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백영희 - 그 생애와 고신교단 분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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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백영희 - 그 생애와 고신교단 분립 과정

서기 0 12
1. 서언 - 백영희 신앙생애와 고신 백영희 신앙생애는, 지역적으로 부산․경남지역 중심의 고신 역사와 함께 관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고신 교단은 비록 규모가 작지만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늘 전면에 있고, 백영희라는 이름은 한 번씩 소식이 들리는 정도이다. 그는 고신과 과거 잠깐 함께 했던 때가 있었고 이후 이웃 교단 정도로 지내왔다. 그런데 고신과 백영희의 궤적을 겹쳐보면, 고신 역사 곳곳에 발견되는 여러 가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런 고신의 정체성 관련 공간에 백영희라는 이름을 넣어서 연결시킬 때 아주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고신의 외면 모습에서부터 내면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고신史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소망을 보여준 면도 있었으나 동시에 자기모순과 정체성의 단절로 실망을 안겨준 경우도 있었다. 만일 이 지역교회사에서 백영희라는 이름으로 관찰해 본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영희는 1959년 고신에서 항명을 이유로 제명이 된다. 떠도는 소문은 난무했으나 그를 실제로 아는 인물은 고신의 최고 원로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백영희의 훗날을 지켜보다가 생존기간 마지막 10년이었던 1980년대에 그를 찾아 고신이 출발 초기 때 품었던 이상의 실현을 발견하고 격찬한다. 연구해 볼 만한 여러가지 여지가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백영희는 평생 무기록 비공개 원칙에 충실하여 그의 생존 기간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교계가 알고 있는 이름은 그의 실제 이름과 편차가 아주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1989년 그의 사후부터 시작된 그의 신앙생애 재구성 작업이 최근 완료되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는 헤어진 사이였으나 앞날 전개될 역사에서 소망적으로 참고한다면 분명히 지역교회사에 도움 될 면이 있다고 본다. 우선 그의 신앙생애의 연대기적 기록의 공식적 최초 보고와 함께 고신과 분리된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했으면 한다. 참고로 그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자료 대부분은 1979-89년 기간의 ‘설교록’인 바, 이 출간물은 음성기록과 함께 그의 생전 교계에 완전 공개되고 있었고, 그와 딴 길을 걸었던 당사자 다수가 생존하던 시기에 고신대 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기증 장서로 제공되던 자료라는 점에서 객관적 사료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2. 백영희 신앙생애 ⑴ 지역 내의 다양한 평가 부산․경남지역을 범위로 말한다면, 그에 대한 일반 인식은 세월에 따라 아주 다르게 기억된다. 1950년대 ‘백영희’라는 이름은 고신의 유명한 사경회 강사였고, 1960년대와 70년대는 그 이름이 이단 명단에 쉽게 포함될 정도였다. 1980년대는 그 이름이 교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어 전국 각 교파 각 교회로부터 매주 수십 명 많을 때는 수백 명씩 10여 년 이상 계속 현장학습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일반 교인들에게는 한국교계에 지나간 여러 이름 중 하나 정도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은 목회자나 신학생들이 교파를 막론하고 그의 10만 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하고 깊은 설교 자료를 접하고 있고, 세월이 갈수록 이런 사례는 더 많아지고 깊어지고 있다. 그의 사후 18년이 된 지금 이제 편차가 심한 선입견이나 감정 개입 없이 차분하게 그를 한번 살펴볼 시점이 된 것 같다. 생전에 자신을 성실하게 소개했더라면 그는 최소한 이 지역 내에서 영향력과 인지도에 있어서 단연 손꼽힐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 출발 때부터 생존 끝까지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데만 주력했고 다른 사람은 그의 생전에 그가 걷는 걸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어 그를 연구할 수 없었다. ⑵ 주요 이력 그는 1910년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에서 출생하고, 1936년 이웃하고 있는 고제면 개명리에서 신앙출발을 하게 되며, 1939년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1949년 이웃에 위치한 위천면 위천교회를 거쳐, 1952년부터 1989년까지 부산서부교회를 담임했다. 