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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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1 08:52
(3) 속성
① 속성의 의미
▪ 속성으로 파악되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존재 모습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그 본체가 완전이므로 어떤 종류의 형체나 모습도 없다(딤전6:16). 그렇지만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분의 행동은 어떤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살펴볼 수 있다. 즉 성경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그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속성의 종류는 기준에 따라 여러 분류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12가지 분류법을 따라 설명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상대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앞으로 자라가야 할 방향이며 목표이기 때문이다(고전15:49, 골3:10).
▪ 공유와 비공유 속성
12가지 속성 중에 하나님만 가지신 ‘비공유’ 속성 4가지는 ‘자존’ ‘완전’ ‘영원’ ‘단일’이며, 인간도 모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유’ 속성 8가지는 ‘지식’ ‘지혜’ ‘선’ ‘사랑’ ‘의’ ‘거룩’ ‘진실’ ‘주권’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에서 이렇게 분류하고 설명해 오지만, 사실 비공유 속성도 좀더 정밀하게 분류하자면 공유 속성과 큰 차이가 없다. 마치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같을 수 없는데 지식이라는 단어가 같기 때문에 큰 범위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중생된 우리에게는 비공유 4가지 속성이 중생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 면으로 자라가고 있다.
자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도 미래적으로는 자존성에서 발원된 존재로 살 것이고(엡1:23), 완전도 하나님의 완전은 아니지만 그림자와 같은 모형적 부분적 일시적 완전은 가지고 있다(마5:48). 또한 중생된 사람 속에는 영원불변을 향한 걸음이 시작되고 있으며(살전4:17, 히13:27-28), 단일성 역시 마찬가지다(딤전1:17). 따라서 공유와 비공유는 큰 의미는 없지만 일반 신학의 기초 상식이므로 잠깐 소개한다.
② 속성 12가지
▪ 자존
자존이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이다. ‘자존’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첫째로 하나님은 스스로 원인자로만 계신다는 뜻이고, 둘째로 시간적 의미로 살필 때는 영원 전부터 계신다는 뜻이며, 셋째로는 신앙문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자존’으로 전부 이해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첫째,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서 존재한 분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생한 분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이 전부이며 하나님 한분만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 한분 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었고 하나님만이 원인이다.
둘째, ‘자존’을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그 연대를 측정한다면 달리 표현할 수 없어 ‘영원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존재시기를 살피는 것은 원래부터 곤란한 문제다. 이유는,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 함께 만든 것이고 하나님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시기를 표현하는 것은, 비록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린 신앙의 어린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인간의 시간을 가지고 굳이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에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셋째, 하나님의 ‘자존’의 의미가 우리에게 실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알아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모든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자존’에서 풀어낼 수 있다. 그분만이 계셨고 그분이 만들어서 모든 것이 다 나왔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인간과 사건과 움직임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며 그 배후가 하나님이며 그 내면은 전부 하나님의 자존에서 해결할 수 있다(출3:14, 계1:8, 22:13).
▪ 완전
완전은, 부족이나 흠이나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본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완전이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이고, 여기 속성에서 표현할 때 완전은 그 범위가 좁은 차이가 있다. 완전에 대하여는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흔히 12가지로 표현하지만 만일 최소한으로 줄인다면 ‘자존하신 완전자’라고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줄일 수 있는데도 ‘완전’이라는 속성을 포함하여 12가지 면으로 펼쳐서 하나님을 살펴보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연구해야 우리 신앙현실에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5:48, 삼하22:26).
▪ 영원
하나님의 속성을 ‘영원’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영원불변을 말한다. 하나님을 과거 시간으로 본다면 영원 전 자존하신 분이지만 그 진행될 앞날의 시간으로 본다면 영원히 변치 않을 불변자다. 그분 자체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므로 영원성을 가진 분이고 그분의 말씀도 결정도 행동도 모두가 영원성이다. 그분 자체가 영원성의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은 전부가 영원성이다(히13:8, 약1:17).
▪ 단일
단일이란 하나라는 뜻이다. 단순하다는 의미도 있고 모순이 없다는 뜻도 있다. 혼선이 없고 변경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뉨이 없고 단절이 없다. 하나님은 단일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별개가 아닌, 한 하나님이시며,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고, 진노할 때와 웃으실 때도 하나님은 동일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며 또한 그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동일하지 딴 마음을 먹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단일성의 하나님인데도 우리를 대할 때 모든 면이 항상 달리 보이는 것은, 하나님은 늘 동일하신데 우리가 왼쪽으로 삐뚤어져 나가면 우리를 오른쪽으로 끌어들이시고 또 오른쪽으로 삐뚤어져 나가면 왼쪽으로 끌어들인다. 누구에게는 왼쪽으로 오라하고 누구에게는 오른쪽으로 오라 하지만 실은 하나님은 단일이고 그 말씀도 단일이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도 다 단일이다(신6:4, 고전8:6).
