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예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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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24
예배에 대한 공회의 시각을 소개합니다.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윤곽을 간추려 봅니다. 총공회 예배는 예배의 모습에서부터 일반 교회들과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옛날식 예배같고 엄숙하다 못해 숨이 막힌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각자가 자기 속의 하나님을 향해 전심을 모두다 보면 군중이 하나되어 율동하듯 움직여 가는 최근의 예배모습과는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 배 론'
1.신앙의 기본방향
1.교리적인 면에서 본 예배
1)'예배'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일이 예배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를 원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풀고 나가면 다른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알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쉽고 확실한 방법이 우리 교회에게는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위치, 우리의 신분, 이 두 존재의 접촉은 예배라는 단어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만난다는 것만 뜻할 것 같으면 예배는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일 것입니다. 앞뒷집 친구가 만난 것이 아니고 만나는 두 존재가 어떤 존재냐는 것을 조금 더듬으면, 이 만남은 만난다는 의미에서 한없는 의미가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다 나올 수 있습니다.
①우선, 만나 뵙는 분의 위치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가 '예배'입니다.
지극히 낮은 우리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을 무슨 말로 표현하여야 적절하겠습니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단어 사용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언어 고유적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으나 성경에 필요하여 그 원어의 그 단어를 사용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니 우리는 그 뜻을 다시 더듬어 올라가며 찾으면 됩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일상 사회 생활에서는 어떤 존재를 마주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단, 인간이 신으로 상대하는 존재에게만 사용하는 단어이며 따라서 예배란 이미 마주 앉은 두 존재의 위치를 표현한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왕이 아무리 높은 존재이며, 또 부모가 아무리 귀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②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무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높은 존재들 중에서 제일 높은 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만 존재 전부를 하나로 묶어 피조물이며 하나님만은 창조주입니다. 당신만 높고 나머지는 다 지극히 낮은 존재이며 이 차이는 무한이기 때문에 아예 그 거리를 재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존재들끼리는 높낮이가 수도 없으며 그래도 그 존재들끼리는 그 차이를 측량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만을 연구해도 평생이 부족하고 영원도 부족합니다. 영원토록 알아 나가는 진행만 있지 그 끝을 측정하지도 못하고 그 끝에 선다는 것은 더욱이나 말도 안됩니다.
③이런 하나님을 만나 뵙는 우리의 자세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배'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뜻은 우리가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제일 천한 우리가 제일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그분의 높이와 우리의 낮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예배적인 자세 외에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을 상대하는 자세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2)예배의 내용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예배'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접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면 예배의 내용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①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얻어만 가질 수 있고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정의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접촉하면 부자의 부요함이 거지에게 묻어 나갑니다. 유식과 무식이 만나면 말 한마디라도 무식한 사람이 듣고 지식에서는 유익을 봅니다. 정권자를 만난 사람은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써먹고 무슨 혜택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본체는 완전이요 그분의 소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요, 인간은 지음을 받았고 그분이 아니면 순간도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완전이란 다른 존재에게 주기만 하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드렸다고 하지만 우리를 받아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유익을 보거나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완전과 우리가 접촉을 하면 무엇이든 우리는 유익만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쪽은 주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받은 것을 조금이라도 되 갚을 수가 없는 이동의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대가가 없었으니 은혜라고 하며 받은 쪽은 거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으니 이를 가르쳐 영광이라고 합니다.
②만나 뵙는 자기가 어떤 신분이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알아도 귀신이 아는 지식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일이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뵐 수도 없었고 우리는 하나님께 정죄받고 지옥을 가야했던 죄인들입니다. 중죄인이 경찰 만나는 일을 기쁘게 기다릴 수 없습니다. 범죄가 난무하는 밤길을 혼자 걸어가야 할 시민이 경찰을 만났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혜택을 봅니다. 이 경찰의 실력이 하찮으면 죄인은 다행일 것이고 시민은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찰이 완전무결하다면 죄인들은 떨 일이고 시민은 얼마나 다행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인지 하나님이 전력을 다 기울이시는 자녀인지 그 신분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며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 죄인 신분이라면 하나님을 만나 뵈올 수도 없고 또 만나면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만나 뵙는 것이 문제입니다.
③대속 받은 우리만 만나 뵐 수 있으니 부모와 자녀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그 높낮이는 이루 말할 수 없어 '예배'라고 표현을 했으나 이런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 두 존재 사이는 '부모와 자녀'입니다. 만나면 자녀가 덕을 보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챙길 수가 있습니다. 두 존재의 위치가 그러하고 두 존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대속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 대속을 예표하는 제사를 앞에 놓아야 합니다. 그 제사에는 여러 가지 규정이 많았습니다. 다 지켜야 그 다음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이제는 마음을 기우려 그분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대속이 완성이 되었고 이 대속으로 구원을 받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전제가 없고 다른 규정이 없으며 가로막는 어떤 휘장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면 당신은 바로 들어오십니다.
집을 나간 것이 우리지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버지를 모실 준비가 되면 아버지가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잊어도 아버지는 손바닥에 새겨놓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기회를 보고 계십니다.
