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교리체계의 시작 -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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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0 08:53
6. 교리 체계의 시각 - 구원론
(1) 구원론 체계의 의의
한 사람을 소개할 때, 어느 시각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 내용은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된다. 이 모든 범주를 전부 집합시켜 설명한다면 단순히 백과사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리는 일단, 성경 진리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전부 체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백과사전과 같이 교리에 관련된 내용을 전부 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는 백영희교리체계는 그 교리체계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며 왜 필요한지를 분명히 묻고 있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이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해 주신 것이 성경이므로,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전부 담도록 하되, 그 모든 항목과 내용들은 전부 우리 구원에 어떤 면으로 필요하며 왜 그 교리 내용이 구원의 어떤 면을 가르치는지가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또한 우리 구원 면에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겠다.
구원 목적과 구원에 필요한 면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교리가 연구되고 기록된다면 이 교리는 죽은 교리가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백영희 신앙노선을 고려할 때, 이 교리연구는 구원론이라는 시각을 근본으로 삼고, 그 다음 교리 체계 전체를 구성하게 된다. 비단 교리뿐 아니라, 신학 전반에도 이 원리는 적용되는 것이고, 심지어 목회나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분야나 부분에서도 구원 목적과 구원 필요성에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살펴볼 것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 교리서 서론에서는, 교회사에서 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만 교리의 총괄역사를 잠깐 요약하여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현재 21세기의 교리 정리는 현 시점까지 밝혀지고 확인된 교리 전체를 체계화시켜 소개하게 되지만, 이 교리들은 어느 한 시점에 조립이 완료되어 출시된 세상의 상품들과 같지 않고 세월 속에 자라나온 것을 현 시점에서 그 단면을 보는 것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체계를 오늘 현황에서 보지 않고 과거 교리사로 살펴본다면 오늘의 교리를 위해 어떤 교리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 교리사라는 분야는 또 하나의 과목으로 따로 살펴보아야 하겠으나 그것은 사실 특수한 사명을 가진 몇 사람에게나 해당된 일이고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여 상식적으로 몇 가지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리 요약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교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잠깐 살펴본다면, 교리는 그냥 항목별로 분류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길러 가시는 구원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인도해온 면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교리의 역사적인 형성 과정, 즉 오늘 우리 시대의 교리는 특히 구원론적 시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소개한다(요5:39).
*요5:39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2) 구원론적 시각에서 본 교리체계의 발전 단계
① 제1시기 : ‘성경관’ 확립
우리 기독교인의 모든 신앙생활은 성경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대속도 모든 행위도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성경대로 믿는다. 모든 것은 성경을 보고 알고 행하여 신앙을 길러간다. 예수님 대속 후 신약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확정 지워 주신 것이 성경이다. 그러나 악령은 성경자체를 없애거나 혼동시키는 일에 제일 먼저 전력을 다한다.
신앙에 유일한 법칙, 신구약 66권 성경 자체를 혼동 혼잡 시킴으로 초대교회의 신앙을 그 뿌리부터 끊어보려고 악령은 200여 년간 노력했지만 초대교회는 이러한 악령의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66권만이 정경임을 깨닫게 되어 ‘정경 교리’를 세운다. 이것이 구원관 교리사로 본다면 신약교회 역사의 제1시기다. 교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시기는 393년에 개최 된 공회라고 기록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확정된 것은 주후 200년 이전이다.
② 제2시기 : ‘삼위일체 하나님관’ 확립
성경관에 이어 악령이 교회를 혼동 시키려고 주력한 또 하나의 미혹은 하나님 관이다. 66권 성경을 아무리 굳게 붙든 성도라도 믿고 따라가야 하는 하나님을 잘못 파악하면 헛일이다. 부처나 알라신을 하나님으로 아는 저급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부르는 이름이 비록 ‘하나님’이라도 만일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그 하나님으로 알고 또 그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이다. 성경관이 잘못되면 출발도 하지 못하게 되고, 신관이 잘못되면 종교가 달라진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단순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던 교회가, 악령이 먼저 시험을 하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알아간다. 그 최종 설명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사람이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무한이어서 유한한 인간으로는 다 알 수 없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알아가는 것이 성도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배워 가는 첫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다른 종교로 간다.