▪ 지식
하나님은 과거에 대한 모든 것을 바로 알고 다 알고 있으니 이것을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한다. 지식은 지혜와 가장 가깝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자존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영원불변의 단일성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특별히 전지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을 전지라고 표현할 때 이 전지는 우리 인간 수준에서 전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새겨두어야 한다. 사람치고는 모르는 것이 없다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완전이 지식 면으로 나타난 전지이니 이 전지는 참 전지다(롬11:33, 삼상2:3, 겔11:5).
▪ 지혜
지식 중에서도, 특별히 미래에 관련하여 아는 지식을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아시니 이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지을 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혜의 존재로 만들었다. 지혜는 주로 지식과 함께 늘 사용되면서 지식은 과거를, 지혜는 미래를 아는 면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지혜는 늘 지식과 함께 살펴보게 된다(롬11:33, 시111:10).
지식과 지혜는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여도 하나님께서 과거 지나간 것은 거의 알려주시는데, 다가올 미래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려 주지 않으시는 미래는, 지나간 과거에 알려주신 지식을 사용해서 알게 한다. 따라서 지나간 지식을 무시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에게서는 지혜가 나올 수 없다. 모두가 다 함께 알고 있는 과거사에서 앞날을 알고 상대할 수 있는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이렇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일 때 지나간 과거를 보아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지난 과거를 움직여 왔고 또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알던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착오나 차이가 없다. 세월이 지나갔다고 하나님 기억이나 느낌이 흐려지는 일이 없고 앞으로 닥쳐 봐야 알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지식’과 ‘지혜’로 따로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되 ‘지식’과 ‘지혜’면으로 각각 따로 알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롬11:33, 시111:10).
▪ 선
선은 ‘중심’이라는 면을 두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나님의 ‘선’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결정한다는 뜻이다. 선이라는 표현 자체는 좋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좋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좋으면 하나님의 ‘선’이다.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은 ‘선’과 악은 하나님의 것이니 인간은 선과 악을 자기 것으로 취하면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반론을 하는 경우는 많다. 누구에게든지 자기에게 좋으면 선이고 자기에게 나쁘면 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좋은 것은 선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 중심에 하나님께 좋은 것만 선이 되어야 하느냐는 지적이 많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께 선한 것을 혹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선을 악이라고 표현하면 된다. 이 세상 살아생전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표현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무궁토록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선이다.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혹 교회까지도 그들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에게 좋은 것을 선이라고 정의한다면 기독교는 인본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인류 전체가 공통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까지도 선이라 하고 공통적으로 나쁘게 보는 것은 악이라고 하는데, 이런 선악의 개념은 세상이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과 악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좋으면 성경이 말하는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다(창2:17, 마20:14-15, 막10:18).
▪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본체와 본성을 살펴보면서 ‘사랑’은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므로 그 본성이 어떤 상대를 접해도 주기만 하지 받는 수는 없다. 대가 없이 준다는 면을 강조할 때는 ‘은혜’라 하고, 준다는 점과 함께 감정까지 포함하면 ‘사랑’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이상의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이 사랑과는 비교할 사랑도 없으니 우리를 구원한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이다(요일3:16, 요일4:8-10).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종류로는 남녀가 사랑하는 이성의 사랑이 있고, 같은 종류라 좋아하는 우정의 사랑이 있고, 출산으로 생기는 혈육의 사랑이 있다. 이 3가지 사랑은 얼른 볼 때 조건 없이 주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이고 있어 ‘사랑’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사랑들은 외모만 사랑처럼 보일 뿐이다(고전13:1-8).
인간에게 있는 것 중에 그래도 다른 존재를 위해 가장 자기를 많이 내놓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이제 설명 드린 3가지를 흔히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사랑들’을 성경의 하나님 ‘사랑’과 혼동하여 그 이름이 같고 그 외모가 비슷하다 해서 아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 교회로 진행되면서 아주 일반화되었다.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도라고 하는 정도인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혼동해버리면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기독교의 타락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가 남녀 이성의 문란 때문에 내부적으로 썩어들어 가는 이유도 대속의 사랑을 남녀 이성의 사랑과 혼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불신 사회와 교회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것도 대속의 하나님 사랑은 잊어버리고 인간들이 아는 사랑이 성경의 사랑인 줄 혼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와 교회가 교리와 신앙노선에 대한 비교 구별도 없이 무조건 통일운동으로 달려가는 것도 사랑을 혼동한 결과다(고전13:1-8, 요일4:10).