3)예배의 필요성
①영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으나, 마음은 힘쓰는 만큼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접촉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은 영을 살리시고 이 중
생된 영 속에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영원히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주격, 우리 속에 있는 주체, 바로 우리 영인데 중생되는 순간에는 이 영만 해결해 놓으시고 마음과 몸은 먼저 살아난 그 사람의 영에게 맡긴 것입니다. 즉, 중생된 사람이 평생 힘쓸 자기 성화라는 것은 바로 자기 마음과 자기 몸에 얼마나 하나님을 모셨느냐에 따라 그 성화의 양이 결정되는 것이며, 이 성화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해 나가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우리 마음에 우선 하나님을 모시는 이 일에 전력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접촉이라 할 수 있는 예배라는 것은 그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가만 두면 비록 중생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 몸과 마음의 기능과 요소들은 영원히 죽어 지옥으로 분리 유리될 수 있습니다. 죽을 우리 마음과 몸의 기능과 요소들을 영이 살려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영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님과 하나가 된 이 영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노력은 우리 마음에 이 하나님을 모시는 예배가 바로 우리 성화 구원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살릴 때와 이치는 꼭 같으나 영은 순간이며 영원해결이고, 마음과 몸은 평생 반복과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데 이는 마음과 몸의 요소가 수도 없는 복합체로 되어 있고 각 현실에서 해당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각개로 따로이 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②평생 힘쓸 이 일이 특별히 예배라는 이름에서 시작되고 또 중심이 됩니다.
무슨 말로 표현해도 결국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우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예배인데,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 생활은 이 일이 전부요 이 일을 빼놓는다면 다 헛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평생은 예배생활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주님 모시지 않고 혼자 움직인 시간, 그 부분은 지옥에 버려야 될 쓰레기가 된 생애이며 주님 모시고 움직인 그 시간 그 생애만 추려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여생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으로 움직이는 생활, 즉 예배생활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따로이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 중에는 주일, 시간 중에는 예배 시간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주일에 관한 명령은 신약에서까지 유지를 시켰고 예배 역시 그 형식은 자유롭게 했으나 신령한 예배, 또는 영적 예배로는 신약으로까지 이어져 나오기 때문에 각 교회와 각 개인의 형편을 따라 정해진 법은 없으나 양심껏 주일과 예배를 지키고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정하게 된 것은 주일 예배가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서 주님 모시는 예배가 되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점Z가 되고 출발이 되며 그 중심 노릇을 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③'예배 따로, 생활 따로'가 되는 예배는 이미 손발이 잘린 예배입니다.
예배시간 예배가 얼마나 생활에까지 번져 갔느냐가, 우리의 건설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나 교리사에서 다루는 '예배'는 예배시간의 '예배'에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예배를 예배시간 외의 일상 생활과 비교하게 되면서 예배 자체의 중요성이 자꾸 강조가 되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일상 생활의 경건은 소홀하게 되고 결국은 생활과 유리된 예배만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사는 생활 현장에 가져갈 예배가 그 현장 맞은 편에 성역으로 구분이 되면서 믿는 사람들은 건너편으로 예배보러 가는 시간과 다시 건너와서 이편에서 자기의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예배를 드린 목적이 그리고 예배를 본 결과가 세상 속에 처한 자기 생활에서 예배적 인격, 예배적 행동, 예배적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구약적 예배로 선입관을 가져 예배는 분리된 거룩한 시간, 하나님을 뵙는 참으로 지성스러워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 강조되면서 자꾸 형식화 의식화가 되어졌고, 그러는 만큼 예배때 모신 하나님을 예배시간 마친 뒤에까지 그대로 모셔 생활 속에까지 동행을 해야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로 진행된다는 점은 전혀 잊혀져 버렸습니다.
예배보는 반대편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예배 보러 갈 때만 저 건너편으로 넘어 갑니다. 그러면서 예배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강조가 됩니다. 예배시간의 예배가 생활시간 속의 예배로 이어져야 하는 면을 간과한 결과 예배 마친 뒤의 교인은 전혀 딴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를 향한 준비와 자세는 아무리 강조가 되어져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생활하던 자기 현실이 상대적으로 덜 경건해 지고 덜 말씀화 되는 소홀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란 이런 것이며 저런 것이라는 설명이 높아갈수록 예배와 생활의 모습은 뚜렷하게 이원화로 진행되어 심지어 천주교와 같이 예배당의 예배 모습은 구약교회나 불교만큼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그 예배가 끝난 뒤 자기 생활 속에 모습은 술 담배가 평범하게 되기까지 되었습니다. 현재 구약교회에서 재출발한 신약의 초대교회 모습, 또 천주교에서 완전히 개혁을 하고 나온 당시의 교회는 예배가 생활이고 생활이 예배가 되었고 이것이 신앙과 생활의 일치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델이 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 따로 행동 따로, 예배 따로 사회 활동 따로라는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 안에 갇혀 있는 '예배'를 예배시간 밖으로 진출시켜 전 생활이 예배가 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앙과 생활이 하나되는 참 성화 참 건설구원이 되어지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이 일을 숙달키 위해 중생된 우리는 바로 천국을 갈 수 있는데도 이 세상에 오랫동안 살도록 붙들어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믿는 사람의 생활이 말씀대로 경건하게 또 깨끗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또 예배가 경건하게 지엄하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도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며 예배에서 뵈온 하나님을 그대로 생활 속에까지 모시고 들어가서 생활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결과가 있어야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라고까지 연결시킨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확대된 예배가 생활이며 축소된 생활이 예배라는 예배와 생활의 하나됨을 놓치면 결국 신약시대에 구약교회를 가지게 됩니다.
