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사역과 목적
① 자존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된 표현
홀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사업을 하나 해보려고 뜻을 정하고 추진하게 된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본다면, ‘목적 - 예정 - 창조 - 섭리’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 목적이라는 말은 우선 어떤 사업을 하려고 작정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이고, 예정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순서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고, 창조는 예정대로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만드셨다는 것이며, 섭리는 만든 것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운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사역의 첫 순서인 ‘목적’은 그 표현이 여러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예택’,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롬8:29, 엡1:4-5, 9, 11, 딤후1:9).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엡1:4-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
‘목적’이라는 말은 자존자의 사업 ‘방향’을 위주로 표현했고,
‘작정’은 이 사업을 자존자가 계획하고 ‘뜻을 정한 것’이라는 말이고,
‘선택’은 ‘택함’이라는 말이니 그 목적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말이며,
‘예택’은 존재가 있기 전 ‘미리 선택’이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은 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사용된 방편을 강조했다.
이제 설명 드린 이 표현들은 전부 하나님 사역의 첫 번째 순서에 해당된 것이다. 이 첫 번째 순서를 바로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외길에 올려 놓은 자동차와 같이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만일 첫 길을 잘못 잡고 시작하게 되면 그 고생도 말할 것 없지만 대개는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 길에서 끝을 보는 경우가 많다. 위의 표현들은 설명하는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사용되는데 존재의 순서를 설명할 때는 대체로 ‘예택’이라는 표현이 가장 좋다(엡1:4).
② 목적의 방향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자존으로부터 발원하여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 사역은, 그 사역을 출발시키고 운영하는 자존자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사역 방향의 출발이며 그 사역의 종착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완전자 무한자이므로 그 만들어진 존재들은 그 하나님을 향한 무궁 무한의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다(마5:48, 롬8:29, 11:36, 갈2:19, 벧전3:21, 엡1:4).
③ 목적의 내용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은 어느 일면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속성은 우리가 자유성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 그 속성을 가진 존재라야 한다(갈5:1, 계3:20, 벧후1:4-8).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계3:20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
벧후1:4-8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④ 목적의 대상
하나님의 목적 방향에 따라 그 내용을 다 갖춘 존재는 바로 택자들이다(엡1:4, 벧후1:5-8). 오늘 우리들이다. 오늘 세상에서는 하나님 목적 달성에 필요한 그 출발에서 갖출 것을 종류대로 챙기는 기간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전진은 무궁세계 영계에 가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목적 대상이 택자라고 할 때는 항상 불택자에 대한 문제도 있다. 불택자는 택자를 귀하게 만드시려고 택자와 존재적으로는 동일하나 다만 택자를 위해 존재하고 택자를 위해 영원히 이용되는 사람이다(사43:3, 유1:4).
오늘 인간의 가치가 인류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귀하게 평가되고 있어 이제 인간의 존엄성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교회까지도 대부분 점령하게 되어 현재 불택자의 개념이 실제 유지되는 교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성경 기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의 시대적 취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곳에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은 인간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만드는 반인간적 발상을 가지느냐고 주장을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전체 피조물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동물을 먹는 인간이나, 식물을 먹는 동물이나, 택자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불택자나 상호 가치관계는 같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결정이 중심 가치이고 나머지는 이용 가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다(사45:9, 렘18:2-6, 롬9:19-21).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43:3 ‘...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유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
사45:9 ‘... 진흙이 토지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르켜 ...’
렘18:2-6 ‘...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9:19-21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계1:5-6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⑤ 목적의 성격
하나님은 그 사역을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결과가 되도록 추진한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존자 완전자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 목적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죽게 하고 죽은 것을 다시 되살리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최상으로 받는다. 천국만 만들어 우리를 천국에서 처음부터 살게 하는 것보다 우리를 타락시켜 하나님 없는 세계를 체험하게 한 뒤에 다시 구원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는 사람이 된다.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와야 하고 대신 죽고 부활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다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타락을 시켜 구원했으니, 목적의 성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최선과 최상의 작업이다(계1:5-6).
