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사역과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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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사역과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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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섭리

① 섭리

창조한 것을 운영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섭리라고 한다. 창세기 1장의 엿새 창조 이후 6천년 역사와 우주 마지막과 천년왕국 그리고 영계의 영원까지 진행될 그 모든 운영 전부가 하나님의 섭리다. 그렇다면 창조는 섭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고, 섭리는 창조 그 이후라고 볼 수 있다.(단4:25, 32-37, 5:18-21, 6:26-27)


② 섭리의 성격

▪ 절대 주권

하나님의 섭리는 절대 주권으로 진행된다. 주권이라는 말은 주인의 전적 권리라는 말이다. 현대 사회가 아니라 고대사회 왕정국가에서 행사하던 주권은 생사를 포함해서 백성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하나님의 주권은 고대사회의 주권에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절대 주권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완전자다. 개미 한 마리나 풀 한 포기처럼 지극히 작은 것부터 태풍과 태양과 천체와 같이 지극히 큰 것도 완전 주권으로 운영한다(마10:29-30). 또 이런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 움직임까지 그리고 택자뿐 아니라 불택자와 악령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움직인다(욥1:6-12, 왕상22:19-23).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범위다. 계획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고, 그 계획대로 실제 이루어지는 것도 절대 주권이다.


마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욥1:6-12’은 P.157, ‘왕상22:19-23’은 P.172 참조

출10: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시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시104:9-15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행16:25-26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 절대 주권은 차질이나 착오나 번복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이 섭리의 주권 역사를 깨닫는다면 그 깨닫는 것만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절대 주권은 영원 전 목적을 정할 때부터 예정과 창조와 섭리로 이어지며 영원 후까지 절대 주권이다(출7:3-5, 9:12, 10:1-2, 시103:19, 104:9-15, 행16:25-26).


▪ 예정 성취

섭리는 항상 예정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 사람의 계획은 실제 결과와 너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계획이라는 것은 사실 참고만 하면 되는 정도다. 또 결과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희망사항일 뿐이다(잠16:1, 9).


잠16:1-9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사14:24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사14:26-27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자시며 완전자시며 영원불변의 단일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계획과 그 성취는 둘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계획에 차질이 발생했다면 이는 완전이 아니기 때문이며 영원불변이 아니다. 전지와 전능과 단일성의 속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우주 만물 그 어떤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하신 바로 그 예정 그대로 진행되도록 하나님께서 늘 보존 관리 운영하고 계신다는 이 섭리의 예정 성취성을 알 때라야 신앙이란 진정한 신앙이 된다(잠21:1, 사14:24, 26-27).


▪ 목적 달성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그 예정대로 성취되지만 그 성취는 크게 살펴볼 때 바로 하나님의 목적 달성이라는 점에서 살펴야 섭리의 진행 방향을 빨리 파악할 수 있다. 섭리는 사실 우리 안팎에 일어나는 일,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섭리고 그것은 앞서 예정되었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현실에서 섭리를 연구하는 일은 마치 모래 위에 쌀 한 포대를 흩어놓고 하나씩 찾는 것과 같다.

그렇게 세밀한 것 자세한 것을 자꾸 살피다 보면 전체를 보는 눈을 잃어버리기 쉽다. 섭리는 하나님의 예정 성취인데, 그 예정은 바로 단 하나인 하나님의 목표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이다.

완전자 하나님을 닮은 우리를 만드시기로 목적을 정했으니 이 목적에 필요한 순서를 미리 예정한 것이고, 섭리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실제 모든 일이 진행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어떤 힘든 일이나 쉬운 일, 슬픈 일이나 기쁜 일,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나 안 되는 일을 가릴 것 없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가 하나님의 목적, 즉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이 일 달성에 오로지 필요하고 유익한 일만 있다(롬8:28).

단언하고, 이 일에 필요 없는 일, 이 일에 상관없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으니, 우리는 이 세상 수도 없는 일을 겪고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과정을 겪게 되지만 항상 찬송하며 감사하며 기쁨으로 우리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섭리가 목적 달성의 작업 과정이기 때문이다(약1:2-4).


롬8:28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③ 섭리의 진행 과정

▪ 창조

창조는 섭리에 앞서 따로 살폈지만, 섭리를 보다 넓은 눈으로 살핀다면 창조는 섭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창조를 논할 때도 창조를 넓은 눈으로 살피면 섭리를 재창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섭리를 창조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창조와 섭리를 분리시켜 살피지 말고 연관 지어 봐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잠깐 설명을 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창조’를 다시 살펴본 것은 다른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섭리의 진행과정에 있어 그 첫 순서로 창조를 기억하자는 정도의 의미다.

다만, 섭리의 진행에 있어 첫 창조 때 나타난 에덴동산은 특별히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사안이다. 에덴동산은 타락 이전 첫 창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던 상태다. 또한 에덴동산은 구원역사가 마무리되고 세상이 끝나게 되면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의 모습이다.

