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질문) 기독교는 하나님독재주의 or 신정정치? (쉬/1364)

주제별 정리      

                           10. (질문) 기독교는 하나님독재주의 or 신정정치? (쉬/1364)

서기 0 1

10. (질문) 기독교는 하나님독재주의 or 신정정치? (쉬/1364)

어떤 표현이 더 좋은 거에요?


(답변) 일반적으로는 신정주의가 좋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만큼은 독재주의가 낫습니다.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평범하게 강의를 할 때는 기독교를 '신정정치'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신학교 교회정치 과목에서 기본적으로 사용할 용어로는 '신정정치'입니다.


그러나, 현재 21세기 한국교회라는 상황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신정정치인데 그 신정정치가 '독재주의'라는 모습으로 부각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교회나 한국사회보다 더 발전하고 더 선진화된 환경을 가진 나라나 그런 나라의 교회라고 한다면 '독재주의'라는 표현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말할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는 교과서적 표현이고 교리적 요약입니다. 그러나 다윗 시대 같이 순종하던 교회는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복'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합왕 때처럼 강퍅한 때는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징계'로 나타납니다.

오늘 인간이 중심되고 인간의 머리숫자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런 사회의 영향이 교회까지 그대로 미치게 되어 이제 교회가 기독교를 민주주의라고 선언하고 나선 이때에는 교회정치가 하나님 한분으로 통치되는 것인데 그 통치의 형태가 '독재주의'라는 모습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교 강의실 안에 갇혀 양떼들이 이리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없는 학자들은 기독교를 신정정치라고 표현할 것이나, 목회현장을 한시도 떠날 수 없는 목회자들은 기독교를 '독재주의'로 표현하고 양떼들이 걸어갈 길을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답변보조) 질문에 대한 백목사님 답변 (설교록 발췌)

이래서,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또 하나님은 타협주의냐 독재주의냐, 민주주의냐 독재주의냐? 하나님은 뭐이냐? 저 사람의 사상은 하나님은 독재주의자로 믿는다, 저 사람의 그 신앙 사상의 정치 사상은 민주주의로 믿는다, 또 저 사람은 하나님은 절대 타협이 없는 그 주권의 하나님이시다, 또 저 사람 생각은 지금 하나님은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는 그런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런 것 몇 가지만 구별하면은 성경 잘 몰라도 탈선되지 안하면 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라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예정하신 대로 행하고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법칙대로 행하지 거게서 양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참고 견디시고 또 기다리시고 또 용서하시고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참아 기다리시고 하는 그것이지 하나님이 인간의 다소에 뭐 타협이나 그런 것을 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독재주의다. 왜? 신주주의라고 하지 안하고 왜 독재주의라 하는가? 독재주의라 하는 그 이유가....( 1988. 9. 17. 새벽 설교에서 )


이영인 목사님께서 정확히 답변을 해주셨으나
백영희 목사님께서 자세히 답변을 해 주신 부분이 있어서 링크를 겁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988. 9. 17. 새벽




▷ 요약 및 적용 :

1)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 : 인본주의

2) 독재주의의 다른 이름 : 신본주의, 하나님 절대주권주의

3) 총공회내의 신주주의(신정주의)의 다른 이름 : 신본주의를 가장한 인본주의
- 독재주의란 성경적인 용어가 나왔음에도 총공회 내에서 신정주의니 신주주의니 하는 유사 용어를 끌어 들이는 것은 민주주의를 동경하는 중심 또는 인본을 두려워하는 중심에서 발동한 것이니 인본과의 타협이다. 총공회내에서 신주주의(신정주의)는 용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신본주의를 가장한 인본주의이며 말장난이다.

4) 총공회밖의 신정주의의 정체 : 대의 명분은 신본이나 실제 움직이면 민주주의만 나옴
- 이름과 이론 뿐인 신본주의이니 겉은 신본이나 속은 인본주의요 그러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것은 전부 그 움직임이 민주주의 곧 인본주의임.
- 북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고는 함. 그러나 무신론이 그들의 속내임.
- 예) 그들의 선거제도와 그 실태, 그들의 교회정치체제, 그들의 의사결정체제(종다수가결), 그들의 성문헌법... 등등


☞ 인본주의를 엿볼수 있는 신정주의에 대한 교계의 한 시각
- 왜 우리가 일반교계의 신정주의를 그대로 사용할수 없는지에 대한 한 실례

-----------------------------------------------------------------

< 링크된 해당 홈페이지가 삭제되어 해당 페이지 추가 : 2004.6. 22 >

[화요칼럼-김삼환] 왜 민주주의가 아닌 신정주의인가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왜 민주주의가 아니고 神政主義인가?

오늘날 현대인의 절대적인 가치기준이며 삶의 문화 자체가 되어버린 민주주의가 교회개혁을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주장들이 난무한다.민주주의 신념과 방법론은 주권재민,다수결의원칙,아래로부터의 의사결정과정,권위의 분산과 상호견제 등인데 이러한 것들이 신성한 교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첫째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는 자연법 사상은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자연 앞에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또한 모든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말해주고 있지만 이러한 인격적 평등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권위의 체계를 부정하는 요소로는 작용할 수 없음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로마서 13장 참조).