▪ 거룩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 ‘거룩’에 대하여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다. 거룩은 ‘구별’이다.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분이며,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타락한 사람에게는 쓸 만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흉내만 내더라도 ‘구별’이라는 것은 좋은 장점이다. 잘 믿을 수 있는 요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구별의 하나님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을 따라 움직여지고 존재되도록 하시는 분임을 알고 조심해야 하겠다. 만물과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위치가 있고 사는 법이 있다. 바로 그 원 상태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거룩’성이다. 그렇게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에서 항상 ‘구별’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성 때문에 우리는 만물을 상대하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길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닌 것을 그냥 둘 수 없고 혼잡한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고전14:33). 이것인지 저것인지 반드시 따지는 분이다. 그리고 종류대로 분류하여 적재적소에 배치를 하고 또 그 보응과 보상을 하는 분이다.
옳고 그른 것을 분류하여 옳은 것은 천국으로 그른 것은 지옥으로 보낸다. 비록 아들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따져서 그 죄인의 죄 값을 따져서 전부 갚게 하는 분이다. 그리고 깨끗해진 다음에 다시 아들로 거두는 분이다(겔44:23, 사5:16).
▪ 진실
진실은 다른 말로 ‘참’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밖에 없는 참이고 하나님의 결정도 그 행동도 전부가 참이다. 하나님은 참이지만 우리가 그 참을 찾아가는 길은 참이 아닌 여러 가지 거짓된 것을 다 구별해서 걸러내야만 하기 때문에 진실은 거룩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지식과 지혜가 시간을 기준으로 과거를 아는 것과 미래를 향한 것으로 구분한다면, 거룩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진실은 거룩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거룩’성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이든지 가장 옳고 바른 단 하나의 ‘참’을 알고 계시고 ‘참’을 찾으시니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참’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자시므로 타락한 우리와 달리 거룩을 통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거룩성과 진실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먼저 본받아 노력해야 하나님의 ‘진실’에 도달한다. 먼저 거룩이 있고 그 다음 진실이 있다(계3:7, 19:11, 고후1:12).
▪ 의
옳은 것을, 의라고 합니다. 옳은 그 자체도 ‘의’라고 하지만 ‘의’라고 할 때는 그 옳은 것이 움직인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나님은 옳으며 옳게 움직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상대할 때는 우선 하나님 자체를 직접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옳다.
그분 자체가 완전이므로 완전이라는 본체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가 옳은 것밖에 없다. 그런데 완전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뜻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의라고 하고, 그 의는 옳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뒤에는, 하나님의 의는 변질된 인간을 다시 이전처럼 되돌려 하나님 앞에 옳게 살 수 있도록 역사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를 대신 한 ‘의’다. 예수님으로 오셔서 행한 모든 사활의 대속이 옳은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옳은 의를 가진 의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 자체와 행위와 생활까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옳은 존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까지 다 말씀하고 있다. 보통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도 있지만, 죄인을 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가 ‘의’이기도 하다. 또 구원받은 우리가 늘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의라고 한다(요일2:29, 시7:9).
▪ 주권
주인이 가지는 권리를 주권이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다.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그 모든 권리를 절대적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주권을 좀더 자세하게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절대주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예정도 또 그 예정대로의 성취도 하나님 혼자 권리를 가졌고 그 권리로 다스리고 있다. 국가에 대한 주권을 임금이 가지는 왕정정치, 국민이 가지는 민주정치 등에서 그 주권의 모습을 약간 볼 수 있으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림자요 참고일 뿐이다. 하나님 주권은 완전자의 전지와 전능에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주권에는 개미 한 마리의 수염이 움직이는 것까지 완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마10:29-30, 대상29:11).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만든 태양 아래 하나님 만든 땅을 밟고 하나님 만든 만물을 접하고 살고 있다. 다만 이 물질계라는 우주 내의 존재만을 상대할 수 있다. 또한 밥을 짓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어 먹게 했으니 이는 물질계 만물을 물질의 이치인 물리를 통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이치를 가지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개발하든, 그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로 봐야 한다. 또 전혀 생각 못한 기술이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은 물질계 이치를 인간이 또 하나 찾아냈다고 알면 되고 그 기술이 놀라운 기술이라면 그 기술을 찾아낸 인간에게 놀랄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물질계 안에 그런 물질의 이치를 미리 만들어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솜씨에 놀랄 일이다. 지금 신학이 과학의 솜씨 앞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이유는 물질의 근본개념을 잘못 알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마음이 물질이 아니고 영이라고 생각한 것이 결정적 이유다. 그리고 ‘주권’이라는 이 하나님의 속성만 바로 알아도 이런 혼동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질계 안에 있는 모든 물질과 영계의 영원 후까지 존재할 모든 존재에게 다 미친다. 오늘 세상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주권을 잃어버리신 듯, 포기하신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주권이 오히려 인간에게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이 만물을 하나님처럼 다 접촉하며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되도록 주권으로 허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물질계라는 범위에서 우리는 특별히 과학 기술의 발달을 보며 인간의 힘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이 과학으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시지만 그 범위는 물질계이지 영계는 아니다.