2.성경 성구로 본 예배
1)요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①예배의 형식은 완전히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은 예루살렘에 구원의 준비가 있었고 따라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신약은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이며 너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만 믿어라고 하시면서 이제는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장소도 형식도 시간도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신령한 예배요 진정한 예배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오셨다면 신령한 예배가 되었을 것이고, 아니라면 예배를 드리려고 오기는 했지만 예배 자체는 실패한 것입니다.
②신령은 하나님을 모심이며 진정은 자기 마음 다 드린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을 구약에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니 우리가 바로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 집례로 구약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이제 그뿐입니다. 신약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우리 각각의 영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장소가 따로 없고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모시고 움직였으며 예배가 된 사람이고, 예배시간이라도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예배를 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외부로는 판단할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사람은 자기 속에 이루어지는 예배의 유무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령한 예배가 예배이기 때문에 온갖 조심과 형식으로 다 기울인 예배당의 예배시간이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광야같은 세상 깊은 속에 사는 어느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동행하시어 신령한 예배가 존재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예배의 뜻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오시느냐는 문제는 자기 마음을 얼마나 기우리고 자기의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생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며 중생은 그 흉내조차도 인간의 협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외부의 흉내와 모양은 자기의 심신이 얼마나 움직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끌고 온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화에 필요한 은혜는 자기 있는 힘을 다 쓰는 자에게 그 정성을 보시고 그다음 당신이 판단해서 당신의 은혜를 당신이 주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다하고 정성 다하고 힘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일익을 맡는다든지 또 우리 정성 다한 것이 1원짜리 정도라도 대가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③이제 신약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향해 집중할 때입니다.
천주교에서 개혁했던 교회는 중생의 기본구원관, 교황 무오설 등 수도 없이 다급하고 현황적인 교리문제가 있었고 이를 집중 상대하며 바른 교리를 세우는데 그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이런 문제는 생과 사를 나눌 문제였고 이런 교리들이 생명을 내놓고 전념했던 신학자들에 의하여 수백년을 이어올 수 있는 좋은 교리로 구현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배의 수고로 교회가 평안과 번영을 가지게 되었는데도 그런 혜택을 가진 후배들이 선배들이 닦아놓은 초석 교리들 위에 이제 남은 평생 믿어갈 평소의 신앙, 여생의 경건에 관계된 성화 구원면을 소홀히 했고 교회는 천주교라는 절대 위협의 요소가 없게 되자 안일과 나태에 빠지면서 서서히 세상 속으로 침체되어 갔습니다. 생사 투쟁의 초기 신학자들은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평소 생활에까지 하나님을 모신 경건으로 살지 않을 수 없는 절박감을 주었는데, 복음의 평화기에는 그런 외부 위협이 없고 이것이 평소의 신앙생활을 풀어놓는 역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지켜지고 집에 돌아가 혼자 살아가는 자기 현실은 따로 진행되는 이분화가 가속화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초기 신학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강조한 것은 그 예배가 생활로 그대로 이어져 그들에게는 항상 긴장 속에 경건 속에 살게 했는데, 후세대는 예배만 그렇게 하고 평소의 생활은 풀어지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은 그 예배마저도 경건의 모양만 진열할 뿐 예배시간에서조차도 경건의 내용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예배 시간 도중에 가족소개를 하고, 예배 시간 도중에 폭소를 유도하고, 예배 시간 도중에 TV 댄스팀이 다리를 치켜 들 수 있게 된 정도입니다. 개 교회 하나를 두고는 아직까지 예배 본질에 대한 집착이 있어 이를 금지하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교단을 두고는 소속 교회들에게 이런 모습을 금지하는 곳이 하나도 없고 따라서 교단적으로 예배 개념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교단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무엇이냐고 시비가 발생되면 신학교 교재들이 인용되지만, 정작 아무 소리가 없으면 이미 예배시간의 예배마저도 별별 진행으로 다 어지러워졌다고 보겠습니다.
2)롬12:1-2,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예배니라
예배란 살아있는 사람의 몸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는 이의가 없을 표현이지만 미개했던 시대로 올라가면 죽은 자를 대상으로 예배를 드린다든지, 죽은 송장 또는 죽은 자의 권위를 빌려서 더 높은 하나님께 상소를 할 수 있다는 미신 또는 이종교적 예배의 형태들이 쉽게 발견됩니다.
일단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라는 시점을 고려한다면 극단적 이단들을 제외하고는 죽은 자와 신과의 연계 자체를 고대 미신 또는 비교 종교학적 현상으로 설명해버리고 그런 행위 자체를 아주 역사책에서 기억할 남의 일로 알아버립니다.
①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구약에서 명령했던 제사의 모습이 다 폐지 된 신약교회이기 때문에 예배 자체가 영적 예배라야 합니다. 외부 진열이 영적 예배의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위기 또는 참고로서 이런 저런 규격을 정해 보지만 그런 규격을 하나의 법칙으로 또는 강요나 의무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배에 관한 한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육적 예배는 육체로 확인이 되는 레위 지파 제사장이 집례를 하게 되어 있으며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레위인이 아니며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인 우리가 혼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제는 신령한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도 육체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신령한 이스라엘로 복음을 향하면 그들도 신령한 이스라엘의 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예배가 영적 예배로 출발했던 초대 교회와 개혁 교회 초기를 잊어버리고 육안으로 기준을 삼을 정도로 천주교와 구약교회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예배당 건축 문화가 있다할 정도로 법 없는 법이 되었고 따라서 예배당을 사무실 형의 사각으로 마감하면 이단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이며, 십자가의 희생을 마음에 담아 두기 위해 건축물에 십자가를 표시하지 않으면 신학에 무지할 정도가 아닌데도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적기독이라는 지칭이 따를 정도입니다.
