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목회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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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회의 신앙

백영희목회를 연구해 볼 의미

백영희 신앙의 내면을 연구한다면 '경건'이라는 주제로 요약할 수 있듯이, 백영희 신앙의 외부적 활동은 '목회'라는 주제로 또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존재를 늘 목회자에서 찾았습니다. 백영희의 경건은 특심하여 그 주위에는 늘 전심을 다해 따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직책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순수한 목회자에서만 그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히 교단이나 교계적 일을 맡는 이들이 직접 맡고 있는 교회의 담임직 보다 큰 복음의 일을 한다고들 하여 그릇이 큰 목사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나 백영희는 '그것은 정치목사라고 하며 목사가 정치하면 반드시 망한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교단적인 일은 목회에 실패하여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이를 시키지 목회가 정상적인 이들에게 교단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보통 학문이나 이론에 깊어 신학자가 되는 것이 대단히 존경받는 일로 생각하지만 그는 '신학자가 되면 신앙가는 되지 못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꼭 신학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담임목회를 하는 전제로 신학강의를 맡깁니다. 목회 없는 신학은 자기 죽고 남 죽이는 일이라는 입장이 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가진 직책 '목사'에다 '박사' 학위를 추가하는 것을 대단히 수치요 전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상동목사님이 1954년 9월 미국 faith신학교에서 ICCC가 주는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대면하여 지적했습니다. 지적하는 뜻을 알기에 한목사님은 변명에 급급했으나 결국 이런 일이 감정에 깔려 초기에 백영희를 적극 옹호하던 한상동은 자기 손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목회 중심, 목회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백영희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만으로도 한국 교회의 생명을 이어가는 시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경건은 목회라는 활동으로 나타나면서 복음운동의 진정한 모습을 이 시대에 보이게 됩니다. '복음운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 고 오늘 우리 시대에 보여준 그의 목회 결과는 복음운동에 관한 교회의 과거 어린 모습이 한 걸음 더 발전하고 성장해 나갈 다음 단계의 복음운동의 모습으로 확인됩니다. 실은 경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회가 가진 결과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교회사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백영희의 경건이 만든 백영희의 목회 세계, 그 목회 세계의 본질을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⑴ 목회의 본질은 십자가

① 십자가와 목회

백영희의 목회 본질은 '십자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받은 구원 십자가로 전하는 것이니 이 십자가가 구원운동에는 본질이 되고 이 본질이 외부로는 목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말은 원래 목자가 양을 기르듯 사람을 기른다는 것이니 주님이 목자 되심같이 우리도 받은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또 인도해야 함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이 십자가,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 그렇다면 목회란 십자가의 본질로만 해야 하고, 십자가의 본질은 목회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입니다.

② 사선까지 통과하도록 목회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

맡겨준 사람들을 말씀으로 기르기 위해 그가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형언 못할 정도였습니다. 고후11장의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난의 종류와 강도에 못지 않은 평생이었습니다. 신사참배 6년의 고난이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개척하고 또 길렀던 교인 전부를 신사참배에 승리케 했던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총독부에 맞서서 거부한 이도 적었지만, 맡은 양떼 전부를 지켰던 경우는 백영희뿐입니다. 맹수를 만난 목자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맞선 것만으로도 성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일진대 맡은 양떼 전부를 맹수에게서 다 지켰다면 어떤 세계에서 그 환란을 통과했을 것인가? 분명한 것은 혼자 십자가를 이기는 데에 들어간 고난보다 비교 못할 고난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목회를 하되 그 십자가의 능력이 더욱 컸고 또한 그 양떼 전부를 인도하기 위해 본인이 진 십자가는 할당된 고난에 수십배로 임했습니다.

6․25 전란 속 2년의 사선에서도 그는 온 교인들과 함께 강단을 지켰습니다. 그가 해방 후 직접 목회 했던 개명, 봉산 교인들은 개인적이 아니라 교인 전체적으로 장년반뿐 아니라 주일학생들까지 점령치하를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런 승리는 예고가 되어 있었습니다. 1949년부터 1950년 3월까지 계속된 국기배례 사건에서는 주일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졌으며 국법이 변경되고 끝이 났는데 바로 6․25 직전이었습니다.

