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속의 내용

조직신학 본서       교리성구 사전

                  (3)대속의 내용

담당 0 16

<24.12.25. 독자가 요약한 내용이며, 향후 교리서에 반영될 초안>



개정본의 내용은 완료 되었으나 공개에 앞서 '저작권' 문제가 있는지 검토 중입니다.
검토가 완료 되면 제목에 표시하고 공개하겠습니다.


4. 대속의 내용

예수님의 대속을 크게 2가지로 나누면, 죽음으로 해결하신 것과 부활로 해결하신 것이 있다.

첫째, 죽음으로 해결하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 그 결과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 고통을 대신 다 당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싸워야 할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또 우리가 불의로 살았던 값을 대신 당해 죽어야 하고 우리 대신 의를 만들기 위해 싸워 죽음으로 이겨야 한다. 하나님과 화친 문제나 영생에 대한 소망 문제도 마찬가지이다(롬5:6-11, 골1:22, 히9:15, 벧전3:18).

롬5:6-11 ‘...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히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둘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하여 해결한 것은 영생에 관련된 모든 것이다. 이 죽음과 이 부활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합하여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라고 한다. 이렇게 죽고 부활하여 해결해 놓은 것을 가지고,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직, 즉 제사장 노릇과 선지자 노릇과 왕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이 면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기름부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도로 가르쳤고, 기름부음이라는 뜻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역할을 뜻하는 것이다(롬6:5, 10, 빌3:10, 벧전1:3, 계20:6).


(1) 죽음의 대속

① 4가지 죄값 면제를 위한 죽음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 죄를 면제하기 위해 죄의 값을 치른 행위이다. 죄의 결과는 첫째 하나님과 단절시키고, 둘째 인격과 행위와 모든 소유까지를 다 부패시키며, 셋째 모든 종류의 고통을 형벌로 받는데 이 모든 형벌의 끝이 없으니, 넷째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면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보호와 안보를 철회했고 부패한 인간의 모든 불편을 다 겪어야 했으며 마지막 십자가에서는 우리 택자 전체의 영원한 지옥 고통까지를 다 끌어서 감당했다.

이 4가지 죄의 결과를 예수님 인성 한 몸에 33년을 겪었고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은 그 영원을 다 한 곳에 모아 고통을 가했으며 예수님은 그 고통을 전부 겪으므로 우리 죄값을 완전 면제시켰다.

좀 더 분석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죽음인데, 이 죽음은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받고 평생을 살다가 마지막으로 그 죄의 고통을 다 치르고 죽은 죽음이다. 둘째, 이 죽음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산 불의의 죄로 인하여 당할 고통 전부를 대신 치르고 그 불의로 인해 당할 것이 전혀 없도록 가해진 형벌을 받고 죽은 죽음이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 하나님과 떨어짐으로 당해야 할 그 고통을 당하며 평생을 살았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숨이 다할 때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 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다 안고 죽었다. 넷째, 예수님의 죽음은 소망을 포기한 인간이 절망 때문에 당해야 할 고통을 평생 겪었고 마지막 죽음에 그 절망의 고통이 다 포함된 죽음이었다(롬4:25).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② 4가지 죄와 투쟁으로 죽은 죽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는 신분이다. 예수님이 행한 것이 하나면 우리가 가질 것이 하나이고, 예수님이 행한 것이 한 종류라면 우리가 받을 것도 한 종류뿐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되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인 고통만을 대신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받을 혜택은 죄의 결과인 고통에서 면제받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당할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겪어 우리가 그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면제해 주신 것이 대속하신 은혜 중에 첫째로 알아야 하지만, 대속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이김으로 우리에게 죄를 이긴 공로를 대신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의 평생과 그 마지막 죽음의 절정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은 죄값을 대신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싸워 이겼으니 이것도 예수님의 대속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죄를 이긴 이 대속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을 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죄와 싸워 이긴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전15:3, 57, 갈1:4).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이겼어야 할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 죄’를 이기고 죽은 죽음이었다. ‘말씀을 어기라는 죄’를 우리 대신 싸워 이겨주셨다. 따라서 오늘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어기게 하는 죄’와 싸워 이겨 주신 대속의 공로를 입었으니 우리는 법적으로 또 기본적으로 죄에게 이긴 사람들이다(마4:6-7).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마4:6-7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둘째로, 예수님의 대속은 인류 조상 아담이 제 마음대로 살면 안 되는데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시키는 불의의 죄에게 져서 죄의 종이 된 것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기까지 싸워 불의의 죄를 지어라고 하는 죄에게 승리하고 죽었다. 불의의 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고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살고 자기 뜻대로는 살지 않으려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대신 불의의 죄를 이긴 죽음이다(마27:42, 벧전4:2).

