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 건설구원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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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2 11:19
3) 건설구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기본구원은, 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면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데, 믿는 순간 이렇게 기본적으로 받아가지는 것 일체를 기본구원이라 한다. 이에 비하여 이번에 살펴볼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믿은 후 평생을 살아가며 각자가 제각각 따로 건설해 나가는 신앙생활 일체를 말한다.
평생 자기가 건설해 나가야 하는 것이므로 ‘건설구원’이라 하고, 그 건설은 자기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깨끗해지게 되면 우리 속에는 의로 살 수 있는 기능이 많아지므로 ‘기능구원’이라고도 한다.
이 건설구원은 기존의 정통교리가 안개 속을 더듬 듯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건설구원 교리를 정리하여 일목 요약한 교리체계로 세계 교회에 제시한 것은 백영희 신앙노선이다.
(1) 건설구원의 요건
① 성령의 역사
안 믿던 사람을 믿게 만든 기본구원도 전적 성령의 역사지만, 믿게 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건설구원의 성화역사도 성령으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 없는 성화는 없다고 단정하면 된다.
건설구원은 믿는 사람의 남은 평생 신앙생활이다. 평생토록 말씀대로 살아도 성령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마음이 단독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건설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말씀을 지켜도 성화는 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름도 우리 심신이 성령을 따라 성령을 닮는 것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심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사다(요일2:27, 요14:26).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14:26 ‘...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롬6:12-18 ‘...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히5: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약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② 순종
안 믿는 사람이 처음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항거를 해도 무조건 강제로 중생시킨다. 이것이 기본구원이다. 그러나 믿게 된 사람을 평생 고쳐가는 건설구원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알고 따르고 순종해야만 고쳐진다.
영을 살릴 때는 성령이 사람의 의사에 상관없이 살려서 구원하지만 이제 구원을 받고 믿게 된 사람은 전적 자유성을 허락하여, 자기 마음이 거부하면 성령도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지 강제로 그 사람 마음 문을 열고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건설구원의 두 번째 요건은 우리 심신의 순종이다. 순종 없는 성화는 없다.
이 순종을 다른 말로는 ‘믿음’이라고 한다. 기본구원도 믿음으로 받은 것이지만, 건설구원도 실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꼭 같은 표현이지만, 기본구원의 믿음은 믿어지게 하여 믿게 하고, 건설구원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도록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즉 믿음은 ‘은혜’를 강조했고, ‘순종’은 행동을 강조한다(롬6:12-18, 히5:8-10, 약2:14-26).
③ 대속과 진리
처음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 ‘단번’ ‘영원’히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믿은 이후 평생 신앙생활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처음 믿을 때 구원해 주신 과거의 은혜로만 기억하고 감사하기 쉽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대속의 은혜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믿은 이후 평생 우리가 순종하고 사는 신앙생활에서도 그 대속의 은혜는 한시도 빠짐없이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 해야 한다.
처음 믿을 때 대속의 은혜는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천국을 가게 했고, 이제 믿은 이후 신앙생활에서 ‘대속’의 은혜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순종을 할 때에도 겉으로는 인간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순종을 하지만, 실은 그 인간의 노력과 순종만을 가지고는 흉내만 낼뿐이지 실제로 성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마음과 몸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성화가 되는 것은 겉으로는 우리의 노력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대속이 바탕이 되고 그 대속을 힘입어 순종할 때라야 심신의 요소 하나하나가 깨끗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믿을 때 대속은 우리라는 사람 자체를 씻어 하늘나라 사람으로 만들고, 그 후 평생의 신앙생활에서는 그 대속이 우리 심신을 현실마다 해당되는 그 부분적으로 개별적으로 씻어 성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의 법칙은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건설구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된다(요일5:5-8)
요일5:5-8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2) 건설구원의 결과
① 심신 자체의 성화
성령이 인도하여 말씀대로 살게 하되 우리 심신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성화시킬 때 그때마다 항상 예수님의 대속으로 씻겨 나가는 것이 성화구원임을 이미 설명했다. 그렇다면 건설구원의 결과는 마음과 몸의 성화다.
영은 중생되는 순간 바로 깨끗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복합체로 된 물질이므로 평생 계속 마주치는 현실마다 그 현실에 해당된 마음과 몸의 각 요소가 그 현실에서 순종하면 성화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화될 기회를 놓쳐서 부분적으로는 지옥에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된다(마18:8-9).
이렇게 몸과 마음에 성화된 부분을 평생 모아서 마지막 최종적으로 합계를 낸 것이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다. 즉 이 세상을 다 살고 나면 최종적으로 우리가 쥐고 갈 것은 중생되는 순간에 살려놓은 영과, 그 영이 평생 깨끗하게 만든 몸과 마음의 성화된 부분 전부다. 건설구원의 결과 중 하나는 바로 심신의 성화의 양이다(계2:23).
마18: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계2:23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성화된 실상은 오늘 땅 위에서 더러워진 손을 씻어 이전처럼 깨끗해지는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받아 가진 하나님의 요소로 된 생명이 우리 마음과 몸으로까지 뻗쳐 나와 신적 요소화 시킨 결과이니, 이 성화는 이 세상 피조물로는 비교하거나 비유할 수가 없다.
