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에 완전영감, 축자영감, 성령의 조명에 대하여 궁금합니…
서기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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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21:54
4. 질문 : 성경에 완전영감, 축자영감, 성령의 조명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472(쉬)
샬롬! 성경을 기록하신 분들마다 기록하시게 된 동기와 과정이다양하기 때문에 한두 마디의 말로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 어떤 책은 사람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혹은 들려 주신대로 아니면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한대로 기록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어떤 책은 다른 책을 참고하면서 쓴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어 그 지혜로써 지은 잠언이 3000 이나 되었지만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그 중에서 신앙에 도움이 될만한 건전한 것들만 ‘편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 25:1)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것이니라
역사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왕정시에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를 기초로하여 기록하였으며 다른 문서를 인용하거나 참고하고서는 그 원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역사서를 기록한 예레미야나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분들은 역대지략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왕상 14:19, 왕상 14:29, 왕상 15:7, 왕상 15:23, 왕상 15:31, 왕상 16:14, 왕상 16:20, 왕상 22:39, 왕상 22:45, 왕하 1:18, 왕하 8:23, 왕하 10:34, 왕하 12:19, 왕하 13:8, 왕하 13:12, 왕하 14:15, 왕하 14:18, 왕하 14:28, 왕하 15:6, 왕하 15:11, 왕하 15:15, 왕하 15:21, 왕하 15:26, 왕하 15:31, 왕하 15:36, 왕하 16:19, 왕하 20:20, 왕하 21:17, 왕하 21:25, 왕하 23:28, 왕하 24:5, 대상 27:24, 느 12:23)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이 인용한 책은 ‘여호와의 전쟁기’(민21:4) 야살의 책(수10:13) 솔로몬 행장 선견자 나단의 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잇도의 묵시책, 선견자 사무엘의 글, 선견자 갓의 글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을 근거로 하여 성실히 썼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성경을 기록한 분들은 출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축자영감설이란 그야말로 하나의 학설에 불과 합니다. 성경에 영감이란 단어는 단지 두번만 쓰였습니다. (왕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왕하 2: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반면에 감동된자 혹은 감동을 받은자라는 말은 다소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영감설의 근거는 대체로 다음 두 구절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구절이 말하는 모든 성경은 분명히 구약성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할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라는 말은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주후 66년 혹은 늦으면 67년 초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는 것은 주후 90년 이후에야 계시록까지 완성되었고 지금의 27권이 확정된 것은 주후 397년 칼타고 회의에 가서 확정되었습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언’을 두고 하는 말씀이지 모든 성경을 두고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으니까 사람의 사견이 들어갈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66권 전체를 성령이 한 글자 두글자 불러 주는대로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신의 감동을 입은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신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의 개입이 없이 성령이 불러 주는 대로만 기록한 사람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에게 감동된 사람 삼손은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모세처럼 신에 감동된 사람도 구스 여인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지만 형편없이 타락하였습니다. 다윗은 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지만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성경을 세권씩이나 기록했고 지혜의 신의 충만했지만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창 41:38, 출 35:21, 출 35:26, 출 35:34, 민 27:18, 삿 13:25, 삿 14:6, 삼상 10:26, 삼상 11:6, 삼상 16:13, 삼하 24:1, 왕하 3:15, 대상 12:18, 대하 18:31, 대하 24:20, 대하 30:12, 대하 36:22, 스 1:1, 스 1:5, 느 7:5, 겔 3:14, 호 9:7, 마 22:43, 막 12:36, 눅 2:27, 행 21:4, 딤후 3:16, 벧후 1:21, 계 1:10, 계 4:2)
축자영감의 증거를 정리하여 주시면 적극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어떤 학설을 주장할 때는 그 학설을 증명할만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경을 여러 차례 살펴보았지만 축자영감설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단 한 구절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미신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일반 성도들이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는 축자영감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던 목사들의 설교와 신학 전체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될 것입니다.
답변 : 쉬운문답방에서 질문하셨으니 '쉽고 간단하게 답변'해보겠습니다.
1. '성경말씀은 일점일획도 가감 없는 성령의 기록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사실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모든 것을 알고 성경을 통해서 모든 신앙을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도, 또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것도 전부 그 기초와 근거가 성경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대단히 심각하게 또 오랫동안 살펴보고 연구할 일입니다. 따라서 '문답방'에서 충분히 논할 문제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제는 말을 많이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므로 여기서 간단히 답변하겠습니다.