셋째로,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도록 했던 죄를 이기지 못한 아담 대신에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도록 만드는 그 죄를 이겨 우리가 승리한 승리를 만들었다. 이 승리의 최종은 예수님 목숨이 이 세상에서 다하도록 싸우고 마지막에 이 싸움을 위해 가진 호흡 하나까지도 다 소진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과 화친한 생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끝까지 하는데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가 그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하나님과 원수 되도록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에게 이긴 승리자가 되었고 그 승리는 오늘 우리의 승리가 되었다(롬3:25, 5:10, 엡2:16, 골1:20-21).

넷째로, 소망을 버리고 절망 가운데 살게 하는 죄가 예수님을 평생토록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따라가며 절망시키려 했으나 예수님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소망 가운데 소망으로 살면서 소망 때문에 죽었다. 따라서 절망시키려는 죄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했고 그 대신 예수님이 절망의 죄를 우리 대신 이겨, 오늘 우리에게 절망의 죄를 승리한 사람을 만들어 주셨으니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셨다(눅23:46).

마27:42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벧전4:2 ‘...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1:20-21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③ 4가지 의를 위한 대속의 죽음

예수님이 죄로 투쟁한 대속은 죄의 종류가 4가지이므로 4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말씀을 어긴 죄, 불의의 죄, 원수 된 죄, 절망의 죄로 죄를 나누되, 이 죄들을 지어 받아야 하는 고통을 대신 받고 나아가서는 이 죄들과 싸워 이기다가 죽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죄의 반대되는 의를 이루려다가 죽은 죽음이다.

예수님 죽음의 첫 단계는 말씀을 어긴 죄의 값을 다 받고 죽었고, 그 죽음 이면에서는 말씀을 어기라는 죄와 싸우다가 그 죄에게 피동 되지 않으므로 죽었고, 그 죽음 더 깊은 이면에서는 말씀에게 붙들려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대신 죄의 값만 받은 것이 아니고, 또 죄로 더불어 싸워 이긴 대속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를 이루어 의인이 되게 한 첫 번째 대속의 죽음이다(요15:10).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둘째 의는, 예수님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았던 불의의 죄 값을 다 겪고 죽었는데 이 죽음 안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몰아붙이는 불의의 죄와 싸우다가 그 죄에게 지지 않고 한 번도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행한 일이 없이 죽었으니 이것이 불의의 죄와 싸워 이긴 승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불의의 죄와 싸워 죽는 그 내면에서는 불의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만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불의의 죄를 짓지 않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죽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든 어떤 희생이든 아낌없이 순종했고 최종적으로 죽음까지를 요구해도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 순종에서 죽었으니, 예수님의 대속의 가장 깊은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다가 죽은 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이 우리를 대신한 것이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한 의인이 되어 중생하고 있다(요12:49).

의를 위한 예수님의 세 번째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값을 당하면서 죽는 그 죽음 속에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악령의 유혹을 물리치고 죽었다. 하나님과 등을 지라고 협박하고 굶기고 마지막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죽이고 있었는데 그 최후 호흡 한번이 남았을 때까지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에 굴복하지 않으므로 그 생명을 끝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원수 되라는 죄를 이긴 대속이다. 바로 이 대속의 죽음에는 하나님과 하나 된 화목의 생으로 살려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죽음 이면에는 하나님과 하나 되려고 노력했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으며 하나님과 하나 된 그 연결이 어떤 외부의 충격과 방해와 사망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고 최후 호흡을 끝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화친을 만든 대속이다. 이 대속은 곧 오늘 우리가 중생되는 그 순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된다(마4:10).