②예배는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 그 몸을 움직이는 우리 속에 마음은 이미 내포가 되어 있습니다. 이 몸을 죽이면 살인죄가 됩니다. 따라서 죽이지는 않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예배보는 우리의 마음을 이제는 하나님이 움직이지 나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산 제사입니다.
드린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움직이면 제가 순점8로 움직이겠고 움직이는 그 주권을 그 결정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살아 있으나 그 사용권 그 소유권 그 활동에 관한 결정권은 내가 가졌던 것을 하나님께 드려 이제는 하나님이 가지고 하나님 마음 대로 명하시고 나는 순종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제일 소중한 시간이며 따라서 세상에서 복잡했던 모든 것을 추스르고 하나님 존전 앞에 나간다는 압박감에서 자신의 전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자들은 예배의 의미를 모든 경건과 지엄의 표현으로 나열을 시켰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들어봐도 좋은 말이어서 틀린 말이 없고 나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 의미가 명확히 또 단촐하게 정리되는 설명 역시 없습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틀린 말이 없고 또 맞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말이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그 구체적인 행위 그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면 그냥 좋은 표현만 진열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산 몸으로 그러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성의를 차려 입은 성직자가 다리를 떨면서 신부 입장의 걸음으로 강단으로 올라가는 그 걸음이 지금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구약입니다. 강단은 설교자의 위치가 편리하게 조성된 것일 뿐입니다. 예배당이라 예배보는 모임을 편리하도록 시설된 것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가질 수 없습니다. 제단은 없어졌으며 성전은 예배당건물에서 그 동일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도 아닙니다. 드려봐야 하나님이 가져가지 않으시고 교회 운영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의 결정대로 사용할 뿐입니다. 강단에 올라가는 성직자가 지금 산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고 생각한다면 그 외 구경하는 교인들은 예배에 상관없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설교자든 교인이든 어떤 순서를 맡은 자이던 예배란 참석한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몸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치 않고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과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라고 그 사용권을 맡기는 것이며 그 결과 주님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고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영적 예배가 된 것입니다.
③예배 참석자 각자가 자기 속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설교자라는 직책은 예배에 필수가 아닙니다. 찬양대도 어떤 순서자라도 예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직책이지 없으면 예배가 성립되지 않는 필수 요소일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참석자 자신들이 자신들 마음 속에서 자기에게 회개를 감사를 각오를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이 예배이며 그 만남을 위한 순서와 형태는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교회마다 교파마다 신학자마다 예배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 경험상 그것이 아주 유익하더라는 것이지 그렇게 해야 예배가 된다고 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인간, 그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하는 모습이 예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로 정할 수 없는 신약의 이런 외부의 형식 속에 실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하나님 앞에 고칠 것을 지적 받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을 배워 감사했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배우고 결심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에서 회개, 감사, 각오 등의 여러 진리 증거를 듣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들은 본인이 들은 내용을 가지고 자기 속에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자기에게만 필요한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 모습을 외부로 표현한다면 예배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성경만 읽어놓고 오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기도로 명상으로 찬송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 테이프를 들을 때 만일 그 테이프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는데 이 사실을 교회도 인정하기를 주저한다 이것이 탄식이다고 했다면, 그 테이프가 설교자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테이프에 담긴 성경 해석을 다시 들으면서 자기가 자기 속의 하나님께 '참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맞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으며, '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살면서 이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라는 자탄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도 감사도 각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제공이 어떤 형태 어떤 모습 어떤 내용이라도 문제는 예배 참석자 자신이 자신 속의 하나님께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하나님과 대화를 전해 듣던 새겨듣던 읽어 듣던 자기 속의 하나님과 자기 가 회개적 대화, 감사적 대화, 각오적 대화, 간구적 대화 무슨 대화든 오고 간 이 실제가 남이 모르는 이 신령한 관계가 바로 예배인데, 이런 내용은 빼버리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예배의 형식만 쭉 진행이 된다면 이는 예배 같으나 예배가 아니게 됩니다.
3)예배 뿐 아니라 모든 신앙 행위가 영적인 생활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향해야 합니다.