⑥ 목적의 수단
하나님의 목적은 그 사랑이 최선이 되고 최고가 될 수 있도록 택한 사람을 타락시켰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 없는 상태를 경험하도록 만든 존재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악령과 죄와 불택자들이다. 이것을 우리 위해 필요하여 만들었다. 일반 만물들은 단순한 무대 배경이요 필요 물품이다. 그러나 악령과 불택자는 목적 대상인 우리를 여러 차원에서 맞서거나 우리 이상의 힘을 가지고 택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하는 자유성의 존재들이다.
대개 전통 신학이 불택자와 죄와 악령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목적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맞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활동을 허용만 했고 그 죄의 계획과 집행은 그들의 자기 책임과 자유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자기 차원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잘못 본 것이다. 하나님이 그 죄와 악령과 불택자를 목적 달성을 위해 만들고 사용하고 있다(욥1:6-12, 롬8:28). 즉 쇠를 용광로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서 망치로 두드려 원하는 도구를 만들고 있는데, 그 쇠와 그 쇠를 두드리는 망치와 그 쇠를 달군 불까지 전부 대장장이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며 사용하는 필수품들이다.
욥1:6-12 ‘...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
롬8:28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눅12:6-7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불택자의 항변>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불택자를 만들었다고 적었으면 그대로 알고 그대로 받아 들이며 그대로 감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면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성 때문에 이 부분은 항상 반론이 많고 마음에 의문도 많다.
불택자는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 진다. 그럴 때마다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고 믿으면 쉽다. 밥상에 작은 그릇과 큰 그릇이 필요하여 그렇게 만들었다.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 해도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까? 그 것은 타락 후부터 가지게 된 자기 중심의 악, 악령이 넣어 준 오해 오판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자 절대자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영원 무궁토록 책임을 지니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다. 그 다음이 만물 중에 아담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위치와 사명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수고를 한다. 타락 후의 통치는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는 악의 즐거움이다. 그 생각 그 자세 그 시각으로 불택자를 대변하는 것이니 대변처럼 보이나 유혹이다.
아담 다음에는 동물이, 그 다음에는 식물이, 그리고 땅이 제일 바닥에 있다. 땅이 제일 편하고 식물은 수고를 더 해야 한다. 타락 한 후에는 모두가 땅을 짓밟는다. 땅은 고통하며 억울해 한다. 그러나 땅이란 하나님이 만들 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며 동물과 인간을 떠받드는 용도로 만들었다. 흙이 풀처럼 뿌리와 줄기와 꽃을 피우려면 불편하고 불행스럽다. 흙은 처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면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풀은 토끼를 보면서 저렇게 행복하게 다니면 좋겠다고 하지만 토끼는 왜 나를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뛰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원망을 한다. 불택자는 택자를 위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존재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졌다. 오늘은 악령의 미혹을 받아 원망을 하나 막상 지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니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어 있다. 감탄하게 되어 있다.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영계의 영물도 이 땅 위에 물질계 만물도 그리고 지옥의 모든 존재도 주님의 구원과 목적과 영생을 향해 찬탄하게 되어 있다.
사11:6~9, 천년왕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이 땅 위의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시했다. 타락 후 오늘 죄악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이리는 어린 양을 침노하는 원수이며 표범이 어린 염소를 살해한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는 함께 살 수가 없는 존재적 본질적 원수다. 이리와 사자는 풀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염소와 양과 소는 풀을 먹는 짐승이다. 오늘은 타락으로 저주를 받은 세상이어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가 변형이 되었고 본질 본성이 다 악화가 되어 그렇다. 그런데 죄악 세상이 끝나고 영생의 나라가 열리게 되면 그 나라에는 침노가 없고 원수도 없으며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살인이 없다. 그래서 이리이 다시는 어린 양을 물어 뜯지 않는다고 6절부터 적었다. 그런데, 7절에서 사자는 소처럼 풀을 뜯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풀을 뜯는 것은 살해가 아니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며 공격도 아니다. 이는 평화로운 모습이며 생명이 살아 가는 은혜의 양식을 받아 가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풀을 기준으로 본다면, 토끼가 뜯어 먹든 사자가 뜯어 먹든 침략을 당하는 것이고 억울한 것이며 살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풀을 기준으로 보고, 풀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풀은 동물들과 생명이 다르고 생존의 방식이 다르며 섭취와 활용과 배출과 이어 지는 자손의 번성을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기준으로 살아 간다. 생의 법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동물을 기준으로 보면 표범이 어린 염소를 잡아 먹어야 사는 것이 오늘이다. 그 날이 되면 표범이 염소를 잡아 먹는 오늘의 죄악 세상과 달리 염소와는 친근하게 살면서 염소와 표범이 함께 풀을 뜯어 먹을 것인데 이 모습은 천년왕국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천년왕국의 모습은 우리의 영생의 모습이다. 