현재 물질계 안에서도 우리 중생된 영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영계의 존재와도 같다. 이 영을 제외하고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비록 신비하기도 하고 또 그 가치는 일반 만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물질로 된 물질계의 물질들이다. 그리고 물질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인간에게 전권을 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인간이 주권자가 된 듯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밀하게 보면 주권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받고 있다.
인간이 과학을 이용하여 하나님 없이도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학의 놀랄 만한 기술도 알고 보면 타락한 인생들에게 이미 타락할 때부터 주신 물질계 범위의 것이니 아무 새로울 것도 없다. 나무에게 물과 거름을 잘 조절하면 소출이 많아지고, 나무를 해치는 벌레를 잡아주면 그 생명이 연장되는 것처럼, 인간의 심신도 그 영양과 필수품과 병충해를 잘 조절해 주면 그 심신이 물질이므로 물리에 잘 맞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를 접붙여서 제삼의 종자를 만드는 것은 현대 과학이 그 기술을 자랑하기 전부터 과거 고대인들이 다 알고 했던 일이다. 종자를 섞어 과거에 보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이 넘어갈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실력껏 손을 댈 수 있는 물질계의 영역임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모든 주권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
과학의 힘과 활동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는 조직신학의 인론편에서 사람의 구성요소라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사람은 영물과 물질로 만들어진 유일한 피조물이므로, 물질의 이치가 닿을 수 있는 곳과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선을 연구하는 데에는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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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딤전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겔44:23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딤전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삼하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
삼상2:3 ‘...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겔11-5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마20:14-15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막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
요일4:8-10 ‘...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사랑은 여기 있으니 ...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전13:1-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겔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사5:16 ‘...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계3:7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요일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시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마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대상29:11 ‘...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① 속성의 의미
▪ 속성으로 파악되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존재 모습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그 본체가 완전이므로 어떤 종류의 형체나 모습도 없다(딤전6:16). 그렇지만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분의 행동은 어떤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살펴볼 수 있다. 즉 성경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그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속성의 종류는 기준에 따라 여러 분류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12가지 분류법을 따라 설명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상대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앞으로 자라가야 할 방향이며 목표이기 때문이다(고전15:49, 골3:10).
▪ 공유와 비공유 속성
12가지 속성 중에 하나님만 가지신 ‘비공유’ 속성 4가지는 ‘자존’ ‘완전’ ‘영원’ ‘단일’이며, 인간도 모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유’ 속성 8가지는 ‘지식’ ‘지혜’ ‘선’ ‘사랑’ ‘의’ ‘거룩’ ‘진실’ ‘주권’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에서 이렇게 분류하고 설명해 오지만, 사실 비공유 속성도 좀더 정밀하게 분류하자면 공유 속성과 큰 차이가 없다. 마치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같을 수 없는데 지식이라는 단어가 같기 때문에 큰 범위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중생된 우리에게는 비공유 4가지 속성이 중생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 면으로 자라가고 있다.
자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도 미래적으로는 자존성에서 발원된 존재로 살 것이고(엡1:23), 완전도 하나님의 완전은 아니지만 그림자와 같은 모형적 부분적 일시적 완전은 가지고 있다(마5:48). 또한 중생된 사람 속에는 영원불변을 향한 걸음이 시작되고 있으며(살전4:17, 히13:27-28), 단일성 역시 마찬가지다(딤전1:17). 따라서 공유와 비공유는 큰 의미는 없지만 일반 신학의 기초 상식이므로 잠깐 소개한다.