신약교회가 그 신앙의 방향을 구약적으로 잡아 손해보는 일이 많고 반대로 신약교회가 신약의 은혜를 방점G 기회로 삼아 쓰지 못할 쓰레기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배가 오늘은 세상을 닮아 썩어진 경우가 휠。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풍조 속에서도 건전한 교회의 예배를 보수하는 극소수의 교회들 중에서 그 정도가 지나쳐 구약까지로 회귀하는 교회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지성인이 많은 교회, 상류층의 문화인이 많은 교회들일수록 장엄한 의식과 예법에 집착이 많고 이런 경향이 결국 천주교를 닮을 수 있는 요인임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비단 예배뿐 아니라 여러 가지 비슷한 사안들이 많다고 보며 전반적인 신앙 경향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산술적 1/10인 십일조는 있어도 자기 번 모든 수입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것이라는 표시로 그 중 1/10을 떼서 당신이 드리라는 복음 운동에 바치고 나머지 9/10도 주님의 것인데 내가 맡아 내가 사용하게 되었으니 하나님 원하시는 뜻을 찾아 일일이 그렇게 사용하겠습니다라고 해야 십일조가 십일조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이런 신령한 면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십분의 일을 계산해서 드린다면 그리고 그 십일조를 드리면서 무슨 말로 해설을 하고 어떤 봉투로 포장을 한다해도 이는 너무 구약적이며 의식적이며 형식적이며 너무도 영적예배가 되어야 할 신령한 이스라엘답지 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교역자가 하나님 앞에 특수 신분으로 특수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아닌데 그렇게 특수화되어 있는 것도 예배, 십일조 등과 함께 진행되고 있는 오늘 교회의 구약화입니다. 앞서 복음 사역을 맡은 그 내용 때문에 목회자가 귀한 것이지 목회자가 된 그 신분 때문에 귀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혼동하면 잘못된 사역에 대한 비판이 없어지고 잘못된 사역이 목회자의 신분에 묻혀 교회를 치명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참으로 움직이는 사람, 그는 주일학생이라도 그 순간은 하나님의 점L며 하나님과 끊어져 자기 주관대로 움직이는 사람, 그는 목회자라도 그 순간은 하나님의 점L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점; 대적해야 하나님 대적이 되지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은 점; 대적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 대적이 되겠습니까? 착오로 실수할까 두려워하는 점은 물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부분 어느 대목을 일일이 짚어 말하라면 한도 없겠으나 전체적인 방향 그 지향하는 자세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3.예배 시간
1)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이 주일이며, 시간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주일만 바로 지키면 6일을 자유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며 예배 시간을 바로 지켰으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날을 바로 살 수 있도록 주일은 명령으로까지 지키도록 했으니 이 주일을 바로 지켜 주일의 은혜로 나머지 모든 날들을 바로 살도록 하신 것이 주일이며, 예배를 명령한 것은 예배가 바로 되어 예배의 은혜가 예배시간 외의 모든 시간까지 바로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이 주일이요, 날 중에 중심이 주일이며, 주일이 바로 되어야 나머지 날도 바로 될 수 있고 주일을 실패하면 나머지 날들은 당연히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시간 중에 가장 귀한 시간이요, 시간 중에 중심이며, 예배가 바로 되어야 나머지 시간들도 바로 될 수 있고 예배를 실패하면 나머지 시간들은 당연히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날 중에 점Z와 같은 날이며 이 점Z가 나머지 6일에 자라가는 것이며, 예배는 씨앗과 같은 것이며 이 예배 시간이 나머지 시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주일과 예배를 바로 지키는 것은 우리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이제 출발이며 발진입니다. 결국은 모든 날이 주일이며 모든 시간이 예배라야 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섬김으로 여생이 계속되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의 자신이 되어지되 늘 그리 되어져야 합니다.
2)예배 형식
①주님의 대속으로 예배의 형식은 없어졌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지극히 낮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지옥갈 우리가 예수님 대속으로 구원받고 이제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이 내신 길을 따라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는 섬기는 예법이 자세하게 제시되었고 그 모양과 그 형식을 전부 다 지켜야 했습니다. 오실 예수님을 어린 구약교회에게 보이는 면으로 쉽게 가르쳐서 점점 볼 수 없는 신령한 면으로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오늘 신약에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대속이 있으니 이 대속을 받아 이 대속으로 사는 실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형식을 전부 폐지했습니다.
②신약 예배는 대속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대속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게 하면 바른 예배입니다. 신약시대 예배는 형식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고 대속 받은 사람이 대속을 힘입어 대속으로 살아가게 하는 이 일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면 각 교회와 교인의 신앙 형편을 따라 하면 됩니다. 구약은 누구에게나 정해진 순서와 법이 있어 어길 수 없었으며 그 형식이 단일이었습니다. 이제 신약에는 그 형식의 실상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대속의 은혜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형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필요성이 구약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으니 대속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대속의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를 사용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③말씀이 중심이 되고 기도와 찬송 정도면 충분합니다.
구체적으로 다 거론할 수는 없으나 말씀이 중심이 되어 대속이 무엇이며 대속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아 나가며 이 과정에 간구할 것이 있고 감사할 것이 있어 이 3가지의 내용들로 대속이 자기 속에서 점점 더 역사하도록 하면 됩니다.
말씀과 찬송과 기도가 어떤 순서로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어져야 하느냐는 것은 은혜되더라는 경험과 느낌이 있을 것이고 그런 모습이 같은 신앙걸음으로 나가는 교회들이 일정한 형태를 보이게 되어 예배의 모범으로 예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경험과 권고일 뿐이지 지켜져야할 예배의 규격이 된다면 신약의 예배 성격에서 이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4.따라서 예배는 일반인이 생각하지 않았던 이런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1)예배의 3가지 요소가 있다면 그 모습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말씀, 기도, 찬송이라는 예배의 요소 3가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형식보다 내용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약의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습까지를 명령해 놓았으나 신약에서는 폐지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그 외부의 모습의 일치나 형식의 재현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①예를 들면, '말씀'이라는 부분이 이런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의 요소 중 하나를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성경을 읽고 그 성구에 대한 설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성경만 읽고 그기 대한 설교가 전혀 없다해도 말씀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각자가 바로 은혜를 받고 또 그 본문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을 각자가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 깨닫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하며 여러 가지 예배의 내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경은 읽지 않고 교리가 증거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교리란 성경을 근거했고 성구에 대한 해석이며 설교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먼저 읽어야 성경을 근거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너무도 형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은 뒤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기 전 먼저 성경을 읽으셨기 때문에 그 모습을 참고하는 것이지 성경 봉독과 이어지는 설교가 예배에서 생략되거나 반대로 되어서 안되는 절대성을 가진 예법은 아닙니다.
