 경건의 깊이와 경건의 실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결국은 대세를 장악한 교권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한 그릇 밥을 얻어먹는 밥통목사들과 교인들이 양산됩니다. 오늘 뚜렷하게 틀린 제도를 대학강단이라는 직위 때문에 눈감지 않은 신학자는 없다고 단정합니다, 특히 교회사 신학자라면.
백영희의 경건은 수백 수천년을 넘어온 제도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지장이 되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하였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진정 장애물이 되는 것은 즉시로 정리해 버렸습니다. 그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과 말씀이었으니 그는 아무도 넘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교회의 잘못된 제도를 자신 속에 가진 강한 경건으로 전부 정리한 인물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는 김현봉과 백영희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김현봉은 혼자 일어섰고 또 당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는 고신의 정통 노선과 경건을 총공회로 아직 이어가고 있으니 교회사가 주목할 일입니다. '개교회주의'적 장로교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은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라는 교회운동으로 한국 교회 앞에 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미 학문적 가치 비교에서는 그 유례가 없고 대체유형이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또 교훈으로는 개혁의 첫 사람들인 루터나 칼빈의 교리 노선을 바로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백영희 신앙노선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입니다.
그의 교회 행정 개혁의 첫 원리는 교회의 헌법을 폐지하고 성경법 유일주의로 하나님의 역사해 오신 과거를 참고하자는 것입니다. 다수결이라는 것이 교회를 세상으로 끌고 가는 원수이니 그 이름이 민주주의라 다수의 인간이 중심되는 민주주의를 절단시키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을 방지할 길이 없다는 것이 그의 초대교회 구현의 두 번째 외침입니다. 교회의 머리 위에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는 상임 교권인 총회장, 산하 교회들을 교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우두머리라는 제도가 들어서 바로 믿으려는 성도의 씨를 다 말려버린다는 절규가 교회 행정을 개혁하는 세번째 노선입니다. 세상이 된 오늘 교회를 향해 외치는 백영희의 신앙 본능입니다.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할 때 교단 헌법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의하고 총회장은 그 결의와 집행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분열과 속화 타락에는 이 3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역할을 맡았습니다. 3가지를 제거하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과 속화는 과거도 앞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백영희의 깨달음은 그의 높은 경건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⑶ 평생을 자라간 사람
사람이 아무리 못나도 자라만 간다면 됩니다. 아무리 천사같은 성자라도 그 앞날이 자꾸 타락해 나간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백영희는 다른 성자들과 달리 그 시작이 거칠었고 또 성자가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을 만드는 것으로 신앙의 생명을 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 이 장점 하나는 다른 단점 99가지를 다 고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이란 그 속성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정상적이면 반드시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세워놓은 자신은 하나님 앞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좀 자라고 나면 올챙이 시절을 생각지 못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중단되며 옛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신사참배를 승리했던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성자들이 해방 후 전부 타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어렸던 백영희는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길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그가 또 그의 모든 전력을 다해서 쥐고 있던 그 생명은 그에게 겨자씨 한 알같이 출발한 시작에서 모든 새들이 깃들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70세면 기억력까지 감퇴되어 목회 일선에 설래야 설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일은 못하면서 원로직에 있는 인물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좋은 표현으로 포장하되 실은 고려장을 시키는 것이 교회의 은퇴제도입니다. 은퇴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함께 영능까지 노쇠하는 이들을 교회 유익을 우선하여 강제로 은퇴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무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백영희의 경건은 그의 나이 42세에 40명의 부산 서부교회에 부임하여 60세에 1천명으로, 70세에 2천을 넘겼고, 그의 마지막 해였던 1989년에는 5천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갈수록 그 부흥은 더하였고 마지막 죽던 해가 생애 전체를 대신할 만큼 큰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일학교도 42세에 100명이었으나 60세에 1천명 80세에 8천명을 헤아렸습니다. 개척했던 교회들의 숫자와 그가 평생 인도했던 매년 2차 집회 참석인원, 모든 기록들이 그러했습니다.
대개 대형교회나 교계적 지도자들이 이룬 업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은 그는 조직과 체제로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경건 하나로 이룬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도 그이만한 현장 전문가가 없었습니다. 매주 300여명 주일학생을 단일반에 출석시키던 주일학교 반사가 매번 백영희목사님에게 지도를 받아야 그 반이 유지되는 정도였습니다. 집회도 평생 단독 강사였으며 설교 한가지 외에는 어떤 특별 순서도 없었습니다. 진정 생명 있는 경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 평생 계속 되었고 이 연결선에서 보급되는 은혜로만 평생을 살았으니, 기독교란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이 육의 노쇠를 초월하고 살 수 있음을 이 시대에 보여주었습니다.
⑷ 정사(情死) 소망에 살았던 사람
① 큰 죄인으로 살았던 백영희
하나님 앞에 세워 놓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는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었던 속에서 그는 늘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과연 백영희라는 인물은 너무도 큰 죄인이며 그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 큰 죄인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듣고 또 그렇게 이해하던 이들은 그의 죄의 실상을 들으면서 자기들 속에는 벗겨보지도 못한 죄가 있어 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았던 교회였고 죄가 많았던 사람들로 그의 주변은 늘 가득찼었습니다. 그가 평생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가장 큰 죄를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 죄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대신 죽고 자신을 살렸으니 이 큰 사랑을 갚지 못한 죄였습니다. 그의 눈물은 주님의 구원해 주신 사랑을 설교할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고 또 그 사랑을 갚다가 죽은 사람을 예로 들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습니다. 평생의 그의 눈물은 오직 두 가지 경우였습니다.
② 평생 그 사랑을 위해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백영희
마음은 콩밭이란 세상 이치가 있으니 백영희의 평생은 늘 그렇게 살았습니다. 전도, 심방, 연경, 신앙 지도 등 그가 맡았던 일에 그만큼 열심을 부었던 예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타고난 건강까지 뒷받침이 되어 다른 사람은 설혹 그이만큼 복음의 사명감을 가졌을지라도 몸이 따라가지 못해서라도 그만큼 충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80 나이에도 왕복 2시간 차를 타고 왕복 1시간 산중으로 걸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루 3-4시간만 자고 평생 일하는 그에게서 충성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책자까지 발간했던 이도 경건과 열심히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음을 적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활동적이라면 그의 마음은 늘 자기 맡은 방대한 일에 다 쏠려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다름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자신도 죽도록 충성하다가 최점{으로는 그를 위해 죽어드려야만 한다는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심방, 그의 설교, 그의 전도, 그의 목회는 매일 매일이 순교하는 마지막날로 급박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순교하게 된다면, 오늘 내가 쉴 수가 있겠는가! 그의 설교 10년 분량에 순교라는 단어는 수천번에 이릅니다. '정사(情死)'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노트에 적어가며 주님께 받은 이 사랑에 감격하고 그 보답은 오로지 그를 위해 죽어드릴 수 있다면.... 이 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일을 그런 날로 맞이할 수 있는가 하여 죽어버릴 충성으로 다했으니 그의 충성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앉혀놓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무엇이 보여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여 앉았다면 그의 행동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백영희는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③ 죽음을 자취했던 백영희
정상적인 우리가 본다면 그는 분명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백영희를 보는 우리는 다 정상적인 정신 건강을 가졌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되어 날 위해 죽었다는 이 말을 신화나 동화같이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같은 정신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실제로 느꼈다면 또 이 사실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였다면 미치지 않고는 그 정신이 견딜 수 없어야 함을 혹 생각해 보았습니까!
죽기가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고 신사참배를 했고, 6․25에 피난을 가면서 교회를 버린 우리의 정신이 정상이라면 그는 분명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죽은 주님을 생각할 때 죽을 생명이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을 보고 그는 불쌍히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을 맡고 나설 교회를 오늘 세상 한토막에서 팔아먹는 우리를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숫자로 보면 우리가 옳습니다. 그러나 이치로 본다면 우리는 다 미쳤습니다. 그는 정상이었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부모가 비참하게 대신 죽는 데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늘 죄스러움에 눌려 살아야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려준 그 부모의 소원을 생각하고 이왕 죽었던 목숨, 그 생명 다해서 부모의 소원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몸부림의 강도가 바로 그 부모에 대한 자식의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백영희의 평생은 ‘정사’라고 표현한 자신의 글대로 '주님 사랑에 죽는 정사, 마지막 죽음을 주님 사랑함에 바쳐 죽는 정사'로 나아갔습니다. 순교에 살고 순교를 외쳤고 순교를 맞은 이가 역사 교회에 많지만 그속의 불타는 중심이 그렇게 간절했던 사람은 몇 손가락 꼽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자세하지를 않아 그러하지 우리 주위에도 손양원, 주남선을 예로 든다면 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④ 평화시의 순교
세상이 순교했는지도 모르고 순교 당한 자의 복이 크다며 순교의 등급을 가지고 있었던 백영희, 그의 순교는 그의 소원대로 교계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괴한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역사에 몇 되지 않은 특이한, 참으로 복된 순교였습니다. 평화시에 순교를 당하다니! 순교의 의미를 아는 이들 입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사망 경위를 듣자 그 입에서 ‘순교’로 축하했던 사람들은 50년 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평양 감옥에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백영희목사만큼 순교를 원했다면 주님도 순교를 주셔야 했고 그래서 받은 것이라! 그의 평생을 아는 이들 중에 그에게 섭섭함을 가졌던 이들까지도 이 정도의 표현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소원 강단에서 말씀 증거하다, 자신이 전한 그 말씀 때문에 설교하던 그 강단에서 순교 당하는 것이 참순교라고 소원하더니 그렇게까지 소원을 다 이룬 것이라, 참으로 자랑스럽고 참으로 귀한 시대적 선지자를 우리는 옆에서 모실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를 통해 예수 믿는 길을 보여준 그 길을 변치 않고 힘써 지켜 나가리라! 그가 아끼던 주변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각오였습니다.
세상 언론에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계 언론 기자들에게 백목사님의 순교 소식은 위의 내용과 같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로 한국 교회에 타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계를 뒤로 하고 교계에 미움을 받고 그렇게 견제를 당해 이단으로까지 정죄하던 교계도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으나 한국 교회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게 됩니다.