결국 자연법 사상과 자연법 사상이 기초가 되어 있는 민주주의 이론은 성경적 진리의 일면을 표방할 뿐이지 전면을 통전적으로 지향하지는 못하고 있다.하나님의 교회는 자연법 사상이나 민주주의를 파괴해서는 안되지만 이들로 환원되어질 수는 없는 통전적 진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자연법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케 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선을 추구하는 신정주의는 인간학적인 선의 추구인 민주주의를 파괴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로는 환원되어지지 않는 신앙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교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찬양하는 곳이다.초대교회시절 유다를 대신할 사도로 맛디아를 택할 때 사용한 제비뽑기는 신정주의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으며(사도행전 1:26),성도들에 의한 일곱 집사의 선출을 사도들이 안수례로 추인한 것도(사도행전 6:1∼6) 민주적 선출이 신정주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법 사상에서 비롯된 만인 평등사상이나 사회계약설,이성주의 등은 그 한계가 극복되지 못할 경우 그 대표적인 역기능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의 개교회주의,권위부정,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무지 등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결국 프로테스탄티즘의 존재론적인 한계,영성적 한계 등을 노정시키게 된다.이 시대의 순복음 운동은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성령에 의한 에큐메니컬적인 교회일치,권위에 대한 순종 그리고 신앙의 참된 신비 등을 추구하는 영성회복운동이다.

둘째로 민주주의 또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타락한 교권을 허무는 방향보다는 참된 교권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역사적 진보주의 사관이 이미 폐기된 현재의 시점에서 살펴볼 때 인류의 역사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닌 단지 복잡화로 발전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민주주의가 자기비판의 초월성을 상실하고 그 자체로 절대시될 때 이는 또 하나의 악이 된다.

교회사를 볼 때 교권 타락을 규탄한 마틴 루터의 개혁운동도 있었지만 교권확립을 위해서 10세기에 클루니 수도원에서 전개된 개혁운동도 있었다.클루니 수도원에서 전개된 개혁운동이란 바로 교권확립운동으로서 평신도인 왕이나 귀족들에게 넘어간 성직자 서임권을 성직자가 되찾는 일이었다.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교권주의는 비판받아야 하나 교권확립은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청이 되어야 한다.아니 교권 타락을 규탄하는 운동보다 참된 교권을 확립하는 것이 더욱 진정한 개혁운동이다.

민주주의 신념은 참된 권위를 확립시키는 것보다 타락한 권위를 허무는데 더욱 봉사한다.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권위의 원천을 다수에게 두어 권위를 분산시키고 서로 견제시키는 것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민주주의를 극복하고 신정주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셋째로 민주주의 논리에서는 개체가 전체에 앞서 존재하며,전체는 언제나 개체들의 합으로만 상정된다.그러나 영성적인 직관은 통전적이어서 처음부터 전체를 전체로서 동시에 직관한다.전체는 개체부분들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민주주의는 부분들에 대한 분석들의 총합을 전체로 간주하는 의사결정의 과정을 필연코 밟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비영성적이다.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드(1091∼1153)가 민주주의적인 방법론을 배척한 이유를 알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이 택하신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겸허한 자기 반성으로 교회를 치리함이 가장 바람직한 교회치리 방법이다.바로 이러한 경우가 성경이 주장하는 신정주의의 교회치리 방식이다.이러한 신정주의 치리방식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위를 다시 아래로 위임하는 방법을 통하여 무한한 교회성장을 기약케 해준다.구약에서의 모세의 치리가 그러했고 신약에서의 사도들의 회(會)가 그러했다.이 경우에 요청되는 것은 택하심을 받은 주의 종들이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으로 자신들에게 위임된 하나님 치리 권위의 ‘초월성’을 부단히 회복하는 일이다.


[2000년 12월 26일 국민일보]
--------------------------------------------------------------------


(답변) 좋은 참고 말씀을 덧붙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자가 1차로 적은 답변을 여러 면으로 잘 보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읽는 분들이 답변자보다 '답변보조'로 적은 글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다면 답변자를 대신해서 이곳에 수고해 주시기를 부탁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답변자 글은 답변자가 읽어보면 참 쉬운 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답변자와 아주 가깝게 접촉하는 분들은 답변자 글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을 많이 합니다.

이곳과 같은 중심으로 같은 시각으로 글을 적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항상 이곳 답변자 자리에서 수고하실 수 있습니다. 이곳 답변자와 같은 차원인데 글이 더 쉽다면 주 답변자로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답변자보다 답변 내용을 더 잘 정리하고 요약한다면 현 답변자는 기쁜 마음으로 새로 오신 목회자를 이 자리에 앞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런 자세를 이곳은 백영희신앙노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보다 답변에 앞서 있는 분들이 계신데, 도무지 숨어만 있어 어떻게 이 자리에 모셔 낼 재주가 없어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곳이 이곳 답변을 도맡고 있는 것은, 지나친 겸손은 지나친 교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하나 고려했고, 또 하나는 지난 날 계속 되어온 업무가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현 상황에 이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답변을 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은 이곳 답변자나 관리자 이메일로 연락 주셔서 이곳에서 백영희신앙노선에서 보는 시각으로 안내를 서 주셨으면 합니다.
0 Comments
State
  • 현재 접속자 34 명
  • 오늘 방문자 1,435 명
  • 어제 방문자 81 명
  • 최대 방문자 1,435 명
  • 전체 방문자 2,546,249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