인간에게 타락의 순서를 섭리역사 과정에 포함시킨 이유는 하나님을 닮는 일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타락 역사 이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 살기 이전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아는 일이다. 이 점 때문에 타락 이전 에덴동산 시기를 먼저 주신 것이다.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활하며 그 나라의 조직과 운영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 나라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 나라의 기쁨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은 한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세상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면 공상에 그친다. 바로 에덴동산 창조의 첫 순간을 살피면 우리가 오늘 미리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창2:8-25).


창2:8-25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 타락

타락의 순서는 천사의 타락이 제일 앞서 있었고, 타락한 천사 악령이 아담을 타락시켰다. 이렇게 악령이 타락의 시작이지만 타락의 중심은 어디까지는 아담이다. 만물은 아담에게 주신 아담의 것이요 아담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공이다. 악령은 옆에서 아담을 타락시켜 아담을 점령하게 되면 아담을 통해 만물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 아담을 정복하고 아담을 통해 만물을 정복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악령이 인간과 세상을 자유한다.

악령은 아담을 자기가 범죄한 그 죄를 가지고 꼭 악령 자기처럼 타락을 시켰다. 아담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 자인데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중심이 되었고 이제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에게는 하나님이 되었다. 자연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되지 못하므로 아담과 연결을 끊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아담은 이후 재림 때까지 후손의 저주를 포함하여 이 땅 위에서 전개되는 모든 타락상을 잘 보게 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아담에게 주신 자유가 있기 때문에 아담이 결정할 수 있으나, 한번 떠나게 된 아담을 다시 불러들이느냐는 문제는 하나님의 자유이지 아담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 완전 단절이다. 인간 속에 하나님과 연결을 맡은 영은 단번에 죽었고 이 영이 죽으므로 이 세상 만물은 하나님과 모든 연결이 끊어져 뿌리와 끊어진 나무의 상태가 되었다(창2:17, 엡2:1).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타락이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으로 만들어지고 하나님으로 살던 사람에게, 하나님 없는 상태를 알리고 체험하게 하는 순서였다. 이것은 지식으로만 알려서 될 일이 아니고 반드시 체험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타락이라는 과정을 섭리 중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 타락이라는 과정은 오늘까지 우리에게 현재 진행되는 체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타락을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시키는 것은, 타락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성취역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을 수가 없도록 하나님께서 타락을 시켰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미리 예정해 두었으며 절대 주권으로 타락을 진행시켰다. 이 타락이 외견상으로는 마치 인간의 결정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인간의 인지 수준에서 관찰한 것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크게 사랑하기 위해 섭리순서에 포함시킨 것이다(롬9:11-18).


롬9:11-18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눅2:51-52 ‘예수께서 ...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

고전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대속

하나님의 섭리역사에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순서는 대속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시는 도성인신이 먼저 있었고(요1:14), 하나님과 사람이 한 분으로 역사하신 신인양성일위의 지상 삶이 있었고(눅2:51-52), 그 삶의 마지막인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었으며(고후5:15), 다시 3일 후에는 신인양성일위의 성자 예수님으로 부활을 했다(마28:6, 고전15:4).

죄를 지은 것은 우리들이므로 그 죄값으로 우리가 영원 지옥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타락의 체험은 주시되 타락의 상태로 계속되도록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원래 위치로 다시 회복을 시켜야 하는데 이 2가지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고 우리 대신 살아나야 한다. 우리 대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대속’이라고 한다(고후5:15, 벧전1:3).

대속은 2천년 전 예수님의 도성인신과 사활 대속으로 완성했지만 이 완성은 법적으로 기본구원을 완성한 것이고, 이 구원을, 믿는 우리 각자에게 실제 나누어주시는 것은 믿는 사람 하나하나를 불러 중생시키는 바로 그 시점부터다(요3:5).


▪ 구원

대속으로 완성한 구원은, 이제 믿는 사람이 세상에 출생한 다음 그 사람에게 예정되어 있는 중생의 순간에 성령과 진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가지고 그를 믿는 사람으로 만든다. 구원은 그 사람이 중생하는 순간 단 한번 만에 완전하게 입혀지는 것이 있으니 이를 기본구원이라 한다(딛3:5). 기본구원을 받아 중생된 사람은 그 이후 죽는 순간까지 각자 전혀 다른 모습과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몸을 말씀과 성령에 붙들려 살도록 건설해가는 역사가 계속되는데 이를 건설구원이라고 한다(고전3:12-15).


요3:5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고전3:12-15 ‘...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계14:10-11 ‘...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 구원 역사는 오직 택자에게만 해당되고 불택자에게는 타락만 있고 이후 심판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평생은 택자들을 위해서 이용만 될 뿐이다. 그러나 만물과 다른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만물이 택자들에게 이용당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행위 뒤에 심판이 따라가게 된다. 만물의 경우는, 택자를 위해 사용되면서 택자의 신앙을 반대하는 일에 사용된 것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행동에 대한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불택자들처럼 자유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대하여 당하는 고통은 없다. 행동을 자기가 결정하고 움직이는 불택자들과 악령은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고통스럽게 영원토록 받는다(계14:10-11, 20:10).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구원하시고 세상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가는 이 섭리 역사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타락도 있고 또 구원의 방해 역사도 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그 값이 단순하게 계산해서 산출될 정도가 아니다. 택자와 꼭 같이 만들어지고 꼭 같은 형편으로 살아가는 불택자 전부가 우리 택자의 구원에 소모품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의 대속이 투자되었고, 또한 이 구원을 실제 우리 것으로 만드는 역사에는 성령과 진리가 전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성령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진리는 그 하나가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만들어낸 창조의 시공자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주 만물 전부이며 그 전부의 움직임이다(사45:9, 롬11:33).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것을 만들고 움직이고 합하고 쪼개고 변동시키고 충돌시키고 수습하고 있습니다.



