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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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0 16
(4) 원죄

  ① 의의

  원죄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지은 첫 범죄로 이후 아담에게서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 출생으로부터 가지고 나오는 죄를 원죄라고 한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원죄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유전 때문이 아니라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지은 범죄이므로 이후 태어날 사람들에게는 동참죄 성격을 가지고 있다(롬5:12).

  출생 때부터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이 죄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며 또 각자가 자기 스스로 짓는 본죄를 더하여 각자 지은 죄의 양과 종류는 달라지고 지옥 형벌도 다 다르다(계20:11-12).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계20:11-12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② 본성

  ▪ 중심의 변화

  원죄의 성질은 ‘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로 가지고 온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한 것은 선과 악을 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것이니 인간이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좋으면 하나님은 선이라 하고 하나님께 나쁘면 하나님은 악이라고 한다. 이렇게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인간은 선으로 살아야지 악으로 살면 안 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은 이 선과 악을 인간이 먹어 인간의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 좋다고 선이라 하거나 또는 인간이 자기에게 싫으면 악이라고 하는 일을 금한 것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다.(창2:17)

  따라서 아담이 지은 첫 죄인 원죄의 성질은 중심을 누구의 것으로 하느냐, 무엇을 중심으로 삼느냐는 문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아 살아야 할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살겠다고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 첫 죄다. 그리고 이 죄는 앞으로 나타날 수없는 인류 각자의 본죄의 뿌리가 되고 발원이 된다. 비록 그 종류와 형태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인간의 모든 죄를 해부하여 분석하면 그 속에는 자기중심이 들어 있다. 자기중심이 밖으로 나타나면서 여러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창3:22, 삼상16:7).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

삼상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욥25:6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 인본주의의 하나님중심 반대

  원죄와 관련하여, 왜 하나님은 하나님중심이라야 하고, 인간은 왜 인간중심이면 안 되는지를 반문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주로 계몽사상에서 내려오는 인문주의자들이 중세기 말부터 제기하여 오늘은 기독교 내에서도 완전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시각이다.

  하나님은 완전자이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완전을 중심하는 것이므로 완전을 향하는 복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게 되면 충돌 모순 착오를 통해서 자멸한다. 인간이 하나님 중심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고대사회로부터 한 인간을 위해 다른 인간들이 고생하는 것이 인간사였는데 중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이 문제를 자각하게 되자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강제로 이용되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소위 인권이나 인간존엄성을 자각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지성인들로부터 급작스럽게 동조자를 얻게 되면서 오늘에는 무식한 사람에게까지 퍼지게 되어 오늘 인류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되었다. 이를 인류사적으로 본다면 발전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 발전사 속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착취당할 수 없다는 표현을 귀신이 살짝 바꾸어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착취당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바꾼 다음 그 ‘다른 존재’ 속에 하나님까지 슬쩍 끼워 넣게 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왜 하나님에게 이용을 당해야 하느냐는 몹쓸 표현까지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 인간중심으로 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사2:22, 욥25:6). 부족한 인간이 인간중심으로 살면 망하니까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중심으로 살면 영복을 받기 때문에 완전자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만일 5세 유아를 독립시켜 자기중심으로 살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괴범일 것이다. 귀신이 하나님 품안에 복되게 살고 있던 아담과 인류를 그 품 밖으로 데려나올 때 ‘자기중심’이라는 낚시미끼를 던졌고 아담은 그것을 물어버린 것이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2:3-4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유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

눅1:41-44 ‘...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③ 범위

  ▪ 아담의 자손 전부

  원죄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그 영향을 미친다. 택자든 불택자든 상관없이 원죄는 일단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택자는 그 원죄와 이후 짓는 본죄를 예수님이 해결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고, 불택자는 그 죄를 사하지 않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을 가게 된다(엡1:4, 2:3-4, 유1:4).

  원죄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시에 입혀지기 때문에 출생이 아니라 모체에 생겨지는 순간부터 생긴다. 요즘 과학의 발달로 어느 시점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시점이냐는 것이 세밀하게 나누어지고 있다. 과학의 표현과 시력에 따라 변할 것 없이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이라는 정도로 확정을 해두고 더 이상의 구체적 시점은 자기 시대에 주시는 현실 속에서 신앙양심으로 판단하면 된다. 요한이 어머니 뱃속에서 성령에 충만하였던 것을 기준으로 짐작하면 충분할 것이다(눅1:41-44).





  ▪ 예수님과 원죄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사람으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인간이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의 보통 생육법과 달리 마리아의 몸으로만 출생하는 특수 생육법으로 나셨다. 예수님이 특수 생육법으로 나셨다고 할 때 그 외부 모습은 아버지 없이 마리아로만 출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특수 생육법의 내부 본질은 성령이 그 육체를 직접 만들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 사람을 만들되 부부가 만든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예수님의 출생이 이루어지도록 직접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달리 원죄가 없다. 히4:15에서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신 대로 원죄만 없는 상태다. 따라서 빌2:7에서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고 예수님으로 오신 그 인성은 원죄가 없다(마1:20).

마1:20 ‘...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예수님에게 원죄가 없어야 하는 이유는 그는 우리의 ‘구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죄가 있으면 예수님 자신도 지옥 갈 죄인이므로 다른 죄인을 구할 수 없다. 예수님은 인간 중에 원죄가 없는 유일한 경우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원죄 없이 출생하려면 예수님의 출생환경인 마리아도 죄가 없어야 한다는 가설을 세워 마리아도 원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그렇게 되려면 마리아의 어머니도 원죄가 없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원죄가 없으신 것은 그 구성은 사람이지만 그 출생의 경로는 아담의 후손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만 왔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인류 첫 조상이다.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라는 1차 창조에서 만든 인간 속에 새로운 2차 창조를 하실 것인데 그 2차 창조의 조상 자리를 예수님께서 맡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태초에 한번 창조된 인간을 겉사람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는 두 번째 창조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이어져 온 속사람을 가지고 있다(롬5:14, 고전15:45).