2. 이 문제는, 그 새끼를 낳은 친애미를 찾는 일입니다.
'친자확인'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그 어미가 낳은 그 자식이냐를 가리는 일입니다. 현대과학이 오만 측정기술을 개발하여 현기증이 날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기술이 없던 때는 이 집 저 집 부모 자식이 뒤엉켜 남의 자식을 제 것인 줄 알고 길렀던가요? 수백 마리 소를 기르는 목장에 수십 마리 송아지가 뒤엉켰다고 제 어미 제 새끼가 혼동되는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원리를 하나 도출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낳은 제 자식, 제 부모를 닮은 제 자녀를 두고 이들이 친부모 자녀가 맞다고 감별해낸 '친자확인기술'이 있다면? 그 감별기술은 바른 것입니다. 만일 제가 낳은 제 자식을 제 자식이 아니라고 감별해낸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이 틀렸지 그 기술에 의하여 제 자식이 남의 자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좀 무식한 사람에게 그런 결과를 들이밀면 갖은 욕설을 다 퍼붓게 되겠지요?
3. 성경이 참으로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 문제에 대하여
어느 신학이, 어느 깨달음이, 어느 학설이 말하기를 '그렇다'하면, 맞는 것입니다. '아니라'하면, 그것이 틀렸습니다. 질문에서 예를 든 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정확하지 않으며 그럴 리가 없으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역사신학적으로 주경신학적으로 성경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변증법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모든 이론과 말은 전부가 틀렸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내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라고 검사했다면 검사법이 틀렸지 그 검사법 때문에 내 자식이 남의 자식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성령으로 기록되었고 정확무오한지를 어떻게 아느냐고요? 답변자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남들이 하는 말을 그냥 전해 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하는 말을 듣고 저 분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분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어떻게 알어?'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점점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답변자도 이제는 '성경은 성령이 기록한 정확무오한 말씀'이라고 마구 있는 힘을 다 해서 외치는 때가 되었습니다. 처음 태어난 자식이 제 자식인지 자기 아내가 딴 짓을 해서 나은 자식인지 어찌 압니까? 솔직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러나 막 낳은 아이를 보는 순간 대충 짐작은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헷갈릴 정도로 애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냐 몇 년이냐 차이지 결국은 과학검사법 때문이 아니라 그냥 보면 세월과 지켜본 과정에서 딱 단정하고 내 자식이라고 밝혀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 때에 누가 과학 검사법을 들먹이면 코웃음을 치겠지요? 물론 법적으로 재산 문제를 따질 때는 무언가 과학적 근거를 들이밀어야 판결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 근거와 그 판결이 진실을 증거하고 진실을 판결합니까? 그냥 소경끼리 대충 더듬다가 코끼리를 코끼리라고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뱀이나 기둥이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4. 모든 조직신학서나 성경신학서의 우문과 우답을 비판하고 자 합니다.
노아 방주가 전설이지 어찌 역사적 사실이겠냐고 과학이 한 소리 하자, 창조과학회에서는 노아 방주 판대기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앞에 말낸 귀신과 뒤에 변증하는 귀신이 실은 한 귀신입니다. 아마 교계가 펄쩍 뛰겠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성경이 어찌 성령이 쓴 것이며 정확무오하냐고 불신자와 불택자들이 한 소리하자 교회와 신학자들이 발끈하여 이 말 저 말을 수도 없이 갖다 대고 있습니다. 앞에 말한 귀신도 귀신이지만 그 귀신에게 충동받고 피동 받은 교회와 신학자들도 함께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뱀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더냐 하여 좌측으로 밀어버리니까 밀리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중심을 잃어버리면서 우측으로 한발 기우뚱했습니다. '죽을까 하노라' 해버렸고 그다음 순서는 삼켜진 것입니다.
어떤 변증과 어떤 논리와 어떤 학설로도 소개하신 내용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기록했음을 보여주셔서 본 사람, 정확무오함을 가르쳐 주셔서 그 정확무오함을 알게 된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연구해 봐야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성령이 기록한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은 말과 논리로는 아무리 말해 봐야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보면 성령이 가르쳐 줄 것이고 그러면 알 것이고, 성령이 가르쳐 주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고 그들에게는 달리 이해시킬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지 않아서 여전히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성경은 성령이 기록한 것이 아니면 정확무오가 아니다 이렇게 단정할 것이 아니고, 성령이 가르쳐 주어서 성령이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더라 라고 알아야 불신자라 할찌라도 양심이겠지요?