인민군이 학생단을 조직하는 점령지 안에서 여학생이 강단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면 누가 믿겠는가! 백영희의 목회가 이러했으니 세상이 감당 못 할 십자가의 교인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서 하루 3회씩 점; 치고 집회를 열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해방 후 출옥성도 박인순선생님이 개명교회를 들렀다가 불신 남편들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교인들을 보며 신사참배보다 더 험한 환란 속에 산다며 감탄했었고 주남선뿐 아니라 박인순이라는 출옥성도를 통해 전해진 소식에 고신은 고신 안에서도 가장 박해를 이기는 교회로 알려지게 됩니다.

양대 환란과 해방 후 5년간 유명했던 개명박해 등 13년은 늘 생명을 경각에 달아놓고 살았던 외부 환란이라면, 그후 1952년 서부교회 부임 후 8년간 고신교권의 박해, 1960년부터 20년간의 한국 교회의 이단정죄는 교회 내부의 박해였습니다. 이 기간에도 늘 살해의 위협은 뒤를 따랐고 인간으로는 하룻밤도 위험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없었습니다. 지나친 피해망상으로 생각하던 이들에게 그의 평화시 순교는 그의 평생 고난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그와 함께 묘소에 봉인되어야 할 형언 못 할 고난들이 나타난 고난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나타난 고난만을 두고도 그는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을 주님 사랑에 취하여 자청한 것도 있고, 말씀대로 걷기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환란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 십자가로 걸어갔던 평생이었고 그의 목회에는 이 십자가가 빠지면 그의 목회 전부가 해체됩니다.

③ 큰 십자가는 작은 십자가로 만든 결과

앞에서 소개한 백영희의 십자가 목회는 기독교사에 소개될 차원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는 이런 역사적 사건 앞에서 도 강했지만 평소의 생활 속에 십자가에서 더 강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평상의 부스러기 십자가를 놓치면 큰 십자가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신앙은 그의 평생 설교에서 빠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가 양떼를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를 다 포기하고 제물이 되는 모습에서 교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갖게 됩니다.

말씀 중심의 설교에서 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란 어떤 것임을 교인들에게 알려 교인들이 충심에서 십자가를 알게 되고 걸어가야 할 확신을 가지며 스스로 자기 몫의 십자가로 살게 만듭니다. 백영희 자신의 십자가가 늘 앞서갔고 교인들은 목자를 따라 각각의 십자가를 지게 되자 평화시 생활 속에 여러 가지 사소한 마찰이 생기며 그 마찰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당시의 믿음의 상급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닥칠 큰 환란을 준비하는 연습이 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백영희 목회에서는 구호나 소개에서 그친 적이 없습니다. 전부가 실재였고 실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옳고 그른 길을 따지지 않고 무작정 그의 목회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정권이든 교권이든 사선을 넘은 그의 목회는 어린 학생 하나까지도 막힌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내어놓은 인간에게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자기 속에 있는 참 자기가 아닌 거짓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사소하고 표시 나지 않는 평소 십자가를 보면 이미 그 사람의 신앙은 다 나타나게 된다는 그의 가르침은 바로 자신이 걸어간 생활이었고 목회였으며 그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규모에 놀란 교계가 그 비결을 배우러 왔을 때, 백영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보도 없는 교회, 교사 양육 프로그램은 물론 그런 과정이 제목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주교 운영, 1천명 반사와 보조반사를 움직이는 것은 통계나 연락 임무만 가진 총무 한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어떤 시청각 교재도 기재도 그림책 하나도 선물 하나도 사용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1천명 반사들 속에는 지극히 작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 구원 위해 힘썼듯이 너는 작은 학생 하나를 위해 너 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단 마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널 구원키 위해 수고한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는 이 한 마디가 그 주일학교 운영의 첫째 본질이었습니다.