⑤ 갈수록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만 남은 사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그분과만 살았던 백영희, 그도 분명 이 땅 위에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지나간 수많은 종들, 자기 시대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교회를 인도하던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그의 경건이 특별했음은 그의 시작보다 그의 마침에는 더욱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으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물들어 그 병이 깊어지면 때때로 개혁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혁이 성공한 경우는 희박했습니다. 대개는 용감하게 시작했다가 중도에 흐려지고 마지막은 결국 그 넓은 세상 물 속에 녹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백영희의 경건은 어떤 세상도 그를 흡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교체되며 당면한 모든 현실 모든 시대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오직 말씀으로 다 정리했습니다.
그는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학벌이 세상 학벌로서 전부였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로는 오로지 성경뿐이었습니다. 신학은 목사가 되는 과정으로 밟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는 오늘에 되살린 초대교회였고 개혁 초기의 교회들이었습니다. 마치 그 방면에 전문학자가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재현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의 목회는 그렇게 모습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1989년 순교시점까지 그의 최후까지 그는 교회의 제도를 한 번도 고정시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세상 표현으로 말한다면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며 변화의 몸부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표현이 나오기 전 그는 40년전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목회에 대한 연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장님의 코끼리 판단이 됩니다. 주일학교 중간반 학생제도 등 늘 더 유익한 복음의 길을 찾았던 그였으니 이만큼 한국 교회에 개혁의 선봉에 있던 이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너무도 변동이 많고 변화가 많아 전통교회의 정통 시각으로 본다면 자유주의 방탕주의라고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한국 교회가 20년 전에 일제히 버린 찬송가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백영희 교회밖에 없습니다. 50년 전에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조사님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50년 전까지 존재했던 한국 교회의 주일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옳으면 모든 사람이 버려도 붙들고 지키는 보수입니다. 고칠 필요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붙들어도 그는 고치는 사람입니다. 표준은 성경이며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그의 경건이며 이 경건이 보수와 개혁을 가지고 그의 말년까지 진행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의 경건의 깊이가 초대교회나 개혁초기의 인물들과 같았음을 보여줍니다.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진동했던 봉산교회 부흥회의 소식은 당시 몇 페이지 되지 않았던 단일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 보도된 정도였습니다. 실상은 그보다 더했습니다.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신유주의자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이 그가 한 일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을 몰고 다녔고 그와 관련되어 고신의 순교자 3명 전부가 배출됩니다.
그 주변에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숫자에 상관없이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는 하는 사람이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의 소원이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통일교나 전도관이 발생되어야 했습니다. 정통 안에는 이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가 없고, 또 이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치고 이단으로 나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를 다 가지고 마지막까지 나간 경건은 신약교회사에서 초대교회를 비롯 그리 많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생애와 가진 것을 다 바쳐 복음에 헌신할 청년들이 서부교회 안에만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2) 목회의 신앙
백영희목회를 연구해 볼 의미
백영희 신앙의 내면을 연구한다면 '경건'이라는 주제로 요약할 수 있듯이, 백영희 신앙의 외부적 활동은 '목회'라는 주제로 또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존재를 늘 목회자에서 찾았습니다. 백영희의 경건은 특심하여 그 주위에는 늘 전심을 다해 따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직책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순수한 목회자에서만 그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히 교단이나 교계적 일을 맡는 이들이 직접 맡고 있는 교회의 담임직 보다 큰 복음의 일을 한다고들 하여 그릇이 큰 목사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나 백영희는 '그것은 정치목사라고 하며 목사가 정치하면 반드시 망한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교단적인 일은 목회에 실패하여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이를 시키지 목회가 정상적인 이들에게 교단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보통 학문이나 이론에 깊어 신학자가 되는 것이 대단히 존경받는 일로 생각하지만 그는 '신학자가 되면 신앙가는 되지 못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꼭 신학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담임목회를 하는 전제로 신학강의를 맡깁니다. 목회 없는 신학은 자기 죽고 남 죽이는 일이라는 입장이 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가진 직책 '목사'에다 '박사' 학위를 추가하는 것을 대단히 수치요 전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상동목사님이 1954년 9월 미국 faith신학교에서 ICCC가 주는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대면하여 지적했습니다. 지적하는 뜻을 알기에 한목사님은 변명에 급급했으나 결국 이런 일이 감정에 깔려 초기에 백영희를 적극 옹호하던 한상동은 자기 손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목회 중심, 목회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백영희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만으로도 한국 교회의 생명을 이어가는 시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경건은 목회라는 활동으로 나타나면서 복음운동의 진정한 모습을 이 시대에 보이게 됩니다. '복음운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 고 오늘 우리 시대에 보여준 그의 목회 결과는 복음운동에 관한 교회의 과거 어린 모습이 한 걸음 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다음 단계의 복음운동의 모습으로 확인됩니다. 실은 경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회가 가진 결과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사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백영희의 경건이 만든 백영희의 목회 세계, 그 목회 세계의 본질을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⑴ 목회의 본질은 십자가
① 십자가와 목회
백영희의 목회 본질은 '십자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받은 구원 십자가로 전하는 것이니 이 십자가가 구원운동에는 본질이 되고 이 본질이 외부로는 목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말은 원래 목자가 양을 기르듯 사람을 기른다는 것이니 주님이 목자 되심같이 우리도 받은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또 인도해야 함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이 십자가,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 그렇다면 목회란 십자가의 본질로만 해야 하고, 십자가의 본질은 목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입니다.
② 사선까지 통과하도록 목회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
맡겨준 사람들을 말씀으로 기르기 위해 그가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형언 못할 정도였습니다. 고후11장의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난의 종류와 강도에 못지 않은 평생이었습니다. 신사참배 6년의 고난이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개척하고 또 길렀던 교인 전부를 신사참배에 승리케 했던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총독부에 맞서서 거부한 이도 적었지만, 맡은 양떼 전부를 지켰던 경우는 백영희뿐입니다. 맹수를 만난 목자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맞선 것만으로도 성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일진대 맡은 양떼 전부를 맹수에게서 다 지켰다면 어떤 세계에서 그 환란을 통과했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혼자 십자가를 이기는 데에 들어간 고난보다 비교 못할 고난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목회를 하되 그 십자가의 능력이 더욱 컸고 또한 그 양떼 전부를 인도하기 위해 본인이 진 십자가는 할당된 고난에 수십배로 임했습니다.
6․25 전란 속 2년의 사선에서도 그는 온 교인들과 함께 강단을 지켰습니다. 그가 해방 후 직접 목회 했던 개명, 봉산 교인들은 개인적이 아니라 교인 전체적으로 장년반뿐 아니라 주일학생들까지 점령치하를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런 승리는 예고가 되어 있었습니다. 1949년부터 1950년 3월까지 계속된 국기배례 사건에서는 주일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졌으며 국법이 변경되고 끝이 났는데 바로 6․25 직전이었습니다.
인민군이 학생단을 조직하는 점령지 안에서 여학생이 강단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면 누가 믿겠는가! 백영희의 목회가 이러했으니 세상이 감당 못 할 십자가의 교인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서 하루 3회씩 점; 치고 집회를 열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해방 후 출옥성도 박인순선생님이 개명교회를 들렀다가 불신 남편들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교인들을 보며 신사참배보다 더 험한 환란 속에 산다며 감탄했었고 주남선뿐 아니라 박인순이라는 출옥성도를 통해 전해진 소식에 고신은 고신 안에서도 가장 박해를 이기는 교회로 알려지게 됩니다.
양대 환란과 해방 후 5년간 유명했던 개명박해 등 13년은 늘 생명을 경각에 달아놓고 살았던 외부 환란이라면, 그후 1952년 서부교회 부임 후 8년간 고신교권의 박해, 1960년부터 20년간의 한국 교회의 이단정죄는 교회 내부의 박해였습니다. 이 기간에도 늘 살해의 위협은 뒤를 따랐고 인간으로는 하룻밤도 위험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없었습니다. 지나친 피해망상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 그의 평화시 순교는 그의 평생 고난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그와 함께 묘소에 봉인되어야 할 형언 못 할 고난들이 나타난 고난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나타난 고난만을 두고도 그는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을 주님 사랑에 취하여 자청한 것도 있고, 말씀대로 걷기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환란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 십자가로 걸어갔던 평생이었고 그의 목회에는 이 십자가가 빠지면 그의 목회 전부가 해체됩니다.
③ 큰 십자가는 작은 십자가로 만든 결과
앞에서 소개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는 기독교사에 소개될 차원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는 이런 역사적 사건 앞에서 도 강했지만 평소의 생활 속에 십자가에서 더 강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평상의 부스러기 십자가를 놓치면 큰 십자가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신앙은 그의 평생 설교에서 빠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를 다 포기하고 제물이 되는 모습에서 교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갖게 됩니다.
말씀 중심의 설교에서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란 어떤 것임을 교인들에게 알려 교인들이 충심에서 십자가를 알게 되고 걸어가야 할 확신을 가지며 스스로 자기 몫의 십자가로 살게 만듭니다. 백영희 자신의 십자가가 늘 앞서갔고 교인들은 목자를 따라 각각의 십자가를 지게 되자 평화시 생활 속에 여러 가지 사소한 마찰이 생기며 그 마찰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당시의 믿음의 상급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닥칠 큰 환란을 준비하는 연습이 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백영희 목회에서는 구호나 소개에서 그친 적이 없습니다. 전부가 실재였고 실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옳고 그른 길을 따지지 않고 무작정 그의 목회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정권이든 교권이든 사선을 넘은 그의 목회는 어린 학생 하나까지도 막힌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내어놓은 인간에게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자기 속에 있는 참 자기가 아닌 거짓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사소하고 표시 나지 않는 평소 십자가를 보면 이미 그 사람의 신앙은 다 나타나게 된다는 그의 가르침은 바로 자신이 걸어간 생활이었고 목회였으며 그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규모에 놀란 교계가 그 비결을 배우러 왔을 때, 백영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보도 없는 교회, 교사 양육 프로그램은 물론 그런 과정이 제목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주교 운영, 1천명 반사와 보조반사를 움직이는 것은 통계나 연락 임무만 가진 총무 한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어떤 시청각 교재도 기재도 그림책 하나도 선물 하나도 사용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1천명 반사들 속에는 지극히 작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 구원 위해 힘썼듯이 너는 작은 학생 하나를 위해 너 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단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널 구원키 위해 수고한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는 이 한 마디가 그 주일학교 운영의 첫째 본질이었습니다.
