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생
(1) 지옥
① 지옥의 의미
지옥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존재들에게 영원히 하나님 없이 살게 하는 영계를 말헌다. 세상 기간동안은 비록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에게도 택자의 훈련을 위해 자연은총을 허락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나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일단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면, 그때는 하나님 없이 산 사람에게는 하나님 없는 상태로 영원토록 살게 한다(막9:48, 눅16:24-25).
막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눅16:24-25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② 지옥의 모습
▪ 지옥의 그림자인 세상
부활 후에라야 가 볼 수 있는 곳이 지옥이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가야 할 천국과 불택자들이 가게 될 지옥을 뒤섞어 보여 주고 있다. 물질계이므로 영계의 천국과 지옥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얼마든지 느끼고 유추하여 알 수 있도록 충분하게 지옥의 상태와 그곳의 고통의 상황을 알게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은 전부가 지옥의 견본품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미 지옥을 맛보고 있으며, 세상을 지옥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오늘 세상의 고통은 그 시작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의 모든 고통은 그날에 당할 고통의 견학 경험 차원에서 주시는 정도다. 영원히 갈수록 커지는 고통 속에서,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남을 나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방법을 제거한 상태다. 택자의 잘못된 기능이 그곳에서 불택자들과 함께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문제는 천국 편에서 살펴보겠다.
▪ 유황 불구렁텅이
지옥의 형편은 영원히 유황 불구렁텅이다. 유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장 혹독한 고통이라는 뜻이고, 불구렁텅이라는 말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다. 오늘 이 땅 위에서의 불구렁텅이는 무엇이든 존재 자체가 쇠하고 없어 지게 되지만 그 곳은 불구덩이의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면서도 존재는 없어 지지 않는다.
그런데 부활한 육체는 아무리 불에 태워도 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냥 고통만 영원히 받게 된다. 오늘 세상에서 산소와 땔감이 있으면 타는 이런 자연의 불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은 그때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표시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이 세상 육체가 이 세상 유황불에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부활한 신령한 불택자들의 몸이 그 부활한 몸으로 느끼고 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형벌이 영원 계속될 것이다(계19:20, 20:14-15).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20:14-15’은 p.444 참조
▪ 은혜의 완전 차단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 차단되는 데 있다. 오늘 세상은 비록 타락을 했다 해도 자연은총에 속한 것을 공급하며 아직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옥의 형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정없이 완전 단절시켜 버린다.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하나님 없이는 단 한 번의 자유도 단 하나의 자유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100% 차단되는 곳이 지옥이다.
오늘 형편으로 말한다면 물 한 방울도 주어지지 않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상태가 된다. 성경은 그 정도만 표현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 차단된 상태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어떤 불편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조금만 양심을 쓴다면 충분히 실감할 것이다(눅16:24, 유1:6).
‘눅16:24’ p.449 참조
유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눅16:24-26’은 P.449 참조
▪ 자기중심의 집합소
지옥에 온 모든 존재는 악령으로부터 불택자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자기중심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다 동원하여 자기를 위하게 만들어야 행복을 누리는 것이 그곳에 온 존재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이를 자기중심의 ‘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온 모든 존재가 꼭 같이 자기를 중심으로 남을 이용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위에서 던져주는 것은 없는 상태이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오직 한 가지 생애법만을 가진 상태가 되면 바로 모든 형태의 지옥 고통이 다 발생하게 된다.
자기가 남에게 이용되는 것은 한없이 고통스럽고 남을 자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한없이 즐기는 자기중심의 존재들만 모아놓은 곳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투쟁과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이 비록 지옥이지만 강제로 남을 억누르고 제압할 수는 없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은 존재가 전혀 자기중심으로 움직여 주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자연은총에 속한 것까지도 전혀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눅16:24-26).
*하나님의 목적 항목에서 존재 별 의미를 중복 준비
<불택자의 항변>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불택자를 만들었다고 적었으면 그대로 알고 그대로 받아 들이며 그대로 감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면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성 때문에 이 부분은 항상 반론이 많고 마음에 의문도 많다.