② 심신의 기능
건설구원의 첫 번째 결과가, 심신 자체가 깨끗해지는 성화라고 한다면, 두 번째 결과는 심신이 가진 실력 문제다. 믿는 사람이 자기 평생 마련하는 것이 건설구원인데, 자체 성화에 이어 우리가 평생을 통해 두 번째로 마련하는 것은 바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실력이다.
마음과 몸이 의를 행하는 실력을 갖추는 것은, 말씀을 따라 순종해 본 그 횟수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순종하는 만큼 그 심신에는 의를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고 자란다. 이 의의 기능, 심신 속에 준비된 의의 기능은 건설구원의 결과다. 비록 그 양은 각자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평생 순종하고 산 것만큼 자기 속에 의의 기능이 남아 있게 되니, 이것이 건설구원의 두 번째 결과다(마18:8-9, 롬6:12-13, 19).
‘마18:8-9’은 p.315 참조
롬6:12-13’은 p.313 참조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③ 심신의 상급
건설구원의 결과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각자가 평생 얼마나 상 받을 일을 했느냐는 것이다. 자기 마음과 몸 자체가 깨끗해진 정도, 그 마음과 몸이 가진 실력에 이어 자기 마음과 몸이 움직여서 얼마나 큰일을 했고 또 많은 일을 했느냐는 문제가 건설구원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비록 사람마다 그 양은 다르겠지만, 하나님께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그 상이 클 것이고, 실력은 있어도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상이 적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상’이라는 것을 세상에서 받는 ‘상’으로만 생각하여 그런 면으로만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상은 우스운 것이라 해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국의 ‘상’이라는 말은 일에 대한 칭찬이며 그 일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그 일을 잘한 것을 근거로 앞으로 대우할 약속이기도 하다(고전3:14, 고후5:10). 그 모습이 천국에서 신령한 형태로 나타나되 어떻게 나타날지 오늘 지상에서 따로 설명할 길이 없어 일단 ‘상’으로만 표현하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3) 건설구원의 성격
① 중복적 건설
기본구원은 단번으로 이루어진다. 그 한 번의 기회에 기본구원에 관련된 것은 전부 다 주어지는데, 건설구원은 평생 마주치는 현실에서 항상 건설구원의 기회를 가진다. 중복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 실패한 사람이 다음에는 회개하고 돌이켜 큰 의인이 될 수도 있고, 또 젊어서는 대충 교회를 다닌 사람이 노년에 크게 노력하여 젊을 때 못다 한 충성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선 자가 뒤에 서고, 뒤선 자가 앞설 수 있는 것이 건설구원의 성격이다(마19:30).
신사참배 때는 실패했으나 다시 준비하여 6.25를 승리하고 순교한 종들도 있다. 반대로 신사참배를 승리한 종들 중에서 일찍 죽지 않은 분들은 훗날 교권싸움에서 거의 실패자들이 된다. 건설구원의 기회는 평생 주어진다고 보시면 된다. 다만 건설구원이 중복적으로 건설되어 나간다고 하는 면은 그 사람 전체를 두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개별 요소들이 많은데 그 개별 구성 요소들에 대한 성화의 기회는 단번이다.
② 개별적 건설
안 믿는 사람이 천국을 가게 되는 기본구원은 그 사람에게 천국 가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면’을 완전히 해결하여 중생시킨다. 따라서 기본구원은 빠진 부분이 없고 미진한 것이 없다.
그러나 건설구원이라 하는 성화의 과정은 매 현실마다 관련 있는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그렇게 해서 그 평생 개별적으로 성화시킨 것을 모두 합하면 그가 평생 마련한 건설의 총합이다. 따라서 우리 평생 심신을 성화시키는 건설의 과정은 매 현실이, 그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개별적으로 성화되는 것이지 그 현실에 상관없는 요소들은 다음 현실에서 해결할 문제다. 한 부분의 성공이 다른 부분의 성공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은 되지만 보장을 하지는 않는다.
자기 가진 심신의 모든 요소와 모든 부분이 전부 건설구원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바로 그날이 그 사람이 죽는 날이다. 이런 면에서 건설구원도 부분적으로는 단번의 기회로 넘어가고 있다(고후5:10, 유1:3).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유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건설구원의 내용
▪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
우리를 구원한 주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로 지옥 갈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주시기 위해 대속하신 이름으로 사용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주로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3가지 직책을 감당할 자로 길러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마1:21). 우리가 지은 죄로부터 구원하는 분인데 우리가 지은 죄는 ‘인론’의 죄의 종류에서 살펴본 대로 크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4가지 죄에서 구원했다는 뜻이니, ‘예수’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을 어긴 ‘죄에서 사죄’를 주신 분이고, 우리 마음대로 산 ‘불의의 죄를 해결하여 칭의’를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를 화친’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 주신 분으로 기억해야 한다. 즉, ‘예수’라는 이름은 ‘사죄, 칭의, 화친, 그리고 소망의 구원’으로 요약해서 알고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지옥 갈 우리를 이 4가지로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아셨으면 한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출40:15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왕상19:16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삼상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
둘째,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니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할 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발음을 한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 단어의 의미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 직책을 하나씩 알려주셔서 구약교회는 그 단어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장’을 세울 때는 기름을 붓는다(출40:15). 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면을 책임진 직책은 ‘선지자’인데 이 선지자를 세울 때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왕상19:16).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왕’을 세울 때도 그렇다(삼상10:1).