너무도 복음적이며 너무도 성경적이며 너무도 마땅한 길이었으나 이 말을 알아듣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예배당 종탑에 하늘 높이 치솟게 하였으나 십자가를 배우지 못했던 연고입니다. 서부교회는 초대형교회였으나 그 예배당이 창고 모습이었고 십자가는 옷깃의 뺏지 정도로 달아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십자가는 참으로 큰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평소의 십자가가 모든 면에서 교인을 붙들고 있었고 이런 십자가의 본질이 주일학교를 향하면 그곳에서, 환란을 만나면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났을 뿐이었습니다.
④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의 십자가
평소 생활 속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인에게 작은 십자가를 진 사람을 가르쳐 교회사에 남을 십자가를 만들었듯이 백영희의 십자가는 늘 목회자인 자신이 먼저 진 십자가를 교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당연히 목자가 먼저 지고 가면서 양에게 소개해야 할 성질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백영희 자신이 먼저 지고간 십자가를 본다면 그를 통해 전달된 십자가의 양과 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를 통해 나타난 모든 환란 승리의 십자가를 본다면 그 속에 내재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백영희의 십자가 걸음은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 세상 모든 것을 앞서 버린 십자가
말씀이 지시한 것을 알고는 어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술사업과 고리업으로 벌었던 돈이라 하여 모든 재산을 일시에 다 없애 버렸습니다. 목자의 첫 걸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의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은 경제나 사회생활의 단절이 필요한 경우 그 단절의 정도는 극히 단호하였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에서는 주일 시험을 지금까지 치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작지만 그의 생전 일개 교단에 의사가 1-2명, 고시를 합격한 이가 1-2명뿐인 정도였습니다. 초대형 교회라 일컫는 부산 서부교회 교사 직업 중 정상적인 직장이나 공직에 있던 이를 다 합해도 5%가 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교인 거의가 노동이나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일 하나를 바로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던 때였고 기꺼이 그런 고난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십자가로 알고 기쁨으로 맞았던 것입니다.
㉯ 가족 친지를 복음 앞에 초월했던 십자가
그의 얼굴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교인들이었습니다. 12년 만에 귀국한 자녀들이 그와 마주 앉아 보는 데는 한 예배당 안에서도 며칠이 걸렸습니다. 교인 중에 그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이는 없었습니다. 성공한 교포였던 자녀가 국내 체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상사로 약간의 경비를 빌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했습니다.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자녀에게 네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만 전했습니다.
유학 중인 신학생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사위 될 사람에게 딸이 갈 비행기값, 옷값, 기타 경비를 일체 보내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하자 선진국이니 은행에 빌려서 보내라 하여 그리 되었고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아야 했습니다. 목사는 교회 돈으로 지출 할 데가 있고 못 할 데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자녀들이 자녀 대접을 받는 경우는 오직 하나, 자신이 걸어가는 그 십자가를 걷도록 권유를 받을 때만이었습니다. 목회자의 모습을 슬하에서 보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백영희 평생에 가장 힘든 일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어간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를 위해 다 바친 십자가
동래에서 서부교회까지 자전거를 타고 교역자회를 참석하던 유차연전도사님이 영양실조로 눈이 어지러워 사택의 경제 형편을 호소하자, 자갈치 어시장에 나가서 팔고 버린 생선 대가리를 모아 끓여 먹으면 당장 해결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은 그가 걸어왔던 길이었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극단의 경우를 가지고 어떤 순간 문의하여도 그의 답변은 미리 작성된 답안을 읽어주듯 나오고 있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그의 두뇌가 좋고 그의 지혜가 모세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사실은 그는 교인들과 후배 목회자들이 거쳐 볼 수 있는 그 모든 바닥을 거쳐 보지 않았던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주를 위해 더 이상 극단이 없을 지경을 다 겪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가장 큰 고난 가장 극단 가장 많은 종류를 다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세계를 그는 다 통과했던 이였습니다.
⑵ 목회의 방법은 말씀
백영희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를 오직 말씀의 방법 성경으로만 길을 삼았습니다. 보수교계라면 이 말을 하지 않는 교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총론이나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목회 전반에 말씀으로 목회함이 철저했고 그 모습은 일반 교회와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참으로 성경 중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목회를 두고 '옳지만 너무 힘들어 따라 가지 못하겠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① 성경 백독의 목회자 과정
성탄절이 아니면 예배 중 찬양대의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묵도의 피아노 반주와 동시에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로지 설교 시간만이 예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신학이나 세상 지식 소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만으로 끝을 맺습니다. 월요일 밤으로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11회의 예배시간으로 계속된 그의 부흥회는 설교 외에는 어떤 특별 행사도 없으며 순수한 설교 시간만 매 예배 때마다 2시간에서 4시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 연구, 말씀대로 실천이었고, 그렇게 살 때 말씀이 책임지고 그 생활이 바로 천국을 준비하는 오늘의 진리 생활임을 확실히 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신학과정을 열람 수준으로 대폭 축소시키고 대신 성경 100독을 요구했습니다. 그 자신은 성경을 다 외운 정도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계시록 전체 암송, 에베소 빌립보 갈라디아서 등을 전체 암송한 이가 적지 않았고, 어떤 성구를 말해도 성경 안에 위치를 바로 찾아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일학생들에게도 성경이나 교리를 요약하여 전체 암송을 시켰습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말씀의 목회였습니다.
②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
그는 고신에 소속되어 있던 1959년까지는 장로교의 교단헌법을 최대한 지켰습니다. 진리노선을 특별하게 걸어가려면 주위의 마찰이 많게 되고 따라서 신앙선배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1959년 고신교단에서 제거되면서부터 그는 신앙 자유를 가제되었는 데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이해하였고 이후 성경에서 모든 것을 바로 연구하고 실현시켜 나갔습니다.
교단이 헌법을 만들어 성경을 대신하던 모습, 그 결과로 교회의 모든 분쟁은 교단 헌법을 이용한 전투였지 복음운동이 아니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절반 이상의 지지만 만들면 교단 소속 모든 교회는 인간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결정할 수도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게 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확보하느냐가 교회의 진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폐지를 해버렸습니다. 교회의 헌법 폐지, 교회의 다수결결의 폐지, 총회장 등의 상존 교권직위 폐지라는 3대 교권을 폐지 하였습니다. 대신 성경법만을 법으로 전부가 인정하지 않는 결정은 의견으로만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영은 합의 집행과정으로만 처리하였습니다.
효율성과 현실성에 반한다는 반론이 안팎에서 대단히 컸습니다. 물론 바벨론의 건설 과정은 효율성과 현실성에서 탁월했으나 그것이 복음건설은 아니었습니다. 성경대로가 아니라면 건설을 파괴로 보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으며 성경대로가 아닌 현실은 이겨야 할 시험이지 순응해야 할 말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의 운영 제도도 철저하게 세상 학교 편제와 교육 심리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의 원칙으로 다 개혁하였습니다. 장년반의 구역 제도도 지역제도가 아니라 전도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지도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모든 전도에서 사은품이나 인간적 대접은 엄금을 시키고 예수와 구원이라는 두 말로만 축소를 시켰습니다. 학교의 써클을 흉내내는 모든 학생회를 폐지시키고 예배모임으로만 단순화시켰습니다. 성경 기도 생활이 전부였고 그 나머지 문제는 각자 자기 현실에서 실천 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③ 말씀대로 만든 길이 모든 성공
말씀대로 해서 될 것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또 될 것 같은 것은 자기와 세상 손해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좋아도 말씀대로 사는 것은 모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부터, 또 교회 모든 제도 운영을 말씀에 옳고 이론에 맞으면 다 고쳤습니다. 교인들도 이런 목회의 방향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교계의 이단정죄를 받았던 이가 '극보수'로 '자랑스런 한국의 6대교회' '세계 최고 최대의 주일학교'로 그의 말년 10여년을 계속 장식하였습니다. 많은 보수교단들이 통합을 제의하고 있었습니다. 교계와 언론이 그를 한국 교계의 진정한 어른으로 모실 때 그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일개 교회의 담임목회자 이상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만든 길만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좌로 또 우로 변하면서 결국은 말씀대로 걸어가는 좁은 가운데 길을 흐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⑶ 목회의 인도자는 성령
① 성령 없는 십자가는 고행주의, 성령 없는 성경은 율법과 교 만의 정죄
십자가 고난으로 진정 걸었고 말씀의 기준만으로 걸었으나 정작 그는 그를 그런 길을 자신의 힘으로 걷지 않고 성령에 붙들려 걸었던 이였습니다. 성경과 십자가의 길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공산혁명을 위해 십자가에 못지 않은 고난을 걸었던 이가 적지 않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운동에 생명을 바친 혁명가들은 수만명에 이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지만 성경이 건강에 좋다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는 이들 중에는 안식교도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기준에 맞고 또 가시밭의 고난을 가진다 해도 그런 길을 걷도록 성령이 인도하고 또 그 길을 걸을 때 성령이 돕고 또 그 길을 걷고 난 이후를 성령이 대신 맡아 계속하게 되어야 생명이 있는 십자가요 생명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게 되어져야 세상으로 고난 당하는 이들과 십자가 고난이 다른 것이며, 그렇게 되어져야 성경이 자기에게 율법과 교만으로 정죄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그가 가진 경건의 세계만큼이나 성령의 인도로 계속된 목회였습니다.