불택자는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 진다. 그럴 때마다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고 믿으면 쉽다. 밥상에 작은 그릇과 큰 그릇이 필요하여 그렇게 만들었다.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 해도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까? 그 것은 타락 후부터 가지게 된 자기 중심의 악, 악령이 넣어 준 오해 오판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자 절대자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영원 무궁토록 책임을 지니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다. 그 다음이 만물 중에 아담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위치와 사명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수고를 한다. 타락 후의 통치는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는 악의 즐거움이다. 그 생각 그 자세 그 시각으로 불택자를 대변하는 것이니 대변처럼 보이나 유혹이다.
아담 다음에는 동물이, 그 다음에는 식물이, 그리고 땅이 제일 바닥에 있다. 땅이 제일 편하고 식물은 수고를 더 해야 한다. 타락 한 후에는 모두가 땅을 짓밟는다. 땅은 고통하며 억울해 한다. 그러나 땅이란 하나님이 만들 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며 동물과 인간을 떠받드는 용도로 만들었다. 흙이 풀처럼 뿌리와 줄기와 꽃을 피우려면 불편하고 불행스럽다. 흙은 처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면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풀은 토끼를 보면서 저렇게 행복하게 다니면 좋겠다고 하지만 토끼는 왜 나를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뛰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원망을 한다. 불택자는 택자를 위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존재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졌다. 오늘은 악령의 미혹을 받아 원망을 하나 막상 지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니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어 있다. 감탄하게 되어 있다.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영계의 영물도 이 땅 위에 물질계 만물도 그리고 지옥의 모든 존재도 주님의 구원과 목적과 영생을 향해 찬탄하게 되어 있다.
사11:6~9, 천년왕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이 땅 위의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시했다. 타락 후 오늘 죄악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이리는 어린 양을 침노하는 원수이며 표범이 어린 염소를 살해한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는 함께 살 수가 없는 존재적 본질적 원수다. 이리와 사자는 풀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염소와 양과 소는 풀을 먹는 짐승이다. 오늘은 타락으로 저주를 받은 세상이어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가 변형이 되었고 본질 본성이 다 악화가 되어 그렇다. 그런데 죄악 세상이 끝나고 영생의 나라가 열리게 되면 그 나라에는 침노가 없고 원수도 없으며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살인이 없다. 그래서 이리이 다시는 어린 양을 물어 뜯지 않는다고 6절부터 적었다. 그런데, 7절에서 사자는 소처럼 풀을 뜯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풀을 뜯는 것은 살해가 아니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며 공격도 아니다. 이는 평화로운 모습이며 생명이 살아 가는 은혜의 양식을 받아 가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풀을 기준으로 본다면, 토끼가 뜯어 먹든 사자가 뜯어 먹든 침략을 당하는 것이고 억울한 것이며 살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풀을 기준으로 보고, 풀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풀은 동물들과 생명이 다르고 생존의 방식이 다르며 섭취와 활용과 배출과 이어 지는 자손의 번성을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기준으로 살아 간다. 생의 법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동물을 기준으로 보면 표범이 어린 염소를 잡아 먹어야 사는 것이 오늘이다. 그 날이 되면 표범이 염소를 잡아 먹는 오늘의 죄악 세상과 달리 염소와는 친근하게 살면서 염소와 표범이 함께 풀을 뜯어 먹을 것인데 이 모습은 천년왕국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천년왕국의 모습은 우리의 영생의 모습이다. 풀도 동물도 사람도 하나님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풀의 생명은 그 존재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생사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면 노아 홍수에 인류를 죽인 것은 몰살이며 잔인이며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것은 인간이 하나님 중심을 떠나 인간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니 그렇다. 기준의 설정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물과 식물을 전부 인간이 최고의 중심에 앉아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홍수로 죽여 버리는 것은 잔혹한 것이고, 사자와 맹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소를 잡아 먹고 식물을 뜯어 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풀은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자기를 뜯어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창조주께 항의를 할 것이다. 그 나라는 누구에게나 항변권이 주어 진다. 