롬5:14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④ 결과

  원죄나 본죄나 죄는 꼭 같은 죄다. 본죄는 원죄의 결과를 더욱 중하게 만드는 것이지 본죄 때문에 원죄와 다른 결과가 더 추가될 것은 없다. 따라서 죄를 살필 때 원죄를 중심으로 살피는 것은 모든 죄의 속성과 해독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 단절

  죄는 삐뚤어진 것이니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삐뚤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삐뚤어지게 되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다. 하나님과 연결이 사람에게는 생명인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과 끊어졌고 즉시 사망하게 되었다(롬6:23).

물론 뱀은 죄를 지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고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뒤 아담은 930세까지 잘 살았다. 결국 죽지 않았느냐고 하겠지만 죄의 값은 즉시 사망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한 것이 중요하다(창2:17).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 바로 죽은 것은 아담의 몸과 마음이 아니라 아담의 영이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자 영은 즉시 죽어버렸고 이제 사람의 영 대신 악령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붙들고 그 심신이 세상에서 소진될 때까지 붙들고 사용하는 것이다.

  영이 죽은 인간은 죽었다고 해야겠는가 살았다고 해야겠는가? 하나님을 기준으로 본다면 죽었고,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몸과 마음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으므로 즉각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선악과를 먹고 아담이 하나님 말씀대로 즉각 죽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보고 하나님 기준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뭇가지가 꺾이면 그 순간 그 가지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은 그 후에도 며칠 동안 파란 색을 가지고 있다. 뿌리에서 끊어진 면으로 보면 꺾이는 순간 그 가지는 즉사했고, 가지가 이미 받아 가진 영양과 물이 소진되지 않았다는 좁은 범위로 보면 아직도 살아 있다. 그래서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창3:4).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 부패

  죄로 하나님과 끊어지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내려오는 것은 없다. 생명과 새 은혜는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데 하나님과 끊어졌으므로 인간에게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 점점 부패해지게 된다. 끊어진 가지가 썩어서 색깔이 바뀌고 조직이 부패해지고 줄어들고 결국은 거름이 되고 땅 속에 흩어지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끊어진 즉시 그 생명은 죽었고 그 심신만 남아서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행동이 전부 하나님과 삐뚤어진 것뿐이다. 따라서 영이 죽은 상태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살아가는 모든 것은 송장이 더욱 썩는 것과 같고 상한 음식이 더욱 상한 것과 같다(렘17:9).

  하나님 없는 인간이 오늘까지 이루어놓은 문화 건설이나 과학 개발, 또는 종교 철학 할 것 없이 아담 이후 안 믿는 인간이 인간 단독으로 이루어놓은 것 치고 죽은 것과 썩은 것에 속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신앙이라면 세상 문화운동이나 시민운동 또는 인권과 정치와 타종교와의 연대 등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네 사람들이 공동묘지에 안장한 시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접촉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았기 때문에 죽은 그들에게 우리처럼 산 자가 살게 된 길을 따라 살자고 전도를 할 뿐이다(마9:17, 요15:19, 요일2:15).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형벌

  죄의 값은 영원한 지옥에서 받는다. 현재 이 물질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심신으로 된 육은 자기가 지은 죄값을 다 받아 감당할 수가 없다. 오늘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지옥에서 본격적으로 죄값을 받기 전에 오늘 세상에서 지옥의 형벌의 맛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불택자들에게 지옥 형벌을 받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갈 우리 택자들에게 세상에서 죄의 그림자를 구경하게 하여 죄를 멀리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선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죄값은 안 믿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 삶 그 자체 전부다. 인간은 인간 제 나름대로 이런 것은 싫고 저런 것은 좋으니까 싫어하는 일을 당하는 것은 지옥 죄값의 그림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떠서 잘 살펴보면 인간이 참으로 울어야 하는데도 몰라서 울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쨌든 잘못 알고 잘못 느낀다고 해도 인간이 행복으로 느끼는 것을 통해 지금 세상에서 천국의 일부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는 면이 있다. 천국의 진정한 그림자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받아 가지고 누리게 되는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세상의 질병, 이별, 실패, 미움, 전쟁 이런 모든 것이 지옥의 고통이다. 죄 값입니다. 죄의 값을 잘 보고 계산하여 영원히 후회할 일을 오늘 막고 있다. 오늘 땅 위에 인생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옥의 모습이다. 지옥의 축소판이며 그림자기 때문에 세상의 불행을 곱해보고 그 속성을 새겨보면 지옥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알고 보면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다(막9:43, 47-48, 계14:11).


  ▪ 지옥

  죄의 값은 영원히 지옥에서 당한다. 지옥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나 역사가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일이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으로 생겨져서 하나님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에게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영원히 죽지는 않게 되는 곳이니 그 형벌은 오늘 우리로서는 측량할 수 없다.

형벌은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는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몸과 마음을 부활시켜 신령한 몸과 마음이 되면 이 물질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죄 값의 실상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 그곳이 지옥이다(눅16:23-24, 막9:48, 계14:11).


막9:43-49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눅16:23-24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막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계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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