‘사45:9’는 p.155 참조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심판

세상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 일반적으로 심판이라는 단어는 죄인을 지옥 보내는 것으로만 전용된다. 그러나 심판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하나는 불택자를 정죄해서 지옥에 보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택자를 심사해서 그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부분은 분리수거하여 지옥에 버림과 동시에 그가 말씀대로 바로 살았던 것은 영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은 지옥으로 보내는 최종 결정의 정죄 처리하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성도들의 영생을 확정하는 심사로 나누어야 한다. 앞에 것을 공심판이라 하고, 뒤에 것을 사심판이라고 한다. 공심판은 택자와 불택자로만 나누어 불택자를 지옥에 보내는 심판이고, 사심판은 택자 각자에게 천국의 영원한 모습을 결정짓는 심판이니 이 사심판은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심사를 받고 그 결과가 전부 다 다르게 나올 것이다. 공심판은 정죄 징벌을 결정하고 사심판은 성화의 정도와 의의 기능과 그 실력 그리고 영원한 소유와 상급을 결정하는 심사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단 이 세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세상 마지막의 심판도 당연히 섭리의 진행 과정 중 하나로 파악해서 세상 살아생전 생활이 최후 심판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또 영원한 자기 모습으로 어떻게 고정이 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계20:11-12, 고후5:10).


계20:11-12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고후5:10 ‘...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영원

대개 천국은 영원히 쉬고 노래하고 사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찌든 사람에게는 쉴 수 있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으므로 인간이 알아듣도록 천국생활은 영원히 쉬는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이때 쉰다는 의미는 세상에 하기 싫은 일 고통스러웠던 짐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천국을 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세상에서 하지 않아도 될 일, 해서는 안 될 노고, 죄와 그 값으로 무겁게 짐 지던 그런 일들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활동과 일 자체가 없는 곳이 아니며, 또한 세상식 휴일과 나태함을 영원히 가지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천국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가 라는 문제를 두고는 에덴동산을 잠깐 참고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 일이 없었는가? 편히 쉬고 노래만 하고 살았던가? 역시 그렇게만 알고 있는 것이 믿는 분들의 상식입니다만 실은 에덴동산의 일은 오늘 인생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로 충만했다. 만물을 지키고 다스리는 일이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이다(창2:15, 19-20).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

계22:5 ‘...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우주와 만물을 움직이는 곳이 그곳이었고 아담은 그 중심에 서서 그 일을 잘 감당했다. 그렇다면 격무로 너무 바빴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겠다. 그러나 죄와 마귀와 사망이 없는 곳이므로 반란도 없고 항의 데모도 없으며 통치자 몰래 놀고먹는 존재도 없었다. 그리고 세상을 운영하는 방법은 하나님중심이 되어 하나님 명령대로만 했다. 아담이 자라감에 따라 만물은 아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것이 천국의 우리 모습이다.



이 세상은 마지막 불심판이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되고 나면 과거 에덴동산처럼 그런 세상이 되겠지만 영계는 이 우주 물질계에 있었던 에덴동산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세계로 전개될 신령한 나라다. 그 나라의 존재는 그 종류도 그 존재 형식도 그 모든 생활 방식도 이곳과는 너무 차원이 높아서 이곳 세상에서는 측량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성도가 자기 실력으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순종한 연습을 통해 가지게 된 기능과 실력이 그 나라에 알지 못할 존재들을 다스리고 지도하며 하나님 노릇을 넉넉히 감당하게 할 것이다(계22:5).

천국에서 하나님 대신 하나님으로 등장할 존재가 바로 우리다. 그 나라에는 다시 미혹이 없고 타락 탈선이 없는 상태로 영원히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오늘 땅 위의 섭리 역사는 영계의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계속될 그 섭리 역사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우리가 지난날과 현재 형편을 보며 대충 짐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점이다(사9:7).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시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목적 곧 우리를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환경이다. 완전자 하나님이 만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하나님의 목적성을 가졌으니 이는 필연이다. 지성인이 만든 것에는 지성이 들어 있고 불도인의 작품에는 불도가 배어 있는 것과 같다. 완전이 아닌 존재가 만든 것은 다소간 차이가 있으나 완전자가 만든 것에는 그 완전성이 그대로 다 들어 있다. 만들 때도 그렇고 만든 이유가 있으니 만물을 만들고 주의 규례대로 늘 존재한다. 존재도 동작도 그렇다. 만물을 만들어 놓고 마음껏 알아서 하라고 방임하거나 위임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만 실은 주권 섭리로 철저히 붙드시고 운영한다. 따라서 만물은 주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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