그리고 오늘 죄악 세상에서는 사자가 풀을 뜯어 먹지 않기 때문에 맹수들은 선하게 보이고 우리 눈에 선하게 보는 사슴과 소와 양을 몹쓸 맹수로 본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홀로 계시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를 만드시려고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를 잘 만들어 보시려고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과 교구재를 모두 동원했다. 나눗셈을 가르치기 위해 돌을 둘로 깨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돌도 인간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노아 홍수보다 더 잔혹하다 할 것이다. 곡식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까고 벗기고 으개고 삶고 반죽을 하고 불에 구워 버린다면 얼마나 아플까? 그렇지 않다. 우리 기준으로 보니 곡식이 깨지고 삶기니 아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존재 이유와 생존의 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식물들로서는 유명해 지는 것이요 천하에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니 오히려 환영하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먹는다는 이 말씀으로, 우리는 존재별 생의 법칙과 의미를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택자를 만들고 영원히 불 가운데 던지는 고난을 두고, 택자 기준이나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겠지만 불택자의 원래 존재 이유를 본다면 그 것이 만유주가 계획한 성취이므로 그 자체를 두고 시비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택자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어떻게 만들고 움직이고 어떻게 처리해도 궁극적으로 존재적 의미에 따라 수긍할 일이고 지켜 보며 감탄할 것뿐이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와 같아 보이는 불택자를 만들어 그들이 우리와 달리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들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처참해 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다. 우리 기준에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라고 했으니 이렇게 봐야 한다. 불택자는 이런 세계를 모르니 이런 내용을 알면 억울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가린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다 밝혀 지고 나면 불택자들도 소에게 먹히는 풀과 같이 그들의 존재 의미에 따라 하나님께는 감탄과 찬양을, 우리에게는 부러움을,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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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불은 이 땅 위에 유황불로 비교한다. 유황이 불에 타며 화력이 강해진다. 생명에게는 고통이 가중된다. 그런데 이 불이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계속된다. 성경이 이렇게 말을 했으면 일단 이대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실상을 살펴 본다면, 물질계 오늘의 유황불은 유황의 성분과 산소가 있어야 불이 붙는다. 영계인 지옥에도 산소가 있을까? 물질의 세계에서 물질을 불태울 때 유황불이 가장 혹독하다면 불택자의 부활한 신령한 몸에게는 무엇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일까? 영계의 고통은 물질계에서 육체에 가해지던 고통의 재료와 형태와 차원은 아닐 것이다.
매를 맞아야 실토를 하는 사람도 있고, 사상 때문에 매를 맞아 죽어도 실토를 하지 않으나 가족이 겪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전향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고 명예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를 하며 동지가 된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지 못하게 될까 해서 자살을 택한 정치인도 있다. 사람마다 고통에 견디는 종류가 다르다. 일단 부활을 하게 되면 물질이었던 몸도 물질 상황을 초월한다. 출신은 물질이나 물질의 한계를 벗어 버린다. 그래서 신령한 몸이 된다. 이 몸에게 이 땅 위에서 고통을 줄 수 있는 유황 성분의 화력이 고통을 주고 그 고통 때문에 마음이 고통스러운 정도에서 그칠까?
물질계에서 물질의 제한을 받았을 때 고통으로 미리 비교를 해서 알리기 위해 유황불을 말씀하셨으나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면 신령한 몸이 고통을 받되 가장 혹독한 고통이 무엇일까? 그 고통을 오늘 물질계에 사는 우리에게 미리 경계를 하려고 유황불로 표시했다.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영계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겪을 때 가장 혹독한 상태를 찾으면 된다. 마음도 그렇다. 오늘은 불택자의 영이 죽어 하나님과 천국과 대속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천국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도 느낌도 없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알게 된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렇게 하나씩 찾아 보면 된다.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고 그 복음이 자기 옆을 지나 갔고 자기 집을 맡은 선지자가 마당에 자기 개들과 뒤엉켜 줏어 먹고 있었는데 그 때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옥을 가면 그 상황 그 아쉬움 그 안타까움 그 가치의 상실을 마음껏 느끼게 해 주신다. 눈을 활짝 띄워 마음껏 보게할 때 홍포입은 부자의 고통이 된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느끼려면 숯불에 유황불에 펄펄 뛰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아주 쉽게 잘 이해가 되고 효력이 있다. 지옥의 불은 화롯불이 아니고 숯불도 아니며 물질로 된 오늘의 유황불이 아니다.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이제 모든 것을 알아 간다. 알아 갈수록 통탄할 것, 고통스러울 것이 지옥의 불이다.