② 성령이 아니면 나가지 않고 성령이 아니면 머물지 않았던 목 회
그의 목회가 성령으로 나가고 머물렀으니 그를 보는 이들마다 그가 가진 십자가, 그가 가진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가진 십자가를 고난이라고 본다면 인도의 고행에 비하겠는가! 교회의 수행은 인도의 고행자들이 마른 나무 꼭대기에 박쥐처럼 매달리고 돌 앞에 앉아 돌과 같은 자기 육체가 되기를 노력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교회가 가진 말씀을 지식이라고 본다면 유대인이 가졌던 실천에 비하겠는가! 그들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그 면에서는 인간 한계선에 다달았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십자가와 말씀은 인도의 고행과 유대인의 실천에 수평 비교치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이끄는 성령을 보지 않으면 그것을 십자가로 보지 않고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는 말씀이 아니면 율법으로만 봅니다. 성령이 붙들고 성령이 친히 동행하며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다 인간이 갈 수 없고 알 수 없을 때는 성령이 전능으로 이를 초월하게 하니 백영희의 목회에는 십자가와 말씀만큼이나 특별했던 것이 기적과 능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일학교가 한창이던 시절 버스 바퀴 속에 몸통이 정면으로 깔려 들어갔던 어린 아이가 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며 아무 부상이 없었던 일, 일개 주일학교 반사의 활동에 많은 능력이 임하고 주일학생까지 능력을 받아 앞을 못 보던 이가 눈이 밝아지고 말 못 하던 아이가 입을 떼게 되는 등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일들이 함께 했습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은 이였습니다. 간증을 하자면 1천여 반사의 간증이 수없이 많으므로 평생이 지나가도 다 기록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안수 없이 설교만 하는 데도 병 나은 숫자가 단일 부흥회에 6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이런 일이 너무도 많았고 또 당연한 일이어서 물어보는 이도 자랑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수십년을 그렇게 내려오다가 1980년대 한국 교회에 몰아닥친 신유바람 때문에 이 복음에 임했던 참 신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통계였습니다.
③ 성령이 전체 교회를 붙들었던 목회
성령으로 사는 목회자, 성령으로 살기를 원하는 교인, 그래서 성령으로 고난받고 성령으로 깨달아 성령으로 사는 온 교회가 되려고 하였기에 백영희와 그의 교회는 기도에 살고 기도에 죽었던 교회였습니다. 나타난 성령으로 표현되던 초기시절이 1940년대였고 1950년대 이후에는 말씀으로 명상하는 깊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기도로 이루었고 모두가 기도 때문이었지 인간이 잘나서 인간의 두뇌와 노력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은 목회자와 교인 전부의 일상 고백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상으로 유력한 이들은 거의 없었고 백영희 평생의 교인 주류는 대단히 천출들이었습니다. 그들 교인으로 이룬 백영희의 목회는 성령이 하셨지 인간 백영희로는 처음부터 만들 수 없는 나사렛 수준이었습니다.
백영희 이후 시대에 나타나는 총공회 내부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그 이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 상식도 모르는 수준의 사람들이 성령에 붙들렸을 때에는 성령의 사람들로 나타났으나 그들이 성령을 버리면 일반 상식 이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백영희 사후 그의 신앙노선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갈등은 그 수준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뜻입니다.
자고로 정통의 교회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자고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은 성령 역사를 많이 강조합니다. 주관주의 신앙가들은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3가지는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변질이 되지만 이 3가지를 다 가지게 되면 초대교회가 됩니다. 그의 평생 죽는 그 해까지 초대형 예배당에 난방장치 하나 없이 한겨울을 보내고 선풍기 하나 없이 여름을 다 보내던 그곳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아우를 수 있는 성령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⑷ 목회주의 목회
① 목회의 의미로 모든 교인을 목회자로 만든 목회
그의 설교가 주경설교에 철저하여 주석급 설교였고 그 설교집을 찾는 이들이 목회자들이나 아니면 주로 교계 지도급이었습니다. 그 설교집의 제목을 굳이 '목회설교록'으로 한정하였던 것은 목회를 위한 설교 목회에 필요한 설교가 아니면 지식 나열이라는 신앙에서였습니다. 누구든 주를 위해 살 사람은 목회를 권하였습니다. 목회자란 목사만 목회자가 아니라 반사나 구역장도 자기 범위에서 목회자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직분과 운영은 자기 맡은 분야에는 담임목사와 같이 개척으로 시작하고 담임목사와 같이 기르되 전권을 가지고 맡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일학교 600개 반은 실은 600개 주일학교였습니다. 자연히 600개 주일학교의 통계와 연락의 임무를 맡을 사람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150개의 구역도 지역체가 아니라 구역장이 자기 구역식구에 대하여는 담임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150개의 교회가 서부교회 내부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는 한 담임목회자의 지도에 있었으나 이렇게 모든 것을 목회로만 처리하였으니 그는 목회 제일주의였습니다.
② 목회에서 만들어지는 경건이 더 큰 수입
그가 이렇게 목회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한 것은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데에는 목회자가 임기제 부임지로 생각지 않고 진정 자신의 자녀를 기르는 목자라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교인 전부가 스스로 자기 범위 내에서 목회자의 정신이라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큰 수입, 실은 더 큰 수입은 다른 사람을 목회자의 입장에서 길러 보아야 자기 자신이 사람이 된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기제로 돌아가며 책임을 맡는 것은 세상 직책이라야 하고 가정이란 참 부모요 참 자녀의 관계라야 성경적이며 그렇다면 부모가 진정 부모가 되는 때는 결혼한 때가 아니라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부모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를 기르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가!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원을 위해 실제로 노력할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맡겨 주신 양들을 기르면서 자기가 자기를 기르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기르시니 외부로는 목회요 내부로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경건이 깊어집니다. 이 면 때문에 백영희의 신앙세계는 내부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경건으로, 외부로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로 나타나게 됩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은 백영희 신앙노선입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의 소개를 일반 교단의 교단 소개서와 같이 소개 한다면 그 외형이나 규모가 참으로 보잘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총공회 신앙노선은 원래 그출발 성격이 조직과 인간들은 숫자에 있지 않고 단 1명이 가도 옳고 바른길로 가겠다는 ‘신앙노선’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영희목사님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그 본질을 파악 하는 것은 총공회 노선을 파악하는데 특별히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교회사의 근본원리에 익숙하지 않아 많은 분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 되겠으나 총공회가 일반 교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신앙노선이라고 생각 한다면 비록 이해 하기에 어렵다 해도 한번쯤 그 본질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 경건의 신앙
⑴ 진정 하나님만을 상대했던 사람
① 경건의 내적인 면
백영희, 그는 순간의 생각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혼자 있으면 명상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까지 모셔놓고 3자간의 대화로 사람을 상대했습니다. 모든 교회 안팎의 일 처리에도 하나님을 모셔놓고 하나님의 눈 앞에서 처리하였으니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동행했던 경건의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경건이나 하나님 동행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너무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간단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사 속에서 성프란시스나 산다싱 칼빈 등 불과 몇 사람밖에 손 꼽을 수 없는 신앙의 수준입니다. 그가 대인관계에서 늘 첫머리에 떠올리고 지켜 산 제목이 바로 '하나님은 안 보고 사람만 대한 죄를 회개하여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대할 것'입니다.
② 경건의 3갈래 외적인 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살아갔으니 가족 동지 교계를 향하여 그 처신이 또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 범위 안에서 형제 사랑도 희생도 교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섭섭해 할 일을 두고는 어떤 인간과 어떤 오해와 비난과 박해와 배척이 생기더라도 단호하였습니다. 넓게는 일본 총독부나 6․25의 점령군에게 말씀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할 일이 생겼으니 늘 생명을 버리고 살았습니다. 죽음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세계에서 살았으니 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습니다.
평화시 교권을 두고 흥정하고 접근하는 동지들에게는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으니 교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교단의 교권을 쥘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주저하거나 뒤돌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교회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의 변영태총리 시절 총리 부인과 장관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청빙하겠다는 간청에 대하여도 '교회란 특별한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마디에 거절하였던 것이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대통령을 배출한 서부교회였지만 재임 전, 재임 당시, 재임 후 단 한 마디도 광고해 본 적이 없었던 차원에서 살았습니다.
성공적인 목회의 결과로 돌아오는 교회내의 여러 가지 대접을 두고는 가족 친지들의 인간적 간청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 앞에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그였기 때문에 그렇게 매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따뜻한 가정과 형제애를 나누기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 친지들이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로부터 가족애를 느낀 이들은 그가 길렀던 신앙의 자녀들뿐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이나 사후 그의 신앙길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는 그 신앙의 자녀들이며 그의 육의 형제 친지 목회자들 중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③ 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시대적 경건
말로는 쉬우나 진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기 눈 앞에 모셔 놓고 정권과는 육체 생명을 내놓고, 교계와는 목회생명을 매장당하고, 가족친지와는 의와 정을 단절하기란 어렵습니다. 신사참배와 6.25는 경건의 심층분석을 2번에 걸쳐 시험했고 신사참배라는 예비 분석에서 통과한 이가 불과 수십이었고 6․25라는 본험에서 통과한 이는 주남선 백영희로 이어지는 신앙 계통만 현재 한국 교회에 이어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교회사에 이어지는 맥은 끊어졌으나 이 두 사람과 같이 가정과 교권과 정권을 완전히 초월하고 넘어선 경건은 주기철, 김현봉목사님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전혀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고 숨겨둔 경건은 더 많을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점L 아니니라'
⑵ 인간 제도에 초월하여 살았던 사람
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나선 신약의 제도
구약은 정하신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상대하였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대속 완성으로 각자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대제사장이 되셨고 따라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상대하고 그 말씀에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 신약교회의 나갈 길이지만 이런 정상의 길을 걸었던 교회시절을 대표적으로 예를 든다면 2천년 교회사에서 불과 2번 정도, 그것도 아주 잠깐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1차로 신약교회의 원형이 잠깐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약의 제도를 통한 구원론이 교회를 잠식하여 결국 천주교로 결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상대를 개인들이 직접 하도록 교회가 협조하고 지원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 신약교회인데 오히려 유형적 교회가 나서서 신약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상대하는 절차를 만들어 이 인간 제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도록 차단하고 나선 것이 바로 천주교라는 형태로 신약교회사 1천년을 잠식해 버렸습니다. 그 시기를 590년대에서 1500년대로 잡고 있지만 그 시작은 벌써 초대교회 도중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기독교는 이 천주교 역사를 정죄하고 출발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제도의 벽을 루터와 칼빈이 전부 제거를 하였지만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개혁기를 막 벗어나는 시점부터 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경건 대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인간의 여러 제도들을 개발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천주교에 못지 않은 제도들이 완벽하게 설정되었습니다. 1500년 전이라는 시대차이를 고려한다면 천주교 못지않은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가졌고 교단과 교회마다 그 조직 체계의 피라밋 구조가 또한 천주교에 못지않습니다. 성직자로 대표되는 교회의 타락 역시 천주교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의 화려함과 정교함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에 편리하도록 시작했으나 그 마침은 육체라고 하겠습니다.