풀도 동물도 사람도 하나님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풀의 생명은 그 존재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생사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면 노아 홍수에 인류를 죽인 것은 몰살이며 잔인이며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것은 인간이 하나님 중심을 떠나 인간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니 그렇다. 기준의 설정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물과 식물을 전부 인간이 최고의 중심에 앉아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홍수로 죽여 버리는 것은 잔혹한 것이고, 사자와 맹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소를 잡아 먹고 식물을 뜯어 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풀은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자기를 뜯어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창조주께 항의를 할 것이다. 그 나라는 누구에게나 항변권이 주어 진다. 그리고 오늘 죄악 세상에서는 사자가 풀을 뜯어 먹지 않기 때문에 맹수들은 선하게 보이고 우리 눈에 선하게 보는 사슴과 소와 양을 몹쓸 맹수로 본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홀로 계시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를 만드시려고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를 잘 만들어 보시려고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과 교구재를 모두 동원했다. 나눗셈을 가르치기 위해 돌을 둘로 깨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돌도 인간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노아 홍수보다 더 잔혹하다 할 것이다. 곡식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까고 벗기고 으개고 삶고 반죽을 하고 불에 구워 버린다면 얼마나 아플까? 그렇지 않다. 우리 기준으로 보니 곡식이 깨지고 삶기니 아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존재 이유와 생존의 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식물들로서는 유명해 지는 것이요 천하에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니 오히려 환영하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먹는다는 이 말씀으로, 우리는 존재별 생의 법칙과 의미를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택자를 만들고 영원히 불 가운데 던지는 고난을 두고, 택자 기준이나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겠지만 불택자의 원래 존재 이유를 본다면 그 것이 만유주가 계획한 성취이므로 그 자체를 두고 시비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택자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어떻게 만들고 움직이고 어떻게 처리해도 궁극적으로 존재적 의미에 따라 수긍할 일이고 지켜 보며 감탄할 것뿐이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와 같아 보이는 불택자를 만들어 그들이 우리와 달리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들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처참해 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다. 우리 기준에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라고 했으니 이렇게 봐야 한다. 불택자는 이런 세계를 모르니 이런 내용을 알면 억울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가린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다 밝혀 지고 나면 불택자들도 소에게 먹히는 풀과 같이 그들의 존재 의미에 따라 하나님께는 감탄과 찬양을, 우리에게는 부러움을,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의 사랑성>
세상 기준으로 택자를 사랑한 것은 이해하나 불택자를 지옥으로 만든 것은 잔인하다는 반론은 존재론적 기준으로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더하여, 불택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우리가 갈 영계를 준비하는 세상 생활에 도움을 주시기 위해 불택자와 지옥을 택자와 중생된 우리에게 더욱 실감 있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보면 불택자의 지옥은 영원히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당하는 고통을 당연하게 받는다. 천국의 우리를 부러워 하지 시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두고 하나님의 처사가 마땅하다고 하지 억울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성경의 대표 원리가 있다.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표시하는 경우다. 십일조는 10분의 1마 떼지만 그 내용은 10에 10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다. 안식일도 그렇다. 출애굽에 장자를 친 것은 장자만 쳤지만 전멸 재앙의 표시다. 반대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에게 첫째의 숫자를 헤아려 돈으로 거둬 들였다. 민3:41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라고 했다. 처음 난 것의 의미는 나머지 전부의 대표니 곧 전체가 된다. 이 원리에 따라 출34:19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고 출34:26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며 라고 되어 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는 그 첫 것뿐 아니라 이어 지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첫 것'이라고 했다. 이 원리에 따라 렘2: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전부 첫 것이다. 그 외에는 이방 민족이다. 첫 것은 택자다. 그 외는 불택자다. 그 구별의 기준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면 구원과 멸망이지만 더 넓은 차원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론의 궁극적 세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좁게 보면 온갖 것이 많고 차이가 있고 다르지만 넓게 보고 더 넓혀 보면 완전자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완전을 이루는 일에 한 부분일 뿐이다. 딤전4:4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보면 그렇다. 타락도 악령도 죄도 홍수도 완전의 하나님의 완전 목적을 달성하는 구성품이다.