.4. 영생
(1) 지옥
① 지옥의 의미
지옥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존재들에게 영원히 하나님 없이 살게 하는 영계를 말헌다. 세상 기간동안은 비록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에게도 택자의 훈련을 위해 자연은총을 허락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나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일단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면, 그때는 하나님 없이 산 사람에게는 하나님 없는 상태로 영원토록 살게 한다(막9:48, 눅16:24-25).
막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눅16:24-25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② 지옥의 모습
▪ 지옥의 그림자인 세상
부활 후에라야 가 볼 수 있는 곳이 지옥이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가야 할 천국과 불택자들이 가게 될 지옥을 뒤섞어 보여 주고 있다. 물질계이므로 영계의 천국과 지옥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얼마든지 느끼고 유추하여 알 수 있도록 충분하게 지옥의 상태와 그곳의 고통의 상황을 알게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은 전부가 지옥의 견본품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미 지옥을 맛보고 있으며, 세상을 지옥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오늘 세상의 고통은 그 시작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의 모든 고통은 그날에 당할 고통의 견학 경험 차원에서 주시는 정도다. 영원히 갈수록 커지는 고통 속에서,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남을 나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방법을 제거한 상태다. 택자의 잘못된 기능이 그곳에서 불택자들과 함께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 이 문제는 천국 편에서 살펴보겠다.
▪ 유황 불구렁텅이
지옥의 형편은 영원히 유황 불구렁텅이다. 유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장 혹독한 고통이라는 뜻이고, 불구렁텅이라는 말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다. 오늘 이 땅 위에서의 불구렁텅이는 무엇이든 존재 자체가 쇠하고 없어 지게 되지만 그 곳은 불구덩이의 고통은 영원히 지속되면서도 존재는 없어 지지 않는다.
그런데 부활한 육체는 아무리 불에 태워도 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냥 고통만 영원히 받게 된다. 오늘 세상에서 산소와 땔감이 있으면 타는 이런 자연의 불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은 그때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표시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이 세상 육체가 이 세상 유황불에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부활한 신령한 불택자들의 몸이 그 부활한 몸으로 느끼고 당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형벌이 영원 계속될 것이다(계19:20, 20:14-15).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20:14-15’은 p.444 참조
▪ 은혜의 완전 차단
지옥의 가장 큰 고통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 차단되는 데 있다. 오늘 세상은 비록 타락을 했다 해도 자연은총에 속한 것을 공급하며 아직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옥의 형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정없이 완전 단절시켜 버린다.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하나님 없이는 단 한 번의 자유도 단 하나의 자유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100% 차단되는 곳이 지옥이다.
오늘 형편으로 말한다면 물 한 방울도 주어지지 않고 한 줄기 빛도 없는 상태가 된다. 성경은 그 정도만 표현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 차단된 상태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면 어떤 불편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조금만 양심을 쓴다면 충분히 실감할 것이다(눅16:24, 유1:6).
‘눅16:24’ p.449 참조
유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눅16:24-26’은 P.449 참조
▪ 자기중심의 집합소
지옥에 온 모든 존재는 악령으로부터 불택자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자기중심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다 동원하여 자기를 위하게 만들어야 행복을 누리는 것이 그곳에 온 존재들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이를 자기중심의 ‘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온 모든 존재가 꼭 같이 자기를 중심으로 남을 이용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위에서 던져주는 것은 없는 상태이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오직 한 가지 생애법만을 가진 상태가 되면 바로 모든 형태의 지옥 고통이 다 발생하게 된다.
자기가 남에게 이용되는 것은 한없이 고통스럽고 남을 자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한없이 즐기는 자기중심의 존재들만 모아놓은 곳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투쟁과 고통이 영원히 계속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이 비록 지옥이지만 강제로 남을 억누르고 제압할 수는 없다.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은 존재가 전혀 자기중심으로 움직여 주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자연은총에 속한 것까지도 전혀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눅16:24-26).
*하나님의 목적 항목에서 존재 별 의미를 중복 준비
<불택자의 항변>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불택자를 만들었다고 적었으면 그대로 알고 그대로 받아 들이며 그대로 감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면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성 때문에 이 부분은 항상 반론이 많고 마음에 의문도 많다.