② 보이는 하나님을 선호하는 것이 타락의 본능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와 형식을 벗겨 주고 말씀으로 바로 하나님을 상대케 하였으나, 육체의 눈이 하나님을 봐야 믿겠고 육체의 귀가 청감에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는 것이 육으로 난 육의 사람입니다. 중생된 사람,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은 육을 벗어버리고 육 속에 영이 듣고 보고자 하는 바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되니 말씀이면 넉넉하게 됩니다. 40일간 모세를 보지 못하자 결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라도 봐야 믿을 수 있었던 타락성이 오늘에도 잔존하여 말씀의 이치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으니 종탑, 강단을 포함하여 보이는 예배당을 한껏 꾸미게 됩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함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게 된다는 심리이니 천주교가 갔던 길이었고 그 이치는 불교로 통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상주의 교회로 타락하면 보이는 위주로 꾸며 사람을 위압시키는 것이 전부요 외형이 단조롭고 단순하면 도저히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당과 같은 건물뿐이 아닙니다. 설교가에게 가운을 입혀야 하고 강단용 성경을 고급화 하여야 하며 찬양대가 울리는 소리가 청중을 압도하며, 교단의 헌법이 눈 앞에 펼쳐져야 이제 교회가 정상으로 운영된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수도 없는 위원회와 부서들이 조직화되어 도표로 나타남으로 그 조직표 앞에 비로소 순종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점L라 반대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여 구약의 선지자를 신약의 목사로만 한정하는 죄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가 모여 지방으로는 노회가 전국으로는 총회가 조직되어 아무리 진리에 틀린 결정이라도 전국 교회가 교회 헌법의 조직과 운영으로 결정해 버리면 그것이 진리가 되고 반대하는 이는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천주교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적 차이점을 규명해야 할 시점입니다. 여자를 교회의 장로로 세우면 정죄받던 교단이 어느날 총회 다수결 결의로 여자를 안수하도록 결정하자 그날부터 그 교단의 교리는 여자 장로를 거부하면 이단이 된다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이 교회의 제도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가 말씀만 들고 성령의 인도를 찾아가는 것으로 전부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상주의로 만들려는 사탄은 세상에 능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배제시킨 교회 안에다 세상 제도와 운영을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집어넣고 결국은 세상주의 교회를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교회의 모든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달될 때는 '복음을 위해서'였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진행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③ 초대교회를 변질시킨 제도를 초월하는 경건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했으니 거저 순종만이면 됩니다. 그후 시대가 인간의 고안으로 교회내에 세상을 투입하기 시작하여 몰래 넘어온 제도들이 생겨지게 되면 교회의 노선이 둘로 나뉘게 됩니다. 옳은 노선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간으로는 세상주의 교회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옳은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 옳은 노선을 걷게된 동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특별 인도를 선물로 받은 이들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복된 노선에 서게 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흘러 천주교가 본격 출범하고 또 개혁교가 천주교에 버금가는 진용을 갖추게 된 오늘은 그 제도를 이길 경건의 깊이와 경건의 실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결국은 대세를 장악한 교권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한 그릇 밥을 얻어먹는 밥통목사들과 교인들이 양산됩니다. 오늘 뚜렷하게 틀린 제도를 대학강단이라는 직위 때문에 눈감지 않은 신학자는 없다고 단정합니다, 특히 교회사 신학자라면.
백영희의 경건은 수백 수천년을 넘어온 제도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지장이 되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를 하였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진정 장애물이 되는 것은 즉시로 정리해 버렸습니다. 그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과 말씀이었으니 그는 아무도 넘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교회의 잘못된 제도를 자신 속에 가진 강한 경건으로 전부 정리한 인물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는 김현봉과 백영희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김현봉은 혼자 일어섰고 또 당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백영희는 고신의 정통 노선과 경건을 총공회로 아직 이어가고 있으니 교회사가 주목할 일입니다. '개교회주의'적 장로교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은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라는 교회운동으로 한국 교회 앞에 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미 학문적 가치 비교에서는 그 유례가 없고 대체유형이 없을 정도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였습니다. 또 교훈으로는 개혁의 첫 사람들인 루터나 칼빈의 교리 노선을 바로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백영희 신앙노선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내용들입니다.
그의 교회 행정 개혁의 첫 원리는 교회의 헌법을 폐지하고 성경법 유일주의로 하나님의 역사해 오신 과거를 참고하자는 것입니다. 다수결이라는 것이 교회를 세상으로 끌고 가는 원수이니 그 이름이 민주주의라 다수의 인간이 중심되는 민주주의를 절단시키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을 방지할 길이 없다는 것이 그의 초대교회 구현의 두 번째 외침입니다. 교회의 머리 위에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는 상임 교권인 총회장, 산하 교회들을 교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우두머리라는 제도가 들어서 바로 믿으려는 성도의 씨를 다 말려버린다는 절규가 교회 행정을 개혁하는 세번째 노선입니다. 세상이 된 오늘 교회를 향해 외치는 백영희의 신앙 본능입니다.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할 때 교단 헌법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의하고 총회장은 그 결의와 집행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분열과 속화 타락에는 이 3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역할을 맡았습니다. 3가지를 제거하지 않고는 교회의 타락과 속화는 과거도 앞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백영희의 깨달음은 그의 높은 경건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⑶ 평생을 자라간 사람
사람이 아무리 못나도 자라만 간다면 됩니다. 아무리 천사같은 성자라도 그 앞날이 자꾸 타락해 나간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백영희는 다른 성자들과 달리 그 시작이 거칠었고 또 성자가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을 만드는 것으로 신앙의 생명을 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 이 장점 하나는 다른 단점 99가지를 다 고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이란 그 속성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정상적이면 반드시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세워놓은 자신은 하나님 앞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좀 자라고 나면 올챙이 시절을 생각지 못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중단되며 옛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신사참배를 승리했던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성자들이 해방 후 전부 타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어렸던 백영희는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길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그가 또 그의 모든 전력을 다해서 쥐고 있던 그 생명은 그에게 겨자씨 한 알같이 출발한 시작에서 모든 새들이 깃들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70세면 기억력까지 감퇴되어 목회 일선에 설래야 설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일은 못하면서 원로직에 있는 인물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좋은 표현으로 포장하되 실은 고려장을 시키는 것이 교회의 은퇴제도입니다. 은퇴제도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육체와 함께 영능까지 노쇠하는 이들을 교회 유익을 우선하여 강제로 은퇴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무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백영희의 경건은 그의 나이 42세에 40명의 부산 서부교회에 부임하여 60세에 1천명으로, 70세에 2천을 넘겼고, 그의 마지막 해였던 1989년에는 5천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갈수록 그 부흥은 더하였고 마지막 죽던 해가 생애 전체를 대신할 만큼 큰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일학교도 42세에 100명이었으나 60세에 1천명 80세에 8천명을 헤아렸습니다. 개척했던 교회들의 숫자와 그가 평생 인도했던 매년 2차 집회 참석인원, 모든 기록들이 그러했습니다.
대개 대형교회나 교계적 지도자들이 이룬 업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은 그는 조직과 체제로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경건 하나로 이룬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도 그이만한 현장 전문가가 없었습니다. 매주 300여명 주일학생을 단일반에 출석시키던 주일학교 반사가 매번 백영희목사님에게 지도를 받아야 그 반이 유지되는 정도였습니다. 집회도 평생 단독 강사였으며 설교 한가지 외에는 어떤 특별 순서도 없었습니다. 진정 생명 있는 경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 평생 계속 되었고 이 연결선에서 보급되는 은혜로만 평생을 살았으니, 기독교란 영으로 난 영의 사람이 육의 노쇠를 초월하고 살 수 있음을 이 시대에 보여주었습니다.
⑷ 정사(情死) 소망에 살았던 사람
① 큰 죄인으로 살았던 백영희
하나님 앞에 세워 놓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는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눈이라도 빼 줄 수 있었던 속에서 그는 늘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과연 백영희라는 인물은 너무도 큰 죄인이며 그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욱 큰 죄인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듣고 또 그렇게 이해하던 이들은 그의 죄의 실상을 들으면서 자기들 속에는 벗겨보지도 못한 죄가 있어 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았던 교회였고 죄가 많았던 사람들로 그의 주변은 늘 가득찼었습니다. 그가 평생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단 두 가지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가장 큰 죄를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 죄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대신 죽고 자신을 살렸으니 이 큰 사랑을 갚지 못한 죄였습니다. 그의 눈물은 주님의 구원해 주신 사랑을 설교할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고 또 그 사랑을 갚다가 죽은 사람을 예로 들 때가 아니면 볼 수 없었습니다. 평생의 그의 눈물은 오직 두 가지 경우였습니다.