초대교회를 향한 악령의 미혹은 하나님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시작했다. 교회보다 더욱 더 강하게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해 놓고는 엉뚱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시켰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성령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훗날 돌아 보며 결과를 보니 그 의도가 드러 났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급격히 성장하는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관'이라는 교리 문제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온 나라의 평안과 질서에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후 325년에 모든 교회 대표들을 니케아라는 도시로 불러 논쟁을 하게 하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했다. 물론 아다나시우스가 정통으로 인정 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교리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마음이 바뀌면 또 다른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공회의 결정으로 정통 교리로 확정 짓게 된다.
③ 제3시기 : 예수님의 ‘인성관’ 확립
제2시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밝혀지자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확정된다. 예수님은 사람이지 하나님일 수 없다고 하던 이단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확정되자 이번에는 말을 정반대로 바꾼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오실 때 예수님의 영을 빼버리고 그 영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예수님의 내면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바로 확립해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진 도로가 개통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내면을 샅샅이 연구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폴로나리스였고 그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 같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교리가 확립된 것은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있었.
④ 제4시기 : 예수님의 ‘일위관’ 확립
이제 예수님 안에는 참 하나님인 신성과 참 사람 인성이 있다는 사실은 확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 안에서 이 신성과 인성이 어떤 관계로 하나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게 된다. 예수님 안에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각각 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앞서 제2시기와 제3시기에서 각각 확정하다 보니까, 두 존재가 한 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계신다는 면을 무시했다. 한 지붕에 두 세대가 사는 것처럼 집만 하나지 내부적으로는 세대가 둘로 나누어지는 정도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단들이 일어났다. 제4시기에서는 예수님은 한 분 안에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분임을 강조하고 이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두 존재가 둘이 아니고 한 분이라는 것을 ‘일위’라는 표현으로 요약했다. 주후 431년 에베소공회의 일이다.
⑤ 제5시기 : 예수님의 ‘양성일위관’ 확립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인데, 예수님 안에서 이 두 존재는 한 분이 되었다는 ‘일위관’에 대하여 또 지나치게 나가는 이단들이 있었다. 두 분이 한 분이 되었으니까 이 둘은 뒤섞여 제 3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한 분이 되었으나 이 둘이 뒤섞여 변성된 것도 아니요 이 둘이 따로 떨어져 별개로 지내는 것도 아니라고 최종으로 정리하게 된다. 주후 451년 칼세돈 공회였다. 오랫동안 끌어오던 삼위일체관과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관을 어거스틴이 최종 정리하게 된다. 간단히 소개드린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신성’ 확정), 참사람이시며(‘인성’ 확정), 이 신인 양성이 분할 분리되지 않고(‘일위’ 확정), 혼합, 변질되지 않고 일위(‘양성일위’ 확정)로 계신다고 요약하게 되면서, 이제 교리체계에서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줄 예수님을 찾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⑥ 제6시기 : ‘기본구원관’ 확립
