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성경의 특성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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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08:51
(2023년본)
③ 성경의 특성
▪ 권위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발표되었으나, 발표된 내용은 진리다. 이 진리가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했다. 그리고 모든 천지만물은 그 진리로 움직이고 마지막에 그 진리로 불에 타서 없어지고 또 그 진리대로 된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성경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을 만들고 다스리고 처리하는 인간의 주격위치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진리를 통해 진리로 나타난다. 마치 전기가 전기선을 따라 전선 안에서 역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는 그 한 말씀 한 말씀 앞에 엎드려 하명을 기다리되, 성경은 명령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순종을 하되 우리의 목숨도 평생도 또 마음 하나 행동 하나도 그 말씀으로 산 것만 영생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진다(히11:3).
신앙생활에 이 권위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할 몇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 ‘성경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성경‘책’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담고 있는 서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신앙이 어린데 어린 신앙은 성경‘책’을 조심해서 상대하는 자세와 태도 없이 성경 ‘권위’를 바르게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 자신의 신앙이 어리면 어리기 때문에 성경을 담고 있는 성경‘책’까지도 조심해서 대하는 것이 유익하고 만일 자신의 신앙이 장성했다면 어린 신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세상에 있는 것 중에는 성경‘책’을 제일 조심해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성경 번역에 있어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진리로서 권위성을 가지므로 번역하면서 첫째 조심할 것은 정확성이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뜻이 같다면 그 표현을 성경이 가지는 권위성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번 확정된 번역은 전반적인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일부 오류 때문에 성경 전체를 재번역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유익하다.
한번 번역된 것은 그 표현을 변경하지 않고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상적으로 번역된 성경에 만일 문제점이 지적된다면 이는 사실상 오류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애매하거나 약간 거리감이 있는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이런 경우는 새로 번역을 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해석을 통해 그 번역문의 원뜻을 바로 알리는 것이 낫다.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첫 번역이 서툴렀다 해도 성경 표현은 성경 전체에 의하여 그 의미가 새로 형성되므로 문제가 해결된다. 참고로, 언어는 생물과 같이 변동과 변화가 많기 때문에 그 변하는 언어 환경을 따라 새로운 기준에 맞는 번역을 하려면 성경의 권위성을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첫째로 기억해야 한다.
셋째,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령이 최종 권위다.
성경은 인간세계를 완전히 초월한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이 세상과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말씀이 없는 데에서 만들었고 그것들은 말씀 아래에 있다.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경 안에 역사하는 성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옳다. 즉, 성경은 자기 속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만 깨닫는 것이다(눅24:45).
이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지식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연구하여 신학이 인간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행 신학의 체계와 방법과 인식으로는 성경의 권위는 전면 부인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성경연구를 두고 ‘성경의 권위성’에서 생각할 것은 성경연구는 성경과 성령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정확성
성경은 정확무오하다.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고 변동이 없으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요17:17).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할 때는 세상 어느 기준이 아니다. 세상의 수도 없는 잣대에 다 맞도록 기록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되, 그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진리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볼 때는 성경기록에 착오도 많고 또 틀린 곳도 많다. 그러나 이는 오늘 세상이 일시 어두워서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는 인인간의 이치인 도덕과 물질의 이치인 물리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도덕은 인간의 타락으로 그 본질이 비틀어졌고 또 세상은 저주를 받아 원래 진리를 수종들던 위치에서 떨어져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통해 주시는 구원을 전부 쏟아버리게 되고 또 정확무오를 세상 여러 다른 기준으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면 수도 없는 오류가 나오게 된다.
다시 한번 이 정확성 문제를 두고 조심할 것을 예를 든다면
첫째, 성경의 정확성은 세상기준에 맞춘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숫자나 이름 또는 사건 기록 등에 여러 가지 잘못이 발견된다. 이런 오류 때문에 현재 성경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대세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정확성의 기준을 잘 몰라서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볼 때 착오로 보이는 것은 그 인간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숫자나 이름이나 과학적 사실을 기준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이나 착오는 성경을 그렇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하나님께서 기록했으니 왜 그렇게 기록이 되어졌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 기록의 목적과 이유를 살피지 않고 성경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것은,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성경의 정확성을 따지려면 우선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이 어떤 안경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시145:3).