너무도 복음적이며 너무도 성경적이며 너무도 마땅한 길이었으나 이 말을 알아듣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예배당 종탑에 하늘 높이 치솟게 하였으나 십자가를 배우지 못했던 연고입니다. 서부교회는 초대형교회였으나 그 예배당이 창고 모습이었고 십자가는 옷깃의 뺏지 정도로 달아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십자가는 참으로 큰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평소의 십자가가 모든 면에서 교인을 붙들고 있었고 이런 십자가의 본질이 주일학교를 향하면 그곳에서, 환란을 만나면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났을 뿐이었습니다.

④ 여기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의 십자가

평소 생활 속 가족에게 이웃에게 교인에게 작은 십자가를 진 사람을 가르쳐 교회사에 남을 십자가를 만들었듯이 백영희의 십자가는 늘 목회자인 자신이 먼저 진 십자가를 교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당연히 목자가 먼저 지고 가면서 양에게 소개해야 할 성질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백영희 자신이 먼저 지고간 십자가를 본다면 그를 통해 전달된 십자가의 양과 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를 통해 나타난 모든 환란 승리의 십자가를 본다면 그 속에 내재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백영희의 십자가 걸음은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 세상 모든 것을 앞서 버린 십자가

말씀이 지시한 것을 알고는 어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술사업과 고리업으로 벌었던 돈이라 하여 모든 재산을 일시에 다 없애 버렸습니다. 목자의 첫 걸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의 목회 범위 안에 있는 교인들은 경제나 사회생활의 단절이 필요한 경우 그 단절의 정도는 극히 단호하였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에서는 주일 시험을 지금까지 치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작지만 그의 생전 일개 교단에 의사가 1-2명, 고시를 합격한 이가 1-2명뿐인 정도였습니다. 초대형 교회라 일컫는 부산 서부교회 교사 직업 중 정상적인 직장이나 공직에 있던 이를 다 합해도 5%가 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교인 거의가 노동이나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일 하나를 바로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던 때였고 기꺼이 그런 고난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십자가로 알고 기쁨으로 맞았던 것입니다.

㉯ 가족 친지를 복음 앞에 초월했던 십자가

그의 얼굴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교인들이었습니다. 12년 만에 귀국한 자녀들이 그와 마주 앉아 보는 데는 한 예배당 안에서도 며칠이 걸렸습니다. 교인 중에 그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이는 없었습니다. 성공한 교포였던 자녀가 국내 체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상사로 약간의 경비를 빌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돈을 빌려주면서 차용증을 요구했습니다.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자녀에게 네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만 전했습니다.

유학 중인 신학생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사위 될 사람에게 딸이 갈 비행기값, 옷값, 기타 경비를 일체 보내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아직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하자 선진국이니 은행에 빌려서 보내라 하여 그리 되었고 부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아야 했습니다. 목사는 교회 돈으로 지출 할 데가 있고 못 할 데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자녀들이 자녀 대접을 받는 경우는 오직 하나, 자신이 걸어가는 그 십자가를 걷도록 권유를 받을 때만이었습니다. 목회자의 모습을 슬하에서 보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백영희 평생에 가장 힘든 일은 그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어간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 교회를 위해 다 바친 십자가

동래에서 서부교회까지 자전거를 타고 교역자회를 참석하던 유차연전도사님이 영양실조로 눈이 어지러워 사택의 경제 형편을 호소하자, 자갈치 어시장에 나가서 팔고 버린 생선 대가리를 모아 끓여 먹으면 당장 해결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은 그가 걸어왔던 길이었습니다. 어떤 고난 어떤 극단의 경우를 가지고 어떤 순간 문의하여도 그의 답변은 미리 작성된 답안을 읽어주듯 나오고 있습니다. 모르는 이들은 그의 두뇌가 좋고 그의 지혜가 모세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사실은 그는 교인들과 후배 목회자들이 거쳐 볼 수 있는 그 모든 바닥을 거쳐 보지 않았던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주를 위해 더 이상 극단이 없을 지경을 다 겪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막힘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가장 큰 고난 가장 극단 가장 많은 종류를 다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세계를 그는 다 통과했던 이였습니다.