마4:10 ‘...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23:46’은 p.267 참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절망하도록 만드는 절망의 죄에게 지지 않고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죽었으니 이 죽음 안에는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놓지 않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소망의 공로, 소망이라는 의를 만들어 주신 대속이다(눅23:46).

④ 예수님의 죽음의 성격

▪ 예수님의 사망이 가지는 3가지 의미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했다고 표현할 때의 ‘죽음’은 임종의 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기간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은 생애 기간 중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가장 넘기기 어려운 순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생애 기간 전체의 고통과 대속의 희생을 대표한 시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망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생애 기간 전체를 가리키고, 둘째는 예수님이 당한 고통의 최고 절정을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님의 생전 활동의 마지막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의 고통으로만 우리를 구원한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예수님은 출생으로부터 성장과정을 거쳐 장년이 되고 또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이 모든 생애 기간 전체가 우리 구원을 위해 당한 고난이었고 그 고난 전부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행동한 것이다. 물론 그 가장 어려운 순간이며 가장 절정을 말하라 한다면 당연히 십자가상의 죽음이다. 이제 이후로는 더 이상의 고통도 없으며 이 순간의 승리로 최후 확정이 되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지 십자가상의 죽음만이 죽음의 대속을 말하고 그 십자가 죽음 이전의 생애는 우리 대신 죽는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순간순간이 이어져서 그의 평생이 되었고, 그의 평생의 마지막 순간이 십자가였다. 악령은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으므로 최악의 고통으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도전했고 예수님은 승리했기 때문에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을 대표하는 표현이 된 것이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다(사53:3).

사53:3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멸시를 당하였고...’


▪ 하나님의 지공지성법과 악령의 주권법

일반인의 사망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자연사이다. 병사 옥사 고문사 자살 사고사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전부를 줄이면 일반인이 당하는 죽음의 형태이므로 ‘자연사’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망은 우리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인데 이 죽음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 때문에 악령의 종이 되어 있고, 악령은 우리에게 왕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악령의 주권이 가하는 고통을 다 당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범죄 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적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법이 우리를 지공과 지성으로 상대하며 엄히 판정하게 되어 있다. 죄인으로 당하고 거쳐야 할 순서를 하나님의 법도 요구하고 또 악령은 아예 자기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가 가진 죄의 주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망은 일반인의 자연사와는 아주 다른 고통과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님이 죽는 그 순간까지 흠과 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예수님에게 속한 신경 세포 하나까지라도 부족이 있어 하나님의 법에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죄인이라고 판정을 해버리고 악령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게 된다. 또한 악령은 예수님에게 죄인의 왕으로 자기 종을 대하는 권세와 방법을 동원해서 죄를 짓도록 하려고 했다(마27:39-44).

마27:39-44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2) 부활의 대속

① 대속의 범위

▪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신 대속의 범위

대속이라는 의미를 좁게 해석하면 지은 죄값을 대신 해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의미를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해결해 준다는 의미가 된다. 죄는 말씀을 어긴 것도 죄이지만 하나님의 온전에 미달된 것도 죄이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어겨 지옥 갈 것을 대신 형벌 받고 지옥형을 면하게 한 것도 대속이지만, 우리가 이겨야 할 죄를 대신 이겨 우리에게 죄를 이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도 대속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행할 의를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것도 대속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누려야 할 복을 우리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 것을 대신 마련해 준 것도 대속이며 제일 넓게 대속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정한 목적에 필요한 것을 대신 마련한 것까지 다 대속이다. 하나님의 사역 첫 출발 때 작정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에 우리가 미달된다면 이 미달된 면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다. 우리를 그 목표에 달성하도록 대신 마련한 모든 수고도 대속이라 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비유한다면,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며 자기는 살인범이 아님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있는 힘 다하여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죄의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수준 낮은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은 뒤에 또 범죄할 기회가 온다면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니 이것이 역시 큰 걱정이다. 그 사람 속에 범죄할 가능성을 뽑아버려야겠는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수고해서 자기 속에 이제 범죄의 가능성을 가진 인격을 완전히 개선시켰다면 이것이 한 차원 높은 대속의 세계일 것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범죄 하지 않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그를 위해 한 사람이 헌신하여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죄인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든 그 수고를 대속이라는 개념에서 삭제한다는 것은 너무 시야가 짧다고 하겠다. 살인범을 이렇게 사랑의 사람으로까지 만들었다면 이 일에 들어간 모든 수고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룬 일이다(고전15:10, 딤전1:13-15, 요15:12-17).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딤전1:13-15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요15:12-17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 이는 너희로 가서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