불택자는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 진다. 그럴 때마다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고 믿으면 쉽다. 밥상에 작은 그릇과 큰 그릇이 필요하여 그렇게 만들었다.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 해도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까? 그 것은 타락 후부터 가지게 된 자기 중심의 악, 악령이 넣어 준 오해 오판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자 절대자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영원 무궁토록 책임을 지니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다. 그 다음이 만물 중에 아담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위치와 사명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수고를 한다. 타락 후의 통치는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는 악의 즐거움이다. 그 생각 그 자세 그 시각으로 불택자를 대변하는 것이니 대변처럼 보이나 유혹이다.
아담 다음에는 동물이, 그 다음에는 식물이, 그리고 땅이 제일 바닥에 있다. 땅이 제일 편하고 식물은 수고를 더 해야 한다. 타락 한 후에는 모두가 땅을 짓밟는다. 땅은 고통하며 억울해 한다. 그러나 땅이란 하나님이 만들 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며 동물과 인간을 떠받드는 용도로 만들었다. 흙이 풀처럼 뿌리와 줄기와 꽃을 피우려면 불편하고 불행스럽다. 흙은 처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면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풀은 토끼를 보면서 저렇게 행복하게 다니면 좋겠다고 하지만 토끼는 왜 나를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뛰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원망을 한다. 불택자는 택자를 위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존재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졌다. 오늘은 악령의 미혹을 받아 원망을 하나 막상 지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니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어 있다. 감탄하게 되어 있다.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영계의 영물도 이 땅 위에 물질계 만물도 그리고 지옥의 모든 존재도 주님의 구원과 목적과 영생을 향해 찬탄하게 되어 있다.
사11:6~9, 천년왕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이 땅 위의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시했다. 타락 후 오늘 죄악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이리는 어린 양을 침노하는 원수이며 표범이 어린 염소를 살해한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는 함께 살 수가 없는 존재적 본질적 원수다. 이리와 사자는 풀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염소와 양과 소는 풀을 먹는 짐승이다. 오늘은 타락으로 저주를 받은 세상이어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가 변형이 되었고 본질 본성이 다 악화가 되어 그렇다. 그런데 죄악 세상이 끝나고 영생의 나라가 열리게 되면 그 나라에는 침노가 없고 원수도 없으며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살인이 없다. 그래서 이리이 다시는 어린 양을 물어 뜯지 않는다고 6절부터 적었다. 그런데, 7절에서 사자는 소처럼 풀을 뜯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풀을 뜯는 것은 살해가 아니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며 공격도 아니다. 이는 평화로운 모습이며 생명이 살아 가는 은혜의 양식을 받아 가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풀을 기준으로 본다면, 토끼가 뜯어 먹든 사자가 뜯어 먹든 침략을 당하는 것이고 억울한 것이며 살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풀을 기준으로 보고, 풀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풀은 동물들과 생명이 다르고 생존의 방식이 다르며 섭취와 활용과 배출과 이어 지는 자손의 번성을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기준으로 살아 간다. 생의 법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동물을 기준으로 보면 표범이 어린 염소를 잡아 먹어야 사는 것이 오늘이다. 그 날이 되면 표범이 염소를 잡아 먹는 오늘의 죄악 세상과 달리 염소와는 친근하게 살면서 염소와 표범이 함께 풀을 뜯어 먹을 것인데 이 모습은 천년왕국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천년왕국의 모습은 우리의 영생의 모습이다. 풀도 동물도 사람도 하나님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풀의 생명은 그 존재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생사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면 노아 홍수에 인류를 죽인 것은 몰살이며 잔인이며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것은 인간이 하나님 중심을 떠나 인간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니 그렇다. 기준의 설정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물과 식물을 전부 인간이 최고의 중심에 앉아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홍수로 죽여 버리는 것은 잔혹한 것이고, 사자와 맹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소를 잡아 먹고 식물을 뜯어 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풀은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자기를 뜯어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창조주께 항의를 할 것이다. 그 나라는 누구에게나 항변권이 주어 진다. 