따라서 ‘그리스도’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기름으로 비유한 ‘성령’(행10:38)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제사장, 선지자, 왕노릇’을 하도록 책임을 지신 주님의 이름이다. 눅4:18 말씀처럼, 죄에게 포로된 것을 해방시키는 제사장,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는 소경에게 눈을 띄워주는 선지자, 악령의 지배만 알던 우리에게 이제 참 자유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왕의 직책을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주님이시며 그 이름을 그리스도로 알렸다(눅4:18).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
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요1:29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히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
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10:1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으니라’
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제를 제사로 해결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요1:29) 친히 제물로 죽어 바쳐졌기 때문에 그 한번의 제사로 우리를 ‘단번에’ ‘영원토록’ ‘완전하게’ 천국 백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참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이다.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로 표시된다(히9:11-12, 10:12-14).
사람이 기본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되는 구원은 전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구원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 땅 위에서 깨끗하게 길러가는 일은 기본구원을 받은 다음 죽는 날까지 노력하게 되는 우리의 건설구원 문제다. 우리가 자기 신앙을 길러가야 하는 이 건설구원 면에서 항상 기억하고 노력해야 할 첫 방향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억하여 그 이름이 가진 첫째 역할인 ‘제사장’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길러 가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어떻게 제사장직책을 했는지 기억하여 우리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때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앞서 제사장이 되셔서 이미 택한 사람의 구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놓으신 주님이 그냥 직접 구원해도 되는데 일부러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 노릇을 하도록 오늘도 역사하고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요구하신다.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 제물이 되고 자기가 수고하고 자기를 희생시켜 자기를 제단위의 제물로 삼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제사장 노릇을 잘 한 사람이 된다(갈4:19).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계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기억할 일은, 택자를 구원한 대속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 밖에 없고 그 대속을 주님이 택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면 되는데 우리를 심부름을 시켜 여러 가지 일을시키시는가? 주님의 대속이 전달되는 이 일에 우리를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고 또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맡기는 이유는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전해질 수 없거나 또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완성되는데 불편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를 사용하므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닮은 희생의 사람이 되어감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장성해지고 깨끗해지고 또 우리의 수고한 이 수고를 전부 하늘에서 계산하여 영광으로 돌려주실 것이므로, 이 수고는 주님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하도록 만들었다.
이래서 이미 믿고 천국 갈 사람이 되었다 해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한 존재가 대신 죽고 바쳐져야 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본받아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또 믿는 사람을 더 잘 믿게 만드는 이 복음 사역에 어떻게 충성할 것인지를 평생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 마디로 제사장 노릇을 잘 해야 한다(계1:6).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이며 제사장은 어떤 면을 조심해야 하며 제사장의 손에 들려 있는 제사의 종류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약성경을 통해 살펴보고, 그다음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을 살펴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구약의 제사장직을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알고 이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연구하여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기독교’라 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표현과 관련된 이런 우리의 이름을 두고 우리는 항상 첫 번째로 ‘제사장’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진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이 빠져 버리면 세상 불신자들이 이웃을 위해 베푸는 희생과 같은 희생이 되어 버린다. 예수님의 대속은 붙들고 있다 해도 자기희생 자기 수고가 빠져버리면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자라가도록 재촉하는 주님의 명령을 저버린 사람이 된다. 그래도 천국은 가겠지만 천국에 간 사람들의 실력과 자체 성화의 정도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제사장 면의 실력과 제사장 면으로 자신을 만든 차이가 그 차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이 ‘제사장’라는 단어 하나만을 가지고 연관을 지어도 전부 연결이 되고 성경 전체가 이 ‘제사장’이라는 단어 하나를 실천하는데 도움 되는 말씀이다(롬15:16, 벧전2:5).
롬15:16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②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감추어져 있는 뜻을 먼저 알고 다른 사람에게 그 뜻을 전한다. 120년 후면 천하를 물로 쓸어버릴 것인데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모두들 자기 세상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 뜻을 앞서 알게 된 노아가 당대의 선지자였다. 그가 전달하는 말을 듣고 노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확정된 줄 알고 순종한 7식구는 구원을 얻었고, 나머지는 노아의 말을 노아가 발표하는 하나의 학설인 줄 알다가 죽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위치요 중요성이다(히11:7).
히11:7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행3:20-24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계5:1-14 ‘...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 ’
하나밖에 없는 참 선지자는 예수님이다(행3:20-24, 신18:18, 요6:14).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적어주신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깨달을 수 없었고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어도 그게 무슨 길인지 전혀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감추어있던 모든 뜻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다 알려주셨습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 죽은 영을 살렸고 성령이 우리 영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밝혀주도록 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전혀 알 도리가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다(계5:1-14).
오늘 우리가 선지자노릇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선지자가 될 실력이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지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놓고 우리에게 알도록 하셨으니 알려 주셔서 알게 된 것을 아직도 모르는 이들에게 배달할 뿐이다. 그래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먼저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역할이 선지가 될 수 있다.