▪ 십자가의 부활로 주신 대속의 범위

살인자 우리를 사형집행에서 건져 주시고, 살인할 가능성도 없도록 개조시키시고, 이제는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까지가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이루어놓은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감옥 밖에 나온 우리를 실제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수고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해결해 놓은 모든 해결이 법적 해결이었는데,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그 모든 법적 해결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누리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대속은 죽음으로 우리 문제를 절반 해결했고, 부활로 우리에게 남은 문제 절반을 다시 해결했다. 일반적으로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우리 문제를 전부 해결한 주님께서 이제 죽기까지 고생한 대가로 다시 생명을 얻어서 평안하고 좋게 살게 된 것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생은 죽음까지 고생이 절반이고 부활하심으로 나머지 절반의 고생, 즉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위해 끝없는 고생을 하겠다는 고난의 시작이다. 시간으로 말하면 죽음까지 고생은 33년이고 부활로 인한 대속의 고생은 영원무궁이므로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두고 말하자면 죄로부터 구해내는 것은 죽음으로 해결했다면 부활로 해결하는 것은 죄에서 구원해낸 우리에게 새 인생을 살도록 한 것이므로 이런 시각에서 반반으로 나눌 수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참 고생, 진정한 대속의 수고는 지상에서 33년 세월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의 절정과 하나의 매듭은 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 위해 고생할 고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 고생 전부를 두고 말한다면 죽음까지의 고생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 고생을 두고 일부만 먼저 설명한다면, 죽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인성을 버릴 수 있었으나 부활로 우리를 대속하여 부활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실 여러 은혜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성을 다시 찾아 입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시는 인성을 벗을 수 없도록 입고 사시는 수고를 자청한 것이다(롬6:10, 고전15:20-21, 벧전1:3).

롬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고전15:20-2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② 부활의 성격

▪ 인성의 변화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고 인성에 대한 본질적 변화만 있었다. 신성은 자존자 완전자 영원불변의 하나님이므로 인성의 대속 역사에 동참한 수고가 전부였으나 인성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와서 인간이 당할 고생을 다 당하되 한 인간이 당할 고생이 아니고 모든 택자 전부의 영원한 고생을 다 당했으므로 그 인성의 고난은 우주적 고난이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그런 차원의 인성 고난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인성은 다시는 죄와 상관이 없고 책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인성은 신성에게 붙들려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 기준에 흠 없고 점 없는 인성이 되었는데, 그 인성은 하나님과 한 분을 이룬 인성이므로 그 인성은 바로 신성 하나님과 나뉠 수 없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의 위치에 올랐다. 따라서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인 연약한 인간에서 출발하여 우주와 영계를 영원히 다스릴 만유주 하나님이 되었으므로 그 인성은 부활 이전의 인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성이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공의 제한을 완전히 벗어 그 시공의 제한을 초월하셨고, 우리 모든 택한 사람을 중생시키고 영원토록 영생케 하는 구주시며 또한 만물의 끝날에 만물을 심판할 심판주시고 택자들이 영원히 사모하며 자라가며 닮아가야 할 길을 앞서 걸어가신 우리의 영원한 목표가 되었다(요14:19-20, 엡4:15, 골3:1-4, 벧전1:3).

요14:19-20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골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벧전1:3’은 p.274 참조
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히8:1 ‘...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바로 이런 예수님의 위치를 가리켜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았다고 했는데 이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성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원래부터 그 자리가 자기 자리이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예수님의 인성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앉을 자존자가 아니었으나 이제 신인양성일위의 인성이 신성에게 완전 순종하므로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었고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신성인 하나님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막16:19, 히8:1).