둘째, 성경은 그 기록이 구원목적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하지 않다는 이들은 대개 성경이 구원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여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담이 낳은 가인과 아벨의 창세기 4장 기록을 인류역사 초기의 호적등본으로 생각한다면, 가인이 하나님께 쫓겨나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은 당시 천하에 퍼져나가던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발생한 2가지 신앙노선의 접촉과 갈등만을 따로 뽑아서 특별하게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4장의 기록은 그 기록 자체가 사실이고, 동시에 그 기록에 관련된 모든 상황은 전부 정확무오하게 하나님께서 기록한 진리다. 이 내용을 두고 그 어떤 면으로 비판을 하든지 이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지해서 그렇다(딤후3:15-16).
셋째, 성경의 정확성은 성령이 최종 담보 확정 짓는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기록이라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종종 제기된다. 대개 신학에서 고고학적 자료와 철학적 논증법으로 이를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성경의 정확성은, 성경을 읽을 때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성령이 읽는 사람 마음속에 증거하는 이 증거야말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면서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성경 연구는 신학이 전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교회의 상식이다. 그런데 성경연구를 책임 맡고 나선 신학은 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 대신 세상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이란, 객관적 자료와 확인 가능한 검증을 필수로 한다. 그래서 성경의 정확성을 가지고 신학이 여러 면으로 변증을 하고 있지만 이는 전부 헛수고다. 오히려 성경을 사람으로부터 멀리 떼 놓는 결과만 만든다.
성경은 성경이 성경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이고, 그 성경이 성경은 성령의 기록이며 정확무오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경의 기록이 참이냐는 증명은 그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말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증명까지 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시각에 객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고 세상 것이다(눅24:32).
▪ 보편성
보편성이란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환경에 있다 해도, 자기 신앙양심을 써서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또 다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할 때 그렇게 되어지게 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실행해 보면 깨닫게 되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서로가 출생과 성장의 형편이 제각각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런 인간적 제한과 차이에 따라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절해 놓았다. 성경 내용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진리지만, 누구나 닿을 수 있도록 해 두셨다는 뜻이다(롬10:11-13).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은 인간 세상에 있는 권위와 정확성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한계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오히려 그 권위와 정확성을 왜곡시켜 깨닫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을 대할 때는 하나님 차원에서부터 늘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성’은 성경을 대할 때 인간이 인간 수준과 인간 범위에서 대하도록 주신 성경의 특성이다.
성경은 비록 그 본질과 내용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마지막 표현은 우리에게 평범한 인간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진리의 겉옷을 보편성으로 입혀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그 인간 언어를 통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시작하면 비록 시작에서는 인간의 일상사에서 누구나 알고 접하고 사용하는 하찮은 표현을 접하게 되지만 그런 표현 속에 담아 두신 진리를 접하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이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실 것은
첫째, 성경해석에서 원어를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말씀은 히브리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 원어를 바로 알아야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이 현 교계에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식되어 있다. 주로 신학자들의 직업문제와 연관이 많고 또 원어 전문가들이 자기 존재를 지나치게 과시하려는 것도 그 이유나 배경이다.
성경은 보편성이 있어,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사본으로 전해지며 문자적 오류가 발생할 것도 아셨고 또 번역이나 통역으로 성경을 읽고 접하게 될 외국인들도 미리 아셨다.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된 원어를 사용하지 않을 성도들에게 전해질 것도 아시고 성경 언어를 택하고 기록했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는 데 있어 일반 사람이 일반적 방법으로 알고 사용하는 그 이상의 특수한 언어적 환경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도록 성경을 기록했다는 대 전제다.