첫 것의 원리는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영과 몸은 다르지만 영을 첫 것으로 표시했을 때는 첫 것만 잡고 몸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서다. 결국 포함을 시킨다. 롬16:5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이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만 별종도 아니다. 이어지는 전체의 출발이다. 나머지는 이와 같다. 계14:4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좁게 보면 예수님이 먼저 첫 열매 되셨고, 우리는 차원이 다르나 존재적으로 명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요1:14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이며 '요3:16 '독생자를 주셨'다. 이런 외아들 예수님을 롬8:29에서 '미리 아신 자들' 우리를 본받게 할 면으로는 '맏아들이 되게 하려' 했고 히1:6에서도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오게' 하셨다.외아들과 맏아들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러나 기준을 좀 달리 해보면 동일인이다. 모순이 아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목적 대상인 택자 우리는 별도 존재다. 나머지는 다 우리를 위해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다시 그 역할의 측면을 보면 우리 옆에서 우선 돕는 존재들은 천사들이다. 당연히 선한 존재다. 우리를 위하기는 해도 대항 세력으로 만든 악령은 우리의 맞은 편에서 칼과 유혹을 들고 노린다. 당장은 피흘려 싸울 원수지만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고 우리를 기르는 목적의 범위 내에서 이 쪽과 저 쪽이다. 천국과 지옥도 그렇다.
<죄를 사용>
우리를 택하고 목적에 맞춰 기르기 이해 죄와 세상과 마귀를 쥐고 사용
(2) 하나님의 사역과 목적
① 자존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된 표현
홀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사업을 하나 해보려고 뜻을 정하고 추진하게 된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본다면, ‘목적 - 예정 - 창조 - 섭리’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 목적이라는 말은 우선 어떤 사업을 하려고 작정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이고, 예정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순서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것이고, 창조는 예정대로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만드셨다는 것이며, 섭리는 만든 것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운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사역의 첫 순서인 ‘목적’은 그 표현이 여러 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예택’,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롬8:29, 엡1:4-5, 9, 11, 딤후1:9).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엡1:4-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
‘목적’이라는 말은 자존자의 사업 ‘방향’을 위주로 표현했고,
‘작정’은 이 사업을 자존자가 계획하고 ‘뜻을 정한 것’이라는 말이고,
‘선택’은 ‘택함’이라는 말이니 그 목적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말이며,
‘예택’은 존재가 있기 전 ‘미리 선택’이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구원’은 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사용된 방편을 강조했다.
이제 설명 드린 이 표현들은 전부 하나님 사역의 첫 번째 순서에 해당된 것이다. 이 첫 번째 순서를 바로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외길에 올려 놓은 자동차와 같이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만일 첫 길을 잘못 잡고 시작하게 되면 그 고생도 말할 것 없지만 대개는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 길에서 끝을 보는 경우가 많다. 위의 표현들은 설명하는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사용되는데 존재의 순서를 설명할 때는 대체로 ‘예택’이라는 표현이 가장 좋다(엡1:4).
② 목적의 방향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자존으로부터 발원하여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 사역은, 그 사역을 출발시키고 운영하는 자존자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사역 방향의 출발이며 그 사역의 종착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완전자 무한자이므로 그 만들어진 존재들은 그 하나님을 향한 무궁 무한의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다(마5:48, 롬8:29, 11:36, 갈2:19, 벧전3:21, 엡1:4).
③ 목적의 내용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은 어느 일면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속성은 우리가 자유성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 그 속성을 가진 존재라야 한다(갈5:1, 계3:20, 벧후1:4-8).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계3:20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
벧후1:4-8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④ 목적의 대상
하나님의 목적 방향에 따라 그 내용을 다 갖춘 존재는 바로 택자들이다(엡1:4, 벧후1:5-8). 오늘 우리들이다. 오늘 세상에서는 하나님 목적 달성에 필요한 그 출발에서 갖출 것을 종류대로 챙기는 기간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전진은 무궁세계 영계에 가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목적 대상이 택자라고 할 때는 항상 불택자에 대한 문제도 있다. 불택자는 택자를 귀하게 만드시려고 택자와 존재적으로는 동일하나 다만 택자를 위해 존재하고 택자를 위해 영원히 이용되는 사람이다(사43:3, 유1:4).