중요한 것만 예를 든다면, 하늘과 땅의 임금이 되셨고 그 통치권이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 택자들을 불러 구원하고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고 또 이 세상 끝날 우주를 심판하고 지옥에 보낼 공심판과 천국에서 영원히 영생할 우리의 세부 요소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무궁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해지도록 영원히 우리를 인도할 것이며, 우리에게 영계와 우주 모든 운영을 맡겨 마치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맡아 하나님 노릇을 하듯,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맡아 예수님 노릇을 하게 할 것이다(눅22:29-30, 계3:21).

눅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계3:21 ‘...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영생의 실제 효력

예수님의 부활은 우선 예수님의 인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마련하신 예수님의 모든 공로를 실제 입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법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준비에 그쳤고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를 향해 입혀질 모든 은혜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의 생활이 되고 우리의 영생이 되었다.

예수님의 인성이 죽어야 했던 것은 죽음으로써 해결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죄값은 사망이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려면 예수님이 직접 죽어야 했고, 또 죄와 싸워 이기려면 죽기까지 싸워 이겨서 최종 승리를 해야 완전한 승리가 되기 때문에 싸워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 시키는 순종을 전부 완수하여 의의 완성을 이루려면 예수님의 생명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고는 완성이라 할 수가 없다. 마지막 호흡 한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을지 아니면 미달에 그칠지는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어 끝이 나야만 완성되는 것은 이런 면의 대속이다.

그런데 죽음으로 예수님의 희생이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신성은 인성을 다시 되찾아 입음으로 예수님은 부활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사망이 가장 큰 공포가 되어 있는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이 아주 큰 출세를 한 것 같지만, 실은 예수님의 신성 하나님으로서는 만일 인성이 부활하고 그 인성을 신성이 되찾아 입게 되면 예수님의 신성인 제2위 성자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그 인성을 입고 불편하며 고생하며 마치 우리가 독방감옥에 영원토록 사는 것 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

예수님 인성이 우리 대속을 위해 죽기까지 고생할 때 예수님의 신성이 사랑으로 동참하며 고통을 받았지만, 이제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의 신성은 영원무궁토록 제한받고 불편한 희생을 지속해야 한다. 바로 이런 희생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로 다시 부활했는데, 이 부활의 의미는 새생명이다. 새로운 생활이다. 새 역사이며 새 활동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완성해 놓은 모든 자격과 실력과 앞날의 소망을 이제 예수님 부활로 인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영원한 나라의 우리 생명으로, 우리 생활로, 우리 행동으로, 우리의 소망으로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살려놓은 대속의 희생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난 우리로 하여금 새생활로 영원히 살아가는 영생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영원한 자본과 희생을 제공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가 부활로 새출발하고 이 신인양성일위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니 이 신인양성일위가 영원히 계속하는 한 우리의 새생명이 실제 살아가는 새생활도 영원할 것이다(롬6:4-5, 벧전1:3-4).

롬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벧전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부활의 인성은 우리의 목표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신인양성‘일위’고 부활 후 우리는 하나님과 신인양성‘일행’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지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과 같을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이 앉으신 그 자리, 그 실력, 그 직무, 그 영광이 우리 모든 택자들이 부활 후 영원히 천국에서 누릴 우리의 모습들이다.

다만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분이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완전히 본받을 수 있는 이 세상 기간에서 중생 후 다시 예수님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한데, 자신의 부족만큼 또 자신이 준비하지 못한 만큼 천국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미달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사람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의 인성의 완전함을 목표치로 두고 영원히 그분을 따라가고 배워가고 자라갈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은 택한 우리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접근해 갈 목표치가 될 것이다(엡4:15).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③ 부활의 희생에 대한 감사와 만물의 순종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이미 죽음으로 마련해 놓은 1차 대속에 이어 이제 이미 죽음으로 해결한 모든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입혀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이는 넓은 차원의 대속 곧 2차 대속 사업이다. 그러나 이 대속으로 우리를 영원히 실제 구원 효력을 받고 살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되고 실제 효력을 누릴 수 있는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그 대가가 바로 인성을 다시 입는 수고였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한번 웃을 때, 그 웃음을 위해 예수님이 당한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행스럽게 살아난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예수님의 사망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소망에 흥분할 때, 그 천국 영생을 위해 영원히 인성을 입고 불편하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의 신성의 영원히 계속되는 희생을 실감하고 감사해야 한다.