특수한 언어 환경이나 비상한 재주로 원어를 익힌 사람들이라야 성경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가 현재 교계에 너무 널리 퍼져 있다. 성경 보편성의 원리로 이를 단호히 정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보편성의 원리를 잘 지키는 것이 특별히 필요한 시대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신 형편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양심을 쓰면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일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보편성이다.
급격한 세계화와 함께 외국어 사용이 강조되면서 신학교에서 성경도 원어로 읽어야 한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의 기획역사 중 보편성의 원칙이 있으므로 원어는 단순하게 참고만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마28:19-20).
둘째, 성경해석에 고고학적 접근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은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에 근본을 두고 있다. 성경은 그 기록된 언어의 문자적 이해와 함께 그 언어가 사용되었던 그 시대의 제반 환경을 재구성해야만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에서 원어에 대한 해설과 성경 고고학적 자료를 생략한다면 성경 주해가 불가능하다 할 만큼 되어 있다. 이는 성경의 보편성을 망각하고 무시한 결과다.
이런 모순은 신학이 세상 학교 편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그들 세상 학문 중의 하나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세상 사학과 일반 고어는 당시 생활과 분리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일반 교인이 자기 평상 생활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양심을 쓴다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도록 보편성의 원칙으로 기획하고 기록을 했다.
따라서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성경의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여 오히려 원래 성경해석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고고학 방법으로는 성경을 정확하게 볼 수도 없지만, 만일 고고학적 방법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혹 있다 해도 이는 복된 방법은 되지 못한다(요20:29).
셋째, 성경의 보편성은 평범하지만 충성을 요구한다.
원어도 성경고고학도 필요 없다는 점을 앞에서 먼저 강조하는 것은 오늘 교회를 혼동시킨 주요 전염병 중 하나가 그곳에서 발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은 앞서 말씀드린 2가지를 조심하는 동시에 그 보편성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방편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면을 조심해야 한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나태와 무지 자체가 성경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충성을 다하고 양심을 쓴다면, 깨달음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되 그 대신 있는 힘을 다해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산 제물로 바쳐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실행해야 할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롬12:1-2).
▪ 충족성
성경기록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했으니 이를 성경의 충족성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를 살든 또 어느 형편을 만났든 성경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편에 대하여 그가 만난 그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성경은 각 내용이 겉으로는 각각 별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성경 어느 말씀이라도 그 말씀은 모든 성도의 모든 현실에서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하는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성경의 전체 말씀이 단일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4계명은 그 외부 기록이 주일문제를 특별히 가르치기 위해 기록하신 것 같지만, 4계명은 그 속에 모든 믿는 사람들의 어떤 문제든지 다 지도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 그 성구와 문자 속에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고, 또한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으로 역사하여 구원에 관하여는 어떤 면으로도 부족이 없게 주신 기록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은혜는 그 제일 외부에 성경 한 권이면 충분하다. 그 말씀 속에 모든 것은 다 들어있다(딤후3:16-17, 사34:16).
신앙생활에서 이 충족성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는
첫째, 성경만 알면 다른 인간 지식은 전혀 필요 없다.
다른 지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다른 지식을 가지되 만일 잘못 가지게 되면 그 해독은 그 사람의 평생을 다 망쳐버린다. 따라서 지식을 바로 가지면 좋으나 그것이 어려우므로 성경의 충족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고, 꼭 필요하여 세상 지식을 가질 때에는 성경의 충족성을 잘 깨달아 성경 지식을 보좌하고 심부름하는 지식으로만 가질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은 하나님 백성이 점8로 이용만 할 때는 필요한 일꾼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세상 풍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거리가 된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 거민을 완전히 전멸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려 두었을 때, 그들을 조심해서 이용하라고 했으나 결국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된 것은 거의 없고 그들에게서 묻어나온 세상 풍습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멸하게 되는 면을 기억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지식 문제가 그런 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신20:17-18).
둘째, 성경에 대하여 몇 가지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 있다.