② 평생 그 사랑을 위해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백영희
마음은 콩밭이란 세상 이치가 있으니 백영희의 평생은 늘 그렇게 살았습니다. 전도, 심방, 연경, 신앙 지도 등 그가 맡았던 일에 그만큼 열심을 부었던 예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타고난 건강까지 뒷받침이 되어 다른 사람은 설혹 그이만큼 복음의 사명감을 가졌을지라도 몸이 따라가지 못해서라도 그만큼 충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80 나이에도 왕복 2시간 차를 타고 왕복 1시간 산중으로 걸어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루 3-4시간만 자고 평생 일하는 그에게서 충성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책자까지 발간했던 이도 경건과 열심히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음을 적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활동적이라면 그의 마음은 늘 자기 맡은 방대한 일에 다 쏠려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다름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자신도 죽도록 충성하다가 최점{으로는 그를 위해 죽어드려야만 한다는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심방, 그의 설교, 그의 전도, 그의 목회는 매일 매일이 순교하는 마지막날로 급박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순교하게 된다면, 오늘 내가 쉴 수가 있겠는가! 그의 설교 10년 분량에 순교라는 단어는 수천번에 이릅니다. '정사(情死)'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노트에 적어가며 주님께 받은 이 사랑에 감격하고 그 보답은 오로지 그를 위해 죽어드릴 수 있다면.... 이 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일을 그런 날로 맞이할 수 있는가 하여 죽어버릴 충성으로 다했으니 그의 충성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앉혀놓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무엇이 보여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여 앉았다면 그의 행동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백영희는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③ 죽음을 자취했던 백영희
정상적인 우리가 본다면 그는 분명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백영희를 보는 우리는 다 정상적인 정신 건강을 가졌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되어 날 위해 죽었다는 이 말을 신화나 동화같이 읽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같은 정신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실제로 느꼈다면 또 이 사실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였다면 미치지 않고는 그 정신이 견딜 수 없어야 함을 혹 생각해 보았습니까!
죽기가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고 신사참배를 했고, 6․25에 피난을 가면서 교회를 버린 우리의 정신이 정상이라면 그는 분명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죽은 주님을 생각할 때 죽을 생명이 두려워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을 보고 그는 불쌍히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을 맡고 나설 교회를 오늘 세상 한토막에서 팔아먹는 우리를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숫자로 보면 우리가 옳습니다. 그러나 이치로 본다면 우리는 다 미쳤습니다. 그는 정상이었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부모가 비참하게 대신 죽는 데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 부모를 생각할 때마다 늘 죄스러움에 눌려 살아야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려준 그 부모의 소원을 생각하고 이왕 죽었던 목숨, 그 생명 다해서 부모의 소원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몸부림의 강도가 바로 그 부모에 대한 자식의 감사의 표현일 것입니다.
백영희의 평생은 ‘정사’라고 표현한 자신의 글대로 '주님 사랑에 죽는 정사, 마지막 죽음을 주님 사랑함에 바쳐 죽는 정사'로 나아갔습니다. 순교에 살고 순교를 외쳤고 순교를 맞은 이가 역사 교회에 많지만 그속의 불타는 중심이 그렇게 간절했던 사람은 몇 손가락 꼽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이 자세하지를 않아 그러하지 우리 주위에도 손양원, 주남선을 예로 든다면 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④ 평화시의 순교
세상이 순교했는지도 모르고 순교 당한 자의 복이 크다며 순교의 등급을 가지고 있었던 백영희, 그의 순교는 그의 소원대로 교계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괴한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역사에 몇 되지 않은 특이한, 참으로 복된 순교였습니다. 평화시에 순교를 당하다니! 순교의 의미를 아는 이들 입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였습니다. 백목사님의 사망 경위를 듣자 그 입에서 ‘순교’로 축하했던 사람들은 50년 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평양 감옥에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백영희목사만큼 순교를 원했다면 주님도 순교를 주셔야 했고 그래서 받은 것이라! 그의 평생을 아는 이들 중에 그에게 섭섭함을 가졌던 이들까지도 이 정도의 표현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소원 강단에서 말씀 증거하다, 자신이 전한 그 말씀 때문에 설교하던 그 강단에서 순교 당하는 것이 참순교라고 소원하더니 그렇게까지 소원을 다 이룬 것이라, 참으로 자랑스럽고 참으로 귀한 시대적 선지자를 우리는 옆에서 모실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를 통해 예수 믿는 길을 보여준 그 길을 변치 않고 힘써 지켜 나가리라! 그가 아끼던 주변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각오였습니다.
세상 언론에서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계 언론 기자들에게 백목사님의 순교 소식은 위의 내용과 같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로 한국 교회에 타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계를 뒤로 하고 교계에 미움을 받고 그렇게 견제를 당해 이단으로까지 정죄하던 교계도 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으나 한국 교회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게 됩니다.
⑤ 갈수록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만 남은 사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그분과만 살았던 백영희, 그도 분명 이 땅 위에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지나간 수많은 종들, 자기 시대를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교회를 인도하던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그의 경건이 특별했음은 그의 시작보다 그의 마침에는 더욱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으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물들어 그 병이 깊어지면 때때로 개혁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혁이 성공한 경우는 희박했습니다. 대개는 용감하게 시작했다가 중도에 흐려지고 마지막은 결국 그 넓은 세상 물 속에 녹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백영희의 경건은 어떤 세상도 그를 흡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교체되며 당면한 모든 현실 모든 시대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오직 말씀으로 다 정리했습니다.
그는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학벌이 세상 학벌로서 전부였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로는 오로지 성경뿐이었습니다. 신학은 목사가 되는 과정으로 밟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는 오늘에 되살린 초대교회였고 개혁 초기의 교회들이었습니다. 마치 그 방면에 전문학자가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재현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의 목회는 그렇게 모습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1989년 순교시점까지 그의 최후까지 그는 교회의 제도를 한 번도 고정시켜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세상 표현으로 말한다면 끊임없는 자기 개발이며 변화의 몸부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표현이 나오기 전 그는 40년전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목회에 대한 연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장님의 코끼리 판단이 됩니다. 주일학교 중간반 학생제도 등 늘 더 유익한 복음의 길을 찾았던 그였으니 이만큼 한국 교회에 개혁의 선봉에 있던 이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너무도 변동이 많고 변화가 많아 전통교회의 정통 시각으로 본다면 자유주의 방탕주의라고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한국 교회가 20년 전에 일제히 버린 찬송가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백영희 교회밖에 없습니다. 50년 전에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조사님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50년 전까지 존재했던 한국 교회의 주일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옳으면 모든 사람이 버려도 붙들고 지키는 보수입니다. 고칠 필요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붙들어도 그는 고치는 사람입니다. 표준은 성경이며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그의 경건이며 이 경건이 보수와 개혁을 가지고 그의 말년까지 진행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의 경건의 깊이가 초대교회나 개혁초기의 인물들과 같았음을 보여줍니다.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로 진동했던 봉산교회 부흥회의 소식은 당시 몇 페이지 되지 않았던 단일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 보도된 정도였습니다. 실상은 그보다 더했습니다. 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신유주의자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이 그가 한 일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을 몰고 다녔고 그와 관련되어 고신의 순교자 3명 전부가 배출됩니다.
그 주변에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숫자에 상관없이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는 하는 사람이 없는 정도였습니다. 그의 소원이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통일교나 전도관이 발생되어야 했습니다. 정통 안에는 이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가 없고, 또 이만큼 존경받고 따르는 이치고 이단으로 나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를 다 가지고 마지막까지 나간 경건은 신약교회사에서 초대교회를 비롯 그리 많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생애와 가진 것을 다 바쳐 복음에 헌신할 청년들이 서부교회 안에만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2) 목회의 신앙
백영희목회를 연구해 볼 의미
백영희 신앙의 내면을 연구한다면 '경건'이라는 주제로 요약할 수 있듯이, 백영희 신앙의 외부적 활동은 '목회'라는 주제로 또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존재를 늘 목회자에서 찾았습니다. 백영희의 경건은 특심하여 그 주위에는 늘 전심을 다해 따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직책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순수한 목회자에서만 그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히 교단이나 교계적 일을 맡는 이들이 직접 맡고 있는 교회의 담임직 보다 큰 복음의 일을 한다고들 하여 그릇이 큰 목사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나 백영희는 '그것은 정치목사라고 하며 목사가 정치하면 반드시 망한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교단적인 일은 목회에 실패하여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이를 시키지 목회가 정상적인 이들에게 교단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보통 학문이나 이론에 깊어 신학자가 되는 것이 대단히 존경받는 일로 생각하지만 그는 '신학자가 되면 신앙가는 되지 못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꼭 신학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담임목회를 하는 전제로 신학강의를 맡깁니다. 목회 없는 신학은 자기 죽고 남 죽이는 일이라는 입장이 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가진 직책 '목사'에다 '박사' 학위를 추가하는 것을 대단히 수치요 전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상동목사님이 1954년 9월 미국 faith신학교에서 ICCC가 주는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대면하여 지적했습니다. 지적하는 뜻을 알기에 한목사님은 변명에 급급했으나 결국 이런 일이 감정에 깔려 초기에 백영희를 적극 옹호하던 한상동은 자기 손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목회 중심, 목회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백영희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만으로도 한국 교회의 생명을 이어가는 시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경건은 목회라는 활동으로 나타나면서 복음운동의 진정한 모습을 이 시대에 보이게 됩니다. '복음운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 고 오늘 우리 시대에 보여준 그의 목회 결과는 복음운동에 관한 교회의 과거 어린 모습이 한 걸음 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다음 단계의 복음운동의 모습으로 확인됩니다. 실은 경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회가 가진 결과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사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백영희의 경건이 만든 백영희의 목회 세계, 그 목회 세계의 본질을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⑴ 목회의 본질은 십자가
① 십자가와 목회
백영희의 목회 본질은 '십자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받은 구원 십자가로 전하는 것이니 이 십자가가 구원운동에는 본질이 되고 이 본질이 외부로는 목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말은 원래 목자가 양을 기르듯 사람을 기른다는 것이니 주님이 목자 되심같이 우리도 받은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또 인도해야 함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이 십자가,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 그렇다면 목회란 십자가의 본질로만 해야 하고, 십자가의 본질은 목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입니다.