위에서 성경은 성령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정확무오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은 미국을 가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보지 않은 사람이니까 미국은 없다고 힘껏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을 가서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은, '미국은 있더라'고 할 뿐입니다.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재질문 : 축자영감을 확실하게 알고 싶습니다.
퍼온 글 입니다.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옛날에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의 권위를 세우시기 위하여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주장하고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학설을 고집하시는 분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제가 직접 만나보는지는 못했습니다. 저의 강의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미신과 다를바가 없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은 축자영감설을 믿어야한다고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미신적인 신앙일 수가 있다고 강의를 했고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축자영감, 즉 성령께서 한 글자 한 글자씩 불러주는 대로 사람이 받아썼고 사람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면 복음서 4개가 꼭 같아서 한글자도 다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대조해 보면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성경을 어느 정도 읽어 본 분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각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것 까지는 진실하다고 하더라고 한 복음서 만 읽어서는 안 되고 4 복음서를 균형 있게 읽어 이해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의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어쩌면 미신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 성도들이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다가 축자영감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던 목사들의 설교와 신학 전체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될 것입니다. 사실이고 증가가 확실 한 것을 믿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사실도 아니고 증거도 없는 것을 믿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사실이고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불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사실이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늘 경계하는 것은 무슨 설(說), 무슨 신학, 무슨 주의, 이러한 식으로 편을 가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 젊은 사람들이 공부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성경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슨 주의로 치우치는 것은 그리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가능하면 쉽게 단순하게 그리고 실천적으로 보고 배우고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나름대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배우려고 지난 25년 동안 노력을 해 왔지만 무슨 학설, 무슨 신학, 무슨 주의에 치우지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는 편입니다. 어떤 신학이나 무슨 주의를 표방 하고나서 다시 성경을 보면 그 입장에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말씀이 수시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힘쓸 뿐 무슨 주의나 무슨 학설에 매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이해가 안 되었거나 용납을 못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들의 태도나 견해를 염려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슨 설(說) 무슨 신학, 무슨 주의를 표방하는 목회자들 혹은 신학자들이 자기 견해와 다른 사람의 견해 사이에 줄을 긋고 거기서 조금만 다르면 또 나누고 갈라지고 하다가 결국은 오늘날 교단과 교파가 끝도 없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취하는 입장은 무슨 노선 무슨 주의에 편승하지 않고 그러한 선입관을 앞세우지 말고 성경말씀 안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표명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굳이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같은 무리한 주장으로 성경의 권위를 높여보겠다는 것은 목적은 좋을지라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때까지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성경을 여러 차례 읽어보니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란 무리한 이론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축자영감설’같은 억지 주장이 다시는 거론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답변 : 틀린 말은, 순간 들을 때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면
질문하신 분을 향한 것이 아니고, 질문하신 분이 인용한 그 글에 대한 반론입니다. 우선 '축자영감설'이란 성경은 한 글자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적어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답변요약)
사복음서는 같은 사건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따라 각각 달리 적었으니 4사람이 자기 주관대로 적은 것이지 성령에 붙들려 적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 한 분이 4사람을 붙들고 불러주었다면 4사람의 기록이 꼭 같아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출생 하나를 가지고 사복음서에서 4가지로 기록한 것은 강조할 것이 다르고 가르칠 내용이 달라 각각 다른 면을 적게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특별히 가르칠 필요가 있어 그 면을 기록하게 했고, 마태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그 '인성'은 남자를 알기 전 마리아의 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또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왜,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성령이 여러 사람을 붙들고 같은 내용을 같이 기록하도록 만들 수도 있으나 각각 다르게 기록하도록 가르치고 그리 기록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여러 사람을 붙들고 기록시킬 때는 그 내용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논리가 세상으로 나간다면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유치원 아이들 수준의 논리로 구성한 그 분의 모든 논리는 그들이 좋아하는 세상 논리책에서도 초보수준에서 금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전체답변)
1. 축자영감을 부인하는 주장이 오히려 솔직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는 시대입니다.