마치 자녀가 사용하는 학비나 모든 비용은 그 돈 액수만큼 그 돈을 벌기 위해 땀 흘린 부모의 노고가 있었던 것과 같다. 일단 한번 죄를 지은 이상 우리를 되살려 영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그 대가를 마련한 수고가 있었다. 이는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악령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값을 악령에게 치르지 않고는 강제로 하나님께서 악령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공의이므로 당신이 대신 죽는 희생의 값을 주고 되찾아 왔다. 하나님의 사랑도 만족시키고 또 하나님의 공의도 그대로 지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 앞에 이제 다시 살려낸 우리에게 영생을 주되 우리를 만물 위의 하나님 자녀로 하나님을 대신할 통치자로 세우는 일에 우리를 기계나 종처럼 대하지 않고 자유성을 가진 실력을 갖춘 아들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아들도 고생을 해야 자기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이고 또 그 실력이 하나님과 같은 성질의 실력이 되어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인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성의 영원한 자본을 투자하고 그 실력을 가진 존재로 우리를 만물 위에 영원한 교회가 되게 했다.

이러므로 영원한 나라에서 만물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은 배경의 하나님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할 훈련을 쌓았고 그 훈련 이전에 그 아버지가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자원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영생을 위해 영원히 하나님의 편리함을 내놓았기 때문에 어떤 만물도 하나님의 자녀 우리 때문에 원망이나 억지 순종이나 불평이 없다. 오히려 우리를 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부러워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인정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대속의 은혜를 찬양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흠 없이 점 없이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우리이기 때문에 만물이 우리를 대할 때도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게 된다(롬8:18-23, 히2:8).

롬8:18-23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히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약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벧전1:3-4’은 p.277 참조


부활 후 영원히 계속될 이 세계는 바로 자유의 세계이다. 어느 벌레 하나도 강압에 의하여 눌려서 순종하는 법이 없고, 그 어떤 풀 한 포기도 억울하지만 참아야 할 일이 없다. 전부가 자유로 자율로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와 사랑을 감사할 것인데 그 모든 중심에는 바로 택함 받고 예수님의 사망으로 구원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영생을 실제 누리게 된 우리가 있을 것이다. 만물 앞에 영원한 영광으로 나타날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죽어주심만 감사할 것이 아니고 부활의 은혜를 함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약2:12, 빌2:9-11, 벧전1:3-4).

④ 이차창조

▪ 이차창조의 여건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하여 우리 눈에 가장 크게 확인되는 역사는 바로 ‘2차 창조’이다. 아담과 하와를 만들던 천지창조가 1차 창조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은 2차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1차 창조의 껍데기 속에 보이지 않는 2차 창조가 완성되고 출발하고 있었다.

1차 창조 직후 아담의 타락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1차 창조에 속한 것은 전부 변질이 되어 영생으로 이어질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영생으로 이어질 존재는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지옥으로 가야 할 존재들만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2차 창조의 주변 여건은 1창 창조 때의 환경보다 훨씬 나쁜 조건이었다. 1차 창조 때는 그냥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2차 창조 때는 창조를 가로 막고 나서는 세력으로만 가득 차 있는 조건이었다(행4:27).

행4:27 ‘과연 헤롯과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벧전1:3’은 p.277 참조
고후5:17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예수님의 부활과 이차창조

2차 창조는 예수님의 부활로 만들어졌다. 외형으로는 1차 창조의 것들 중에서 예수님의 사활의 완성으로 인하여 다시 고쳐지고 치료를 받아 복구가 되는 모습을 가진다. 그러나 그 내면을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새역사가 다시 전개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새창조를 위한 준비였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새창조였다. 부활은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생명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생명을 가진 존재를 만들었다(벧전1:3, 고후5:17).