‘66권 성경’ 교리와 ‘삼위일체’ 교리와 ‘신인양성일위’ 교리를 확립하며 보낸 세월이 주후 5세기까지다. 이제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받아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교리 발전은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를 구원해 놓았으니 이 구원을 우리가 얻어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천주교 1천년 동안의 혼동이 구원론 교리체계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한 가지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성경과 삼위일체와 신인양성일위 교리에 이어진 이 기본구원교리 논쟁에서는 천주교라는 모습의 이단이 근 1천년간 주도를 하게 된다. 천주교의 구원관도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간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는 길에 인간도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적 은혜로 받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인간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은 이후에 힘써야 할 것을 많이 가르쳤는데, 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을 전부 기본구원으로 해석하여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천국을 가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천국 자체를 가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버리게 되자 중세 1천년 교회는 천국을 가기 위해 평생 노력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지옥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떨며 살게 되었다. 모두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는가 라는 문제로 떨게 되자, 신앙을 지도하는 성직자들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여러 법을 만들었다. 그 법은 교회가 천하의 돈과 권세를 거머쥐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천주교는 불신자들이 볼 때도 비난을 할 만큼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잘못은 ‘기본구원’ 교리를 혼동한 것인데, 이것은 깊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그 대신 불신자들도 비판할 그런 도덕적인 탈선만이 천주교의 주요 죄목이 된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길 때, 교회는 그 초기에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 다른 교리들을 확립할 때와 달리 이 기본구원 교리를 바로 잡는 데에는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되고 마침내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기본구원 교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구원은 전적 은혜로만 받는 것이라는 이 한 마디가 1천여 년 세월 속에서 확정적으로 발표된다. 루터의 뒤를 이어 칼빈이 기본구원에 관련된 교리를 요약하여 발표하게 되고, 당시 막 발명되어 보급된 인쇄술에 의하여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게 되자, 중세기 1천년을 종료시키고 교회가 새로 출발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들이 당시 자신들의 깨달음을 ‘기본구원론’이라고 발표한 적은 없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론이 단순히 ‘구원론’의 전부인 줄 알았으나, 오늘 ‘건설구원론’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초기 구원론은 ‘기본구원론’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과 그 구원론이 당시 세계 교회를 구원하게 된 면을 두고 어느 역사가가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인쇄술의 보급이 없었더라면 북방 르네상스는 그와 같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활판 인쇄술은 15세기 중기(1447년경) 독일에서 인쇄소를 가진 구텐베르그에 의해 활용되었다. 그는 주조된 활자를 써서 기술적 혁신을 하였다. 그는 이 방식으로 1454년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하였다(구텐베르그성경). 이 새 활판 인쇄술은 유럽 다른 지역에 곧 전파되어 1500년경에는(종교개혁직전) 1000여개 이상의 인쇄소가 유럽의 주요국에 설치되었으며 3만 종류의 판본들이 있어 서적을 염가로 (기존 책값의 1/20정도) 대량 출판하게 하였다.’
오늘 이 세대가 감당하고 증거해야 할 복음은 인터넷으로 요약되는 통신술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 이상으로 급속하게 전해야 할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때와 비교도 못할 탁월한 기술을 이 말세에 대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⑦ 제7시기 : ‘건설구원관’ 확립
사람이 구원을 얻고 천국을 가는 것은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고 제6시기에서 확정해 놓고 나니까, 즉시 또 하나의 문제가 다가왔다. 그러면 이제 중생된 사람은 남은 평생 왜 신앙생활에 힘을 써야 하는가? 왜 성경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구원을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 천주교 1천년의 폐해가 너무 크다보니까 기본구원 교리를 확립한 우리 교회들은 오랜 세월 그 교리만 보배인 줄 알고 그 교리만을 붙들고 제자리에 너무 오랫동안 안주했다.
은혜로, 공짜로,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염려하던 모든 일은 전부 해결이 된 것 아닌가? 천주교 1천년 시절에는 천국을 가지 못할까봐서 교황청 시키는 대로 평생에 얼마나 육체로 고생하고 마음으로 고생을 했다.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지옥 같은 교리감옥에서 해방 받고 이제 은혜 교리의 품안에 안기게 되었으니 교회는 너무 좋고 평안해서 그 동안의 피곤을 풀고 곤히 잠들만도 했다. 그러나 잠이 너무 깊어져 400여년을 넘기고 500여년을 바라보게 되는 시점이 오고 있었다.