석가나 공자 같은 천하에 천재들도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방법도 길도 결국은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한없이 무지하고 몽매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으로 살려놓고 성령과 성경으로 얼마든지 알도록 해 놓으셨으니, 우리는 우리 속에 알려 주시는 성령과 성경을 가지면 우주를 알고 영계를 알고 영생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과거 타락했던 원인을 알고 앞으로 갈 천국에 가져갈 우리의 준비물을 갖추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먼저 알려 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될 때 선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노력하라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뜻을 ‘선지자’로 표시해 놓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그 머리 위에 부었다.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선지자노릇도 하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분이 죽기까지 충성하여 선지자로 사신 것처럼 오늘 그분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선지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고, 선지자 노릇을 잘 한 것만큼 자기 신앙건설을 바로 한 것이다.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도록 노력하고,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이 가르쳐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주신 현실속의 자연 만물을 살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뜻을 다 알 수 있다. 그 뜻을 한꺼번에 다 알려 주지는 않는다. 먼저 알려 주신 작은 것을 가지고 어려워도 실행을 하게 되면, 그 실행을 통해서 좀더 눈이 밝아지고 그다음에는 좀더 어렵고 복잡한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를 길러 가신다(롬12:1-2, 눅16:10).
롬12:1-2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
안 믿는 사람에게 천국 가는 구원의 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 밖에 없다고 전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가 할 일이다.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면 그가 바로 선지자다. 그리고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더 잘 믿는 길, 더 바로 믿는 길,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역할이다. 내가 깨닫고 알게 된 것처럼 그에게도 말씀과 성령과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길을 가르치고, 또 그가 어두워서 알지 못하면 알려 주고, 그로 하여금 실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도록 한다면 그는 선지자다.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가게 되었다면, 이후 평생 노력해야 할 두 번째 방향은 바로 선지자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점점 온전하게 잘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실제 사는 것과 그렇게 다른 사람도 만들어 가는 이것을 주제로 삼고 성경을 연결시켜 보면 성경 전체는 바로 선지자를 만드는 지침서다. 하나도 여기에 연결 되지 않은 구절이 없다(딤전5:17).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삼하5:2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③ ‘왕’이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겨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먹여 살리도록 세운 목자요 지도자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안보, 누구에게 어떤 직책과 위치를 어떻게 맡기는 인사, 약한 이를 돕고 병든 이를 치료하며 환란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통치다. 그리고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 앞서서 인도하는 지도자이니 바로 구약의 왕이 해야 할 일이다(삼하5:2).
악령이 우리를 죄짓게 하여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죄값은 사망과 모든 저주 아래 있었다. 말하자면 원수의 나라에 포로가 된 신세였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싸워 우리를 다시 본국에 갖다놓으셨고 우리를 말씀으로 먹였고 옳게 행동하도록 하여 의의 행실로 입혔고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참인격에 고장난 부분을 전부 고쳐서 치료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다시 악령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구원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우리가 가야 할 하늘 길로만 전념을 하게 만들었다.
구약 역사를 통해 이 일을 가장 잘 했던 왕이 다윗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혈통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마1:1에서 말씀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알렸고, 그다음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인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 진 왕으로서는 다윗이 표준이요 다윗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요 다윗이 가진 중심과 충성이면 누구든지 다 예수님의 구원 안에 그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어 기본적으로 모든 통치와 책임의 문제를 다 해결해 놓았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미 천국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가 죽는 날까지 힘쓰고 노력할 분야는 천국을 못 가는 일이 있을까봐 늘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고, 한번 중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다시는 지옥 가는 일이 없게 구원되었으니, 우리의 할 일은 천국에서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뒤따라 그분과 함께 영계와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릴 영원한 왕이 되는 이 일에 주력해야 한다(벧전2:9, 계5:10).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오늘 세상에서 준비하고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만큼 왕노릇을 할 수 있다. 무한한 영계와 새롭게 된 우주를 우리에게 다 주신다고 해도 우리의 실력이 없으면 다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그만큼 하늘나라에서 통치력과 실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받고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다. 믿는 사람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 차이로 차이 나는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같은 성자나 우리처럼 뒤로 술 먹고 죄짓고 별별 짓을 다하고 천국 간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실력과 영원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꼭 같을 수는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은 믿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오늘 내가 편히 잘 수 있는 그 시간에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으며, 믿게 된 사람에게 바로 믿는 길을 어떻게 도와주고 안내했는가? 신앙어린 사람을 유혹하는 주변 사람들의 사소해 보이는 접촉을 어떻게 잘 차단시켰고 그들에게 그런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었는가, 천하를 다 삼키는 이단과 세상 풍조 속에서 자기 맡은 신앙의 사람을 어떻게 안보했고 그들을 이끌고 모세가 광야 40년을 통과한 것처럼 했는가? 오늘 우리가 믿은 이후에 평생 주력할 세 번째 숙제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담아 주신 ‘왕’이라는 이름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왕’이라는 직책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성경을 어떻게 기록하셨으며, 또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뒤 따르되 성경을 통해 왕직을 잘 연습하려면 무엇을 알고 어떤 면을 조심하며 어떻게 실력을 길러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엡5:15).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앞에서 살펴본 대로 기본구원은, 안 믿던 사람이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면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는데, 믿는 순간 이렇게 기본적으로 받아가지는 것 일체를 기본구원이라 한다. 이에 비하여 이번에 살펴볼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믿은 후 평생을 살아가며 각자가 제각각 따로 건설해 나가는 신앙생활 일체를 말한다.