즉, 예배의 3요소 중에 하나인 '말씀'의 부분이 성경공부 형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용이 예배인데, 그리고 예배의 말씀 부분인데 그 말씀 부분이 성경공부의 성격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인데 외부에 붙이는 이름에 따라서 예배가 되고 안되는 정도로 형식화 구조화시킨다는 것은 신약교회의 예배에 대한 기본 인식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②찬송의 경우는 이미 많이 보편화가 되었고 지나친 경우까지 있습니다.
찬양예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의 3가지 요소 중 말씀과 기도 부분을 없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의도가 되었다면 예배라는 이름을 붙인 노래판이겠지만 말씀과 기도까지를 찬양에서 포함하여 찬양의 모습이 가장 부각되도록 해 본다는 의미라면 전혀 정죄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찬양이란 음의 높낮이와 길이의 조절, 그리고 최소한으로 줄여 표현하는 몇 마디의 감사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내용은 전부가 성경에서 나온 말씀이라야 하고 또한 그 속에 우리의 소원이 담겨져 있으니 이미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설명을 하지 않아도 상식으로 안다는 전제에서 특별히 찬양적 말씀, 찬양적 기도, 찬양적 찬양이 필요하다고 느껴 찬양예배라고 한 것이 찬양예배의 첫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찬양예배는 없어지고 찬양만 남고, 찬양까지도 없어지며 노래의 기술과 숙련만 남고, 노래의 기술과 숙련은 들러리가 되고 말초신경의 예민함만 한 곳으로 끌고 다니는 모습으로까지 진행하여 '열린 예배의 극단'까지를 혹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찬송 속에 말씀과 기도를 포함하고 그리고 찬송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예배를 진행한다면, 이를 정죄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③예배가 시작되자 기도가 터져 결국 그 기도로 예배가 마쳐진 경우도 있습니다.
광신들이 주로 써먹는 일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을 것이나, 성령에 붙들려 감사가 넘치고 또는 간구할 제목이 있어 그 회중을 하나님이 휘몰아 기도로 한 시간의 예배를 계속 인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과 말씀 증거가 없었다면 기도회라고 해야겠는가? 예배로 모였다가 기도회로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 기도가 과거 받은 말씀을 되새기며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회개가 있었다면, 또는 기도의 목소리만 있었으나 그 기도의 한 편에 받은 은혜의 감사가 자신의 감정을 격발시켰다면 그래서 감탄의 신음이 나왔다면 찬송의 요소가 빠졌다고 할 것입니까? 기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배 시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의 모습을 다 갖추고 정한 예배 시간의 모든 요소가 다 나열이 되어져도 그 기도 속에 내용은 무속의 구복이 스며갈 수도 있고, 성경의 봉독과 설교의 강조는 이어져도 세상 정치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찬송의 음은 높아가고 화음은 어우러져도 대속의 감사는 찾아볼 수 없고 성악가의 기술만 높이 휘날릴 수가 있으니 이런 경우는 예배의 모양은 있고 예배는 없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예배의 필수 인원이라는 개념도 신약이 되면 달라집니다.
①제사장이 없는 제사는 없었습니다. 신약은 목사님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에 꼭 필요한 인원 꼭 순서에 담당시키는 직책이 사회자, 설교 담당자, 찬양대, 기도 맡은 분 등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너무도 고정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그 순서를 다 외울 정도이고 이런 순서에 변화가 생기면 정식 예배가 아니었던 것으로 여기는 기존 지식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목사님 혼자 모든 순서를 다 맡아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실은 목사님이 빠지고 전도사님도 없어 교인 중에 한 분이 대신해도 예배입니다. 혼자 앉아 말씀새기고 찬송하고 기도하여 예배를 드려도 예배입니다. 단순한 습관이며 단순한 인식이지 실은 정확히 예배라 할 때는 사람이 몇 명이든 담당 직책이 어찌 되었든 그리고 그 순서의 진행이 어찌 되었든 이는 예배의 본질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사장이 없는 제사가 없듯이 목사가 없는 예배가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신약의 모든 믿는 사람은 전부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말씀을 맡은 다 선지자들입니다. 자기 단독이 예배 드릴 수 있으며 필요하여 모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단호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예배에는 누가 없으면 안된다든지, 특별한 사람이 꼭 필요하다든지, 심지어 어느 높은 차원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등의 것입니다.
천주교가 시작되고 교조주의가 시작될까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만인제사장론이라는 평범한 신약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받는 것도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깊이 새겨 더 깊고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도 모든 신앙의 본질적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성도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돕는 은혜는 좋은 것이나 필수는 아닙니다.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가 좋은 것이나 목사님이 없다고 예배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대가 없는 예배라고 서부교회는 수십년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오해를 하셨던 분들은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초기 건전했던 때를 몰랐었습니다. 그 큰 서부교회 예배당에 목사님 혼자 사회, 설교, 기도, 찬송인도, 광고까지를 다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요하여 어느 다른 순서가 다른 분에게 맡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할 것은 양극단입니다. 순서를 꼭 맡겨야 한다거나 꼭 누구 혼자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예배의 필수 인원은 자기와 하나님 단 둘이며 누구도 사이에 들어갈 수 없는 관계인데 이를 변경시키게 되면 신약의 예배는 그 본질에 문제가 생깁니다.