⑵ 목회의 방법은 말씀

백영희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를 오직 말씀의 방법 성경으로만 길을 삼았습니다. 보수교계라면 이 말을 하지 않는 교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총론이나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고 그의 목회 전반에 말씀으로 목회함이 철저했고 그 모습은 일반 교회와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참으로 성경 중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목회를 두고 '옳지만 너무 힘들어 따라 가지 못하겠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① 성경 백독의 목회자 과정

성탄절이 아니면 예배 중 찬양대의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묵도의 피아노 반주와 동시에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로지 설교 시간만이 예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신학이나 세상 지식 소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만으로 끝을 맺습니다. 월요일 밤으로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11회의 예배시간으로 계속된 그의 부흥회는 설교 외에는 어떤 특별 행사도 없으며 순수한 설교 시간만 매 예배 때마다 2시간에서 4시간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 연구, 말씀대로 실천이었고, 그렇게 살 때 말씀이 책임지고 그 생활이 바로 천국을 준비하는 오늘의 진리 생활임을 확실히 했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신학과정을 열람 수준으로 대폭 축소시키고 대신 성경 100독을 요구했습니다. 그 자신은 성경을 다 외운 정도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계시록 전체 암송, 에베소 빌립보 갈라디아서 등을 전체 암송한 이가 적지 않았고, 어떤 성구를 말해도 성경 안에 위치를 바로 찾아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일학생들에게도 성경이나 교리를 요약하여 전체 암송을 시켰습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말씀의 목회였습니다.

②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

그는 고신에 소속되어 있던 1959년까지는 장로교의 교단헌법을 최대한 지켰습니다. 진리노선을 특별하게 걸어가려면 주위의 마찰이 많게 되고 따라서 신앙선배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1959년 고신교단에서 제거되면서부터 그는 신앙 자유를 가제되었는 데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로 이해하였고 이후 성경에서 모든 것을 바로 연구하고 실현시켜 나갔습니다.

교단이 헌법을 만들어 성경을 대신하던 모습, 그 결과로 교회의 모든 분쟁은 교단 헌법을 이용한 전투였지 복음운동이 아니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절반 이상의 지지만 만들면 교단 소속 모든 교회는 인간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결정할 수도 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게 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확보하느냐가 교회의 진로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장에 폐지를 해버렸습니다. 교회의 헌법 폐지, 교회의 다수결결의 폐지, 총회장 등의 상존 교권직위 폐지라는 3대 교권을 폐지 하였습니다. 대신 성경법만을 법으로 전부가 인정하지 않는 결정은 의견으로만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운영은 합의 집행과정으로만 처리하였습니다.

효율성과 현실성에 반한다는 반론이 안팎에서 대단히 컸습니다. 물론 바벨론의 건설 과정은 효율성과 현실성에서 탁월했으나 그것이 복음건설은 아니었습니다. 성경대로가 아니라면 건설을 파괴로 보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으며 성경대로가 아닌 현실은 이겨야 할 시험이지 순응해야 할 말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의 운영 제도도 철저하게 세상 학교 편제와 교육 심리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의 원칙으로 다 개혁하였습니다. 장년반의 구역 제도도 지역제도가 아니라 전도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지도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모든 전도에서 사은품이나 인간적 대접은 엄금을 시키고 예수와 구원이라는 두 말로만 축소를 시켰습니다. 학교의 써클을 흉내내는 모든 학생회를 폐지시키고 예배모임으로만 단순화시켰습니다. 성경 기도 생활이 전부였고 그 나머지 문제는 각자 자기 현실에서 실천 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③ 말씀대로 만든 길이 모든 성공