평생 자기가 건설해 나가야 하는 것이므로 ‘건설구원’이라 하고, 그 건설은 자기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깨끗해지게 되면 우리 속에는 의로 살 수 있는 기능이 많아지므로 ‘기능구원’이라고도 한다.
이 건설구원은 기존의 정통교리가 안개 속을 더듬 듯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건설구원 교리를 정리하여 일목 요약한 교리체계로 세계 교회에 제시한 것은 백영희 신앙노선이다.
(1) 건설구원의 요건
① 성령의 역사
안 믿던 사람을 믿게 만든 기본구원도 전적 성령의 역사지만, 믿게 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건설구원의 성화역사도 성령으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령 없는 성화는 없다고 단정하면 된다.
건설구원은 믿는 사람의 남은 평생 신앙생활이다. 평생토록 말씀대로 살아도 성령으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마음이 단독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건설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말씀을 지켜도 성화는 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름도 우리 심신이 성령을 따라 성령을 닮는 것이므로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심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사다(요일2:27, 요14:26).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14:26 ‘...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롬6:12-18 ‘...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히5: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약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② 순종
안 믿는 사람이 처음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항거를 해도 무조건 강제로 중생시킨다. 이것이 기본구원이다. 그러나 믿게 된 사람을 평생 고쳐가는 건설구원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알고 따르고 순종해야만 고쳐진다.
영을 살릴 때는 성령이 사람의 의사에 상관없이 살려서 구원하지만 이제 구원을 받고 믿게 된 사람은 전적 자유성을 허락하여, 자기 마음이 거부하면 성령도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지 강제로 그 사람 마음 문을 열고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건설구원의 두 번째 요건은 우리 심신의 순종이다. 순종 없는 성화는 없다.
이 순종을 다른 말로는 ‘믿음’이라고 한다. 기본구원도 믿음으로 받은 것이지만, 건설구원도 실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꼭 같은 표현이지만, 기본구원의 믿음은 믿어지게 하여 믿게 하고, 건설구원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도록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 즉 믿음은 ‘은혜’를 강조했고, ‘순종’은 행동을 강조한다(롬6:12-18, 히5:8-10, 약2:14-26).
③ 대속과 진리
처음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 ‘단번’ ‘영원’히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믿은 이후 평생 신앙생활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을, 처음 믿을 때 구원해 주신 과거의 은혜로만 기억하고 감사하기 쉽다. 물론 처음 믿을 때는 대속의 은혜만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믿은 이후 평생 우리가 순종하고 사는 신앙생활에서도 그 대속의 은혜는 한시도 빠짐없이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 해야 한다.
처음 믿을 때 대속의 은혜는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천국을 가게 했고, 이제 믿은 이후 신앙생활에서 ‘대속’의 은혜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순종을 할 때에도 겉으로는 인간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순종을 하지만, 실은 그 인간의 노력과 순종만을 가지고는 흉내만 낼뿐이지 실제로 성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마음과 몸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성화가 되는 것은 겉으로는 우리의 노력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대속이 바탕이 되고 그 대속을 힘입어 순종할 때라야 심신의 요소 하나하나가 깨끗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 믿을 때 대속은 우리라는 사람 자체를 씻어 하늘나라 사람으로 만들고, 그 후 평생의 신앙생활에서는 그 대속이 우리 심신을 현실마다 해당되는 그 부분적으로 개별적으로 씻어 성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속과 진리의 법칙은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건설구원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된다(요일5:5-8)
요일5:5-8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2) 건설구원의 결과
① 심신 자체의 성화
성령이 인도하여 말씀대로 살게 하되 우리 심신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성화시킬 때 그때마다 항상 예수님의 대속으로 씻겨 나가는 것이 성화구원임을 이미 설명했다. 그렇다면 건설구원의 결과는 마음과 몸의 성화다.
영은 중생되는 순간 바로 깨끗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복합체로 된 물질이므로 평생 계속 마주치는 현실마다 그 현실에 해당된 마음과 몸의 각 요소가 그 현실에서 순종하면 성화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화될 기회를 놓쳐서 부분적으로는 지옥에 버려야 할 쓰레기가 된다(마18:8-9).
이렇게 몸과 마음에 성화된 부분을 평생 모아서 마지막 최종적으로 합계를 낸 것이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다. 즉 이 세상을 다 살고 나면 최종적으로 우리가 쥐고 갈 것은 중생되는 순간에 살려놓은 영과, 그 영이 평생 깨끗하게 만든 몸과 마음의 성화된 부분 전부다. 건설구원의 결과 중 하나는 바로 심신의 성화의 양이다(계2:23).
마18: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계2:23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성화된 실상은 오늘 땅 위에서 더러워진 손을 씻어 이전처럼 깨끗해지는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받아 가진 하나님의 요소로 된 생명이 우리 마음과 몸으로까지 뻗쳐 나와 신적 요소화 시킨 결과이니, 이 성화는 이 세상 피조물로는 비교하거나 비유할 수가 없다.
② 심신의 기능
건설구원의 첫 번째 결과가, 심신 자체가 깨끗해지는 성화라고 한다면, 두 번째 결과는 심신이 가진 실력 문제다. 믿는 사람이 자기 평생 마련하는 것이 건설구원인데, 자체 성화에 이어 우리가 평생을 통해 두 번째로 마련하는 것은 바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실력이다.