② 속성 12가지
▪ 자존
자존이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이다. ‘자존’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첫째로 하나님은 스스로 원인자로만 계신다는 뜻이고, 둘째로 시간적 의미로 살필 때는 영원 전부터 계신다는 뜻이며, 셋째로는 신앙문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자존’으로 전부 이해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첫째,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서 존재한 분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생한 분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이 전부이며 하나님 한분만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 한분 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었고 하나님만이 원인이다.
둘째, ‘자존’을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그 연대를 측정한다면 달리 표현할 수 없어 ‘영원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존재시기를 살피는 것은 원래부터 곤란한 문제다. 이유는,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 함께 만든 것이고 하나님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시기를 표현하는 것은, 비록 적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린 신앙의 어린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인간의 시간을 가지고 굳이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에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셋째, 하나님의 ‘자존’의 의미가 우리에게 실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알아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모든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자존’에서 풀어낼 수 있다. 그분만이 계셨고 그분이 만들어서 모든 것이 다 나왔다. 따라서 모든 존재와 인간과 사건과 움직임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며 그 배후가 하나님이며 그 내면은 전부 하나님의 자존에서 해결할 수 있다(출3:14, 계1:8, 22:13).
▪ 완전
완전은, 부족이나 흠이나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본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완전이라는 표현은 넓은 의미이고, 여기 속성에서 표현할 때 완전은 그 범위가 좁은 차이가 있다. 완전에 대하여는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흔히 12가지로 표현하지만 만일 최소한으로 줄인다면 ‘자존하신 완전자’라고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줄일 수 있는데도 ‘완전’이라는 속성을 포함하여 12가지 면으로 펼쳐서 하나님을 살펴보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연구해야 우리 신앙현실에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5:48, 삼하22:26).
▪ 영원
하나님의 속성을 ‘영원’이라 할 때는 하나님의 영원불변을 말한다. 하나님을 과거 시간으로 본다면 영원 전 자존하신 분이지만 그 진행될 앞날의 시간으로 본다면 영원히 변치 않을 불변자다. 그분 자체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므로 영원성을 가진 분이고 그분의 말씀도 결정도 행동도 모두가 영원성이다. 그분 자체가 영원성의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은 전부가 영원성이다(히13:8, 약1:17).
▪ 단일
단일이란 하나라는 뜻이다. 단순하다는 의미도 있고 모순이 없다는 뜻도 있다. 혼선이 없고 변경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뉨이 없고 단절이 없다. 하나님은 단일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별개가 아닌, 한 하나님이시며,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고, 진노할 때와 웃으실 때도 하나님은 동일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며 또한 그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동일하지 딴 마음을 먹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단일성의 하나님인데도 우리를 대할 때 모든 면이 항상 달리 보이는 것은, 하나님은 늘 동일하신데 우리가 왼쪽으로 삐뚤어져 나가면 우리를 오른쪽으로 끌어들이시고 또 오른쪽으로 삐뚤어져 나가면 왼쪽으로 끌어들인다. 누구에게는 왼쪽으로 오라하고 누구에게는 오른쪽으로 오라 하지만 실은 하나님은 단일이고 그 말씀도 단일이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도 다 단일이다(신6:4, 고전8:6).
▪ 지식
하나님은 과거에 대한 모든 것을 바로 알고 다 알고 있으니 이것을 하나님의 ‘지식’이라고 한다. 지식은 지혜와 가장 가깝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은 자존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영원불변의 단일성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특별히 전지라고 한다. 하나님의 지식을 전지라고 표현할 때 이 전지는 우리 인간 수준에서 전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새겨두어야 한다. 사람치고는 모르는 것이 없다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완전이 지식 면으로 나타난 전지이니 이 전지는 참 전지다(롬11:33, 삼상2:3, 겔11:5).
▪ 지혜
지식 중에서도, 특별히 미래에 관련하여 아는 지식을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아시니 이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지을 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지혜의 존재로 만들었다. 지혜는 주로 지식과 함께 늘 사용되면서 지식은 과거를, 지혜는 미래를 아는 면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지혜는 늘 지식과 함께 살펴보게 된다(롬11:33, 시111:10).
지식과 지혜는 서로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여도 하나님께서 과거 지나간 것은 거의 알려주시는데, 다가올 미래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려 주지 않으시는 미래는, 지나간 과거에 알려주신 지식을 사용해서 알게 한다. 따라서 지나간 지식을 무시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에게서는 지혜가 나올 수 없다. 모두가 다 함께 알고 있는 과거사에서 앞날을 알고 상대할 수 있는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이렇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일 때 지나간 과거를 보아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렇게 지난 과거를 움직여 왔고 또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알던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착오나 차이가 없다. 세월이 지나갔다고 하나님 기억이나 느낌이 흐려지는 일이 없고 앞으로 닥쳐 봐야 알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지식’과 ‘지혜’로 따로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되 ‘지식’과 ‘지혜’면으로 각각 따로 알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롬11:33, 시111:10).