성경은 그 충족성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살이에 필요하여 피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지만, 최소한 성경을 모든 책보다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좋기는 성경만으로 전부를 삼는 것이지만, 그렇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을 일찍 가지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런 분을 접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성경의 충족성을 깨달았다면 앞으로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책을 대할 때마다, 결국은 성경 한 권으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세상 것은 성경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고 성경지식을 써먹는 일에 하나의 도구로 소속을 시켜 이용하는 것으로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새기는 일을 세상 어떤 지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도록 해야 한다(신6:6-7).
셋째, 성경 연구는 한 구절과 전체를 연결시켜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존재하지만 개별 말씀도 각각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고 살필 때는 한 성구를 가지고 전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고, 또 한 성구를 해석할 때는 전체 성구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을 성경 전체와 성경 각 내용으로 나누어 배치시킨 것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성경 전체와 개별 성구를 통해 달리 접근하면서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기록하셨다. 또한 말씀은 그 자체가 단일성의 진리이므로 어디서 출발해도 모든 말씀과 전부 연결된다. 따라서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대할 때마다 여기에 우리의 세상과 영계의 영생이 다 들어있다고 믿고 삼가 충족성 앞에서 성경을 대해야 한다(요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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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시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딤후3:15-16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롬10:11-1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롬12:1-2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신20:17-18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신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③ 성경의 특성
▪ 권위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발표되었으나, 발표된 내용은 진리다. 이 진리가 천지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했다. 그리고 모든 천지만물은 그 진리로 움직이고 마지막에 그 진리로 불에 타서 없어지고 또 그 진리대로 된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성경은 만물의 주인공인 인간을 만들고 다스리고 처리하는 인간의 주격위치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진리를 통해 진리로 나타난다. 마치 전기가 전기선을 따라 전선 안에서 역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할 때는 그 한 말씀 한 말씀 앞에 엎드려 하명을 기다리되, 성경은 명령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순종을 하되 우리의 목숨도 평생도 또 마음 하나 행동 하나도 그 말씀으로 산 것만 영생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영원히 지옥에 버려야 한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진다(히11:3).
신앙생활에 이 권위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할 몇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 ‘성경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성경‘책’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담고 있는 서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신앙이 어린데 어린 신앙은 성경‘책’을 조심해서 상대하는 자세와 태도 없이 성경 ‘권위’를 바르게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 자신의 신앙이 어리면 어리기 때문에 성경을 담고 있는 성경‘책’까지도 조심해서 대하는 것이 유익하고 만일 자신의 신앙이 장성했다면 어린 신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서 세상에 있는 것 중에는 성경‘책’을 제일 조심해서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성경 번역에 있어 자세와 태도를 극히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진리로서 권위성을 가지므로 번역하면서 첫째 조심할 것은 정확성이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뜻이 같다면 그 표현을 성경이 가지는 권위성을 생각해서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한번 확정된 번역은 전반적인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 한 일부 오류 때문에 성경 전체를 재번역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유익하다.
한번 번역된 것은 그 표현을 변경하지 않고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상적으로 번역된 성경에 만일 문제점이 지적된다면 이는 사실상 오류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차라리 애매하거나 약간 거리감이 있는 번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이런 경우는 새로 번역을 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해석을 통해 그 번역문의 원뜻을 바로 알리는 것이 낫다. 그리고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첫 번역이 서툴렀다 해도 성경 표현은 성경 전체에 의하여 그 의미가 새로 형성되므로 문제가 해결된다. 참고로, 언어는 생물과 같이 변동과 변화가 많기 때문에 그 변하는 언어 환경을 따라 새로운 기준에 맞는 번역을 하려면 성경의 권위성을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첫째로 기억해야 한다.
셋째,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령이 최종 권위다.
성경은 인간세계를 완전히 초월한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이 세상과 인간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말씀이 없는 데에서 만들었고 그것들은 말씀 아래에 있다. 성경 해석은 성경과 성경 안에 역사하는 성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옳다. 즉, 성경은 자기 속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만 깨닫는 것이다(눅24:45).