1950년대, 그 당시 형성되던 건설구원 교리는 1960년을 전후하며 지금까지 교리사가 잊어버린 성도 속의 영을 되찾고 성도가 중생된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 속에 있는 영이며, 마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이 교리가 일단 한국 교계에 소개되자 지금까지 듣지 못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비록 세계를 다 다녀보지 못했으나, 한국 교회는 유별나게 세계 교회들과 연결되어 있어 한국의 신학교는 세계 신학의 집합소가 되어 있는데, 세계 신학계의 축소판이 되는 한국 교회가 일제히 이 교리를 거부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이 교리는 세계를 다 뒤져 볼 것도 없이 세계 교리사의 제7시기로 규정할 차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건설구원’ 교리가 확정되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라는 것이 예고되고 있었다.
안 믿는 사람이 중생을 받아 천국을 가는 것은 전적 은혜이며 이는 모든 성도에게 기본적으로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니 이를 기본구원이라 하고, 믿은 성도가 이후 힘써야 하는 부분은 기본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성도들이 자기 신앙에 따라 믿은 이후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각자 신앙건설의 양에 따라 다르다. 다르므로 천국에서는 그 차이가 영원토록 있게 된다. 이를 건설구원이라는 교리로 발표하여, 그 이전까지 세계교회의 교리역사를 제6시기까지로 구분 짓고, 이제부터 제7시기 교리시대로 나갈 수 있게 한 이가 바로 ‘백영희’라는 인물이다. 그 백영희 신앙노선이 교회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총공회’라는 개교회주의다.
(3) 이 시대의 교리 방향
이제까지 간단하게 구원론시각에서 교리의 발전사를 살펴보았다. 이단들의 미혹을 막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고 교회의 혼동을 막기 위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살피다가 형성된 것이 교리들이다. 어느 학자가 남이 모르는 것을 발견해 내려고 자기 학설을 연구하여 발표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 주시는 현실을 자기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서 성경이 어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교리 발전의 진행 과정이었다.
우리는 이런 교리 발전의 진행을 보면서, 오늘 이후 시대는 하나님께서 어떤 면으로 역사하고 이 시대를 인도하실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리사와 교리체계를 안다면 늘 이런 질문은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성도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듯 큰 건을 하나 터뜨려 이름을 남기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주신 현실 속에 주신 말씀으로 따라가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마음속에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 시대의 미혹이 무엇이며, 오늘 이 시대 천하 교회를 삼키는 가장 무서운 이단 교리가 무엇인지, 어떤 논리가 오늘 성도의 구원을 마구 절단 내는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앞서 세워주신 교리를 가지고 그 교리에 이어지는 어떤 교리로 우리 시대를 감당하라고 하시는지 그 방향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선 급한 것은, 지금까지 이런 7시기로 교리를 발전시켜 우리 손에 쥐어준 교리체계를 정리 요약하는 일이다. 요약이 완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인도의 방향은 우리 전체에게 아주 공통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기가 급박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수백 년의 세월이 헛돌지는 않을 듯 하다. 또 근본교리체계가 전부 확정이 된 상태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게 완성되었지만 그 후 3시기부터 5시기의 예수님관 교리체계는 수십 년의 시간을 간격으로 하여 빨리 진행된 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구원 교리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일에 5백여 년이 걸렸다면, 이제 큰 고비를 넘겼으므로 나머지 거쳐 가야 할 단계는 그리 오래 걸리거나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본다. 어쨌든 역사 세계 전체적으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세상 모든 일에 충성하고 바빠야 하겠으나, 이 복음을 받고 이 신앙노선에 눈을 열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일에 매진하라는 명령이 함께 전달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 구원론 체계의 의의
한 사람을 소개할 때, 어느 시각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 내용은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된다. 이 모든 범주를 전부 집합시켜 설명한다면 단순히 백과사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리는 일단, 성경 진리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전부 체계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백과사전과 같이 교리에 관련된 내용을 전부 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는 백영희교리체계는 그 교리체계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며 왜 필요한지를 분명히 묻고 있다. 우리 구원에 필요한 이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해 주신 것이 성경이므로, 교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전부 담도록 하되, 그 모든 항목과 내용들은 전부 우리 구원에 어떤 면으로 필요하며 왜 그 교리 내용이 구원의 어떤 면을 가르치는지가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또한 우리 구원 면에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겠다.