지역적으로 본다면 1952년 이전까지는 주남선 신앙지도 범위 내에 있던 거창지역에 있었고, 이후 고신의 중심지인 부산에만 있었다. ① 신사참배 환난 : 1939.1. - 1945. 8. 그는 첫 목회지인 개명교회에서 신사참배 6년 환난을 겪었다. 그 기간 동안 주일학생을 포함한 전교인이 목회자와 함께 신사참배 뿐 아니라 동방요배까지 거부했다. 또한 그와 교인들은 환난을 피해 타 지역으로 피하거나 예배를 변형하지 않고 혹독한 환난 현장에서 해방을 맞이하는 특이한 승리를 했다. 해방 후 거창으로 돌아온 주남선은 이런 특별한 신앙과 실력을 인정하여 이후 자신을 초청하는 외부 사경회에 백영희를 자주 파송했다. 또 출옥성도들에게 백영희를 소개하여 이인재 박인순 조수옥 등은 백영희 지지자가 되고,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오종덕 등 고신의 지도층은 백영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② 6.25 점령치하 : 1950.6. - 1952.7. 둘째 목회지였던 위천교회에서 백영희는 6.25 전쟁 점령 치하를 겪게 된다. 점령기간 전체를 통해 평소 출석보다 많은 교인이 인민군 퇴각 때까지 매일 예배당에 모여 종을 치며 고정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미 그의 신사참배 승리 소식을 지방 교회들이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인도한 집회는 수년 간 주변 교인들을 불덩어리로 만들었으며, 전쟁 직전에 공비들이 거창지방을 일시 점령했을 때 집회 참석 교인들이 점령치하를 겪으며 신앙으로 승리한 경우가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맡고 있던 교회 뿐 아니라 과거 그가 직접 목회를 했던 개명교회와 겸직으로 지도하던 봉산교회도 인민군 점령치하 속에서 그대로 예배를 드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 2개 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다 지켰으나 목회자들은 피난을 했다는 사실이다. 인민군의 퇴각시 주퇴로에 접했던 봉산교회는 퇴각하는 인민군들에게 주일학생까지 나와서 전도를 했던 정도였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3월 주남선은 임종시 백영희에게 사용하던 성경과 뜻 깊은 유언을 남기게 된다. ③ 부산의 고신 시절 : 1952.7. - 1959.9. 셋째 목회지인 서부교회로 이동한 1952년 이후부터 백영희는 그동안 겪은 외부 신앙 환난과는 판이하게 다른, 교계의 내부 분쟁을 겪게 된다. 우선 주남선과 달리 주남선의 후임은 취임 즉시 백영희를 최대한 견제하였고 부산서부교회로 청빙을 받아 가는 백영희를 가로막고 나섰다. 고신의 중심지로 이동하는 것까지 전적 반대하고 고신의 지도층에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고신의 지도층이 그를 주남선을 잇는 신앙이며 실력 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임에는 문제가 없었다. 1950년 고려신학교를 재입학하고 1952년 부산으로 부임하게 된 그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당시 총회측과 고려파의 분립 과정에서 머뭇거리던 교회들을 고려파로 가입하도록 하는데 있어 당시 유명했던 부흥사인 박영기 및 박윤선과 함께 고신 내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한상동과 박윤선은 신학교 강의 출석 일체를 면제하고 교단 분립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곳곳의 교회를 위해 그를 파송했다. 이런 그가 막상 고신의 중심부에서 이후 고신이 총회측과 투쟁하면서 소송을 비롯 여러 면에서 초기 신앙의 변형된 모습을 직접 보게 되자 그의 비판은 외부에 앞서 내부를 향하게 되었다. 이후 백영희는 고신에서 떠나던 1959년까지 고신의 제일 내부에서 매사 첫 비판자로 나섰다. 박윤선과 송상석의 예배당 소송논쟁은 표면화된 양측의 최후 입장 정리였고 그 내용적 투쟁은 이미 백영희와 그를 지지하는 고신 내부의 주요 인사 및 소장파에 의하여 격화되어 있었다. 한편 수습 불능으로 분류되던 부산서부교회는 백영희의 부임으로 급격한 부흥을 이루게 되고 백영희의 부산․경남 지역 영향력은 고신의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목회지도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신 지도부는 백영희가 서울에 개척시켜 성공한 교회들이 다수 있었으므로 총회측 중심지인 서울로 이동시켜 고신측을 위해 활동하도록 요구를 했다. 백영희와 서부교회는 이 요구를 교권 탈선에 대한 비판을 제거하는 조처라고 보고 거절하게 된다. 1959년 9월 고신지도부는 부산서부교회 전도사 백영희에게 항명을 이유로 제명한다. 