그리고 오늘 죄악 세상에서는 사자가 풀을 뜯어 먹지 않기 때문에 맹수들은 선하게 보이고 우리 눈에 선하게 보는 사슴과 소와 양을 몹쓸 맹수로 본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홀로 계시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를 만드시려고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를 잘 만들어 보시려고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과 교구재를 모두 동원했다. 나눗셈을 가르치기 위해 돌을 둘로 깨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돌도 인간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노아 홍수보다 더 잔혹하다 할 것이다. 곡식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까고 벗기고 으개고 삶고 반죽을 하고 불에 구워 버린다면 얼마나 아플까? 그렇지 않다. 우리 기준으로 보니 곡식이 깨지고 삶기니 아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존재 이유와 생존의 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식물들로서는 유명해 지는 것이요 천하에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니 오히려 환영하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먹는다는 이 말씀으로, 우리는 존재별 생의 법칙과 의미를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택자를 만들고 영원히 불 가운데 던지는 고난을 두고, 택자 기준이나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겠지만 불택자의 원래 존재 이유를 본다면 그 것이 만유주가 계획한 성취이므로 그 자체를 두고 시비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택자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어떻게 만들고 움직이고 어떻게 처리해도 궁극적으로 존재적 의미에 따라 수긍할 일이고 지켜 보며 감탄할 것뿐이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와 같아 보이는 불택자를 만들어 그들이 우리와 달리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들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처참해 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다. 우리 기준에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라고 했으니 이렇게 봐야 한다. 불택자는 이런 세계를 모르니 이런 내용을 알면 억울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가린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다 밝혀 지고 나면 불택자들도 소에게 먹히는 풀과 같이 그들의 존재 의미에 따라 하나님께는 감탄과 찬양을, 우리에게는 부러움을,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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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불은 이 땅 위에 유황불로 비교한다. 유황이 불에 타며 화력이 강해진다. 생명에게는 고통이 가중된다. 그런데 이 불이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계속된다. 성경이 이렇게 말을 했으면 일단 이대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실상을 살펴 본다면, 물질계 오늘의 유황불은 유황의 성분과 산소가 있어야 불이 붙는다. 영계인 지옥에도 산소가 있을까? 물질의 세계에서 물질을 불태울 때 유황불이 가장 혹독하다면 불택자의 부활한 신령한 몸에게는 무엇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일까? 영계의 고통은 물질계에서 육체에 가해지던 고통의 재료와 형태와 차원은 아닐 것이다.
매를 맞아야 실토를 하는 사람도 있고, 사상 때문에 매를 맞아 죽어도 실토를 하지 않으나 가족이 겪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전향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고 명예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를 하며 동지가 된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지 못하게 될까 해서 자살을 택한 정치인도 있다. 사람마다 고통에 견디는 종류가 다르다. 일단 부활을 하게 되면 물질이었던 몸도 물질 상황을 초월한다. 출신은 물질이나 물질의 한계를 벗어 버린다. 그래서 신령한 몸이 된다. 이 몸에게 이 땅 위에서 고통을 줄 수 있는 유황 성분의 화력이 고통을 주고 그 고통 때문에 마음이 고통스러운 정도에서 그칠까?
물질계에서 물질의 제한을 받았을 때 고통으로 미리 비교를 해서 알리기 위해 유황불을 말씀하셨으나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면 신령한 몸이 고통을 받되 가장 혹독한 고통이 무엇일까? 그 고통을 오늘 물질계에 사는 우리에게 미리 경계를 하려고 유황불로 표시했다.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영계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겪을 때 가장 혹독한 상태를 찾으면 된다. 마음도 그렇다. 오늘은 불택자의 영이 죽어 하나님과 천국과 대속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천국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도 느낌도 없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알게 된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렇게 하나씩 찾아 보면 된다. 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고 그 복음이 자기 옆을 지나 갔고 자기 집을 맡은 선지자가 마당에 자기 개들과 뒤엉켜 줏어 먹고 있었는데 그 때 알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옥을 가면 그 상황 그 아쉬움 그 안타까움 그 가치의 상실을 마음껏 느끼게 해 주신다. 눈을 활짝 띄워 마음껏 보게할 때 홍포입은 부자의 고통이 된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느끼려면 숯불에 유황불에 펄펄 뛰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아주 쉽게 잘 이해가 되고 효력이 있다. 지옥의 불은 화롯불이 아니고 숯불도 아니며 물질로 된 오늘의 유황불이 아니다.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이제 모든 것을 알아 간다. 알아 갈수록 통탄할 것, 고통스러울 것이 지옥의 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