말씀대로 해서 될 것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또 될 것 같은 것은 자기와 세상 손해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좋아도 말씀대로 사는 것은 모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부터, 또 교회 모든 제도 운영을 말씀에 옳고 이론에 맞으면 다 고쳤습니다. 교인들도 이런 목회의 방향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교계의 이단정죄를 받았던 이가 '극보수'로 '자랑스런 한국의 6대교회' '세계 최고 최대의 주일학교'로 그의 말년 10여년을 계속 장식하였습니다. 많은 보수교단들이 통합을 제의하고 있었습니다. 교계와 언론이 그를 한국 교계의 진정한 어른으로 모실 때 그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일개 교회의 담임목회자 이상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만든 길만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한 것은 세상이 좌로 또 우로 변하면서 결국은 말씀대로 걸어가는 좁은 가운데 길을 흐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⑶ 목회의 인도자는 성령

① 성령 없는 십자가는 고행주의, 성령 없는 성경은 율법과 교 만의 정죄

십자가 고난으로 진정 걸었고 말씀의 기준만으로 걸었으나 정작 그는 그를 그런 길을 자신의 힘으로 걷지 않고 성령에 붙들려 걸었던 이였습니다. 성경과 십자가의 길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공산혁명을 위해 십자가에 못지 않은 고난을 걸었던 이가 적지 않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운동에 생명을 바친 혁명가들은 수만명에 이릅니다. 예수를 믿지 않지만 성경이 건강에 좋다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는 이들 중에는 안식교도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기준에 맞고 또 가시밭의 고난을 가진다 해도 그런 길을 걷도록 성령이 인도하고 또 그 길을 걸을 때 성령이 돕고 또 그 길을 걷고 난 이후를 성령이 대신 맡아 계속하게 되어야 생명이 있는 십자가요 생명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게 되어져야 세상으로 고난 당하는 이들과 십자가 고난이 다른 것이며, 그렇게 되어져야 성경이 자기에게 율법과 교만으로 정죄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백영희의 목회는 그가 가진 경건의 세계만큼이나 성령의 인도로 계속된 목회였습니다.

② 성령이 아니면 나가지 않고 성령이 아니면 머물지 않았던 목 회

그의 목회가 성령으로 나가고 머물렀으니 그를 보는 이들마다 그가 가진 십자가, 그가 가진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가진 십자가를 고난이라고 본다면 인도의 고행에 비하겠는가! 교회의 수행은 인도의 고행자들이 마른 나무 꼭대기에 박쥐처럼 매달리고 돌 앞에 앉아 돌과 같은 자기 육체가 되기를 노력하는 정도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교회가 가진 말씀을 지식이라고 본다면 유대인이 가졌던 실천에 비하겠는가! 그들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그 면에서는 인간 한계선에 다달았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십자가와 말씀은 인도의 고행과 유대인의 실천에 수평 비교치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이끄는 성령을 보지 않으면 그것을 십자가로 보지 않고 우리는 성령이 함께 하는 말씀이 아니면 율법으로만 봅니다. 성령이 붙들고 성령이 친히 동행하며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다 인간이 갈 수 없고 알 수 없을 때는 성령이 전능으로 이를 초월하게 하니 백영희의 목회에는 십자가와 말씀만큼이나 특별했던 것이 기적과 능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일학교가 한창이던 시절 버스 바퀴 속에 몸통이 정면으로 깔려 들어갔던 어린 아이가 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며 아무 부상이 없었던 일, 일개 주일학교 반사의 활동에 많은 능력이 임하고 주일학생까지 능력을 받아 앞을 못 보던 이가 눈이 밝아지고 말 못 하던 아이가 입을 떼게 되는 등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일들이 함께 했습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만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은 이였습니다. 간증을 하자면 1천여 반사의 간증이 수없이 많으므로 평생이 지나가도 다 기록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안수 없이 설교만 하는 데도 병 나은 숫자가 단일 부흥회에 6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이런 일이 너무도 많았고 또 당연한 일이어서 물어보는 이도 자랑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수십년을 그렇게 내려오다가 1980년대 한국 교회에 몰아닥친 신유바람 때문에 이 복음에 임했던 참 신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통계였습니다.