고신과 분리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④ 개교회주의 교회 운영 : 1960.1. - 1989.8. 고신에서 분리된 백영희는 교회가 교권에서 벗어나서 진리 연구와 신앙자유를 실제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을 절감했다. 신사참배와 6․25점령지의 외부 환난 그리고 해방 후 총회 교권에 의한 고신의 고통 및 고신 내부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모든 상황을 장로교의 헌법 첫 원리인 ‘양심자유’ ‘교회자유’로 비판한다면, 장로교 교권 구조는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함을 절감했다. 막상 교회가 결정적 시기가 되면 아주 세상 정치와 꼭 같은 행태를 보이게 되므로 순수하게 신앙노선을 지키려는 진리 중심의 활동은 항상 교권에 의하여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경과 교회사 그리고 가깝게는 자신이 속한 한국교계의 현실을 그렇게 읽었다. 아쉬운 점은 평화시 교권체계는 일사분란하게 협력하며 복음사업을 크게 할 수 있지만, 그는 조직의 힘에서 나오는 결과보다 하나님 한 분의 뜻에 순종하는 그 자체를 중시했다. 이것만 복음운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고신에서 분리가 되자 바로 개교회주의로 자신의 앞날 진로를 확정했다. 그의 교회 운영안은 장로교 교회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교회가 가질 내용인 교리나 교훈은 장로교의 정통 신앙을 가장 바른 신앙노선으로 인정하고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다만 참된 정통노선이란 어느 한 시점에서 고정될 수 없고 정통노선을 지키면서 그 안에서 꾸준히 자라가는 것으로 보았으며 실제 그의 평생은 늘 성경연구와 실행으로 자기의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만일 그가 고신 내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늘 교권 비판에만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장기간 내분은 더 많은 모순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시점에 그는 제명되었고 이후 조용히 자기 갈 길을 걸었다. 그가 원한 대로 그의 생전 다시는 교권 때문에 교회가 가야 할 길을 허비한 적이 없었다. 한국교회를 향한 10만여 페이지 성경해석과 그의 세계적인 교회 부흥 모습은, 꼭 신앙노선을 변경하거나 세상 방법을 도입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통신앙을 더 엄하게 지키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었다. ⑤ 성경 연구와 그의 설교 세계 고신 내에 있을 때는 교회의 화평을 고려하여 항상 불가피한 문제 외에는 발언 하나도 조심했다. 그러나 일단 교단에서 자유롭게 되자 그는 성경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깨달은 대로 발표하는 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이미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을 통해 세계 정통교리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단정했기 때문에 향후 그가 깨닫고 연구하는 바는 이미 확인해 둔 정통교리 범위에서 이탈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깨달음을 찾을 수 있었다. 중생 이후 성도의 할 일은 무엇이며, 그 충성의 성격은 무엇인가? 칼빈 이후 정통 교리가 머뭇거리고 있던 이 부분을 삼분론과 중생교리에서 찾은 그는 더 이상 교단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자유롭게 자기가 성경을 읽으며 깨달은 것을 발표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천국을 가게 되는 것은 한번 중생으로 절대 확정이 되지만, 그 이후 죽는 날까지 말씀대로 산 생활에 따라 천국의 자기 건설은 달라지는 것이니 믿는 사람의 영은 단번 중생으로 영원불변의 구원을 받고, 우리의 마음과 몸은 평생 각자가 말씀대로 산 생활에 따라 그 성화가 다르다는 것이 백영희의 구원론이다. 1960년대 초반 이단 시비로 격화되었던 이 교리는 현재 40년을 지나며 그 지지가 확산되어 현재 국내 정상급 보수신학교에서 쉽게 원용되거나 같은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2000년대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유전공학과 그 성공사례들은 40여 년 전에 이미 증명된 이 교리들의 기초가 되는 백영희 삼분론에 의하여 간단하게 해석되며 오히려 최근 발견되는 결과들이 과거 정통교리를 더 자세하게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교리 발표 초기 주변 교회가 조금만 냉정하게 학문적인 자세로 그의 주장을 대했었더라면 정통 교리의 범위 안에서 발전의 방향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알고 접하고 있던 고신 합동 통합 계열의 모든 교단들은 일제히 기존 정통설과 다른 주장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부터 하게 된다. 