이런 점에서 인간이 인간지식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연구하여 신학이 인간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행 신학의 체계와 방법과 인식으로는 성경의 권위는 전면 부인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성경연구를 두고 ‘성경의 권위성’에서 생각할 것은 성경연구는 성경과 성령으로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정확성
성경은 정확무오하다. 일점일획도 가감이 없고 변동이 없으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한다(요17:17).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할 때는 세상 어느 기준이 아니다. 세상의 수도 없는 잣대에 다 맞도록 기록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되, 그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진리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볼 때는 성경기록에 착오도 많고 또 틀린 곳도 많다. 그러나 이는 오늘 세상이 일시 어두워서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는 인인간의 이치인 도덕과 물질의 이치인 물리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도덕은 인간의 타락으로 그 본질이 비틀어졌고 또 세상은 저주를 받아 원래 진리를 수종들던 위치에서 떨어져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통해 주시는 구원을 전부 쏟아버리게 되고 또 정확무오를 세상 여러 다른 기준으로 생각하여 그 기준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면 수도 없는 오류가 나오게 된다.
다시 한번 이 정확성 문제를 두고 조심할 것을 예를 든다면
첫째, 성경의 정확성은 세상기준에 맞춘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숫자나 이름 또는 사건 기록 등에 여러 가지 잘못이 발견된다. 이런 오류 때문에 현재 성경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대세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정확성의 기준을 잘 몰라서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볼 때 착오로 보이는 것은 그 인간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숫자나 이름이나 과학적 사실을 기준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모순이나 착오는 성경을 그렇게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어 하나님께서 기록했으니 왜 그렇게 기록이 되어졌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 기록의 목적과 이유를 살피지 않고 성경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것은,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성경의 정확성을 따지려면 우선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이 어떤 안경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시145:3).
둘째, 성경은 그 기록이 구원목적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하지 않다는 이들은 대개 성경이 구원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여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담이 낳은 가인과 아벨의 창세기 4장 기록을 인류역사 초기의 호적등본으로 생각한다면, 가인이 하나님께 쫓겨나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은 당시 천하에 퍼져나가던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발생한 2가지 신앙노선의 접촉과 갈등만을 따로 뽑아서 특별하게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4장의 기록은 그 기록 자체가 사실이고, 동시에 그 기록에 관련된 모든 상황은 전부 정확무오하게 하나님께서 기록한 진리다. 이 내용을 두고 그 어떤 면으로 비판을 하든지 이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지해서 그렇다(딤후3:15-16).
셋째, 성경의 정확성은 성령이 최종 담보 확정 짓는다.
성경이 정확무오한 기록이라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증명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종종 제기된다. 대개 신학에서 고고학적 자료와 철학적 논증법으로 이를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성경의 정확성은, 성경을 읽을 때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성령이 읽는 사람 마음속에 증거하는 이 증거야말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면서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성경 연구는 신학이 전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 교회의 상식이다. 그런데 성경연구를 책임 맡고 나선 신학은 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 대신 세상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증명을 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이란, 객관적 자료와 확인 가능한 검증을 필수로 한다. 그래서 성경의 정확성을 가지고 신학이 여러 면으로 변증을 하고 있지만 이는 전부 헛수고다. 오히려 성경을 사람으로부터 멀리 떼 놓는 결과만 만든다.
성경은 성경이 성경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이고, 그 성경이 성경은 성령의 기록이며 정확무오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경의 기록이 참이냐는 증명은 그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이 말한 것이 사실로 나타나기 때문에 증명까지 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시각에 객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고 세상 것이다(눅24:32).
▪ 보편성
보편성이란 믿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환경에 있다 해도, 자기 신앙양심을 써서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또 다 깨달을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할 때 그렇게 되어지게 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실행해 보면 깨닫게 되는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서로가 출생과 성장의 형편이 제각각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그런 인간적 제한과 차이에 따라 지장을 받지 않도록 조절해 놓았다. 성경 내용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진리지만, 누구나 닿을 수 있도록 해 두셨다는 뜻이다(롬10:11-13).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은 인간 세상에 있는 권위와 정확성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한계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오히려 그 권위와 정확성을 왜곡시켜 깨닫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성과 정확성을 대할 때는 하나님 차원에서부터 늘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성’은 성경을 대할 때 인간이 인간 수준과 인간 범위에서 대하도록 주신 성경의 특성이다.