구원 목적과 구원에 필요한 면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교리가 연구되고 기록된다면 이 교리는 죽은 교리가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백영희 신앙노선을 고려할 때, 이 교리연구는 구원론이라는 시각을 근본으로 삼고, 그 다음 교리 체계 전체를 구성하게 된다. 비단 교리뿐 아니라, 신학 전반에도 이 원리는 적용되는 것이고, 심지어 목회나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분야나 부분에서도 구원 목적과 구원 필요성에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살펴볼 것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 교리서 서론에서는, 교회사에서 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만 교리의 총괄역사를 잠깐 요약하여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현재 21세기의 교리 정리는 현 시점까지 밝혀지고 확인된 교리 전체를 체계화시켜 소개하게 되지만, 이 교리들은 어느 한 시점에 조립이 완료되어 출시된 세상의 상품들과 같지 않고 세월 속에 자라나온 것을 현 시점에서 그 단면을 보는 것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체계를 오늘 현황에서 보지 않고 과거 교리사로 살펴본다면 오늘의 교리를 위해 어떤 교리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 교리사라는 분야는 또 하나의 과목으로 따로 살펴보아야 하겠으나 그것은 사실 특수한 사명을 가진 몇 사람에게나 해당된 일이고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여 상식적으로 몇 가지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리 요약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교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잠깐 살펴본다면, 교리는 그냥 항목별로 분류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길러 가시는 구원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인도해온 면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교리의 역사적인 형성 과정, 즉 오늘 우리 시대의 교리는 특히 구원론적 시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소개한다(요5:39).
*요5:39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2) 구원론적 시각에서 본 교리체계의 발전 단계
① 제1시기 : ‘성경관’ 확립
우리 기독교인의 모든 신앙생활은 성경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대속도 모든 행위도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성경대로 믿는다. 모든 것은 성경을 보고 알고 행하여 신앙을 길러간다. 예수님 대속 후 신약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확정 지워 주신 것이 성경이다. 그러나 악령은 성경자체를 없애거나 혼동시키는 일에 제일 먼저 전력을 다한다.
신앙에 유일한 법칙, 신구약 66권 성경 자체를 혼동 혼잡 시킴으로 초대교회의 신앙을 그 뿌리부터 끊어보려고 악령은 200여 년간 노력했지만 초대교회는 이러한 악령의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66권만이 정경임을 깨닫게 되어 ‘정경 교리’를 세운다. 이것이 구원관 교리사로 본다면 신약교회 역사의 제1시기다. 교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시기는 393년에 개최 된 공회라고 기록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확정된 것은 주후 200년 이전이다.
② 제2시기 : ‘삼위일체 하나님관’ 확립
성경관에 이어 악령이 교회를 혼동 시키려고 주력한 또 하나의 미혹은 하나님 관이다. 66권 성경을 아무리 굳게 붙든 성도라도 믿고 따라가야 하는 하나님을 잘못 파악하면 헛일이다. 부처나 알라신을 하나님으로 아는 저급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부르는 이름이 비록 ‘하나님’이라도 만일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그 하나님으로 알고 또 그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이다. 성경관이 잘못되면 출발도 하지 못하게 되고, 신관이 잘못되면 종교가 달라진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단순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던 교회가, 악령이 먼저 시험을 하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더 확실하게 알아간다. 그 최종 설명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사람이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무한이어서 유한한 인간으로는 다 알 수 없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알아가는 것이 성도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배워 가는 첫길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다른 종교로 간다.
