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본)
④ 교리의 발전
* 생명성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성을 가졌다. 바르게 닦은 교훈의 터에서는 더욱 완전한 데로 자라간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니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도를 사모하여 계속 자라 가야 한다(주10). 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주10)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히6:2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살후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처음 믿을 때 서툴지만 세월 속에 아는 것이 자라 가야 정상이다. 교리는 생명의 그 말씀을 요약한 것이니 바른 교리는 기계처럼 또는 돌처럼 그치지 않고 자라간다. 칼빈 이후 발전 없이 4백년 이상을 한 곳에 머문 적은 있고 중세 1천년처럼 혼선과 곁길을 간 경우는 있지만, 바른 교리는 마침내 바른 방향으로 자라 간다.
* 안정성
자라간다는 것은 변질 변경 둔갑이 아니라 말씀의 원래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과 설명은 달라진 듯해도 알고 보면 바뀐 것이 없다. 진리란 변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교리는 교회의 근본인데 늘 안정적이다. 교회의 진리를 삼키기 위해 발전을 앞세워 변질 변경을 안팎에서 시도한다. 돌처럼 기계처럼 유지하는 것은 안정성이 아니라 생명이 없어 그런 것이다. 아이는 자라 가며 보행이 더욱 안전해진다. 건강과 지식도 모든 면에서 정상적으로 자랐다면 사람은 그 사람인데 더 안정 된다.
* 진정성
교리는 생명성 때문에 자라가면서 마치 변한 듯하나 오히려 더욱 원 모습을 갖게 되어 더 안정된다. 갈수록 더욱 원만하게 모르던 것을 밝힌다. 윤곽만 알던 우리가 교리의 발전 때문에 말씀에 담아 주신 무한의 세계를 더욱 알아 간다. 교리가 성경의 정리에 진정성을 가지면 그렇다.
그러나 성경 외적 인간과 세상 것이 교리에 들어오면 진리가 흔들린다. 생명의 존재는 병해와 원수가 있다. 교회의 오판과 세상의 비판에 지식 투쟁을 겪으면서 자라가고 또 안정이 된다.
원수는 교리 발전을 위해 세상 철학과 과학을 도입하려 한다. 역사 이후에 중단한 적은 없다. 갈수록 더욱 극심해 지는데 신학이 이를 막는다 하나 신학을 통해 들어 온 원수가 대부분이다. 논리 싸움은 끝이 없으나 열매를 보아 나무는 판명되고 만다. 논쟁은 불가피하나 논의에서 그치고 세월에 맡겨 놓는 것이 지혜롭다.
* 합리성
교리는 논리적으로 증명이 되면서 자라간다. 교리는 성경을 이치에 따라 체계화한 것이니 현재도 이치에 맞고 발전이 되었을 때도 역시 이치적이다. 또한 현재와 지난날 자라나온 이치를 맞춰 보면 자라가야 할 방향과 내용을 알 수 있다. 어떤 교리도 다른 교리와 다르지 않고, 언제 교리라 해도 훗날의 교리와 맞춰 보면 맞아질 때 진정한 교리다. 여기서 벗어난 부분은 교리가 아니다.
신경을 통한 교리의 형성 과정,
1. 역사의 신경
교회의 신앙고백 = 신경 = 신조는 교회를 규정짓는 동시에 교회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석가는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천국에 갔을 듯하다 라는 사상은 WCC라고 하며, 정통 교회는 이런 생각과 이런 사상을 받아 들이는 교회를 교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교회를 흔드는 유혹이 심할 때 그 유혹을 전제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발표하여 교회를 지켜 냈고 오늘까지 왔다.
2. 오늘의 신경
마귀는 에덴동산 이후 오늘까지 항상 그 마귀다. 별별 죄를 들고 나오지만 자세히 보면 마귀는 그 마귀이고 유혹도 별별 것을 사용하나 창조적인 새 수법은 없고 늘 뻔한 수법으로 반복한다. 그렇다 해도 우선 보기에는 마치 처음 사용하는 수법처럼 보이고 어린 교인들이 놀라며 유혹을 받기 때문에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유혹을 전제로 그 당시 교인들이 가장 쉽게 또 핵심 내용을 파악하도록 신경을 적어 왔다. 오늘도 당연히 필요하다.