②예배당의 모습부터 이미 우려할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 예배당은 다른 건물과 달라야 하느냐? 성전이기 때문이라며 예배당 건물에 부여하는 의미가 많이 의식화되고 있습니다. 천 개면 천개, 만 개면 만 개의 예배당이 기독교 예배당의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건물 꼭대기에 표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의 법이 되었습니다. 예외가 없을 정도입니다.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신약입니다. 십자가란 건물에 올려놓은 표시로 인하여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십자가 표시가 있어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이 있는 그 희생의 생활, 그 희생의 생애, 그 희생의 행위가 있는 곳에 이미 십자가는 그어지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는 노력과 수고가 사회인들에게까지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비난이야 모르니까 자기들 수준에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말을 하던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적을 하기 이전, 예배당을 예배 보는 장소로서의 편리함과 유리함에 두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면 참으로 탄식할 교리문제가 이어지게 됩니다.
목회자의 성취감, 과시필요, 교인들의 회집력과 자긍심 등 여러 신앙외적인 요소들이 동인이 되고 인력과 경제 동원은 구약의 성전 건축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숫자가 적으냐 많으냐의 논란은 있겠으나 전혀 그런 신앙외적 요인을 배제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예배당은 거의 없다 하겠습니다. 정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예배'에 대한 인식입니다. 예배당이 치장되기 시작하면 예배의 내용은 비게 되고 예배의 내용이 차게 되면 예배당의 치장이 저절로 사라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배당을 더럽게 관리하면 저절로 예배가 예배다워지느냐는 반론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배보는 장소는 가정도 되고 들판도 되며 그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가장 편리한 곳,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곳, 예배 진행이 잘 되어질 수 있는 곳을 예배당으로 마련하는 것이고, 또 죄 되지 않으면 교회의 공동 행위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배당은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적 차원의 예배당이기 이전에 '예배'의 정의와 관련된 예배당이라면 예배 보는 곳이 예배당이지 예배당이 예배를 가능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혹시 무교회주의나 모이기를 힘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오해도 있을 법합니다. 교회의 정의를 먼저 생각한다면 예배당의 문제로 무교회주의를 경계하지 않을 것이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그 차원이 예배의 정의와 예배당의 의미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배당의 모습에서부터 교회들이 인식하는 '예배'의 구약화가 위험선을 넘고 있으며 구약이 신약으로 발전되어 온 교회사를 되돌려 신약교회의 구약화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적 오류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5.말씀이 중심된 초대교회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결국 말씀이 새겨져야 예배의 실상인 하나님 경배가 경배답게 됩니다.
①아는 경배라야 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의 대상은 바로 찾게 되었으나 그 방법이 형식과 경건의 모양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인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씩 둘씩 알아가게 되면 아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그 자세가 저절로 커지고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 경배한다는 말은 없고 그런 몸짓은 없어져도 예배보는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의 높으심에 눌려 그 마음이 얼어붙듯 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면, 예배하는 사람의 여러 가지 좌석 위치나 앉는 자세로부터 여러 가지 비천한 우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양들이 개발되고 결국 깊은 중심에 느껴지는 중압감은 없고 외식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 우리가 어떻게 죽을 죄인이었는지, 또 오늘에도 얼마나 망령과 강퍅을 가진 인간인지를 알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표시하지 않아도 중심이 겸손해지기 때문에 경배받으실 하나님과 경배해야 될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게 되고 이것이 참으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인격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하지 않아도 죽은 자가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일 것이며, 또한 무생물이나 동식물이 예배드릴 리가 없으니 산 사람이 살아있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은 강조할 것도 없고 재론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예배란 살아있는 우리가 영원토록 사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그 예배라는 것이 무슨 외부의 형식이 있는 것으로 무의식인 구약적 관념에 젖은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새롭게 새기는 말씀에서 몰랐던 하나님의 다른 면을 또 알아가고 부족한 우리를 또 다시 느끼게 되고, 대속의 은혜를 다시 새롭게 알게 되면 저절로 예배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무엇을 드리는 형상을 탈피하고 진정 받은 대속의 사람이 참으로 되어가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 받은 그 은혜를 알고, 아니까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되고, 그 구원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할 자신이 되어야 할찌 알게 되고, 또 각오하게 되고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 부족한 자신을 도와 주시라고 간구하게 되고, 이러는 사이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속의 사람으로 인격을 만들고 행위를 만들고 생활을 만들고 말씨까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었고 그러니 우리는 섬겼고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은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더욱 붙들었고 우리는 이 예배를 볼 때마다 더욱 더 새로워지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니 이런 실체는 엄숙의 분위기나 경건의 모양이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외부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새기는 데에서 하나님과 대속의 은혜와 구원의 감사와 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②어린 신앙이 예배를 통해 자라감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예배가 전 생활이며 전 생활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신앙이 있고 어린 신앙이 있으나 예배를 통하여 자라가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경배했고 섬겼다면 하나님과의 접촉,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결실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예배라는 섬김, 예배라는 바침의 외형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이 은혜로 오게 되고 그 결과는 나아짐이 있으며 장성함이 있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닮은 우리로 점점 향상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형을 표현한다면 섬김과 예배가 되겠고 내용과 결과를 말한다면 은혜를 받는 것이며 배운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배가 바로 진행되면 어린 신앙이 모든 면으로 알아가게 되고 알아가게 되는 만큼 이전에 모르던 찬송, 이전에 못 보던 진리 말씀, 이전에 생각 못한 기도가 이어지게 됩니다.