초대교회를 향한 악령의 미혹은 하나님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시작했다. 교회보다 더욱 더 강하게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해 놓고는 엉뚱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시켰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성령이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훗날 돌아 보며 결과를 보니 그 의도가 드러 났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급격히 성장하는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관'이라는 교리 문제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온 나라의 평안과 질서에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후 325년에 모든 교회 대표들을 니케아라는 도시로 불러 논쟁을 하게 하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했다. 물론 아다나시우스가 정통으로 인정 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교리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마음이 바뀌면 또 다른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공회의 결정으로 정통 교리로 확정 짓게 된다.
③ 제3시기 : 예수님의 ‘인성관’ 확립
제2시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밝혀지자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확정된다. 예수님은 사람이지 하나님일 수 없다고 하던 이단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확정되자 이번에는 말을 정반대로 바꾼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오실 때 예수님의 영을 빼버리고 그 영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예수님의 내면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바로 확립해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진 도로가 개통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내면을 샅샅이 연구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폴로나리스였고 그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 같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교리가 확립된 것은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있었.
④ 제4시기 : 예수님의 ‘일위관’ 확립
이제 예수님 안에는 참 하나님인 신성과 참 사람 인성이 있다는 사실은 확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 안에서 이 신성과 인성이 어떤 관계로 하나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게 된다. 예수님 안에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각각 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앞서 제2시기와 제3시기에서 각각 확정하다 보니까, 두 존재가 한 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계신다는 면을 무시했다. 한 지붕에 두 세대가 사는 것처럼 집만 하나지 내부적으로는 세대가 둘로 나누어지는 정도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단들이 일어났다. 제4시기에서는 예수님은 한 분 안에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분임을 강조하고 이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두 존재가 둘이 아니고 한 분이라는 것을 ‘일위’라는 표현으로 요약했다. 주후 431년 에베소공회의 일이다.
⑤ 제5시기 : 예수님의 ‘양성일위관’ 확립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사람인데, 예수님 안에서 이 두 존재는 한 분이 되었다는 ‘일위관’에 대하여 또 지나치게 나가는 이단들이 있었다. 두 분이 한 분이 되었으니까 이 둘은 뒤섞여 제 3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신성 하나님과 인성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한 분이 되었으나 이 둘이 뒤섞여 변성된 것도 아니요 이 둘이 따로 떨어져 별개로 지내는 것도 아니라고 최종으로 정리하게 된다. 주후 451년 칼세돈 공회였다. 오랫동안 끌어오던 삼위일체관과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관을 어거스틴이 최종 정리하게 된다. 간단히 소개드린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신성’ 확정), 참사람이시며(‘인성’ 확정), 이 신인 양성이 분할 분리되지 않고(‘일위’ 확정), 혼합, 변질되지 않고 일위(‘양성일위’ 확정)로 계신다고 요약하게 되면서, 이제 교리체계에서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줄 예수님을 찾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⑥ 제6시기 : ‘기본구원관’ 확립