3. 신경의 오해
말하자면 웨스트민스터 신경이 신앙의 교리와 신경의 전부는 아니다. 학자마다 역사 속에서 특별히 손에 꼽는 신경들이 있고 그들에게 배운 교인들은 마치 그 신경들만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는데, 분량과 내용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성경만 정확무오하고 사람이 정리한 교리나 신경은 틀릴 수도 있고, 옳지만 어려서 더 보충해야 하는 것도 있고, 또 다른 시대의 유혹을 상대 할 때 아쉬울 수도 있다. 훗날의 마귀는 발표된 신경으로 다 막아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이전 시대를 감당한 신경으로 이전 시대에 재미를 보던 마귀는, 이전 시대를 감당한 신경으로 막기 어려운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면 새 시대의 교회는 새로 유혹하는 마귀를 상대하기 위해 이전 시대의 신경 위에 그 연장선에서 또 성벽을 보충 구축 보강한다. 즉, 지난 날의 모든 신경은 훗날의 신경으로 이어 지며 자라 간다. 동시에 오늘의 마귀를 상대할 때 수천 년 전의 신경으로는 속수무책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신경은, 그 시대의 미혹과 그 시대의 방어였고 이를 잘 연구한 다음 현 시대의 마귀 유혹과 이 유혹을 막고 이겨 낼 신경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어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학자는 현재를 기준으로 확보된 증거를 가지고 학설을 세운다. 이미 과거용일 수밖에 없는 내재적 한계를 가졌다. 그런데 학자가 되기 위해 그동안 배웠고 확신했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여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된 학자가 자기가 잘 알고 자기가 남보다 탁월한 자기 분야를 강조하고 싶지 현재 닥치고 곧바로 닥쳐 올 것을 상대하고 싶지 않는 성향을 가지기 쉽다. 이로 인해 자기가 배웠고 잘 아는 과거 신경을 오늘에 강조를 하면서 오늘의 미혹을 대처하는 일에 그대로 사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거 소개에 그친다면, 정작 오늘의 교회의 시선을 오도할 수도 있다.
4. 소개한 신경
교계에서도 좋은 교회의 좋은 교인들이 제대로 알고 믿자는 운동이 많고 자연스럽게 원어 공부에서부터 각종 신학 교양을 전문 전공 수준으로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역사적 정통 교회의 신경 공부 운동이 교계의 곳곳에서 전개 되고 있다. 부러운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공회 교인은 기본적으로 그 출처와 배경이 세상적으로 무식하여 신경까지 공부하다가 성경 읽기조차 문제가 생길까 하여 성경만 주력한다. 성경만 읽다가 이단으로 나간 것이 역사적 이단이라는 점 때문에 신학 상식이 필요하고 신경이 필요한 것도 알지만 성경과 신학 또는 성경과 신경을 동시에 잘 붙들기가 어려워 일단 신학자들이 보면 참 무식하다 또는 이단이다 또는 위험하다 라고 보일지라도 공회 노선 자체의 역량이 이단이나 이상하게 나갈 정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과거도 있고 역량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된다.
그리고 신경에 대해서 모처럼 한 분이 소개해 주셨으니 한번쯤 읽으며 눈에 익혀 두는 것도 좋다. 그러나 공회의 현재 교리와 성경 해석과 신앙의 방향에서는 이 모든 역사적 신경이 모두 포함 되어 있다. 혹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는 착시다. 다만 공회의 교인들 중에 역사적 신경을 잘 몰라서 그 신경으로 본다면 이단 될 소리를 할 때 이단설이라고 하지 말고 일단 공회가 이 신경을 알면서도 이렇게 발표할 때는 어떤 면을 생각했는지 이해적으로 지켜 보면 된다. 그리고 확실하게 의심이 되면 이 곳에 지적해 주시면 어느 한 공회 교인의 개인적인 착오인지, 강조가 지나쳤는지, 공회가 회개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공회의 성장이 그 신경을 넘어 선 상황인지 구별하면 된다.