성경은 비록 그 본질과 내용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마지막 표현은 우리에게 평범한 인간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진리의 겉옷을 보편성으로 입혀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그 인간 언어를 통해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시작하면 비록 시작에서는 인간의 일상사에서 누구나 알고 접하고 사용하는 하찮은 표현을 접하게 되지만 그런 표현 속에 담아 두신 진리를 접하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이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주의하실 것은
첫째, 성경해석에서 원어를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말씀은 히브리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 원어를 바로 알아야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이 현 교계에는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식되어 있다. 주로 신학자들의 직업문제와 연관이 많고 또 원어 전문가들이 자기 존재를 지나치게 과시하려는 것도 그 이유나 배경이다.
성경은 보편성이 있어,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사본으로 전해지며 문자적 오류가 발생할 것도 아셨고 또 번역이나 통역으로 성경을 읽고 접하게 될 외국인들도 미리 아셨다.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된 원어를 사용하지 않을 성도들에게 전해질 것도 아시고 성경 언어를 택하고 기록했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는 데 있어 일반 사람이 일반적 방법으로 알고 사용하는 그 이상의 특수한 언어적 환경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도록 성경을 기록했다는 대 전제다.
특수한 언어 환경이나 비상한 재주로 원어를 익힌 사람들이라야 성경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는 논리가 현재 교계에 너무 널리 퍼져 있다. 성경 보편성의 원리로 이를 단호히 정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보편성의 원리를 잘 지키는 것이 특별히 필요한 시대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신 형편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양심을 쓰면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는 일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보편성이다.
급격한 세계화와 함께 외국어 사용이 강조되면서 신학교에서 성경도 원어로 읽어야 한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의 기획역사 중 보편성의 원칙이 있으므로 원어는 단순하게 참고만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마28:19-20).
둘째, 성경해석에 고고학적 접근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은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에 근본을 두고 있다. 성경은 그 기록된 언어의 문자적 이해와 함께 그 언어가 사용되었던 그 시대의 제반 환경을 재구성해야만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에서 원어에 대한 해설과 성경 고고학적 자료를 생략한다면 성경 주해가 불가능하다 할 만큼 되어 있다. 이는 성경의 보편성을 망각하고 무시한 결과다.
이런 모순은 신학이 세상 학교 편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그들 세상 학문 중의 하나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세상 사학과 일반 고어는 당시 생활과 분리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신 하나님께서 일반 교인이 자기 평상 생활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양심을 쓴다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구원도리를 깨닫도록 보편성의 원칙으로 기획하고 기록을 했다.
따라서 원어와 함께 성경고고학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성경의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여 오히려 원래 성경해석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고고학 방법으로는 성경을 정확하게 볼 수도 없지만, 만일 고고학적 방법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혹 있다 해도 이는 복된 방법은 되지 못한다(요20:29).
셋째, 성경의 보편성은 평범하지만 충성을 요구한다.
원어도 성경고고학도 필요 없다는 점을 앞에서 먼저 강조하는 것은 오늘 교회를 혼동시킨 주요 전염병 중 하나가 그곳에서 발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은 앞서 말씀드린 2가지를 조심하는 동시에 그 보편성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방편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면을 조심해야 한다.
'보편성’이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나태와 무지 자체가 성경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충성을 다하고 양심을 쓴다면, 깨달음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의 보편성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되 그 대신 있는 힘을 다해 성경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먼저 산 제물로 바쳐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실행해야 할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롬12:1-2).