물론 1차 창조와는 다른 존재 형식을 가진 생명역사이고 존재형태를 가진다. 중요한 것은 1차 창조의 것을 심판하고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세계는 예수님의 2차 창조에 속한 것만 존재하고 활동하는 세상이 되고, 그 이전 1차 창조 때 지속되던 모든 존재는 전부 불심판에 소멸되고 지옥으로 쓰레기처리가 된다. 따라서 오늘 지상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된 2차 창조물들이 어디 있는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 2차 창조에 속한 새것들이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가장 중심에 서서 존재하고 활동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1차 창조도 그 의미가 크지만 그보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2차 창조의 의미는 전혀 그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출발이다(마22:30, 히9:11-12, 계21:1-5).

마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히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계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벧전1:3-4’은 p.277 참조
히12:27 ‘...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 영원불변성의 창조

1차 창조에 속한 것은 처음부터 진동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2차 창조에 속한 것은 처음부터 다시는 변동이 없는 상태를 만들었다. 1차 창조 당시는 아담에게 죄가 없었고 또한 만물도 아무 저주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1차 창조 상태는 아담이 죄를 지으려면 지을 수 있는 상태였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 만들어진 2차 창조의 새생명에 관련된 것은 한번 생명을 얻게 되면 다시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수가 없는 영원 불변성의 존재가 된다(벧전1:3-4).

1차 창조가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2차 창조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직접 죽고 부활하여 만든 것이며 다시는 진동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이 사활의 대속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히12:27).

▪ 택자들만을 위한 창조

1차 창조는 불택자와 택자를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2차 창조는 오직 천국 구원으로 영생에 이르게 될 택자의 새생명에 속한 것만 창조했다. 다시는 끊어질 수 없는 절대성의 생명을 택자들에게 만들어 주시는 범위에만 한정된 창조이다. 물론 1차 창조에 비하여 보이는 범위를 가지고 말한다면 너무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 안다면 2차 창조는 1차 창조와는 그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이 깊고 넓으니 영원무궁이다(벧전1:4).

▪ 신인양성일위의 역사

2차 창조에 속한 것이 이렇게 진동하지 않을 것이 되고 생명에만 속한 것으로 광대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은, 이 2차 창조에 투입된 제조 원동력이 ‘신인양성일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셔서 직접 죽고 직접 부활하여 영원히 이 2차 창조의 배경이 되고 힘이 되며 자본이 되었다.

말씀이 역사하여 없는 가운데에서 만물을 만든 것이 1차 창조라면, 하나님이 사람 되어 사활의 대속 공로를 완성하고 그 공로가 2차 창조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1차 창조와 2차 창조는 그 창조를 위해 움직이고 투자된 것이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부활한 이 영원하고 무한한 역사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2차 창조이다. 이런 새창조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겨진 것이 중생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중생은 절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벧전1:3).

벧전1:3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이차창조와 주일

2차 창조에 속한 것이 만들어진 그 첫날은 예수님이 부활하던 날이다. 예수님이 부활하던 그 주일새벽에 영원히 진동치 않을 영생을 창조하는 일이 완료되었는데, 그 영생이 믿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입혀지는 것은 재림 때까지 계속 태어나고 살아갈 중생된 사람들 각자의 생애 기간에 계속 진행된다.

마치 1차 창조의 첫 순간에 창조가 있었고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재창조가 계속되었던 것처럼, 2차 창조가 처음 시작된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던 주일이었고, 2차 창조가 재림 때까지 재창조로 이어지듯 그 새생명의 역사가 계속 되는 것은 항상 주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관련하여 ‘새생명’의 창조를 살펴보면서 ‘주일’을 한번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은, 이 날은 그냥 쉬니까 쉬는 세상 사람의 ‘안식’일 정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2차 창조를 실제로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생명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중심에는 주일이 있음을 특별히 살펴두어야 한다(눅24:1, 계1:10, 출20:11).

눅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출20:11 ‘...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