오늘 인간의 가치가 인류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귀하게 평가되고 있어 이제 인간의 존엄성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교회까지도 대부분 점령하게 되어 현재 불택자의 개념이 실제 유지되는 교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성경 기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의 시대적 취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곳에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은 인간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만드는 반인간적 발상을 가지느냐고 주장을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전체 피조물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동물을 먹는 인간이나, 식물을 먹는 동물이나, 택자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불택자나 상호 가치관계는 같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결정이 중심 가치이고 나머지는 이용 가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다(사45:9, 렘18:2-6, 롬9:19-21).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43:3 ‘...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유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
사45:9 ‘... 진흙이 토지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르켜 ...’
렘18:2-6 ‘...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9:19-21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계1:5-6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⑤ 목적의 성격
하나님은 그 사역을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결과가 되도록 추진한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존자 완전자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 목적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죽게 하고 죽은 것을 다시 되살리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최상으로 받는다. 천국만 만들어 우리를 천국에서 처음부터 살게 하는 것보다 우리를 타락시켜 하나님 없는 세계를 체험하게 한 뒤에 다시 구원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는 사람이 된다.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 되어 와야 하고 대신 죽고 부활하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다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타락을 시켜 구원했으니, 목적의 성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최선과 최상의 작업이다(계1:5-6).
⑥ 목적의 수단
하나님의 목적은 그 사랑이 최선이 되고 최고가 될 수 있도록 택한 사람을 타락시켰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 없는 상태를 경험하도록 만든 존재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악령과 죄와 불택자들이다. 이것을 우리 위해 필요하여 만들었다. 일반 만물들은 단순한 무대 배경이요 필요 물품이다. 그러나 악령과 불택자는 목적 대상인 우리를 여러 차원에서 맞서거나 우리 이상의 힘을 가지고 택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하는 자유성의 존재들이다.
대개 전통 신학이 불택자와 죄와 악령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목적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맞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활동을 허용만 했고 그 죄의 계획과 집행은 그들의 자기 책임과 자유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자기 차원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잘못 본 것이다. 하나님이 그 죄와 악령과 불택자를 목적 달성을 위해 만들고 사용하고 있다(욥1:6-12, 롬8:28). 즉 쇠를 용광로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서 망치로 두드려 원하는 도구를 만들고 있는데, 그 쇠와 그 쇠를 두드리는 망치와 그 쇠를 달군 불까지 전부 대장장이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며 사용하는 필수품들이다.
욥1:6-12 ‘...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
롬8:28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눅12:6-7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불택자의 항변>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불택자를 만들었다고 적었으면 그대로 알고 그대로 받아 들이며 그대로 감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면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성 때문에 이 부분은 항상 반론이 많고 마음에 의문도 많다.
불택자는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 진다. 그럴 때마다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만들었다고 믿으면 쉽다. 밥상에 작은 그릇과 큰 그릇이 필요하여 그렇게 만들었다.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간단한 문제다.
그렇다 해도 억울하고 분하지 않을까? 그 것은 타락 후부터 가지게 된 자기 중심의 악, 악령이 넣어 준 오해 오판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자 절대자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영원 무궁토록 책임을 지니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다. 그 다음이 만물 중에 아담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위치와 사명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수고를 한다. 타락 후의 통치는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희생 시키는 악의 즐거움이다. 그 생각 그 자세 그 시각으로 불택자를 대변하는 것이니 대변처럼 보이나 유혹이다.