‘66권 성경’ 교리와 ‘삼위일체’ 교리와 ‘신인양성일위’ 교리를 확립하며 보낸 세월이 주후 5세기까지다. 이제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받아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교리 발전은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를 구원해 놓았으니 이 구원을 우리가 얻어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천주교 1천년 동안의 혼동이 구원론 교리체계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 한 가지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성경과 삼위일체와 신인양성일위 교리에 이어진 이 기본구원교리 논쟁에서는 천주교라는 모습의 이단이 근 1천년간 주도를 하게 된다. 천주교의 구원관도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간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는 길에 인간도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적 은혜로 받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인간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은 이후에 힘써야 할 것을 많이 가르쳤는데, 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을 전부 기본구원으로 해석하여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천국을 가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천국 자체를 가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버리게 되자 중세 1천년 교회는 천국을 가기 위해 평생 노력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지옥으로 떨어질까 두려워 떨며 살게 되었다. 모두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는가 라는 문제로 떨게 되자, 신앙을 지도하는 성직자들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여러 법을 만들었다. 그 법은 교회가 천하의 돈과 권세를 거머쥐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천주교는 불신자들이 볼 때도 비난을 할 만큼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잘못은 ‘기본구원’ 교리를 혼동한 것인데, 이것은 깊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그 대신 불신자들도 비판할 그런 도덕적인 탈선만이 천주교의 주요 죄목이 된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생길 때, 교회는 그 초기에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 다른 교리들을 확립할 때와 달리 이 기본구원 교리를 바로 잡는 데에는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되고 마침내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기본구원 교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구원은 전적 은혜로만 받는 것이라는 이 한 마디가 1천여 년 세월 속에서 확정적으로 발표된다. 루터의 뒤를 이어 칼빈이 기본구원에 관련된 교리를 요약하여 발표하게 되고, 당시 막 발명되어 보급된 인쇄술에 의하여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게 되자, 중세기 1천년을 종료시키고 교회가 새로 출발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들이 당시 자신들의 깨달음을 ‘기본구원론’이라고 발표한 적은 없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론이 단순히 ‘구원론’의 전부인 줄 알았으나, 오늘 ‘건설구원론’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초기 구원론은 ‘기본구원론’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과 그 구원론이 당시 세계 교회를 구원하게 된 면을 두고 어느 역사가가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인쇄술의 보급이 없었더라면 북방 르네상스는 그와 같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활판 인쇄술은 15세기 중기(1447년경) 독일에서 인쇄소를 가진 구텐베르그에 의해 활용되었다. 그는 주조된 활자를 써서 기술적 혁신을 하였다. 그는 이 방식으로 1454년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하였다(구텐베르그성경). 이 새 활판 인쇄술은 유럽 다른 지역에 곧 전파되어 1500년경에는(종교개혁직전) 1000여개 이상의 인쇄소가 유럽의 주요국에 설치되었으며 3만 종류의 판본들이 있어 서적을 염가로 (기존 책값의 1/20정도) 대량 출판하게 하였다.’
오늘 이 세대가 감당하고 증거해야 할 복음은 인터넷으로 요약되는 통신술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 이상으로 급속하게 전해야 할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때와 비교도 못할 탁월한 기술을 이 말세에 대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⑦ 제7시기 : ‘건설구원관’ 확립
사람이 구원을 얻고 천국을 가는 것은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고 제6시기에서 확정해 놓고 나니까, 즉시 또 하나의 문제가 다가왔다. 그러면 이제 중생된 사람은 남은 평생 왜 신앙생활에 힘을 써야 하는가? 왜 성경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구원을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 천주교 1천년의 폐해가 너무 크다보니까 기본구원 교리를 확립한 우리 교회들은 오랜 세월 그 교리만 보배인 줄 알고 그 교리만을 붙들고 제자리에 너무 오랫동안 안주했다.
은혜로, 공짜로, 무조건 천국을 가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염려하던 모든 일은 전부 해결이 된 것 아닌가? 천주교 1천년 시절에는 천국을 가지 못할까봐서 교황청 시키는 대로 평생에 얼마나 육체로 고생하고 마음으로 고생을 했다.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지옥 같은 교리감옥에서 해방 받고 이제 은혜 교리의 품안에 안기게 되었으니 교회는 너무 좋고 평안해서 그 동안의 피곤을 풀고 곤히 잠들만도 했다. 그러나 잠이 너무 깊어져 400여년을 넘기고 500여년을 바라보게 되는 시점이 오고 있었다.