③ 성령이 전체 교회를 붙들었던 목회

성령으로 사는 목회자, 성령으로 살기를 원하는 교인, 그래서 성령으로 고난받고 성령으로 깨달아 성령으로 사는 온 교회가 되려고 하였기에 백영희와 그의 교회는 기도에 살고 기도에 죽었던 교회였습니다. 나타난 성령으로 표현되던 초기시절이 1940년대였고 1950년대 이후에는 말씀으로 명상하는 깊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기도로 이루었고 모두가 기도 때문이었지 인간이 잘나서 인간의 두뇌와 노력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것은 목회자와 교인 전부의 일상 고백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상으로 유력한 이들은 거의 없었고 백영희 평생의 교인 주류는 대단히 천출들이었습니다. 그들 교인으로 이룬 백영희의 목회는 성령이 하셨지 인간 백영희로는 처음부터 만들 수 없는 나사렛 수준이었습니다.

백영희 이후 시대에 나타나는 총공회 내부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그 이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 상식도 모르는 수준의 사람들이 성령에 붙들렸을 때에는 성령의 사람들로 나타났으나 그들이 성령을 버리면 일반 상식 이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백영희 사후 그의 신앙노선안에서 발생되는 많은 갈등은 그 수준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뜻입니다.

자고로 정통의 교회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자고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나가는 교회들은 성령 역사를 많이 강조합니다. 주관주의 신앙가들은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 3가지는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변질이 되지만 이 3가지를 다 가지게 되면 초대교회가 됩니다. 그의 평생 죽는 그 해까지 초대형 예배당에 난방장치 하나 없이 한겨울을 보내고 선풍기 하나 없이 여름을 다 보내던 그곳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아우를 수 있는 성령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⑷ 목회주의 목회

① 목회의 의미로 모든 교인을 목회자로 만든 목회

그의 설교가 주경설교에 철저하여 주석급 설교였고 그 설교집을 찾는 이들이 목회자들이나 아니면 주로 교계 지도급이었습니다. 그 설교집의 제목을 굳이 '목회설교록'으로 한정하였던 것은 목회를 위한 설교 목회에 필요한 설교가 아니면 지식 나열이라는 신앙에서였습니다. 누구든 주를 위해 살 사람은 목회를 권하였습니다. 목회자란 목사만 목회자가 아니라 반사나 구역장도 자기 범위에서 목회자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직분과 운영은 자기 맡은 분야에는 담임목사와 같이 개척으로 시작하고 담임목사와 같이 기르되 전권을 가지고 맡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일학교 600개 반은 실은 600개 주일학교였습니다. 자연히 600개 주일학교의 통계와 연락의 임무를 맡을 사람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150개의 구역도 지역체가 아니라 구역장이 자기 구역식구에 대하여는 담임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150개의 교회가 서부교회 내부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는 한 담임목회자의 지도에 있었으나 이렇게 모든 것을 목회로만 처리하였으니 그는 목회 제일주의였습니다.

② 목회에서 만들어지는 경건이 더 큰 수입

그가 이렇게 목회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한 것은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만드는 데에는 목회자가 임기제 부임지로 생각지 않고 진정 자신의 자녀를 기르는 목자라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교인 전부가 스스로 자기 범위 내에서 목회자의 정신이라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또 하나의 다른 큰 수입, 실은 더 큰 수입은 다른 사람을 목회자의 입장에서 길러 보아야 자기 자신이 사람이 된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기제로 돌아가며 책임을 맡는 것은 세상 직책이라야 하고 가정이란 참 부모요 참 자녀의 관계라야 성경적이며 그렇다면 부모가 진정 부모가 되는 때는 결혼한 때가 아니라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부모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를 기르기 위해 어떤 수고를 하셨는가!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원을 위해 실제로 노력할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맡겨 주신 양들을 기르면서 자기가 자기를 기르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기르시니 외부로는 목회요 내부로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경건이 깊어집니다. 이 면 때문에 백영희의 신앙세계는 내부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경건으로, 외부로는 사람을 기르는 목회로 나타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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