② 사선까지 통과하도록 목회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
맡겨준 사람들을 말씀으로 기르기 위해 그가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형언 못할 정도였습니다. 고후11장의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난의 종류와 강도에 못지 않은 평생이었습니다. 신사참배 6년의 고난이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개척하고 또 길렀던 교인 전부를 신사참배에 승리케 했던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총독부에 맞서서 거부한 이도 적었지만, 맡은 양떼 전부를 지켰던 경우는 백영희뿐입니다. 맹수를 만난 목자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맞선 것만으로도 성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일진대 맡은 양떼 전부를 맹수에게서 다 지켰다면 어떤 세계에서 그 환란을 통과했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혼자 십자가를 이기는 데에 들어간 고난보다 비교 못할 고난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목회를 하되 그 십자가의 능력이 더욱 컸고 또한 그 양떼 전부를 인도하기 위해 본인이 진 십자가는 할당된 고난에 수십배로 임했습니다.
6․25 전란 속 2년의 사선에서도 그는 온 교인들과 함께 강단을 지켰습니다. 그가 해방 후 직접 목회 했던 개명, 봉산 교인들은 개인적이 아니라 교인 전체적으로 장년반뿐 아니라 주일학생들까지 점령치하를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런 승리는 예고가 되어 있었습니다. 1949년부터 1950년 3월까지 계속된 국기배례 사건에서는 주일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졌으며 국법이 변경되고 끝이 났는데 바로 6․25 직전이었습니다.
인민군이 학생단을 조직하는 점령지 안에서 여학생이 강단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면 누가 믿겠는가! 백영희의 목회가 이러했으니 세상이 감당 못 할 십자가의 교인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서 하루 3회씩 점; 치고 집회를 열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해방 후 출옥성도 박인순선생님이 개명교회를 들렀다가 불신 남편들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교인들을 보며 신사참배보다 더 험한 환란 속에 산다며 감탄했었고 주남선뿐 아니라 박인순이라는 출옥성도를 통해 전해진 소식에 고신은 고신 안에서도 가장 박해를 이기는 교회로 알려지게 됩니다.
양대 환란과 해방 후 5년간 유명했던 개명박해 등 13년은 늘 생명을 경각에 달아놓고 살았던 외부 환란이라면, 그후 1952년 서부교회 부임 후 8년간 고신교권의 박해, 1960년부터 20년간의 한국 교회의 이단정죄는 교회 내부의 박해였습니다. 이 기간에도 늘 살해의 위협은 뒤를 따랐고 인간으로는 하룻밤도 위험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없었습니다. 지나친 피해망상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 그의 평화시 순교는 그의 평생 고난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그와 함께 묘소에 봉인되어야 할 형언 못 할 고난들이 나타난 고난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나타난 고난만을 두고도 그는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을 주님 사랑에 취하여 자청한 것도 있고, 말씀대로 걷기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환란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 십자가로 걸어갔던 평생이었고 그의 목회에는 이 십자가가 빠지면 그의 목회 전부가 해체됩니다.
③ 큰 십자가는 작은 십자가로 만든 결과
앞에서 소개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는 기독교사에 소개될 차원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는 이런 역사적 사건 앞에서 도 강했지만 평소의 생활 속에 십자가에서 더 강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평상의 부스러기 십자가를 놓치면 큰 십자가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신앙은 그의 평생 설교에서 빠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를 다 포기하고 제물이 되는 모습에서 교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갖게 됩니다.
말씀 중심의 설교에서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란 어떤 것임을 교인들에게 알려 교인들이 충심에서 십자가를 알게 되고 걸어가야 할 확신을 가지며 스스로 자기 몫의 십자가로 살게 만듭니다. 백영희 자신의 십자가가 늘 앞서갔고 교인들은 목자를 따라 각각의 십자가를 지게 되자 평화시 생활 속에 여러 가지 사소한 마찰이 생기며 그 마찰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당시의 믿음의 상급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닥칠 큰 환란을 준비하는 연습이 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백영희 목회에서는 구호나 소개에서 그친 적이 없습니다. 전부가 실재였고 실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옳고 그른 길을 따지지 않고 무작정 그의 목회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정권이든 교권이든 사선을 넘은 그의 목회는 어린 학생 하나까지도 막힌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내어놓은 인간에게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자기 속에 있는 참 자기가 아닌 거짓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사소하고 표시 나지 않는 평소 십자가를 보면 이미 그 사람의 신앙은 다 나타나게 된다는 그의 가르침은 바로 자신이 걸어간 생활이었고 목회였으며 그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규모에 놀란 교계가 그 비결을 배우러 왔을 때, 백영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보도 없는 교회, 교사 양육 프로그램은 물론 그런 과정이 제목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주교 운영, 1천명 반사와 보조반사를 움직이는 것은 통계나 연락 임무만 가진 총무 한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어떤 시청각 교재도 기재도 그림책 하나도 선물 하나도 사용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1천명 반사들 속에는 지극히 작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 구원 위해 힘썼듯이 너는 작은 학생 하나를 위해 너 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단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널 구원키 위해 수고한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는 이 한 마디가 그 주일학교 운영의 첫째 본질이었습니다.
너무도 복음적이며 너무도 성경적이며 너무도 마땅한 길이었으나 이 말을 알아듣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예배당 종탑에 하늘 높이 치솟게 하였으나 십자가를 배우지 못했던 연고입니다. 서부교회는 초대형교회였으나 그 예배당이 창고 모습이었고 십자가는 옷깃의 뺏지 정도로 달아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십자가는 참으로 큰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평소의 십자가가 모든 면에서 교인을 붙들고 있었고 이런 십자가의 본질이 주일학교를 향하면 그곳에서, 환란을 만나면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났을 뿐이었습니다.
④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의 십자가
평소 생활 속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인에게 작은 십자가를 진 사람을 가르쳐 교회사에 남을 십자가를 만들었듯이 백영희의 십자가는 늘 목회자인 자신이 먼저 진 십자가를 교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당연히 목자가 먼저 지고 가면서 양에게 소개해야 할 성질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백영희 자신이 먼저 지고간 십자가를 본다면 그를 통해 전달된 십자가의 양과 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를 통해 나타난 모든 환란 승리의 십자가를 본다면 그 속에 내재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백영희의 십자가 걸음은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 세상 모든 것을 앞서 버린 십자가
말씀이 지시한 것을 알고는 어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술사업과 고리업으로 벌었던 돈이라 하여 모든 재산을 일시에 다 없애 버렸습니다. 목자의 첫 걸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의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은 경제나 사회생활의 단절이 필요한 경우 그 단절의 정도는 극히 단호하였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에서는 주일 시험을 지금까지 치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작지만 그의 생전 일개 교단에 의사가 1-2명, 고시를 합격한 이가 1-2명뿐인 정도였습니다. 초대형 교회라 일컫는 부산 서부교회 교사 직업 중 정상적인 직장이나 공직에 있던 이를 다 합해도 5%가 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교인 거의가 노동이나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일 하나를 바로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던 때였고 기꺼이 그런 고난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십자가로 알고 기쁨으로 맞았던 것입니다.
㉯ 가족 친지를 복음 앞에 초월했던 십자가
그의 얼굴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교인들이었습니다. 12년 만에 귀국한 자녀들이 그와 마주 앉아 보는 데는 한 예배당 안에서도 며칠이 걸렸습니다. 교인 중에 그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이는 없었습니다. 성공한 교포였던 자녀가 국내 체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상사로 약간의 경비를 빌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했습니다.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자녀에게 네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만 전했습니다.
유학 중인 신학생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사위 될 사람에게 딸이 갈 비행기값, 옷값, 기타 경비를 일체 보내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하자 선진국이니 은행에 빌려서 보내라 하여 그리 되었고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아야 했습니다. 목사는 교회 돈으로 지출 할 데가 있고 못 할 데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자녀들이 자녀 대접을 받는 경우는 오직 하나, 자신이 걸어가는 그 십자가를 걷도록 권유를 받을 때만이었습니다. 목회자의 모습을 슬하에서 보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백영희 평생에 가장 힘든 일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어간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를 위해 다 바친 십자가
동래에서 서부교회까지 자전거를 타고 교역자회를 참석하던 유차연전도사님이 영양실조로 눈이 어지러워 사택의 경제 형편을 호소하자, 자갈치 어시장에 나가서 팔고 버린 생선 대가리를 모아 끓여 먹으면 당장 해결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은 그가 걸어왔던 길이었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극단의 경우를 가지고 어떤 순간 문의하여도 그의 답변은 미리 작성된 답안을 읽어주듯 나오고 있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그의 두뇌가 좋고 그의 지혜가 모세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사실은 그는 교인들과 후배 목회자들이 거쳐 볼 수 있는 그 모든 바닥을 거쳐 보지 않았던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주를 위해 더 이상 극단이 없을 지경을 다 겪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가장 큰 고난 가장 극단 가장 많은 종류를 다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세계를 그는 다 통과했던 이였습니다.
⑵ 목회의 방법은 말씀
백영희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를 오직 말씀의 방법 성경으로만 길을 삼았습니다. 보수교계라면 이 말을 하지 않는 교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총론이나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목회 전반에 말씀으로 목회함이 철저했고 그 모습은 일반 교회와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참으로 성경 중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목회를 두고 '옳지만 너무 힘들어 따라 가지 못하겠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① 성경 백독의 목회자 과정
성탄절이 아니면 예배 중 찬양대의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묵도의 피아노 반주와 동시에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로지 설교 시간만이 예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신학이나 세상 지식 소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만으로 끝을 맺습니다. 월요일 밤으로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11회의 예배시간으로 계속된 그의 부흥회는 설교 외에는 어떤 특별 행사도 없으며 순수한 설교 시간만 매 예배 때마다 2시간에서 4시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 연구, 말씀대로 실천이었고, 그렇게 살 때 말씀이 책임지고 그 생활이 바로 천국을 준비하는 오늘의 진리 생활임을 확실히 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신학과정을 열람 수준으로 대폭 축소시키고 대신 성경 100독을 요구했습니다. 그 자신은 성경을 다 외운 정도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계시록 전체 암송, 에베소 빌립보 갈라디아서 등을 전체 암송한 이가 적지 않았고, 어떤 성구를 말해도 성경 안에 위치를 바로 찾아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일학생들에게도 성경이나 교리를 요약하여 전체 암송을 시켰습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말씀의 목회였습니다.