25.7.19. /연구소/총공회/발언, 댓글/
(2023년본)
④ 교리의 발전
* 생명성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성을 가졌다. 바르게 닦은 교훈의 터에서는 더욱 완전한 데로 자라간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니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도를 사모하여 계속 자라 가야 한다(주10). 벧전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주10)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히6:2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살후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처음 믿을 때 서툴지만 세월 속에 아는 것이 자라 가야 정상이다. 교리는 생명의 그 말씀을 요약한 것이니 바른 교리는 기계처럼 또는 돌처럼 그치지 않고 자라간다. 칼빈 이후 발전 없이 4백년 이상을 한 곳에 머문 적은 있고 중세 1천년처럼 혼선과 곁길을 간 경우는 있지만, 바른 교리는 마침내 바른 방향으로 자라 간다.
* 안정성
자라간다는 것은 변질 변경 둔갑이 아니라 말씀의 원래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과 설명은 달라진 듯해도 알고 보면 바뀐 것이 없다. 진리란 변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교리는 교회의 근본인데 늘 안정적이다. 교회의 진리를 삼키기 위해 발전을 앞세워 변질 변경을 안팎에서 시도한다. 돌처럼 기계처럼 유지하는 것은 안정성이 아니라 생명이 없어 그런 것이다. 아이는 자라 가며 보행이 더욱 안전해진다. 건강과 지식도 모든 면에서 정상적으로 자랐다면 사람은 그 사람인데 더 안정 된다.
* 진정성
교리는 생명성 때문에 자라가면서 마치 변한 듯하나 오히려 더욱 원 모습을 갖게 되어 더 안정된다. 갈수록 더욱 원만하게 모르던 것을 밝힌다. 윤곽만 알던 우리가 교리의 발전 때문에 말씀에 담아 주신 무한의 세계를 더욱 알아 간다. 교리가 성경의 정리에 진정성을 가지면 그렇다.
그러나 성경 외적 인간과 세상 것이 교리에 들어오면 진리가 흔들린다. 생명의 존재는 병해와 원수가 있다. 교회의 오판과 세상의 비판에 지식 투쟁을 겪으면서 자라가고 또 안정이 된다.
원수는 교리 발전을 위해 세상 철학과 과학을 도입하려 한다. 역사 이후에 중단한 적은 없다. 갈수록 더욱 극심해 지는데 신학이 이를 막는다 하나 신학을 통해 들어 온 원수가 대부분이다. 논리 싸움은 끝이 없으나 열매를 보아 나무는 판명되고 만다. 논쟁은 불가피하나 논의에서 그치고 세월에 맡겨 놓는 것이 지혜롭다.
* 합리성
교리는 논리적으로 증명이 되면서 자라간다. 교리는 성경을 이치에 따라 체계화한 것이니 현재도 이치에 맞고 발전이 되었을 때도 역시 이치적이다. 또한 현재와 지난날 자라나온 이치를 맞춰 보면 자라가야 할 방향과 내용을 알 수 있다. 어떤 교리도 다른 교리와 다르지 않고, 언제 교리라 해도 훗날의 교리와 맞춰 보면 맞아질 때 진정한 교리다. 여기서 벗어난 부분은 교리가 아니다.
신경을 통한 교리의 형성 과정,
1. 역사의 신경
교회의 신앙고백 = 신경 = 신조는 교회를 규정짓는 동시에 교회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석가는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천국에 갔을 듯하다 라는 사상은 WCC라고 하며, 정통 교회는 이런 생각과 이런 사상을 받아 들이는 교회를 교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교회를 흔드는 유혹이 심할 때 그 유혹을 전제로 교회는 신앙 고백을 발표하여 교회를 지켜 냈고 오늘까지 왔다.
2. 오늘의 신경
마귀는 에덴동산 이후 오늘까지 항상 그 마귀다. 별별 죄를 들고 나오지만 자세히 보면 마귀는 그 마귀이고 유혹도 별별 것을 사용하나 창조적인 새 수법은 없고 늘 뻔한 수법으로 반복한다. 그렇다 해도 우선 보기에는 마치 처음 사용하는 수법처럼 보이고 어린 교인들이 놀라며 유혹을 받기 때문에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유혹을 전제로 그 당시 교인들이 가장 쉽게 또 핵심 내용을 파악하도록 신경을 적어 왔다. 오늘도 당연히 필요하다.