▪ 선
선은 ‘중심’이라는 면을 두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하나님의 ‘선’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결정한다는 뜻이다. 선이라는 표현 자체는 좋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좋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좋으면 하나님의 ‘선’이다.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은 ‘선’과 악은 하나님의 것이니 인간은 선과 악을 자기 것으로 취하면 안 된다는 명령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반론을 하는 경우는 많다. 누구에게든지 자기에게 좋으면 선이고 자기에게 나쁘면 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좋은 것은 선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 중심에 하나님께 좋은 것만 선이 되어야 하느냐는 지적이 많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께 선한 것을 혹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선을 악이라고 표현하면 된다. 이 세상 살아생전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표현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무궁토록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선이다.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혹 교회까지도 그들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에게 좋은 것을 선이라고 정의한다면 기독교는 인본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인류 전체가 공통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까지도 선이라 하고 공통적으로 나쁘게 보는 것은 악이라고 하는데, 이런 선악의 개념은 세상이 말하는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과 악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좋으면 성경이 말하는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다(창2:17, 마20:14-15, 막10:18).
▪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본체와 본성을 살펴보면서 ‘사랑’은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므로 그 본성이 어떤 상대를 접해도 주기만 하지 받는 수는 없다. 대가 없이 준다는 면을 강조할 때는 ‘은혜’라 하고, 준다는 점과 함께 감정까지 포함하면 ‘사랑’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이상의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이 사랑과는 비교할 사랑도 없으니 우리를 구원한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이다(요일3:16, 요일4:8-10).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종류로는 남녀가 사랑하는 이성의 사랑이 있고, 같은 종류라 좋아하는 우정의 사랑이 있고, 출산으로 생기는 혈육의 사랑이 있다. 이 3가지 사랑은 얼른 볼 때 조건 없이 주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이고 있어 ‘사랑’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사랑들은 외모만 사랑처럼 보일 뿐이다(고전13:1-8).
인간에게 있는 것 중에 그래도 다른 존재를 위해 가장 자기를 많이 내놓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이제 설명 드린 3가지를 흔히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사랑들’을 성경의 하나님 ‘사랑’과 혼동하여 그 이름이 같고 그 외모가 비슷하다 해서 아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 교회로 진행되면서 아주 일반화되었다.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도라고 하는 정도인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혼동해버리면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기독교의 타락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가 남녀 이성의 문란 때문에 내부적으로 썩어들어 가는 이유도 대속의 사랑을 남녀 이성의 사랑과 혼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불신 사회와 교회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것도 대속의 하나님 사랑은 잊어버리고 인간들이 아는 사랑이 성경의 사랑인 줄 혼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와 교회가 교리와 신앙노선에 대한 비교 구별도 없이 무조건 통일운동으로 달려가는 것도 사랑을 혼동한 결과다(고전13:1-8, 요일4:10).
▪ 거룩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 ‘거룩’에 대하여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다. 거룩은 ‘구별’이다.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분이며,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타락한 사람에게는 쓸 만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흉내만 내더라도 ‘구별’이라는 것은 좋은 장점이다. 잘 믿을 수 있는 요건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구별의 하나님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 만물이 하나님의 신성을 따라 움직여지고 존재되도록 하시는 분임을 알고 조심해야 하겠다. 만물과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위치가 있고 사는 법이 있다. 바로 그 원 상태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거룩’성이다. 그렇게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에서 항상 ‘구별’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성 때문에 우리는 만물을 상대하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길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닌 것을 그냥 둘 수 없고 혼잡한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고전14:33). 이것인지 저것인지 반드시 따지는 분이다. 그리고 종류대로 분류하여 적재적소에 배치를 하고 또 그 보응과 보상을 하는 분이다.
옳고 그른 것을 분류하여 옳은 것은 천국으로 그른 것은 지옥으로 보낸다. 비록 아들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따져서 그 죄인의 죄 값을 따져서 전부 갚게 하는 분이다. 그리고 깨끗해진 다음에 다시 아들로 거두는 분이다(겔44:23, 사5:16).