그를 비판한 그 동안의 교계 발표문 중에서는 그가 실제 깨닫고 가르친 기초 사실조차 확인한 경우가 없었다. 그렇지만 백영희는 형제 교단에 대하여서는 최대한 변론을 삼가고 성경과 세월의 증거에 맡기며 자기 갈 길만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향한 모든 정죄는 오해와 모함으로 밝혀졌고 그의 생존 마지막 기간은 한국교회가 그를 너무 미화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갈 길에 충성하는 자세, 그리고 대외 해명과 논쟁에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대하지 않는 경건이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당시 교계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사실 그에게로 쏠리는 교인과 일반 목회자들의 동요가 문제였다. ⑶ 주요 연대기 자료 ① 출생 1910년: 7월 29일,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1045번지 출생 ② 성장과정 1918: 9세, 동네 서당에서 3년간 한문 수학 1920: 11세, 야학 2개월 후 7월에 ‘웅양공립보통학교' 입학 1924: 초등학교 5학년 2학기말에 가정 경제문제로 자퇴 1926: 17세에서 19세까지 3년간 도일, 탄광 공장 등 세상 경험 1928: 11월 귀국. 12월 11일 개명리 이경순과 결혼 1929: 9월 1일. 처가 개명리 이주 및 양조장 사업출발 ③ 신앙과정 1936: 7월 4일, 말세 공포와 죄인 형벌의 공황심 폭발, 교회 출석 1937: 농산교회 세례기록 "백영희, 남27세, 1937.1.31. 개명리, … 시취 고도열" 1938: 1월 18일 진주성경학원 예과 및 1학년 1학기 수료 ④ 목회생활 1939: 개명에 기도소로 목회 시작, 전도한 장년 남녀 8인 출발 1944: 1-5월. 총독부 예배장소합동령 발령, 거부하고 예배 지속 .6월 26일. 일본어강습소로 예배당 강제 징발 해방 때까지 예배당 담옆 교인 뜰에서 예배 지속 1945: 4월, 4개월 후 해방된다는 기도 중의 음성을 듣고 마지막 신사참배 고비 이길 힘 얻음 .8월, 덕유산 금식기도 중 4일째 해방을 맞아 하산 8월 20일, 고제면 독립축하대회 주민 초빙으로 축하연설 1946: 6월 23일, 박윤선 진해신학강좌에 3명 청년 파송 .9월 20일, 일신여학교 고려신학교 개교식 1회 입학 1948: 1월, 가조교회집회, 전도사 인허 .3월, 봉산교회집회, 17개 교회 400명 참석 1949: 5월 1일, 위천교회 부임 .7월 18일, 위천초등학교 졸업식 국기배례 사건 표면화 1950: 3월 1일, 3.1절 면민 기념식 경찰 출동, 기념식 무산 주교생 전체 교사 상대 경찰 폭행, 환난 승리 4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국기배례를 국기주목으로 변경 6월 2일, 고려신학교 재입학 ⑤ 부산서부교회 1952: 7월 27일, 부산서부교회 부임 1954: 6월 17일, 고려신학교 제8회 졸업 1956: 12월 성탄절 직후, 고신 비판 불간여 서원하고 삭발 1957: 강도사 합격, 8월전국사경회 제1회 시작, 평생 지속 1958: 5월전국사경회 제1회 시작, 평생 지속 1959: 4월, 고신교단의 강도사 해임 통고. 6월 11일, 고신교단의 시무해임 통고 .9월 8일, 고신교단의 ‘상회명령불복종’ 이유로 제명 통고 ⑥ ‘총공회’ 노선 출발 1960: 장로교 내의 공의회 지향 개교회주의 교회 연대 출발 11월 29일 목사안수 1961: 서부교회 주일학교 통합반 시범운영 주일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전환 학생회 찬양대 등 순수 예배에서 발전된 각종 단체의 해체 1963: 주일학교 통합반 운영체제 전면 시행 1966: 5월 26일, 제1회 총공회 정식 출발 1970: 주일학교와 장년반 각각 1천명 출석 기록 본당 신축 1976: 3월, 총공회 산하 목사과정인 ‘목회자양성원’ 설립 1979: 2월 5일, 주일학교 취재보도로 서부교회의 교계 전면등장 1982: 3월 10일, 설교록 출간 연구기관인 ‘백영희목회연구소’ 발족 1989: 8월 27일, 백목사님 새벽설교 강단을 지키다가 순교 3. 백영희와 고신의 분리 ⑴ 백영희 분리의 직접 원인이 된 7대 사건 ① 예배당 소송 문제 해방 후 신사참배 처리 문제를 두고 장로교는 양분 사태를 맞는다. 백영희는 고신의 지도부가 전폭 신뢰하는 유망 목회자로서 고신 내부에서 고신의 대 총회측 투쟁 방법에 대한 불법성을 비판하게 된다. 바로 ‘예배당 소송’이었다. 이는 고신 내의 첫 공개비판이며 그 비판은 예배당 소송을 책임지고 나가던 송상석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되었다. 송상석의 주 무대가 되는 마산지역에도 백영희의 영향력은 컸기 때문이다. 총회측과 고신이 교단을 분리하던 1952년을 전후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양측의 치열한 교회 확보전이 벌어지고 많은 논쟁과 다툼을 거치며 결국 예배당 소유권 판단을 세상 법정에 맡기게 된다. 투쟁 초기에는 고신이 신앙 원칙을 엄히 지켜 한상동부터 자신의 초량교회를 완전 포기하고 삼일교회로 개척하게 되지만, 고신 전체 교회가 문제였다. 