③지식 신앙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씀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물론, 말씀만 지나치게 강조가 되어 나머지 두 가지 요소가 무시되는데에 이르면 곤란하겠으나 바르게 전해지는 말씀이라면 그 두 가지를 내포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잘못 진행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말씀만 남아 있고 기도라는 간구와 감사의 표현이 없게 되면 그 말씀은 말라빠진 고서적 책장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이유 감사할 내용도 모르고 찬송이라는 감정과 가장 밀접한 곡과 가사에만 피동이 되어 세상 노래에서 오는 기쁨인지 하늘로 오는 기쁨인지 모르고 결국 세상 노래 모임에서 얻는 기쁨과 교회의 찬양에서 얻는 기쁨이 같은 수준 같은 차원에까지 나갈 수 있는 기형적 신앙도 주의해야 된다고 봅니다. 기도가 감사하고 간구하고 결심하는 순서나 내용을 가지게 되는데, 기도의 형식은 성경에서 가져오고 기도하는 내용은 무당에게 자기 소망을 요구하듯 그렇게 요구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구할 것도, 뺄 것도 모든 것이 정상이 되리라 봅니다. 신앙은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이 있고, 아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자기에 대한 깨달음, 확신, 각오 등이 생기면서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성경 성구의 해석을 다시 한번 참고하도록 덧붙입니다.
1)예배는 신령과 진정입니다.
①영감을 받게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성령에 붙들리는 영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요4:24,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신 신령은 성령에 감동된 영감의 예배를 말하며 진정은 우리 중심 우리 전부를 진정 기우린 면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이 먼저 전제되어 있습니다. 형식과 외형을 두고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한 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 마음을 완전히 붙들도록, 우리는 붙들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성령에 붙들려야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은 그 내용이 무릎을 꿇은 경건한 자세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하나님께 나를 바칩니다라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형식적 표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신약의 예배입니다. 성령이 각자 속에 직접 와 계시니 그 분에게 자신이 붙들리는 것이 신령입니다. 이는 다른 형식으로는 될 수 없고 자신의 진정한 참 마음 그 중심을 내적으로 다 기우려 집중할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느끼고 주님 아니면 안된다는 이 절박 이 간절 이 중심이 될 때 성령이 우리 마음을 붙들어 주시니 예배가 '신령'하게 된 것입니다. 벌써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은 몰라도 자신이 아는 있는 힘을 다 기우린 중심 그 진심이 바로 '진정'입니다.
②그렇다면 진리를 소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진행과 내용이 '신령과 진정'이라야 한다고 가르치신 말씀이라면,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만든 설교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안내한 설교이며 그 설교는 그 설교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그 설교의 말씀 내용이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족과 주님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우쳐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께 자기 부족을 느꼈고 주님을 갈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면 비로소 이것이 예배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는 방편은 여러 가지 형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꼭 어느 방법 어느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성경 봉독과 그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방법도 있겠고, 많은 말씀의 내용을 함축 정리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읽음으로 그 교리서가 설교하는 내용을 파악하면서 깨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없는 교회 목사님이 없는 예배시간도 있을 수 있으니, 설교를 맡은 목사님이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보다 더 진리의 내용 소개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책자가 있다면 원고로 삼아 읽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대속을 깨닫게 하고 성령은 붙들고 각자는 자기가 성령에게 붙들리는 이 교제, 이 연결, 이 접촉, 이 영감의 실상을 만들어주는 진리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대표되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은 예배의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없이 각자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며 이것이 예배의 실체이며 이 생활이 생활에까지 이어진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예배화한 성자일 것입니다.
③진리의 성령이니 진리의 말씀을 소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테이프나 비디오를 다시 재생시켜 말씀을 반복하여 배우고 새기고 연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예배가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오실 수 있는 그 선행의 진리 깨달음에 각성을 주고 해설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게 되면 깨닫는 성령이 역사하고 이미 영감의 교제가 있게 되는 순서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재독에 대하여 반대한 분들은 한결같이 '죽은 자의 테이프를 다시 설교 시간에 듣는 것이 틀렸다'고 하는데 이는 논쟁의 수단은 될찌라도 논리의 모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것이든 산 자의 것이든 재독 자체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의 산 인격체의 활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분히 감정적 지적에 치우쳐 읽는 사람에게 부정적 채색을 시도하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산 사람의 산 인격체에서 발원된 것이라야 한다면, 스피커 선을 통하여 이미 전류 파동의 기계적 처리로 바뀐 설교자의 음성은 인격체의 것입니까? 발원이 인격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된다라고 하면, 시차 문제이지 재독 테이프의 목소리 역시 같은 이치가 적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동시적 발음이 나와야 한다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 설교하는 분 자체가 없고 설교 순서가 없어도 예배는 형성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모순으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④재독에 대한 지지를 목표로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우리의 예배관은 이렇게 형식보다 내용적인 면, 전체적인 면보다 개별 구원적인 면을 강조해 왔고 그 선상에서 재독이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진 말씀 연구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그 표현이 바치던 받던 연구든 설교든 형식이 아니라 실제 말씀을 새긴 사람들이 그 말씀을 새기는 과정에서 영감의 역사를 만나게 되었던가가 문제입니다.
2)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설교자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