전통신학 교과서는 거의 다 '축자영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혹 보수신학교라는 곳은 아직도 그런 교재를 사용하고 또 설교시간에도 더러 소개하지만, 이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고전6:1-7에서 차라리 손해를 당해도 소송하지 말라고 했으나 몇 억 몇 십억 소송이 붙었을 때 이 말씀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믿음을 보겠냐고 했는데 이 분이 말한 것처럼 축자영감을 믿는 사람은 아직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는 정도이니, 과연 참으로 믿는 사람은 희귀하고 믿는다는 이름만 가진 사람들 뿐이라는 증거입니다.
2. 그러나 성경은 축자영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축자영감을 믿지 않는 시대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축자영감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5:18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벧후1:21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는 성구로 먼저 예를 들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렇게 말해도 안 믿어지는 것은 어찌하겠습니까? 안 믿어질 뿐이지요. 그런데 이런 분들을 표현할 때 우리는 불신자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한 것을 안 믿는 사람을 가르쳐 우리는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불신자'라고 합니다. 불신자가 안 믿어지고 또 못 믿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솔직히 되돌아볼 때 예수 믿던 첫날부터 예수 믿는 모든 도리와 성경말씀 전부를 다 믿었던가요? 눈꼽 만큼 믿었고 쥐꼬리만큼 믿었으며 저 구석 한 모퉁이조차도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점점 믿어지고 믿어져서 지금은 제법 많이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마 축자영감을 부인하는 분은 예수 믿은 세월은 오래지만 그 신앙은 아직도 예수 믿던 첫날에서 두 걸음을 제대로 떼놓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참 솔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믿은 세월이 오래되면 믿는 척 해버리지 솔직하게 안 믿어진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한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안 믿어질 때 분명히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안 믿어진다'까지만 말해야 합니다. 내가 안 믿어진다 하여 '너도 안 믿어져야 한다'라고 한다면 억지가 되지요. 알고도 그리 말하면 혹세무민의 죄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자기의 주관을 객관적 진리로 알게 되면 정신병 병명으로 분류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못 본 것은 없다, 내가 틀렸다고 결론내린 것은 객관적으로 틀렸다는 주장을 혼자 중얼거리면 경증이고, 그런 주장을 많이 하게 되면 중증이 됩니다. 의과대학 정신과 교과서에 있는 병명입니다.
답변자도 또 과거에 축자영감을 주장한 분들도 처음 믿을 때는 축자영감을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알았지요. 그러나 축자영감이라는 사실을 뒤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좀더 세월이 필요할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마치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해야 양심일 것이고 믿는 우리는 그러든 말든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봤다는 사람을 안 봤다는 사람이 '너는 잘못 봤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봤냐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물어보는 것은 몰라도. 3세 유아 수준의 발언입니다.
4. 구체적으로 예를 든 내용은 구체적으로 반론합니다. 사복음서 문제입니다.
성령이 한 글자씩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면 사복음서는 그 내용이 꼭 같아야 된다고요? 꼭 같은 한국지도를 꼭 같은 사람이 4장을 그리면서 한 장은 관광지도로 그리고 한 장은 행정지도로 그리고 한 장은 지질지도로 그리고 한 장은 식물지도로 그린다면 그 4장의 그림이 꼭 같이 나올까요? 행정지도는 도청소재지 시군의 경계표시를 위주로 하게 됩니다. 불국사 해인사가 용인민속촌은 다 빠지게 됩니다. 관광지도는 전국에 놀고먹는 유흥지와 고속도로만 커다랗게 표시됩니다. 4장의 지도는 대충대충 같은데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탄생과 행하신 일들이 비슷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이쪽에는 빠진 것도 있고 저쪽에는 달리 기록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아직까지 안 믿는 상태에 있는 신학자들은 한 사건을 두고 각각 달리 기록한 것을 보니까 성령이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성경을 부인해보겠다는 하나의 일념으로 말이 되든 안 되든 그냥 허공에 날려보는 것입니다. 먹히면 다행이고 안 먹히면 그만이고.
5. 모든 변론에서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초보적인 것을 잡으셨으면 합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남한에서는 북한이 이상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는 분들과 북한은 지옥 같은 곳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과 돕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싶은 것은 과거 북한이 이상주의 사회라고 말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은 북한을 돕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상주의 낙원인 북한에다가 깡통 차고 빌어먹는 남한이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백영희목회연구회는 정치가 아닌 신앙을 논하는 곳입니다. 세상의 예를 들어본 것입니다. 축자영감을 유독 부인하는 신학자들이 감리교 신학교나 한신대 등입니다.