아담 다음에는 동물이, 그 다음에는 식물이, 그리고 땅이 제일 바닥에 있다. 땅이 제일 편하고 식물은 수고를 더 해야 한다. 타락 한 후에는 모두가 땅을 짓밟는다. 땅은 고통하며 억울해 한다. 그러나 땅이란 하나님이 만들 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며 동물과 인간을 떠받드는 용도로 만들었다. 흙이 풀처럼 뿌리와 줄기와 꽃을 피우려면 불편하고 불행스럽다. 흙은 처음부터 식물의 품이 되면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풀은 토끼를 보면서 저렇게 행복하게 다니면 좋겠다고 하지만 토끼는 왜 나를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뛰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원망을 한다. 불택자는 택자를 위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존재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 졌다. 오늘은 악령의 미혹을 받아 원망을 하나 막상 지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니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어 있다. 감탄하게 되어 있다. 빌립보서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영계의 영물도 이 땅 위에 물질계 만물도 그리고 지옥의 모든 존재도 주님의 구원과 목적과 영생을 향해 찬탄하게 되어 있다.
사11:6~9, 천년왕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이 땅 위의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시했다. 타락 후 오늘 죄악 세상을 기준으로 보면 이리는 어린 양을 침노하는 원수이며 표범이 어린 염소를 살해한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는 함께 살 수가 없는 존재적 본질적 원수다. 이리와 사자는 풀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염소와 양과 소는 풀을 먹는 짐승이다. 오늘은 타락으로 저주를 받은 세상이어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가 변형이 되었고 본질 본성이 다 악화가 되어 그렇다. 그런데 죄악 세상이 끝나고 영생의 나라가 열리게 되면 그 나라에는 침노가 없고 원수도 없으며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살인이 없다. 그래서 이리이 다시는 어린 양을 물어 뜯지 않는다고 6절부터 적었다. 그런데, 7절에서 사자는 소처럼 풀을 뜯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풀을 뜯는 것은 살해가 아니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며 공격도 아니다. 이는 평화로운 모습이며 생명이 살아 가는 은혜의 양식을 받아 가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풀을 기준으로 본다면, 토끼가 뜯어 먹든 사자가 뜯어 먹든 침략을 당하는 것이고 억울한 것이며 살해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이다. 풀을 기준으로 보고, 풀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풀은 동물들과 생명이 다르고 생존의 방식이 다르며 섭취와 활용과 배출과 이어 지는 자손의 번성을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기준으로 살아 간다. 생의 법칙이 서로 다른 것이다. 동물을 기준으로 보면 표범이 어린 염소를 잡아 먹어야 사는 것이 오늘이다. 그 날이 되면 표범이 염소를 잡아 먹는 오늘의 죄악 세상과 달리 염소와는 친근하게 살면서 염소와 표범이 함께 풀을 뜯어 먹을 것인데 이 모습은 천년왕국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천년왕국의 모습은 우리의 영생의 모습이다. 풀도 동물도 사람도 하나님도 생명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풀의 생명은 그 존재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생사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면 노아 홍수에 인류를 죽인 것은 몰살이며 잔인이며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것은 인간이 하나님 중심을 떠나 인간을 절대 기준으로 놓고 보니 그렇다. 기준의 설정 자체가 잘못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물과 식물을 전부 인간이 최고의 중심에 앉아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홍수로 죽여 버리는 것은 잔혹한 것이고, 사자와 맹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소를 잡아 먹고 식물을 뜯어 먹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풀은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자기를 뜯어 먹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창조주께 항의를 할 것이다. 그 나라는 누구에게나 항변권이 주어 진다. 그리고 오늘 죄악 세상에서는 사자가 풀을 뜯어 먹지 않기 때문에 맹수들은 선하게 보이고 우리 눈에 선하게 보는 사슴과 소와 양을 몹쓸 맹수로 본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홀로 계시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를 만드시려고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를 잘 만들어 보시려고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과 교구재를 모두 동원했다. 나눗셈을 가르치기 위해 돌을 둘로 깨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돌도 인간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노아 홍수보다 더 잔혹하다 할 것이다. 곡식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까고 벗기고 으개고 삶고 반죽을 하고 불에 구워 버린다면 얼마나 아플까? 그렇지 않다. 