투쟁이 진행되면서 고신은 총회측과 마찬가지로 투쟁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이로 인하여 양측의 분쟁은 교권투쟁이지 진리투쟁이 될 수 없게 되자 고신 내부에서는 진리 범위 내에서의 투쟁을 요구했고 그 전면에 백영희가 서게 된다. 초기 한상동과 다수 고신 인사들은 백영희를 지지했고 송상석은 교단 내에서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송상석의 목회하던 마산지역에서 백영희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중진 목회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법적 투쟁의 여러 기술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교단의 존립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에서 한상동은 중립에 서게 되고 이런 분위기는 급격하게 송상석 지지의 결과가 된다. 한부선 박윤선 및 평소 백영희를 지지하던 고신 내 많은 유력인사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영희의 이런 주장은 고신 지도부 내에 확실한 반대파를 만들게 된다. 최후 고신의 입장을 하나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한상동은 최종적으로 송상석 편을 들게 된다. 백영희의 비판은 한상동까지 그 대상으로 삼게 된다. 백영희는 불신 판사와 법에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판단을 맡기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비판했다. 박윤선의 반소 활동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② 유엔군 철수 반대 문제 소송 반대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질 때 국내 상황은 6․25전후 국가안보가 최우선이었다. 인민군 치하의 북한 교회가 처리되는 것을 본 남한 교회와 그곳에서 탈출한 한국교계는 공산화에 대한 절정의 반대를 하게 된다. 전후 유엔군이 철수하는 문제가 대두되자 한국사회는 각계각층이 일치단결하여 이를 반대했고 교회도 그 속에 일부가 되어 궐기를 했다. 고신 역시 이 운동에 동참을 했고 미국의 친분 있는 교회들을 통해 미국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백영희는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있지만, 한국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 단체와 연대하여 유엔군이 물러가면 죽는다고 유엔군 철수 반대운동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크게 비판을 하고 나선다. 그는 신사참배를 한국교회가 힘이 없어 당한 강간으로, 그리고 유엔군 철수 반대운동은 한국교회가 스스로 세상을 향해 좋아서 하나된 화간으로 비판했다. 신사참배보다 그 죄질이 더 크다고 외친 그의 비판 때문에 고신 지도부는 크게 당황하였고 이후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으나 이 사건은 고신 지도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게 된다. 고신의 총회 기록에 남겨 이를 회개하자는 이인재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아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국가의 독재정치체제든 민주화운동이든 세상에 속한 문제를 향해 교회가 세상 차원에서 개입하고 활동하는 것을 엄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부교회 출신이고 지역구 안에 서부교회가 있었지만 서부교회는 그의 평생 광고에 이름 한번 올린 적도 없었다. ③ 진리운동의 상징, 고신 교단지 '파수꾼' 출간 문제 고신은 장로교 총회측에 비하여 모든 면으로 현저히 열세였지만 '파수꾼'이라는 책자를 통해 왜 고신의 노선이 옳은지 등을 조목조목 열거해가며 한국교회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신앙 논리적으로 분명 고신이 옳았기 때문에 파수꾼의 외침은 한국교회를 향한 고신의 진리 운동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글을 올리는 이들을 시기하는 내분이 있어 파수꾼은 출간 경비에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폐간이 된다. 백영희는 서부교회 단독으로 파수꾼을 복간하고 외부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운영주체를 변경한다. 서부교회 단독으로 출판권을 가지고 이전과 같이 계속 출간이 되자 파수꾼의 정통성과 의미를 다시 평가한 고신 지도부에서 출판권 인도를 재요청하였고, 출간의 역사나 최초 공로 등을 고려할 때 아까운 사업이지만 고신의 중심부가 출간하는 것이 신앙사리라고 판단하여 이를 인도하게 된다. 1957년 강도사 시취 때 백영희는 고신이 진리운동을 한다면서 파수꾼을 버렸다고 강하게 외치게 된다. 