▪ 진실
진실은 다른 말로 ‘참’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밖에 없는 참이고 하나님의 결정도 그 행동도 전부가 참이다. 하나님은 참이지만 우리가 그 참을 찾아가는 길은 참이 아닌 여러 가지 거짓된 것을 다 구별해서 걸러내야만 하기 때문에 진실은 거룩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지식과 지혜가 시간을 기준으로 과거를 아는 것과 미래를 향한 것으로 구분한다면, 거룩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진실은 거룩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거룩’성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이든지 가장 옳고 바른 단 하나의 ‘참’을 알고 계시고 ‘참’을 찾으시니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참’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자시므로 타락한 우리와 달리 거룩을 통해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고, 처음부터 거룩성과 진실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먼저 본받아 노력해야 하나님의 ‘진실’에 도달한다. 먼저 거룩이 있고 그 다음 진실이 있다(계3:7, 19:11, 고후1:12).
▪ 의
옳은 것을, 의라고 합니다. 옳은 그 자체도 ‘의’라고 하지만 ‘의’라고 할 때는 그 옳은 것이 움직인 행동까지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나님은 옳으며 옳게 움직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상대할 때는 우선 하나님 자체를 직접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옳다.
그분 자체가 완전이므로 완전이라는 본체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가 옳은 것밖에 없다. 그런데 완전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뜻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의라고 하고, 그 의는 옳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뒤에는, 하나님의 의는 변질된 인간을 다시 이전처럼 되돌려 하나님 앞에 옳게 살 수 있도록 역사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를 대신 한 ‘의’다. 예수님으로 오셔서 행한 모든 사활의 대속이 옳은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옳은 의를 가진 의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 자체와 행위와 생활까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옳은 존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까지 다 말씀하고 있다. 보통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는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도 있지만, 죄인을 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가 ‘의’이기도 하다. 또 구원받은 우리가 늘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의라고 한다(요일2:29, 시7:9).
▪ 주권
주인이 가지는 권리를 주권이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의 하나님이다.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그 모든 권리를 절대적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주권을 좀더 자세하게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절대주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예정도 또 그 예정대로의 성취도 하나님 혼자 권리를 가졌고 그 권리로 다스리고 있다. 국가에 대한 주권을 임금이 가지는 왕정정치, 국민이 가지는 민주정치 등에서 그 주권의 모습을 약간 볼 수 있으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림자요 참고일 뿐이다. 하나님 주권은 완전자의 전지와 전능에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주권에는 개미 한 마리의 수염이 움직이는 것까지 완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마10:29-30, 대상29:11).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만든 태양 아래 하나님 만든 땅을 밟고 하나님 만든 만물을 접하고 살고 있다. 다만 이 물질계라는 우주 내의 존재만을 상대할 수 있다. 또한 밥을 짓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어 먹게 했으니 이는 물질계 만물을 물질의 이치인 물리를 통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허락한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이치를 가지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개발하든, 그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로 봐야 한다. 또 전혀 생각 못한 기술이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은 물질계 이치를 인간이 또 하나 찾아냈다고 알면 되고 그 기술이 놀라운 기술이라면 그 기술을 찾아낸 인간에게 놀랄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물질계 안에 그런 물질의 이치를 미리 만들어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솜씨에 놀랄 일이다. 지금 신학이 과학의 솜씨 앞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이유는 물질의 근본개념을 잘못 알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마음이 물질이 아니고 영이라고 생각한 것이 결정적 이유다. 그리고 ‘주권’이라는 이 하나님의 속성만 바로 알아도 이런 혼동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질계 안에 있는 모든 물질과 영계의 영원 후까지 존재할 모든 존재에게 다 미친다. 오늘 세상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주권을 잃어버리신 듯, 포기하신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주권이 오히려 인간에게 있는 듯 보인다. 인간이 만물을 하나님처럼 다 접촉하며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되도록 주권으로 허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물질계라는 범위에서 우리는 특별히 과학 기술의 발달을 보며 인간의 힘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이 과학으로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시지만 그 범위는 물질계이지 영계는 아니다.
현재 물질계 안에서도 우리 중생된 영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영계의 존재와도 같다. 이 영을 제외하고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비록 신비하기도 하고 또 그 가치는 일반 만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물질로 된 물질계의 물질들이다. 그리고 물질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인간에게 전권을 주다시피 했기 때문에 인간이 주권자가 된 듯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밀하게 보면 주권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받고 있다.