우리 기준으로 보니 곡식이 깨지고 삶기니 아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존재 이유와 생존의 방식으로 보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식물들로서는 유명해 지는 것이요 천하에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니 오히려 환영하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천년왕국에서 사자가 풀을 먹는다는 이 말씀으로, 우리는 존재별 생의 법칙과 의미를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택자를 만들고 영원히 불 가운데 던지는 고난을 두고, 택자 기준이나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불행하겠지만 불택자의 원래 존재 이유를 본다면 그 것이 만유주가 계획한 성취이므로 그 자체를 두고 시비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택자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어떻게 만들고 움직이고 어떻게 처리해도 궁극적으로 존재적 의미에 따라 수긍할 일이고 지켜 보며 감탄할 것뿐이다.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와 같아 보이는 불택자를 만들어 그들이 우리와 달리 말씀을 어기는 행동을 하게 하고 그들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처참해 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다. 우리 기준에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라고 했으니 이렇게 봐야 한다. 불택자는 이런 세계를 모르니 이런 내용을 알면 억울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가린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다 밝혀 지고 나면 불택자들도 소에게 먹히는 풀과 같이 그들의 존재 의미에 따라 하나님께는 감탄과 찬양을, 우리에게는 부러움을,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인식하여 원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의 사랑성>
세상 기준으로 택자를 사랑한 것은 이해하나 불택자를 지옥으로 만든 것은 잔인하다는 반론은 존재론적 기준으로 앞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더하여, 불택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우리가 갈 영계를 준비하는 세상 생활에 도움을 주시기 위해 불택자와 지옥을 택자와 중생된 우리에게 더욱 실감 있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보면 불택자의 지옥은 영원히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당하는 고통을 당연하게 받는다. 천국의 우리를 부러워 하지 시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두고 하나님의 처사가 마땅하다고 하지 억울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성경의 대표 원리가 있다.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표시하는 경우다. 십일조는 10분의 1마 떼지만 그 내용은 10에 10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다. 안식일도 그렇다. 출애굽에 장자를 친 것은 장자만 쳤지만 전멸 재앙의 표시다. 반대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에게 첫째의 숫자를 헤아려 돈으로 거둬 들였다. 민3:41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라고 했다. 처음 난 것의 의미는 나머지 전부의 대표니 곧 전체가 된다. 이 원리에 따라 출34:19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고 출34:26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며 라고 되어 있다.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는 그 첫 것뿐 아니라 이어 지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첫 것'이라고 했다. 이 원리에 따라 렘2: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전부 첫 것이다. 그 외에는 이방 민족이다. 첫 것은 택자다. 그 외는 불택자다. 그 구별의 기준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면 구원과 멸망이지만 더 넓은 차원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재론의 궁극적 세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좁게 보면 온갖 것이 많고 차이가 있고 다르지만 넓게 보고 더 넓혀 보면 완전자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완전을 이루는 일에 한 부분일 뿐이다. 딤전4:4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보면 그렇다. 타락도 악령도 죄도 홍수도 완전의 하나님의 완전 목적을 달성하는 구성품이다.
첫 것의 원리는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영과 몸은 다르지만 영을 첫 것으로 표시했을 때는 첫 것만 잡고 몸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순서다. 결국 포함을 시킨다. 롬16:5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이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만 별종도 아니다. 이어지는 전체의 출발이다. 나머지는 이와 같다. 계14:4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좁게 보면 예수님이 먼저 첫 열매 되셨고, 우리는 차원이 다르나 존재적으로 명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요1:14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이며 '요3:16 '독생자를 주셨'다. 이런 외아들 예수님을 롬8:29에서 '미리 아신 자들' 우리를 본받게 할 면으로는 '맏아들이 되게 하려' 했고 히1:6에서도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오게' 하셨다.외아들과 맏아들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러나 기준을 좀 달리 해보면 동일인이다. 모순이 아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목적 대상인 택자 우리는 별도 존재다. 나머지는 다 우리를 위해 만들었다. 그렇다 해도 다시 그 역할의 측면을 보면 우리 옆에서 우선 돕는 존재들은 천사들이다. 당연히 선한 존재다. 우리를 위하기는 해도 대항 세력으로 만든 악령은 우리의 맞은 편에서 칼과 유혹을 들고 노린다. 당장은 피흘려 싸울 원수지만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고 우리를 기르는 목적의 범위 내에서 이 쪽과 저 쪽이다. 천국과 지옥도 그렇다.
<죄를 사용>
우리를 택하고 목적에 맞춰 기르기 이해 죄와 세상과 마귀를 쥐고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