이때 비판은 특히 한상동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되고 강도사 시취 평가를 맡은 한상동은 백조사를 향해 대책망을 하게 되었으며 백영희는 더 이상 기대할 지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게 된다. ④ 진리의 종들 제거 문제 고신은 해방 직후 '진리운동'을 내세우고 출발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박형룡 박윤선 등 많은 인재들이 고신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러나 모이면 다수결로 결정을 하게 되고 교권을 잡은 쪽은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므로 고신이 첫출발을 할 때는 해방 직후 비장한 마음으로 죽기를 각오하며 옳은 진리를 한국교회에 세우겠다는 일념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서 교권단체가 되었다. '진리'보다 '전법'에 밝은 사람들이 교권지도부를 차지하게 되고 이것은 또 다른 교권을 낳고 이에 대한 반대 인물은 제거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고신의 모습을 두고 그는 지도층과 끝까지 갈등을 빚는다. 현재 한국 보수교단의 주요 인사는 1950년대 고신에서 교육을 받고 이후 합동 등 타교단으로 진출하거나 독자 길을 걷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신을 거쳤던 이들이 진리의 좁은 잣대가 아닌 교권의 좁은 잣대로 배제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한국교단의 판세는 확연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백영희는 꾸준히 제거되는 인물들을 두고 앞서 투쟁했고 그 자신 역시 제거되었다. ⑤ ICCC 가담 문제 1950년대에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두 단체가 있었다. 용공으로 비판 받는 WCC라는 진보 단체와 반공단체로 비판 받는 ICCC라는 보수 노선의 단체 대립이었다. 오늘까지 두 단체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으며 고신의 경우 그 노선의 경향 때문에 WCC를 반대하는 ICCC에 적극 동참하고 나서게 된다. 6․25 전후의 국가적 반공 분위기는 ICCC로 하여금 한국교회를 특별하게 보게 하였고 한국교회 역시 신앙의 보수성과 전후 사회 분위기는 고신으로 하여금 적극 가담하게 하였다. 선진기독교국의 지원 역시 적지 않은 유인이었다. 고신의 ICCC 가담이 대세가 되던 시점, 백영희는 교회가 공산주의의 교회 탄압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죽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지만, 반공주의 운동에 나서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반공을 구호로 걸고 나선 ICCC는 순수 신앙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의 요소가 있고 교회 타락의 또 하나의 함정이라는 입장이었다. 한상동 박윤선의 ICCC 박사학위에 대하여 학자가 아닌 한상동의 박사학위 수여를 직접 비판하였다. 한상동은 학위 받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이후 박사학위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고신이 성경과 신앙 원칙에 충실했던 시기이므로 그의 원칙에 철저한 주장은 선배들을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 감정과 바탕에 깔린 근본적 교단 운영의 기초 철학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인간적 섭섭함이 있었고 바탕에는 근본적으로 주남선형의 신앙순수주의와 한상동형의 교단 운영을 고려한 대외 활동형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었다. 교권을 가진 쪽이 한상동형이었고 주남선형의 백영희는 그 신앙성향 자체가 세대결을 하지 않을뿐더러 외치다가 제거되면 제거된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인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는 데까지만 나가지 그 이후 교단의 형편은 하나님께 맡기고 걸어갔다. 인간의 계획적인 조성이나 활동에 의한 결과물로서의 교회나 교단이 아니라 하나님 인도를 따라가다 만나게 된 현실로서의 교회나 교단의 모습을 백영희는 당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인도로 보고 그것에 충실한 것을 땅 위에서의 자신 역할로 보았다. 그래서 그의 고신 내 영향력을 생각할 때 쉽게 제거된 것도 이상한 일이고, 크게 부흥된 서부교회에 대한 자신의 死後 조처를 고려할 때도 하나님의 사후 직접 역사를 수종하는 자세였을 뿐, 자신의 인간적 판단과 조처로 훗날을 설계하지 않았다. 그의 독립노선 내내 그리고 최종까지 걸어간 길이었다. ⑥ 고신신학교 정치학 강사 문제 송상석은 고신의 모든 법적 처리와 대응, 해결을 최일선에서 맡았던 인물이었다. 고려신학교는 정치학 강사 선임을 하면서 그의 세상 행정과 법률체계에 대한 전문가적 수준과 교단 내 많은 문제를 맡아 처리한 경력을 고려하여 교회 정치 과목 교수로 임명했다. 