1950년대, 그 당시 형성되던 건설구원 교리는 1960년을 전후하며 지금까지 교리사가 잊어버린 성도 속의 영을 되찾고 성도가 중생된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 속에 있는 영이며, 마음이라는 존재는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다. 이 교리가 일단 한국 교계에 소개되자 지금까지 듣지 못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비록 세계를 다 다녀보지 못했으나, 한국 교회는 유별나게 세계 교회들과 연결되어 있어 한국의 신학교는 세계 신학의 집합소가 되어 있는데, 세계 신학계의 축소판이 되는 한국 교회가 일제히 이 교리를 거부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이 교리는 세계를 다 뒤져 볼 것도 없이 세계 교리사의 제7시기로 규정할 차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건설구원’ 교리가 확정되는 시대가 바로 우리 시대라는 것이 예고되고 있었다.
안 믿는 사람이 중생을 받아 천국을 가는 것은 전적 은혜이며 이는 모든 성도에게 기본적으로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니 이를 기본구원이라 하고, 믿은 성도가 이후 힘써야 하는 부분은 기본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성도들이 자기 신앙에 따라 믿은 이후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각자 신앙건설의 양에 따라 다르다. 다르므로 천국에서는 그 차이가 영원토록 있게 된다. 이를 건설구원이라는 교리로 발표하여, 그 이전까지 세계교회의 교리역사를 제6시기까지로 구분 짓고, 이제부터 제7시기 교리시대로 나갈 수 있게 한 이가 바로 ‘백영희’라는 인물이다. 그 백영희 신앙노선이 교회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총공회’라는 개교회주의다.
(3) 이 시대의 교리 방향
이제까지 간단하게 구원론시각에서 교리의 발전사를 살펴보았다. 이단들의 미혹을 막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고 교회의 혼동을 막기 위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살피다가 형성된 것이 교리들이다. 어느 학자가 남이 모르는 것을 발견해 내려고 자기 학설을 연구하여 발표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 주시는 현실을 자기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서 성경이 어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교리 발전의 진행 과정이었다.
우리는 이런 교리 발전의 진행을 보면서, 오늘 이후 시대는 하나님께서 어떤 면으로 역사하고 이 시대를 인도하실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리사와 교리체계를 안다면 늘 이런 질문은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 성도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듯 큰 건을 하나 터뜨려 이름을 남기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주신 현실 속에 주신 말씀으로 따라가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마음속에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 시대의 미혹이 무엇이며, 오늘 이 시대 천하 교회를 삼키는 가장 무서운 이단 교리가 무엇인지, 어떤 논리가 오늘 성도의 구원을 마구 절단 내는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앞서 세워주신 교리를 가지고 그 교리에 이어지는 어떤 교리로 우리 시대를 감당하라고 하시는지 그 방향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선 급한 것은, 지금까지 이런 7시기로 교리를 발전시켜 우리 손에 쥐어준 교리체계를 정리 요약하는 일이다. 요약이 완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인도의 방향은 우리 전체에게 아주 공통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기가 급박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수백 년의 세월이 헛돌지는 않을 듯 하다. 또 근본교리체계가 전부 확정이 된 상태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게 완성되었지만 그 후 3시기부터 5시기의 예수님관 교리체계는 수십 년의 시간을 간격으로 하여 빨리 진행된 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구원 교리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일에 5백여 년이 걸렸다면, 이제 큰 고비를 넘겼으므로 나머지 거쳐 가야 할 단계는 그리 오래 걸리거나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본다. 어쨌든 역사 세계 전체적으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세상 모든 일에 충성하고 바빠야 하겠으나, 이 복음을 받고 이 신앙노선에 눈을 열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 일에 매진하라는 명령이 함께 전달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구원론적 교리의 발전 단계” 참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 (삼위일체)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 니케아 공의회 결정 재확인
에베소 공의회 (431년):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우스 배격
칼케돈 공의회 (451년):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신인양성일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년):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
기본구원(16세기) : 루터의 이신칭의, 칼빈의 절대예정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 (삼위일체)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 니케아 공의회 결정 재확인
에베소 공의회 (431년):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우스 배격
칼케돈 공의회 (451년):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신인양성일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년):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
기본구원(16세기) : 루터의 이신칭의, 칼빈의 절대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