②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
그는 고신에 소속되어 있던 1959년까지는 장로교의 교단헌법을 최대한 지켰습니다. 진리노선을 특별하게 걸어가려면 주위의 마찰이 많게 되고 따라서 신앙선배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1959년 고신교단에서 제거되면서부터 그는 신앙 자유를 가제되었는 데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이해하였고 이후 성경에서 모든 것을 바로 연구하고 실현시켜 나갔습니다.
교단이 헌법을 만들어 성경을 대신하던 모습, 그 결과로 교회의 모든 분쟁은 교단 헌법을 이용한 전투였지 복음운동이 아니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절반 이상의 지지만 만들면 교단 소속 모든 교회는 인간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결정할 수도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게 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확보하느냐가 교회의 진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폐지를 해버렸습니다. 교회의 헌법 폐지, 교회의 다수결결의 폐지, 총회장 등의 상존 교권직위 폐지라는 3대 교권을 폐지 하였습니다. 대신 성경법만을 법으로 전부가 인정하지 않는 결정은 의견으로만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영은 합의 집행과정으로만 처리하였습니다.
효율성과 현실성에 반한다는 반론이 안팎에서 대단히 컸습니다. 물론 바벨론의 건설 과정은 효율성과 현실성에서 탁월했으나 그것이 복음건설은 아니었습니다. 성경대로가 아니라면 건설을 파괴로 보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으며 성경대로가 아닌 현실은 이겨야 할 시험이지 순응해야 할 말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의 운영 제도도 철저하게 세상 학교 편제와 교육 심리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의 원칙으로 다 개혁하였습니다. 장년반의 구역 제도도 지역제도가 아니라 전도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지도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모든 전도에서 사은품이나 인간적 대접은 엄금을 시키고 예수와 구원이라는 두 말로만 축소를 시켰습니다. 학교의 써클을 흉내내는 모든 학생회를 폐지시키고 예배모임으로만 단순화시켰습니다. 성경 기도 생활이 전부였고 그 나머지 문제는 각자 자기 현실에서 실천 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③ 말씀대로 만든 길이 모든 성공
말씀대로 해서 될 것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또 될 것 같은 것은 자기와 세상 손해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좋아도 말씀대로 사는 것은 모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부터, 또 교회 모든 제도 운영을 말씀에 옳고 이론에 맞으면 다 고쳤습니다. 교인들도 이런 목회의 방향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교계의 이단정죄를 받았던 이가 '극보수'로 '자랑스런 한국의 6대교회' '세계 최고 최대의 주일학교'로 그의 말년 10여년을 계속 장식하였습니다. 많은 보수교단들이 통합을 제의하고 있었습니다. 교계와 언론이 그를 한국 교계의 진정한 어른으로 모실 때 그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일개 교회의 담임목회자 이상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만든 길만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좌로 또 우로 변하면서 결국은 말씀대로 걸어가는 좁은 가운데 길을 흐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⑶ 목회의 인도자는 성령
① 성령 없는 십자가는 고행주의, 성령 없는 성경은 율법과 교 만의 정죄
십자가 고난으로 진정 걸었고 말씀의 기준만으로 걸었으나 정작 그는 그를 그런 길을 자신의 힘으로 걷지 않고 성령에 붙들려 걸었던 이였습니다. 성경과 십자가의 길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공산혁명을 위해 십자가에 못지 않은 고난을 걸었던 이가 적지 않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운동에 생명을 바친 혁명가들은 수만명에 이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지만 성경이 건강에 좋다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는 이들 중에는 안식교도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기준에 맞고 또 가시밭의 고난을 가진다 해도 그런 길을 걷도록 성령이 인도하고 또 그 길을 걸을 때 성령이 돕고 또 그 길을 걷고 난 이후를 성령이 대신 맡아 계속하게 되어야 생명이 있는 십자가요 생명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게 되어져야 세상으로 고난 당하는 이들과 십자가 고난이 다른 것이며, 그렇게 되어져야 성경이 자기에게 율법과 교만으로 정죄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그가 가진 경건의 세계만큼이나 성령의 인도로 계속된 목회였습니다.
② 성령이 아니면 나가지 않고 성령이 아니면 머물지 않았던 목 회
그의 목회가 성령으로 나가고 머물렀으니 그를 보는 이들마다 그가 가진 십자가, 그가 가진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가진 십자가를 고난이라고 본다면 인도의 고행에 비하겠는가! 교회의 수행은 인도의 고행자들이 마른 나무 꼭대기에 박쥐처럼 매달리고 돌 앞에 앉아 돌과 같은 자기 육체가 되기를 노력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교회가 가진 말씀을 지식이라고 본다면 유대인이 가졌던 실천에 비하겠는가! 그들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그 면에서는 인간 한계선에 다달았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십자가와 말씀은 인도의 고행과 유대인의 실천에 수평 비교치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이끄는 성령을 보지 않으면 그것을 십자가로 보지 않고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는 말씀이 아니면 율법으로만 봅니다. 성령이 붙들고 성령이 친히 동행하며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다 인간이 갈 수 없고 알 수 없을 때는 성령이 전능으로 이를 초월하게 하니 백영희의 목회에는 십자가와 말씀만큼이나 특별했던 것이 기적과 능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일학교가 한창이던 시절 버스 바퀴 속에 몸통이 정면으로 깔려 들어갔던 어린 아이가 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며 아무 부상이 없었던 일, 일개 주일학교 반사의 활동에 많은 능력이 임하고 주일학생까지 능력을 받아 앞을 못 보던 이가 눈이 밝아지고 말 못 하던 아이가 입을 떼게 되는 등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일들이 함께 했습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은 이였습니다. 간증을 하자면 1천여 반사의 간증이 수없이 많으므로 평생이 지나가도 다 기록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안수 없이 설교만 하는 데도 병 나은 숫자가 단일 부흥회에 6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이런 일이 너무도 많았고 또 당연한 일이어서 물어보는 이도 자랑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수십년을 그렇게 내려오다가 1980년대 한국 교회에 몰아닥친 신유바람 때문에 이 복음에 임했던 참 신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통계였습니다.
③ 성령이 전체 교회를 붙들었던 목회
성령으로 사는 목회자, 성령으로 살기를 원하는 교인, 그래서 성령으로 고난받고 성령으로 깨달아 성령으로 사는 온 교회가 되려고 하였기에 백영희와 그의 교회는 기도에 살고 기도에 죽었던 교회였습니다. 나타난 성령으로 표현되던 초기시절이 1940년대였고 1950년대 이후에는 말씀으로 명상하는 깊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기도로 이루었고 모두가 기도 때문이었지 인간이 잘나서 인간의 두뇌와 노력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은 목회자와 교인 전부의 일상 고백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상으로 유력한 이들은 거의 없었고 백영희 평생의 교인 주류는 대단히 천출들이었습니다. 그들 교인으로 이룬 백영희의 목회는 성령이 하셨지 인간 백영희로는 처음부터 만들 수 없는 나사렛 수준이었습니다.
백영희 이후 시대에 나타나는 총공회 내부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그 이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 상식도 모르는 수준의 사람들이 성령에 붙들렸을 때에는 성령의 사람들로 나타났으나 그들이 성령을 버리면 일반 상식 이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백영희 사후 그의 신앙노선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갈등은 그 수준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뜻입니다.
자고로 정통의 교회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자고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은 성령 역사를 많이 강조합니다. 주관주의 신앙가들은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3가지는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변질이 되지만 이 3가지를 다 가지게 되면 초대교회가 됩니다. 그의 평생 죽는 그 해까지 초대형 예배당에 난방장치 하나 없이 한겨울을 보내고 선풍기 하나 없이 여름을 다 보내던 그곳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아우를 수 있는 성령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⑷ 목회주의 목회
① 목회의 의미로 모든 교인을 목회자로 만든 목회
그의 설교가 주경설교에 철저하여 주석급 설교였고 그 설교집을 찾는 이들이 목회자들이나 아니면 주로 교계 지도급이었습니다. 그 설교집의 제목을 굳이 '목회설교록'으로 한정하였던 것은 목회를 위한 설교 목회에 필요한 설교가 아니면 지식 나열이라는 신앙에서였습니다. 누구든 주를 위해 살 사람은 목회를 권하였습니다. 목회자란 목사만 목회자가 아니라 반사나 구역장도 자기 범위에서 목회자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직분과 운영은 자기 맡은 분야에는 담임목사와 같이 개척으로 시작하고 담임목사와 같이 기르되 전권을 가지고 맡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일학교 600개 반은 실은 600개 주일학교였습니다. 자연히 600개 주일학교의 통계와 연락의 임무를 맡을 사람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150개의 구역도 지역체가 아니라 구역장이 자기 구역식구에 대하여는 담임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150개의 교회가 서부교회 내부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는 한 담임목회자의 지도에 있었으나 이렇게 모든 것을 목회로만 처리하였으니 그는 목회 제일주의였습니다.
② 목회에서 만들어지는 경건이 더 큰 수입
그가 이렇게 목회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한 것은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데에는 목회자가 임기제 부임지로 생각지 않고 진정 자신의 자녀를 기르는 목자라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교인 전부가 스스로 자기 범위 내에서 목회자의 정신이라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큰 수입, 실은 더 큰 수입은 다른 사람을 목회자의 입장에서 길러 보아야 자기 자신이 사람이 된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기제로 돌아가며 책임을 맡는 것은 세상 직책이라야 하고 가정이란 참 부모요 참 자녀의 관계라야 성경적이며 그렇다면 부모가 진정 부모가 되는 때는 결혼한 때가 아니라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부모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를 기르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가!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원을 위해 실제로 노력할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맡겨 주신 양들을 기르면서 자기가 자기를 기르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기르시니 외부로는 목회요 내부로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경건이 깊어집니다. 이 면 때문에 백영희의 신앙세계는 내부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경건으로, 외부로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로 나타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