백영희는 이 과목이 교회가 성경적으로 운영되도록 가르치는 과목인데, 세상 정치와 법을 잘 안다고 송상석을 강사로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반대를 했다.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은 다음 학기에 송상석 대신 한상동에게 강의를 맡기게 된다. 송상석의 분노는 짐작할 수 있다. 고신이 교권교단이 아니라 진리로 나가는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 훗날 보복으로 매장 당하게 될 가능성을 알면서도 외쳤던 것이 백영희였다. 그런 외침 하나하나가 누적되면서 그는 고신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⑦ 고려신학교의 세상 학교화 고려신학교가 신학교로만 있을 때는 아주 왕성했고 진리를 잘 가르쳐서 한국 신학교 중에 제일 으뜸이었다는 것이 백영희의 근본 시각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세상식으로 키우며 길러야 한다 해서 복음병원과 대학을 만들고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바, 이 과정에서 한명동의 역할이 지대했다. 백영희는 한명동에게 고신의 세상 학교화는 머리 좋은 학생들이 의과나 법과로 가고 신학과는 세상 학습 부진학생의 유입으로 학교 분위기가 세상 학업 평가 위주로 흐를 것을 경고하며 이를 반대했다. 복음병원 역시 동기는 좋았으나 한부선이 시발 시켰는데 이 문제 때문에 몇 년이 지난 다음 한번은 언쟁을 벌였다. 한부선은 복음병원을 하나님이 세웠다고 설득했고 백영희는 한부선의 실질적 주관 지도를 비판했다. 병원이 복음운동으로 지속되기는 어렵고 경제운영체로 나가게 될 것임을 알고 반대했다. 교회가 복음운동을 위해 세상 제도를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지 그 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는 없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추진된 당시 고신의 대학화 준비를 백영희는 이미 고신의 정체성을 잃게 될 주요 사안으로 보고 반대를 했다. ⑵ 고신에서 분리된 배경 ① 교권의 견제 심리 백영희는 고신 지도부로서 소장파였다. 그러나 그 영향력과 비판은 자신의 위치 이상이었다. 당시 교단으로서의 고신이 향후 한국교계를 진리운동으로 석권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가졌더라면 고신은 백영희를 배제할 이유가 없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단으로서의 고신을 지도할 입장에 있었던 인물들이 진리운동으로서의 고신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당대 교단 운영을 맡은 지도층으로서는 백영희를 교단 운영차원에서 또는 인간적 감정으로 배제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주남선이 아쉽다. 주남선은 여러 면으로 자기 위상을 넘어서던 백영희를 거창교계에서 끝까지 수하에 두었다. 박윤선은 1987년 백영희를 부산으로 찾아갔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경우여서 그로서도 남달리 격려를 했다. 백영희는 고려신학교 때 그에게서 배웠던 그 정통노선에 감사했다. 박윤선과 백영희는 외형 소속으로는 고신과 분리되었으나 내용적으로 그들은 고신의 출발 정신을 끝까지 가졌던 이들이다. 고신이 그들을 고신 범위 내에 둘 수 있었더라면, 고신 내부 교권행사에 불편이 있었을지라도 오늘 고신의 안팎은 한국교회에서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② 비판의 강도 백영희 입장에서 지도부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한다면 당시 지도부 입장을 이해하는 측에서는 백영희의 지나친 비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주남선에게 대했듯이 고신 지도인사들에게 그렇게 깍듯했더라면 더욱 아껴주고 길러주었지 않았겠느냐는 반론을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백영희가 지킨 평생의 신앙성향이었다. 그는 처음 믿을 때부터 생존 마지막 순간까지 대외 접촉의 원리를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보겠는가? 한번 신앙의 선을 분명하게 넘어가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신사참배도 6.25점령지 인민군 치하에서도, 그리고 역대의 모든 정권하에서도, 또 고신과 교계를 상대할 때도 단 한번도 타협이나 중도 포기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그를 품을 수 있는지를 두고 고신의 역량과 성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③ 한상동형 신앙과 주남선형의 충돌 한상동은 고신의 지도자로서 정치 투쟁에 유력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활동과 실력은 그의 경건과 목회실력 등 그를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는 그런 장점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그는 주요 고비마다 그리고 그의 인생 후반 전체를 통해 교회 정치가였다. 