인간이 과학을 이용하여 하나님 없이도 만물을 자유자재로 주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학의 놀랄 만한 기술도 알고 보면 타락한 인생들에게 이미 타락할 때부터 주신 물질계 범위의 것이니 아무 새로울 것도 없다. 나무에게 물과 거름을 잘 조절하면 소출이 많아지고, 나무를 해치는 벌레를 잡아주면 그 생명이 연장되는 것처럼, 인간의 심신도 그 영양과 필수품과 병충해를 잘 조절해 주면 그 심신이 물질이므로 물리에 잘 맞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를 접붙여서 제삼의 종자를 만드는 것은 현대 과학이 그 기술을 자랑하기 전부터 과거 고대인들이 다 알고 했던 일이다. 종자를 섞어 과거에 보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이 넘어갈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실력껏 손을 댈 수 있는 물질계의 영역임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모든 주권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
과학의 힘과 활동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는 조직신학의 인론편에서 사람의 구성요소라는 차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사람은 영물과 물질로 만들어진 유일한 피조물이므로, 물질의 이치가 닿을 수 있는 곳과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선을 연구하는 데에는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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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딤전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겔44:23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딤전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삼하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
삼상2:3 ‘...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겔11-5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마20:14-15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막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
요일4:8-10 ‘...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사랑은 여기 있으니 ...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전13:1-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겔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사5:16 ‘...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계3:7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요일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시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마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대상29:11 ‘...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
1.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1)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2) 그는 그 존재와 속성3)에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결하신 영4)으로서 보이지 아니하시며,5) 몸이나 지체6)나 성정7)이 없으시다. 그는 변치 아니하시며,8) 무궁하시고,9) 영원하시어10) 인간이 측량하지 못한다.11) 그는 전능하시고,12) 지극히 지혜로우시고,13) 지극히 거룩하시고,14) 지극히 자유로우시고,15) 지극히 절대적이시어서16) 그 변치 않는 의로운 뜻17)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을 행하시되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18) 행하신다. 그는 사랑이 지극하시며,19)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풍부하셔서 사람들의 불의와 범행과 죄를 용서하시며,20) 부지런히 그를 찾는 자에게 갚아 주신다.21) 동시에 그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롭고 무서우며,22) 그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므로23) 죄를 회개치 않고 스스로 고집하여 죄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을 결단코 면죄(용서)하지 않으신다.24)
1)신 6:4, 고전 8:4,6. 2)살전 1:9, 렘 10:10. 3)욥 11:7-9, 26:14. 4)요 4:24. 5)딤전 1:17. 6)신 4:15-16, 눅 24:39, 요 4:24. 7)행 14:11,15. 8)약 1:17, 말 3:6. 9)왕상 8:27, 렘 23:23-24. 10)시 90:2, 딤전 1:17. 11)시 145:3. 12)창 17:1, 계 4:8. 13)롬 16:27. 14)사 6:3, 계 4:8. 15)시 115:3. 16)출 3:14. 17)엡 1:11. 18)잠 16:4, 롬 11:36. 19)요일 4:8,16. 20)출 34:6-7. 21)히 11:6. 22)느 9:32-33. 23)시 5:5-6. 24)출 34:7.
1.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1)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2) 그는 그 존재와 속성3)에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결하신 영4)으로서 보이지 아니하시며,5) 몸이나 지체6)나 성정7)이 없으시다. 그는 변치 아니하시며,8) 무궁하시고,9) 영원하시어10) 인간이 측량하지 못한다.11) 그는 전능하시고,12) 지극히 지혜로우시고,13) 지극히 거룩하시고,14) 지극히 자유로우시고,15) 지극히 절대적이시어서16) 그 변치 않는 의로운 뜻17)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을 행하시되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18) 행하신다. 그는 사랑이 지극하시며,19)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풍부하셔서 사람들의 불의와 범행과 죄를 용서하시며,20) 부지런히 그를 찾는 자에게 갚아 주신다.21) 동시에 그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롭고 무서우며,22) 그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므로23) 죄를 회개치 않고 스스로 고집하여 죄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을 결단코 면죄(용서)하지 않으신다.24)
1)신 6:4, 고전 8:4,6. 2)살전 1:9, 렘 10:10. 3)욥 11:7-9, 26:14. 4)요 4:24. 5)딤전 1:17. 6)신 4:15-16, 눅 24:39, 요 4:24. 7)행 14:11,15. 8)약 1:17, 말 3:6. 9)왕상 8:27, 렘 23:23-24. 10)시 90:2, 딤전 1:17. 11)시 145:3. 12)창 17:1, 계 4:8. 13)롬 16:27. 14)사 6:3, 계 4:8. 15)시 115:3. 16)출 3:14. 17)엡 1:11. 18)잠 16:4, 롬 11:36. 19)요일 4:8,16. 20)출 34:6-7. 21)히 11:6. 22)느 9:32-33. 23)시 5:5-6. 24)출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