▪ 충족성
성경기록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했으니 이를 성경의 충족성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를 살든 또 어느 형편을 만났든 성경은 모든 사람의 모든 형편에 대하여 그가 만난 그 현실에서 그가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성경은 각 내용이 겉으로는 각각 별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성경 어느 말씀이라도 그 말씀은 모든 성도의 모든 현실에서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하는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성경의 전체 말씀이 단일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4계명은 그 외부 기록이 주일문제를 특별히 가르치기 위해 기록하신 것 같지만, 4계명은 그 속에 모든 믿는 사람들의 어떤 문제든지 다 지도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은 성경 그 성구와 문자 속에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고, 또한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으로 역사하여 구원에 관하여는 어떤 면으로도 부족이 없게 주신 기록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은혜는 그 제일 외부에 성경 한 권이면 충분하다. 그 말씀 속에 모든 것은 다 들어있다(딤후3:16-17, 사34:16).
신앙생활에서 이 충족성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몇 가지는
첫째, 성경만 알면 다른 인간 지식은 전혀 필요 없다.
다른 지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다른 지식을 가지되 만일 잘못 가지게 되면 그 해독은 그 사람의 평생을 다 망쳐버린다. 따라서 지식을 바로 가지면 좋으나 그것이 어려우므로 성경의 충족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고, 꼭 필요하여 세상 지식을 가질 때에는 성경의 충족성을 잘 깨달아 성경 지식을 보좌하고 심부름하는 지식으로만 가질 것을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은 하나님 백성이 점8로 이용만 할 때는 필요한 일꾼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세상 풍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거리가 된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 거민을 완전히 전멸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려 두었을 때, 그들을 조심해서 이용하라고 했으나 결국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된 것은 거의 없고 그들에게서 묻어나온 세상 풍습 때문에 이스라엘이 전멸하게 되는 면을 기억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지식 문제가 그런 면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신20:17-18).
둘째, 성경에 대하여 몇 가지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 있다.
성경은 그 충족성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살이에 필요하여 피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지만, 최소한 성경을 모든 책보다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좋기는 성경만으로 전부를 삼는 것이지만, 그렇게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을 일찍 가지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런 분을 접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성경의 충족성을 깨달았다면 앞으로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책을 대할 때마다, 결국은 성경 한 권으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세상 것은 성경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고 성경지식을 써먹는 일에 하나의 도구로 소속을 시켜 이용하는 것으로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새기는 일을 세상 어떤 지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도록 해야 한다(신6:6-7).
셋째, 성경 연구는 한 구절과 전체를 연결시켜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존재하지만 개별 말씀도 각각 충족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고 살필 때는 한 성구를 가지고 전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고, 또 한 성구를 해석할 때는 전체 성구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을 성경 전체와 성경 각 내용으로 나누어 배치시킨 것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성경 전체와 개별 성구를 통해 달리 접근하면서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기록하셨다. 또한 말씀은 그 자체가 단일성의 진리이므로 어디서 출발해도 모든 말씀과 전부 연결된다. 따라서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대할 때마다 여기에 우리의 세상과 영계의 영생이 다 들어있다고 믿고 삼가 충족성 앞에서 성경을 대해야 한다(요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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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시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딤후3:15-16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롬10:11-13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롬12:1-2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신20:17-18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신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성경의 보편성
성경의 보편성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깨달음이자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과거 천주교는 성경을 매우 거룩히 여겨 사제들만 볼 수 있었고, 원어 자체를 신성시해서 번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기록해 주셨다. "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각자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비유적 의미로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죽었다. 당시 교황청은 그럴만한 힘과 권력이 있었다.
또 보편 언어로의 번역과 동시에 모든 교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 다독이었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에서 성경을 일 년에 일 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가며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다.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는데, 이는 아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하는 목적이 있었다.
성경의 보편성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깨달음이자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과거 천주교는 성경을 매우 거룩히 여겨 사제들만 볼 수 있었고, 원어 자체를 신성시해서 번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기록해 주셨다. "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각자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비유적 의미로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죽었다. 당시 교황청은 그럴만한 힘과 권력이 있었다.
또 보편 언어로의 번역과 동시에 모든 교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 다독이었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에서 성경을 일 년에 일 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가며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다.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는데, 이는 아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하는 목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