마음과 몸이 의를 행하는 실력을 갖추는 것은, 말씀을 따라 순종해 본 그 횟수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순종하는 만큼 그 심신에는 의를 행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고 자란다. 이 의의 기능, 심신 속에 준비된 의의 기능은 건설구원의 결과다. 비록 그 양은 각자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평생 순종하고 산 것만큼 자기 속에 의의 기능이 남아 있게 되니, 이것이 건설구원의 두 번째 결과다(마18:8-9, 롬6:12-13, 19).
‘마18:8-9’은 p.315 참조
롬6:12-13’은 p.313 참조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③ 심신의 상급
건설구원의 결과 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각자가 평생 얼마나 상 받을 일을 했느냐는 것이다. 자기 마음과 몸 자체가 깨끗해진 정도, 그 마음과 몸이 가진 실력에 이어 자기 마음과 몸이 움직여서 얼마나 큰일을 했고 또 많은 일을 했느냐는 문제가 건설구원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비록 사람마다 그 양은 다르겠지만, 하나님께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그 상이 클 것이고, 실력은 있어도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상이 적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상’이라는 것을 세상에서 받는 ‘상’으로만 생각하여 그런 면으로만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상은 우스운 것이라 해서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천국의 ‘상’이라는 말은 일에 대한 칭찬이며 그 일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그 일을 잘한 것을 근거로 앞으로 대우할 약속이기도 하다(고전3:14, 고후5:10). 그 모습이 천국에서 신령한 형태로 나타나되 어떻게 나타날지 오늘 지상에서 따로 설명할 길이 없어 일단 ‘상’으로만 표현하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고전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3) 건설구원의 성격
① 중복적 건설
기본구원은 단번으로 이루어진다. 그 한 번의 기회에 기본구원에 관련된 것은 전부 다 주어지는데, 건설구원은 평생 마주치는 현실에서 항상 건설구원의 기회를 가진다. 중복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 실패한 사람이 다음에는 회개하고 돌이켜 큰 의인이 될 수도 있고, 또 젊어서는 대충 교회를 다닌 사람이 노년에 크게 노력하여 젊을 때 못다 한 충성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선 자가 뒤에 서고, 뒤선 자가 앞설 수 있는 것이 건설구원의 성격이다(마19:30).
신사참배 때는 실패했으나 다시 준비하여 6.25를 승리하고 순교한 종들도 있다. 반대로 신사참배를 승리한 종들 중에서 일찍 죽지 않은 분들은 훗날 교권싸움에서 거의 실패자들이 된다. 건설구원의 기회는 평생 주어진다고 보시면 된다. 다만 건설구원이 중복적으로 건설되어 나간다고 하는 면은 그 사람 전체를 두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개별 요소들이 많은데 그 개별 구성 요소들에 대한 성화의 기회는 단번이다.
② 개별적 건설
안 믿는 사람이 천국을 가게 되는 기본구원은 그 사람에게 천국 가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면’을 완전히 해결하여 중생시킨다. 따라서 기본구원은 빠진 부분이 없고 미진한 것이 없다.
그러나 건설구원이라 하는 성화의 과정은 매 현실마다 관련 있는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그렇게 해서 그 평생 개별적으로 성화시킨 것을 모두 합하면 그가 평생 마련한 건설의 총합이다. 따라서 우리 평생 심신을 성화시키는 건설의 과정은 매 현실이, 그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개별적으로 성화되는 것이지 그 현실에 상관없는 요소들은 다음 현실에서 해결할 문제다. 한 부분의 성공이 다른 부분의 성공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은 되지만 보장을 하지는 않는다.
자기 가진 심신의 모든 요소와 모든 부분이 전부 건설구원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면, 바로 그날이 그 사람이 죽는 날이다. 이런 면에서 건설구원도 부분적으로는 단번의 기회로 넘어가고 있다(고후5:10, 유1:3).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유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건설구원의 내용
▪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
우리를 구원한 주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로 지옥 갈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주시기 위해 대속하신 이름으로 사용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주로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3가지 직책을 감당할 자로 길러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마1:21). 우리가 지은 죄로부터 구원하는 분인데 우리가 지은 죄는 ‘인론’의 죄의 종류에서 살펴본 대로 크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4가지 죄에서 구원했다는 뜻이니, ‘예수’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을 어긴 ‘죄에서 사죄’를 주신 분이고, 우리 마음대로 산 ‘불의의 죄를 해결하여 칭의’를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를 화친’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 주신 분으로 기억해야 한다. 즉, ‘예수’라는 이름은 ‘사죄, 칭의, 화친, 그리고 소망의 구원’으로 요약해서 알고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지옥 갈 우리를 이 4가지로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아셨으면 한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출40:15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왕상19:16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삼상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
둘째,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니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할 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발음을 한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 단어의 의미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가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 직책을 하나씩 알려주셔서 구약교회는 그 단어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장’을 세울 때는 기름을 붓는다(출40:15). 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면을 책임진 직책은 ‘선지자’인데 이 선지자를 세울 때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왕상19:16).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왕’을 세울 때도 그렇다(삼상10:1).