3. 신경의 오해
말하자면 웨스트민스터 신경이 신앙의 교리와 신경의 전부는 아니다. 학자마다 역사 속에서 특별히 손에 꼽는 신경들이 있고 그들에게 배운 교인들은 마치 그 신경들만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는데, 분량과 내용의 종류에 이르기까지 성경만 정확무오하고 사람이 정리한 교리나 신경은 틀릴 수도 있고, 옳지만 어려서 더 보충해야 하는 것도 있고, 또 다른 시대의 유혹을 상대 할 때 아쉬울 수도 있다. 훗날의 마귀는 발표된 신경으로 다 막아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이전 시대를 감당한 신경으로 이전 시대에 재미를 보던 마귀는, 이전 시대를 감당한 신경으로 막기 어려운 부분에 집중한다. 그러면 새 시대의 교회는 새로 유혹하는 마귀를 상대하기 위해 이전 시대의 신경 위에 그 연장선에서 또 성벽을 보충 구축 보강한다. 즉, 지난 날의 모든 신경은 훗날의 신경으로 이어 지며 자라 간다. 동시에 오늘의 마귀를 상대할 때 수천 년 전의 신경으로는 속수무책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신경은, 그 시대의 미혹과 그 시대의 방어였고 이를 잘 연구한 다음 현 시대의 마귀 유혹과 이 유혹을 막고 이겨 낼 신경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어야 한다.
현대적 의미의 학자는 현재를 기준으로 확보된 증거를 가지고 학설을 세운다. 이미 과거용일 수밖에 없는 내재적 한계를 가졌다. 그런데 학자가 되기 위해 그동안 배웠고 확신했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여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된 학자가 자기가 잘 알고 자기가 남보다 탁월한 자기 분야를 강조하고 싶지 현재 닥치고 곧바로 닥쳐 올 것을 상대하고 싶지 않는 성향을 가지기 쉽다. 이로 인해 자기가 배웠고 잘 아는 과거 신경을 오늘에 강조를 하면서 오늘의 미혹을 대처하는 일에 그대로 사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거 소개에 그친다면, 정작 오늘의 교회의 시선을 오도할 수도 있다.
4. 소개한 신경
교계에서도 좋은 교회의 좋은 교인들이 제대로 알고 믿자는 운동이 많고 자연스럽게 원어 공부에서부터 각종 신학 교양을 전문 전공 수준으로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역사적 정통 교회의 신경 공부 운동이 교계의 곳곳에서 전개 되고 있다. 부러운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공회 교인은 기본적으로 그 출처와 배경이 세상적으로 무식하여 신경까지 공부하다가 성경 읽기조차 문제가 생길까 하여 성경만 주력한다. 성경만 읽다가 이단으로 나간 것이 역사적 이단이라는 점 때문에 신학 상식이 필요하고 신경이 필요한 것도 알지만 성경과 신학 또는 성경과 신경을 동시에 잘 붙들기가 어려워 일단 신학자들이 보면 참 무식하다 또는 이단이다 또는 위험하다 라고 보일지라도 공회 노선 자체의 역량이 이단이나 이상하게 나갈 정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과거도 있고 역량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된다.
그리고 신경에 대해서 모처럼 한 분이 소개해 주셨으니 한번쯤 읽으며 눈에 익혀 두는 것도 좋다. 그러나 공회의 현재 교리와 성경 해석과 신앙의 방향에서는 이 모든 역사적 신경이 모두 포함 되어 있다. 혹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는 착시다. 다만 공회의 교인들 중에 역사적 신경을 잘 몰라서 그 신경으로 본다면 이단 될 소리를 할 때 이단설이라고 하지 말고 일단 공회가 이 신경을 알면서도 이렇게 발표할 때는 어떤 면을 생각했는지 이해적으로 지켜 보면 된다. 그리고 확실하게 의심이 되면 이 곳에 지적해 주시면 어느 한 공회 교인의 개인적인 착오인지, 강조가 지나쳤는지, 공회가 회개를 해야 할지, 아니면 공회의 성장이 그 신경을 넘어 선 상황인지 구별하면 된다.
25.7.19. /연구소/총공회/발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