반면 주남선은 그를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바로 그런 장점, 즉 한상동과는 반대의 성향을 가진 목회자였다. 사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로 주남선 한상동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주남선의 활동기록은 그렇게 관찰될 만한 자료가 없고 한상동의 정치 행정력만 곳곳에 돋보일 뿐이다. 그것이 한상동이었고 그것이 바로 주남선이었다. 고신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주남선형 고신과 한상동형 고신은 분화현상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백영희는 주남선형이었다. 단 주남선과 달리 한상동형의 고신의 움직임을 읽는 눈이 있었다. 교단으로서의 고신 전체를 지도하는 한상동은 격변의 교회사를 거치면서 때로는 고신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원칙론을 보류하고 타협을 고민할 위치에 있었다. 반면 주남선은 어떤 상황 전개에도 상관없이 원래 가야 할 신앙노선 하나만 생각하는 형이다. 그런 고민을 하기 전에 이미 생을 끝마쳤으므로 양자의 직접 분리는 지상에서는 없었다. 그러나 주남선은 갔으나 주남선형으로 질주하고 있던 백영희를 통해 고신 내면의 두 흐름이 충돌하고 분리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남선 50주년 기념 학술회에 참가한 주남선 신앙 목격자들은 학술회에 주남선이 없다며 항의성 질의를 한 적이 있다. 신학의 방법론을 모르는 일선 교회 교인들의 오해 때문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59년 백영희 제거를 고신 내의 주남선형 제거로 본다면,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고신 역사를 통해 한상동은 세월이 갈수록 교단 운영을 위해 많은 방법과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다.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으나 과거 주남선과 그 이후 백영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반대 방향에 주력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앙을 좁게 해석하는 것과 넓게 해석한 차이라고 한다면 보다 순화된 표현일까? ④ 고신 범위를 넘어서는 교회사적 방향 백영희가 훗날 결과적으로 보여준 여러 성공 사례들을 만일 그가 고신 내부에서 시도했더라면 논쟁만 하다가 세월을 다 보냈을 것 같다. 신학자로서 박윤선의 경우도 고신이 그를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은 많이 듣고 있지만 고신 역사 전체를 놓고 냉정하게 본다면 정치적 의도 외에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꼭 고신이라는 교단의 범위 안에서만 이 시대 정통 복음운동을 전개하지 않겠다는 섭리가 그렇게 나타난 것 같다. 신학계에서 박윤선이라고 한다면, 목회 일선에서 백영희의 의미를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 될 것 같다. 교단으로서의 고신도 필요하여 한편으로 고신 교단을 한국교회에 배치시켜 두었고, 한국교계 전체의 정통신학 유지를 위해 박윤선을 전국 곳곳으로 유랑을 시켰으며, 백영희를 통해 고신의 출발 노선이 조용하게 발전하여 나갈 수 있는 실제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외 많은 분들도 교회사의 넓은 의미로 본다면 필요한 자리에 필요하게 시킬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3. 심층 연구 과제 초두 안내처럼 그에 대한 종합적 기록은 외부에 나타난 것이 없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다양한 신앙경력 중 어느 일부만 접하고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를 이 글에서 소개한 이상으로 평가하는 분들이면 이번 글은 목차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정도 듣고 지나갈 이름으로 상대하는 분들이라면 이 정도 글이라도 길었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과거 교계에 제공된 백영희 관련 ‘추정치’ 연대 자료 등이 정확한 자료로 확인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동시에 고신 관련 백영희 신앙노선의 분리 과정에 대하여 백영희 신앙노선 내부에서 지역 교회를 향하여 ‘내부시각’으로 간략하게 설명한 차원 정도라고 이해되어, 그 동안 이 지역교계에서 제기된 다른 시각의 평가가 있다면 비교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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