따라서 ‘그리스도’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는 기름으로 비유한 ‘성령’(행10:38)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제사장, 선지자, 왕노릇’을 하도록 책임을 지신 주님의 이름이다. 눅4:18 말씀처럼, 죄에게 포로된 것을 해방시키는 제사장,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는 소경에게 눈을 띄워주는 선지자, 악령의 지배만 알던 우리에게 이제 참 자유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왕의 직책을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 주님이시며 그 이름을 그리스도로 알렸다(눅4:18).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
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요1:29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히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
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10:1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으니라’
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제를 제사로 해결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오셔서(요1:29) 친히 제물로 죽어 바쳐졌기 때문에 그 한번의 제사로 우리를 ‘단번에’ ‘영원토록’ ‘완전하게’ 천국 백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참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이다.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뜻을 특별히 강조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로 표시된다(히9:11-12, 10:12-14).
사람이 기본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되는 구원은 전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구원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 땅 위에서 깨끗하게 길러가는 일은 기본구원을 받은 다음 죽는 날까지 노력하게 되는 우리의 건설구원 문제다. 우리가 자기 신앙을 길러가야 하는 이 건설구원 면에서 항상 기억하고 노력해야 할 첫 방향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억하여 그 이름이 가진 첫째 역할인 ‘제사장’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길러 가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어떻게 제사장직책을 했는지 기억하여 우리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때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앞서 제사장이 되셔서 이미 택한 사람의 구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놓으신 주님이 그냥 직접 구원해도 되는데 일부러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제사장 노릇을 하도록 오늘도 역사하고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요구하신다. 우리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 제물이 되고 자기가 수고하고 자기를 희생시켜 자기를 제단위의 제물로 삼아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제사장 노릇을 잘 한 사람이 된다(갈4:19).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계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기억할 일은, 택자를 구원한 대속은 오직 예수님의 대속 밖에 없고 그 대속을 주님이 택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면 되는데 우리를 심부름을 시켜 여러 가지 일을시키시는가? 주님의 대속이 전달되는 이 일에 우리를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고 또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맡기는 이유는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전해질 수 없거나 또 우리가 없으면 이 구원이 완성되는데 불편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를 사용하므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닮은 희생의 사람이 되어감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장성해지고 깨끗해지고 또 우리의 수고한 이 수고를 전부 하늘에서 계산하여 영광으로 돌려주실 것이므로, 이 수고는 주님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하도록 만들었다.
이래서 이미 믿고 천국 갈 사람이 되었다 해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한 존재가 대신 죽고 바쳐져야 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본받아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또 믿는 사람을 더 잘 믿게 만드는 이 복음 사역에 어떻게 충성할 것인지를 평생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 마디로 제사장 노릇을 잘 해야 한다(계1:6).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이며 제사장은 어떤 면을 조심해야 하며 제사장의 손에 들려 있는 제사의 종류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구약성경을 통해 살펴보고, 그다음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을 살펴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구약의 제사장직을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알고 이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연구하여 그대로 실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기독교’라 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표현과 관련된 이런 우리의 이름을 두고 우리는 항상 첫 번째로 ‘제사장’의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진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이 빠져 버리면 세상 불신자들이 이웃을 위해 베푸는 희생과 같은 희생이 되어 버린다. 예수님의 대속은 붙들고 있다 해도 자기희생 자기 수고가 빠져버리면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자라가도록 재촉하는 주님의 명령을 저버린 사람이 된다. 그래도 천국은 가겠지만 천국에 간 사람들의 실력과 자체 성화의 정도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제사장 면의 실력과 제사장 면으로 자신을 만든 차이가 그 차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이 ‘제사장’라는 단어 하나만을 가지고 연관을 지어도 전부 연결이 되고 성경 전체가 이 ‘제사장’이라는 단어 하나를 실천하는데 도움 되는 말씀이다(롬15:16, 벧전2:5).
롬15:16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②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감추어져 있는 뜻을 먼저 알고 다른 사람에게 그 뜻을 전한다. 120년 후면 천하를 물로 쓸어버릴 것인데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모두들 자기 세상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 뜻을 앞서 알게 된 노아가 당대의 선지자였다. 그가 전달하는 말을 듣고 노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확정된 줄 알고 순종한 7식구는 구원을 얻었고, 나머지는 노아의 말을 노아가 발표하는 하나의 학설인 줄 알다가 죽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위치요 중요성이다(히11:7).
히11:7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행3:20-24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계5:1-14 ‘...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 ’
하나밖에 없는 참 선지자는 예수님이다(행3:20-24, 신18:18, 요6:14). 이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적어주신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깨달을 수 없었고 천국 가는 길을 보여 주어도 그게 무슨 길인지 전혀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감추어있던 모든 뜻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다 알려주셨습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 죽은 영을 살렸고 성령이 우리 영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밝혀주도록 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전혀 알 도리가 없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선지자다(계5:1-14).
오늘 우리가 선지자노릇을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선지자가 될 실력이나 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지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놓고 우리에게 알도록 하셨으니 알려 주셔서 알게 된 것을 아직도 모르는 이들에게 배달할 뿐이다. 그래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먼저 알았다고 해서 우리의 역할이 선지가 될 수 있다.
석가나 공자 같은 천하에 천재들도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국 가는 방법도 길도 결국은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한없이 무지하고 몽매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으로 살려놓고 성령과 성경으로 얼마든지 알도록 해 놓으셨으니, 우리는 우리 속에 알려 주시는 성령과 성경을 가지면 우주를 알고 영계를 알고 영생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과거 타락했던 원인을 알고 앞으로 갈 천국에 가져갈 우리의 준비물을 갖추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먼저 알려 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될 때 선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노력하라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뜻을 ‘선지자’로 표시해 놓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그 머리 위에 부었다. 선지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선지자노릇도 하는 분임을 알게 된다. 그분이 죽기까지 충성하여 선지자로 사신 것처럼 오늘 그분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선지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고, 선지자 노릇을 잘 한 것만큼 자기 신앙건설을 바로 한 것이다.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도록 노력하고,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이 가르쳐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주신 현실속의 자연 만물을 살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뜻을 다 알 수 있다. 그 뜻을 한꺼번에 다 알려 주지는 않는다. 먼저 알려 주신 작은 것을 가지고 어려워도 실행을 하게 되면, 그 실행을 통해서 좀더 눈이 밝아지고 그다음에는 좀더 어렵고 복잡한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를 길러 가신다(롬12:1-2, 눅16:10).
롬12:1-2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
안 믿는 사람에게 천국 가는 구원의 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 밖에 없다고 전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가 할 일이다.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면 그가 바로 선지자다. 그리고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더 잘 믿는 길, 더 바로 믿는 길,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역할이다. 내가 깨닫고 알게 된 것처럼 그에게도 말씀과 성령과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길을 가르치고, 또 그가 어두워서 알지 못하면 알려 주고, 그로 하여금 실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도록 한다면 그는 선지자다. 우리가 구원 받아 천국가게 되었다면, 이후 평생 노력해야 할 두 번째 방향은 바로 선지자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점점 온전하게 잘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실제 사는 것과 그렇게 다른 사람도 만들어 가는 이것을 주제로 삼고 성경을 연결시켜 보면 성경 전체는 바로 선지자를 만드는 지침서다. 하나도 여기에 연결 되지 않은 구절이 없다(딤전5:17).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삼하5:2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③ ‘왕’이 되신 그리스도
구약의 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겨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먹여 살리도록 세운 목자요 지도자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안보, 누구에게 어떤 직책과 위치를 어떻게 맡기는 인사, 약한 이를 돕고 병든 이를 치료하며 환란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통치다. 그리고 백성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 앞서서 인도하는 지도자이니 바로 구약의 왕이 해야 할 일이다(삼하5:2).
악령이 우리를 죄짓게 하여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죄값은 사망과 모든 저주 아래 있었다. 말하자면 원수의 나라에 포로가 된 신세였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싸워 우리를 다시 본국에 갖다놓으셨고 우리를 말씀으로 먹였고 옳게 행동하도록 하여 의의 행실로 입혔고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참인격에 고장난 부분을 전부 고쳐서 치료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다시 악령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구원으로 성벽을 쌓았으며 우리가 가야 할 하늘 길로만 전념을 하게 만들었다.
구약 역사를 통해 이 일을 가장 잘 했던 왕이 다윗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혈통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마1:1에서 말씀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알렸고, 그다음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인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 진 왕으로서는 다윗이 표준이요 다윗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요 다윗이 가진 중심과 충성이면 누구든지 다 예수님의 구원 안에 그 구원으로 다른 사람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어 기본적으로 모든 통치와 책임의 문제를 다 해결해 놓았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되었고 이미 천국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가 죽는 날까지 힘쓰고 노력할 분야는 천국을 못 가는 일이 있을까봐 늘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고, 한번 중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다시는 지옥 가는 일이 없게 구원되었으니, 우리의 할 일은 천국에서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뒤따라 그분과 함께 영계와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릴 영원한 왕이 되는 이 일에 주력해야 한다(벧전2:9, 계5:10).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오늘 세상에서 준비하고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만큼 왕노릇을 할 수 있다. 무한한 영계와 새롭게 된 우주를 우리에게 다 주신다고 해도 우리의 실력이 없으면 다 다스리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 연습하고 실력을 갖춘 그만큼 하늘나라에서 통치력과 실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받고 천국 간 성도들의 차이다. 믿는 사람은 천국을 가고 지옥을 가는 차이로 차이 나는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같은 성자나 우리처럼 뒤로 술 먹고 죄짓고 별별 짓을 다하고 천국 간 성도가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실력과 영원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꼭 같을 수는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은 믿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오늘 내가 편히 잘 수 있는 그 시간에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했으며, 믿게 된 사람에게 바로 믿는 길을 어떻게 도와주고 안내했는가? 신앙어린 사람을 유혹하는 주변 사람들의 사소해 보이는 접촉을 어떻게 잘 차단시켰고 그들에게 그런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었는가, 천하를 다 삼키는 이단과 세상 풍조 속에서 자기 맡은 신앙의 사람을 어떻게 안보했고 그들을 이끌고 모세가 광야 40년을 통과한 것처럼 했는가? 오늘 우리가 믿은 이후에 평생 주력할 세 번째 숙제는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담아 주신 ‘왕’이라는 이름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왕’이라는 직책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성경을 어떻게 기록하셨으며, 또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뒤 따르되 성경을 통해 왕직을 잘 연습하려면 무엇을 알고 어떤 면을 조심하며 어떻게 실력을 길러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엡5:15).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참고.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진다.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로서,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께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신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진다.
"칭의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로서,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께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